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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절대 속지 않으려면 승천하라>의 줄거리 :
예수님의 동생인 유다가 기록한 유다서는 베드로후서 2장과 그 내용이 너무 흡사합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거짓 교훈과의 싸움에서 붙잡아야만 할 진리의 기준에 예수님의 승천을 덧붙여 힘주어 강조합니다. 승천하신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십니다. 유다에게 있어서 경건은 마음이 하늘로 승천한 상태에서 땅을 사는 모습입니다. 심판은 승천하지 않은 마음으로 본능에 따른 지식에 근거하여 믿는 자들에게 임합니다.
절대 속지 않으려면 승천하라
(유다서 1:1~25)
1.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는 부르심을 받은 자 곧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라
2. 긍휼과 평강과 사랑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3.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일반으로 받은 구원에 관하여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생각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4.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그들은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하지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
5. 너희가 본래 모든 사실을 알고 있으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고자 하노라 주께서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시고 후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멸하셨으며
6.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7.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그들과 같은 행동으로 음란하며 다른 육체를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
8. 그러한데 꿈꾸는 이 사람들도 그와 같이 육체를 더럽히며 권위를 업신여기며 영광을 비방하는도다
9.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 감히 비방하는 판결을 내리지 못하고 다만 말하되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하였거늘
10. 이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그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하는도다 또 그들은 이성 없는 짐승 같이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멸망하느니라
유다서는 앞서 살펴본 요한2서나 요한3서와 마찬가지로 한 장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승천’이라는 무척 중요한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이 승천은 다음 주부터 살펴볼 요한계시록에서도 중요하게 다루어질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절대 속지 않으려면 승천하라’는 제목을 정해보았습니다. 어떤 종류의 속임수로부터도 자유하려면 승천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어떤 분이 십자가 복음방송을 유튜브로 접하신 뒤에 솔깃한 부분이 있어서 계속 듣게 되셨다고 합니다. 다만 마음의 경계심을 풀지 않고 적어도 6개월은 조심스럽게 살펴보리라는 결심을 하셨다고 합니다. 이러한 태도는 옳습니다. 십자가 복음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여러분을 속이는 경우도 있을 것이기에 속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경계심을 풀지 않고 살펴본다고 해서 속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종류의 거짓에 대해서도 속지 않는 방법은 한 가지뿐입니다. 여러분이 방송을 들으실 때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신학대학 총장이든 교황이든 예수님의 승천을 말하지 않는다면 다 거짓말하는 자입니다. 예수님의 승천 없이 진리는 성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거짓말하는 자들도 십자가와 부활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에서 분명히 밝힌 것처럼 십자가와 부활은 승천의 한 과정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죽고 부활해야만 하는 이유는 하늘에 대해 살기 위해서입니다. 하늘에 대해 산다는 것은 마음이 승천함을 의미합니다.
승천의 생활화는 우리를 신앙적 거짓에서 속지 않게 해주는 것뿐만 아니라 삶 전체에 영향을 미칩니다. 일반적인 사회생활 속에서 그 누구에게도 속지 않는 방법은 상대방을 의심하거나 마음의 경계심을 유지하려는 결심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승천하면 됩니다. 홀로 골방에서 예수님 따라 마음이 승천하는 일에는 오류가 있을 수 없고 속임수가 끼어들 수 없으며 손해가 있을 수 없습니다. 내 마음이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겠다고 하는데 여기에 오류가 생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승천을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전 사역을 무효화시키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는 곧 진리 안에 거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리 안에 거할 때만 모든 속임수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진리 안에 거할 때 영적인 거짓에 속지 않을 뿐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접하는 다양한 거짓에도 속지 않게 됩니다. 마음이 승천하면 재정적으로 사기를 치려는 자들에게 속지 않으며, 그 누구의 어떤 말과 약속과 감정을 유발하는 태도에 대해서도 속지 않습니다. 심지어 내가 나에게도 속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떤 일에 대해서 틀렸는데도 맞다고 확신할 때가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경우가 내가 나에게 속고 있는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진리 안에 거할 때 이러한 상태를 피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진리 안에 거함의 반대는 죄와 저주 속에 빠져 사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평생을 끊임없이 속아서 살게 됩니다. 지금 여러분께서 불행하다고 생각하거나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저것을 가졌으면 좋겠다, 배우자나 자녀 혹은 나의 미래가 이랬으면 좋겠다.’라는 바람을 갖는다면 다 속고 있는 것입니다. 삶의 모든 불행은 속음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건강이 안 좋아서 불행하다면 속은 것입니다. 재정적으로 궁핍해서 불행하다면 속은 것입니다. 본래 건강 문제나 재정 문제는 우리에게 불행을 가져다줄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의 어떤 일에도 나를 불행하게 만들 능력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 속아서 울고불고 죽고 싶은 우울증에 빠질 뿐입니다. 속는 이유는 마음이 이 땅에 머물며 승천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 10절을 보면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멸망하느니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본능으로 아는 그것은’ 다시 말해 본능의 지식이란 마음이 승천하지 못할 때 발휘되는 죄적 본능을 가리킵니다. 마음이 승천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보고 듣고 만지고 맛보고 냄새 맡는 육체의 오감에 갇히게 됩니다. 마음이 갇힌 상태에서 생기는 지식은 모두 속임수에 넘어간 것입니다.
