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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마음이 사람에 체(滯)하지 않는 삶>의 줄거리 :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거리낌이란 덫, 올가미, 방해 등의 의미입니다. 사람을 만나는데 그 사람이 마음에 덫이 되고 방해가 되고 올가미가 된다는 뜻입니다. 마음이 그 사람으로 인해서 걸리고 체하는 것입니다. 누구를 만나도 마음에 체함이 없이 항상 쾌청한 상태를 유지할 수는 없는 것일까요? 마음이 빛 가운데 거하는 중에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마음이 사람에 체(滯)하지 않는 삶
(요한1서 2:1~11)
3.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4.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5.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6.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7.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가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8.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그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둠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침이니라
9.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
10.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11.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
제목에서 언급한 체(滯)함이란 음식을 먹고 체하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10절을 보면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거리낌으로 번역된 헬라어 스칸달론(σκάνδαλον)은 덫, 함정, 방해, 올가미를 뜻합니다. 우리가 자주 쓰는 영어의 스캔들(scandal)이라는 표현도 여기서 나왔습니다. 이러한 표현을 염두에 두고 10절을 풀어보자면 ‘형제를 사랑하는 모습이 보인다면 그 사람의 마음은 빛 가운데 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마음에는 누구를 만나도 덫이 되거나, 올가미가 되거나, 방해가 되거나, 함정이 되는 일이 없다.’라는 뜻입니다.
아시다시피 거리낌이란 마음에 걸려서 언짢고 싫은 느낌입니다. 마음의 스캔들이 곧 거리낌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음식을 급하게 먹거나 잘못 먹으면 체하게 됩니다. 체함은 곧 통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이 우리의 마음에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사람을 만날 때 사랑할 수 없다면 그 사람에게 체했기 때문입니다. 본문 말씀의 요지가 이와 같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최대 장점이자 최대 약점이기도 합니다. 사도 요한은 1장에서 서신을 쓴 이유를 밝히며 1장 1절에서 예수님에 대해 소개하기를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라고 하였습니다. 사도들은 자신들이 보고 듣고 만진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예수님을 전한 이유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과 더불어 사귐이 있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3절에서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한편 오늘 본문에서는 이와 동일한 내용의 이야기가 다른 표현으로 등장합니다. 우리가 읽지 않은 1절을 보면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죄를 범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죄의 상태를 죽이지 않고 말과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범죄의 뿌리는 죄입니다. 가장 넓은 의미에서 죄는 빗나감입니다. 사도 요한에게 있어서 빗나감이란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과 사귐이 없는 상태입니다. 바꿔 말하면 마음이 이 세상에 머무르며 세상과 사귀고 있는 상태가 죄입니다.
범죄란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과 사귀지 않는 죄의 상태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보자면 하나님과 사귀지 않는 죄의 상태를 없애지 않고 유지하면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범죄인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1장 5절에서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라고 하였습니다.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과 사귄다는 것은 곧 빛과 사귀는 것입니다. 마음이 하늘에 올라가 빛과 사귀는 상태가 의로움의 상태입니다. 마음이 하늘에 올라가 있을 때 하늘의 빛줄기는 입과 몸을 통해 나타납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모든 말과 모든 행동은 하늘의 빛줄기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귐은 곧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입니다. 이 앎이란 단순히 정보를 듣고 아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창조주이시고, 주권자이시고, 예수님의 아버지이시고, 삼위일체 되심을 아는 것은 하나님과의 사귐이라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사귐이자 앎이란 우리의 마음이 직접 삼위일체 되심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삼위 하나님께서 일체가 되셔서 교제를 이루고 계시듯이, 하나님과 사귄다는 것은 마음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교제 속에 뛰어드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 삼위일체 하나님과 어우러져 사위일체를 이루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과의 사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될 때 반드시 이 땅에서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은 하늘의 빛줄기가 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말할 때 하늘의 빛줄기를 내보내고, 행동할 때 하늘의 빛줄기를 뿜어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말과 행동을 할 수 없다면 하나님과의 사귐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마음이 하늘에 올라가 빛이신 하나님과 사귀고 있다면 배우자에게, 자녀에게, 부모에게, 형제자매에게 하는 일상적인 말들이 하늘의 빛줄기가 뿜어져 나오게 됩니다. 하늘의 빛줄기는 정해진 시간에 하는 설교에서만 나타나는 일이 아닙니다. 일상적으로 직장에서, 가정에서, 시장에서 하는 모든 말과 행동에서 나타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모든 말과 행동은 죄를 범하는 것이 됩니다. 그 이유는 내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올라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교제 가운데 뛰어들어서 하나님과 더불어 사귐이 없기 때문입니다. 빛이신 하나님과 사귐이 없기 때문에 내 말과 행동이 빛줄기가 아니게 됩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도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 빛이신 하나님과 사귐이 없다면 소용이 없습니다. 목사든 신학대학 교수든 교단의 총회장이든 심지어 교황일지라도 하나님과 사귐이 없다면 그 말과 행동은 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물론 겉으로 보기에는 남을 돕는 말과 행동을 하는 것처럼 보일 수는 있습니다. 구제하고 봉사도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문자적 계명을 따라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사랑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주의자의 일입니다.