유다서가 기록된 이유가 4절에 언급됩니다.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그들은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하지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가만히 들어온 사람’이란 거짓 교사와 이단을 가리킵니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당시 교회를 흔들던 영지주의자들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육체로 오셨음을 부인하였습니다. 육체는 더러운 것이기에 그리스도의 영이 더러운 육체를 입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에 대한 부인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의 부인으로 이어집니다.
얼핏 이러한 말씀은 영지주의자가 아닌 우리와는 무관한 말씀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영지주의자들처럼 예수님을 부인하지는 않을지라도 예수님을 따라 승천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일상적으로 생활화하지 못하고, 말씀 속에 포함시키지 못하고, 그 말씀을 듣지도 못하고 신앙생활을 한다면 결국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 부활하신 예수님, 승천하신 예수님이 부인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9장 51절을 보면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라고 하였습니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누누이 예고하신 대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실 것을 감수하실 때가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승천의 과정으로 생각하며 기록하고 있습니다. 승천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고 부활하셔야 했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저자인 유다 또한 바로 이러한 점을 상기시키며 3절에서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라고 합니다.
십자가 생활화는 곧 승천의 생활화입니다. 승천이 따르지 않는 십자가는 가짜입니다. 목표 없는 출발점입니다. 이 승천이 중요한 이유는 승천이 모든 거짓으로부터 믿음의 도를 지켜내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회생활과 믿지 않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도 상대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나를 속이더라도 속지 않게 해줍니다. 행여 속이려는 의도가 없더라도 자기 자신에게 속아서 하는 말에 대해서도 속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돈이 최고라고 믿으며 다른 사람에게도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합니다. 이 사람의 돈에 대한 믿음은 분명하나 이미 속고 있는 상태입니다. 다른 사람을 속일 의도가 없이 말하더라도 이미 스스로 속고 있기에 남을 속이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이 세상에 머무는 상태란 곧 오감에 갇힌 상태입니다. 이 상태에서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해나간다는 것 자체가 속임수에 빠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서 샘물처럼 솟아나는 기쁨과 행복이 없는 이유입니다. 거짓에는 기쁨이 없습니다. 오직 진리 안에 기쁨과 행복이 있습니다. 배우자와 대화할 때라도 배우자의 마음이 진리 안에 있지 않다면 인격 전체가 세상에 속고 있는 상태입니다. 마음이 승천하지 않으면 오감에 갇혀있게 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죄적 본능에 따라 생기는 지식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속을 수밖에 없습니다. 유다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교사들과 이단들이 교회를 흔들고, 교인들이 이들에게 현혹되고 미혹될 것을 경계합니다. 믿음의 도를 지키지 못한다면 구원에서 떨어져 나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유다서를 기록한 유다는 예수님의 동생 중 하나입니다. 예수님의 동생 중에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이자 야고보서를 기록한 야고보 장로도 있었습니다. 유다서는 70~80년경에 기록되었고 유다 또한 유다서를 기록한 이후에 순교했다고 추정됩니다. 유다가 이 편지를 기록한 이유는 교회와 교인들에게 큰 위협이 되었던 이단 사상과 거짓 교훈에 대한 경계심을 고취시키고 믿음의 도를 위해 힘써 싸울 것을 격려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본문을 보면 내용면에서 베드로후서 2장과 거의 흡사합니다. 베드로후서 2장 1절을 보면 “그러나 백성 가운데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그들은 멸망하게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라고 하였고, 20절을 보면 “만일 그들이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라고 하였습니다. 또 22절에서는 “참된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라는 유명한 구절이 나오기도 합니다. 한편 본문을 읽어보면 이와 유사한 표현이 등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유다는 어떤 이유에서 베드로후서 2장의 내용을 거의 반복하다시피 강조하고 있는 것일까요?