사랑은 문자적 계명을 따라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처해 있는 생활 현장에서 마음이 하늘에 올라가 빛이신 하나님과 사귐을 이룰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하늘의 빛줄기가 입과 몸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사도 요한은 사랑을 ‘새 계명’이라 칭합니다. 본문 7절에서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가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사랑이 새 계명인 이유는 사랑은 언제나 새롭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A라는 사람을 만난다면 마음이 하늘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A에 대한 사랑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 사랑은 문자적 율법이나 계명을 따라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하늘로 올라간 상태에서 하나님과 사귀는 중에 A라는 사람에게 말하고 행동해야 할 구체적인 사랑의 내용이 나오게 됩니다. 또 B라는 사람을 만난다면 정해진 글자대로 A와 동일한 내용의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B라는 사람과 만날 때도 마음은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과 사귀는 중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구체적인 내용이 말과 행동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사도 요한은 사랑을 새 계명이라 칭했던 것입니다. 형제를 사랑하라는 계명은 우리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는 옛 계명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새 계명은 모든 사랑의 순간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이제까지 해보지 않은 전혀 새로운 내용이 됩니다.
한편 우리는 이러한 이해를 통해 10절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라고 하였습니다. 거리낌이 없다는 것은 마음에 체함이 없고 스캔들이 없는 상태입니다. 마음이 덫에 걸리지 않고, 함정에 빠지지 않고, 올가미에 얽히지 않게 됨을 의미합니다.
사도 요한은 1장 7절에서도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빛이신 삼위일체 하나님께 머물러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사람을 만날 때 우리의 마음이 그 현장에서 완전히 철수되어야 함을 전제로 합니다. 사람을 만나는 현장에 마음이 남아있다면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마음은 철수하여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따라 하늘에 올라가 빛이신 하나님과 사귐이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빛이신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빛줄기가 내 입과 몸을 통하여 사랑으로 표현됩니다.
마음이 철수되어야 한다는 것은 사람을 만날 때 절대로 직접 반응해서는 안 됨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8장 26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대하여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나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 말하노라 하시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셨기에 대하는 사람에 대해서 얼마든지 말하고 판단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독자적인 생각과 판단으로 반응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마주하는 사람으로부터 마음을 철수시켜서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로부터 듣는 것만을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가 예수님이 만나는 사람을 보고 계시고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직 아버지에게 가 있는 마음으로 마주하는 사람에 대해 해야 할 말과 판단을 들으셨습니다. 우리 또한 그렇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이 하나님과 사귐을 이룰 때 이 땅에 있는 내 몸과 지정의의 기능 속으로 하나님의 생각이 전달되면서 말과 행동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이렇듯 사랑은 직접 반응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이 마주하는 사람을 받아들인다면 직접 반응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상태는 먹지 말아야 할 음식을 먹은 것과 같은 상태입니다. 마음으로 먹지 말아야 할 사람을 먹고, 담지 말아야 할 사람을 담았기에 체함이 생깁니다. 사랑은 어렵지 않습니다. 마음으로 사람을 담지 말고 예수님 따라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과 사귀는 본업에 충실하다면 이 땅에서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은 사랑이 됩니다.
말씀드렸듯이 사랑은 ‘사랑하라’는 계명의 문자를 기억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내가 사랑해야지 결심하고 말하고 행동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사랑하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의 본업을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마음의 본업은 하늘에 올라가서 빛이신 하나님과 사귀는 것입니다. 마음이 이 땅에 머물면서 사람을 담으려고 하는 것은 절대로 먹으면 안 되는 음식을 먹으려는 것과 같습니다. 먹어서는 안 될 것을 먹었기에 마음에 거리낌이라는 체함이 생깁니다. 마음이 올가미에 얽힌 것이고, 함정에 빠진 것이고, 덫에 걸린 것입니다.