3절을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일반으로 받은 구원에 관하여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생각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라고 하였습니다. 본래 유다는 일반적 구원론에 관하여 이야기할 작정이었습니다. 그런데 급하게 마음의 결심을 바꾸어서 베드로후서 2장의 내용을 보완하여 다시 언급합니다. 여기서 유다가 보완한 부분이 특별합니다.
9절을 보면 모세 사후의 승천과 관련된 내용이 등장하고, 14절에서는 에녹의 승천과 관련된 내용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부분은 성경에는 기록되지 않은 내용으로써 위경에 포함되는 부분입니다. 위경이란 주전 2세기부터 주후 2세기까지 만들어진 문서로써 하나님과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신뢰성에 의심이 가고 오류가 많기에 성경으로 채택되지 못한 기록들입니다. 본문 9절은 위경인 모세 승천기의 내용을 인용한 것이고, 14절 마찬가지로 위경인 에녹서를 인용한 것입니다. 이처럼 유다서의 기록 의도는 베드로후서 2장과 동일한데, 위경을 인용했다는 점이 독특합니다. 이러한 표현들은 유다가 베드로후서 2장에 무엇을 보태고 싶었는지를 알게 해줍니다.
9절의 내용을 보면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 감히 비방하는 판결을 내리지 못하고 다만 말하되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하였거늘”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부분을 좀 더 자세히 언급해 보자면 모세의 사후에 천사장 미가엘은 그 시신을 거두어가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마귀가 나타나서 모세는 애굽 사람을 죽인 살인자이기에 그 몸을 자신이 취하겠다고 주장합니다. 이때 미가엘은 마귀를 내쫓는 대신 그 판결을 하나님께 의뢰합니다. 여기서 유다는 모세의 승천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이로부터 우리는 유다가 어떤 점에 특별히 관심을 두고 베드로후서 2장의 내용을 보완하고 싶어 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승천입니다.
또한 에녹서를 인용한 14~15절을 보면 “아담의 칠대 손 에녹이 이 사람들에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 이는 뭇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하지 않은 자가 경건하지 않게 행한 모든 경건하지 않은 일과 또 경건하지 않은 죄인들이 주를 거슬러 한 모든 완악한 말로 말미암아 그들을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간단히 말해 예수님께서 천사들을 이끌고 내려오셔서 경건하지 못한 자들을 심판하시리라는 이야기입니다. 유다가 에녹의 입을 빌어서 심판과 경건을 언급하는 이유는 바로 에녹이 승천한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유다는 우리에게 나타나야 할 경건함이란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승천한 상태에서 이 땅을 사는 모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 4절을 보면 거짓 교사와 이단에 대해 말하기를 “…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방탕함’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원문을 보면 성적인 문란함을 가리킵니다. 마음이 승천하지 못하고 땅에 남아있는 것이야말로 성적 문란함 같은 방탕함이라는 것입니다. 유다는 모세 승천기나 에녹서라는 위경에서 인용한 승천과 관련된 부분을 언급함을 통해 승천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거짓 교사들이나 이단들이 승천을 잘라내고 있음을 지적합니다. 마음이 이 세상에 갇힌 상태에서는 하나님을 등지는 영적 방탕함이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3절을 보면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고 하는 것은 믿음의 이론이나 교리를 굳건히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본문을 기록한 유다는 야고보 장로나 사도 베드로나 사도 요한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승천을 목격한 당사자였습니다. 이러한 유다에게 있어서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움이란 목격한 대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따라 보좌 우편까지 가는 일에 힘쓰는 것이었습니다.
단순히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야 한다고 하지 않고 힘써 싸우라고 강조한 이유는 당시의 상황이 그만큼 혼란스러웠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의 세계 안에서조차 숨어 들어온 자들이 있어서 우리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방해합니다. 그들은 우리 마음을 이 땅에 남아있도록 만들고자 합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은 무조건 하늘로 올라가야만 합니다. 하늘로 올라가지 않으면 믿음의 세계에 숨어 들어온 자들에게 속을 뿐만 아니라 삶 전체가 속아 넘어가는 상황이 되어버립니다.
예를 들어 회사에서 승진이 발표될 시기가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회사의 모든 직원은 마음에 기대를 품고 결과를 기다릴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모습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믿음의 도를 지키기 위하여 힘써 싸울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는 일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승진 발표를 기대하며 마음이 땅에 머물러 있다면 승진에 성공해서 기쁨이 생길지라도 속는 것이고, 승진을 못해서 우울해지고 슬퍼할지라도 속는 것입니다. 기쁠 일이 아닌 것으로 기뻐하고, 슬퍼할 일이 아닌 것으로 슬퍼합니다.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고 오감에 갇혀서 이 세상에 머무는 동안에는 몸으로 만나는 일에 대한 일희일비가 모두 속음입니다. 속고 있기에 울어도 바보이고 웃어도 바보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후서 2장에서 거짓 선생들의 교훈에 넘어가지 말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유다는 거의 똑같은 내용을 가지고 이야기하는데 여기에 승천을 강조합니다. 과거 신학계에서는 유다서가 신뢰할 수 없는 모세 승천기와 에녹서라는 위경에서 말씀을 발췌하였기에 정경에 포함시켜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볼 때 유다가 위경의 말씀을 인용했다고 할지라도 성령의 감동을 받아 필요한 부분을 인용했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유다서의 진실성은 위경의 신용도와는 무관하다는 결론이 나왔기에 성경에 포함이 된 것입니다. 저 또한 이러한 견해에 찬성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위경의 내용을 염두에 둠으로써 유다가 베드로후서 2장에 어떤 관심을 보태고 싶었는가를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승천입니다. 승천은 우리가 앞으로 요한계시록을 이해함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승천의 중요성은 지금까지도 계속 언급되어 왔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1절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는 부르심을 받은 자 곧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라”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상에서 불러내셨습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우리의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유일한 좋음으로 상대하기를 바라시며 세상에서 불러내신 것입니다.
내 마음이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을 직면하는 상태가 아니라면 다른 사람의 말을 믿든 안 믿든 속는 것입니다. 참이 없는 상황이기에 믿지 않는다고 해서 속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절대적으로 마음은 승천해야만 합니다. 승천하여 하나님을 직면하고서야 비로소 속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마음이 하나님을 직면하면 하나님의 존재감이 일등이 되고 하나님의 좋음만을 소망하게 됩니다. 이러한 상태가 아니라면 받아들여도 속는 것이고 받아들이지 않아도 속는 것입니다. 기뻐도 속는 것이고 슬퍼도 속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도 속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고 싶다고 생각할 수 있는 일은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 아버지와 직면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것뿐입니다. 이것 외에는 다 속는 것입니다. 뭘 해도 좋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동생이었던 유다는 베드로후서 2장에 승천을 보태기 위하여 위경의 내용을 인용하면서 편지를 기록하였습니다. 아무쪼록 우리는 이러한 유다의 급한 마음을 잘 헤아릴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유다는 일반적인 구원론에 관한 이야기를 쓰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후서 2장의 거짓에 대한 경계심의 내용을 읽는 수신자들을 위해 급하게 승천이라는 주제를 포함시킵니다. 에녹은 살아서 승천한 사람이었습니다. 위경이지만 모세 승천기 역시 승천을 강조하기 위해 인용되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 내용들이 모세 승천기와 승천한 에녹에게서 왔음을 쉽게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유다는 이와 관련하여 경건에 대한 정의를 내립니다. 경건은 마음이 승천한 상태에서 이 땅을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비록 에녹서가 에녹이 직접 쓴 것이 아닐지라도 승천한 에녹을 통해 심판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마음이 하늘로 올라간 상태가 되어야 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 살지 않는 모든 경건치 않은 사람들에 대해 심판이 임할 것이며, 그때는 천국에 머물던 천사들이 함께 대동하리라고 했습니다. 유다는 이러한 인용을 통해 우리 마음이 가 있어야 할 천국을 제시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이 승천함으로 모든 속임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속지 않고 진리 안에 머물면 행복은 저절로 옵니다. 이 세상의 삶은 아버지의 사랑과 주권에 의해서 저절로 진행되어 갈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임하여 이끌어가는 삶은 세상 사람들의 기준에 의한 성공과 실패와는 무관합니다. 오직 아버지의 주권이 이루어져 가는 과정일 뿐입니다. 세상 사람들 눈에 번영으로 보일지라도 번영이 아니며, 세상 사람들 눈에 쇠락으로 보일지라도 쇠락이 아님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아버지의 뜻만이 있을 뿐입니다.
사람들은 모양에 쉽게 속으나 승천하여 진리 안에 머무는 사람은 모양에 현혹되지 않습니다. 세상 기준으로 번영한다고 해서 정말로 잘된 것은 아닙니다. 세상 기준으로 쇠락한다고 해서 정말로 잘못된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다 속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원하시는 대로 그 뜻이 이루어져 갈 뿐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반드시 날마다 승천하여 예수님 안에서 아버지를 직면하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거짓뿐인 세상, 거짓이 난무하는 세상, 거짓이 쇄도하는 세상에서 어떤 것에도 속지 않는 승천의 비결을 붙잡고 진리 안에 거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