음식에 체하면 트림이 나오고 토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가 마주하는 사람에 대해 직접 반응하면서 체하게 된 마음은 내 존재 속에 뿌리박힌 죄악들을 토해내게 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모세의 므리바 사건입니다. 민수기 20장을 보면 므리바에서 일어난 사건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시는 것을 보았고, 홍해를 건넜으며, 광야에서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는 등 수많은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마실 물이 없음을 이유로 불평하였습니다. 이에 모세는 분노했고 하나님께서 바위에 명령하여 물을 내라고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두 번 내려치게 됩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12절에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라고 모세를 꾸짖으십니다.
모세는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을 마음에 담게 된 결과 체하게 되었습니다. 못 먹을 음식을 먹은 것과 같은 일을 하게 되었고 그 결과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낼 수 없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마음을 보내고 하나님과 사귈 수 있었으면 그것으로 충분했습니다. 하나님과 사귐이 있을 때 그 마음에는 쾌청함과 유쾌함이 지속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아무리 마주하는 사람이 악하고 못되고 패역할지라도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그 사람을 보고 계신 하나님의 뜻대로 빛을 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한순간의 분노로 이스라엘 백성의 패역한 모습을 마음에 담게 되었고 그 결과 존재 속에 박힌 죄악들을 토해내는 결과를 드러내게 되었던 것입니다.
본문 말씀은 얼핏 모순처럼 여겨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가 보통 사람을 사랑한다고 하면 마음으로 그 사람을 품는 모습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야말로 중대한 착각입니다.
정말로 사람을 사랑한다면 상대가 내 마음에 없어야 됩니다. 내 마음은 오직 예수님 안에 들어간 상태에서 하나님만 담을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이 받아들여서 소화할 수 있는 대상은 하나님뿐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관계가 불편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서로를 마음에 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가족관계가 불편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 마음이 소화할 수 없는 음식을 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예수님 안에 들어갈 때 세상을 떠납니다. 그리고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 안에서 소망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를 담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마음은 성경이 말하는 평강의 상태가 됩니다. 피자나 햄버거 혹은 곱창처럼 기름진 것들을 먹어서 더부룩할 때 누룽지와 동치미를 먹으면 속이 편해지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마음이 소화할 수 있는 대상은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의 기질은 죄와 저주에 찌들어 있습니다. 먹어야 할 하나님은 먹지 않고 먹지 말아야 할 이 세상의 사람들만 먹고자 하니 계속해서 체증이 나타납니다. 따라서 마주하는 사람에게 역한 트림과 토사물을 뿜어내게 됩니다. 사람의 마음은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을 담을 수 있는 최대의 장점입니다. 한편으로 도저히 소화시킬 수 없는 사람과 사건과 문제를 담을 수도 있는 최대의 약점이기도 합니다.
사랑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본래 소화시킬 수 있는 대상을 담을 때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마음에 담으면 편해지고, 기뻐지고, 힘이 생기고, 즐거워지는 본래의 음식이신 하나님 아버지를 먹을 때 일어나는 일이 사랑입니다. 사도 요한은 마음이 하나님 아버지를 먹는 것을 사귐과 앎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이것은 오직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그 예수님 안에 들어감으로써 본래 먹도록 정해진 유일한 음식이신 하나님을 먹을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과 사귈 수 있게 됩니다. 빛이신 하나님을 먹으면 우리의 입과 몸을 움직일 때마다 말과 행동에서 빛을 뿜어내게 됩니다.
사랑에 대한 오해는 깨져야 합니다. 그저 상대를 마음으로 따뜻하게 품어주는 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의 마음을 어둠으로 끌고 들어가고 지옥으로 직결시키는 무서운 착각이자 함정입니다. 우리 마음은 절대 사람을 품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에 대한 사랑은 마음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22장 37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대로 우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만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께 전부 드려야만 합니다. 절대로 마음에 사람을 담아서는 안 됩니다. 마음의 용도는 하나님께 드림에 있고, 하나님을 먹음에 있고, 하나님과 사귐에 있습니다. 마음은 빛을 먹어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마음이 어떻게 빛을 먹을 수 있을까요? 예를 들어 부모 자녀의 관계를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부모가 자녀를 마음에 담는 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마음에 자녀가 얹힌 상태이고, 마음이 자녀로 인해 체한 상태입니다. 이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한다면 부모와 자녀가 함께 엉켜서 어둠 속에 빠지고 지옥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은 상대방의 존재가 내 마음에서 완전히 사라진 상태에서만 할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이 하늘에서 빛과 사귀고 빛을 먹음으로써 그 빛이 내 입과 몸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 사랑입니다. 문자로 적힌 계명을 기억하면서 그대로 말하고 행동하고자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우리는 삶에서 착한 사람을 만날 수도 있고, 좋은 사람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착하다는 이유에서 마음으로 좋아하고, 인격이 훌륭하다는 이유에서 마음으로 좋아할 수는 없습니다. 그럴 때 마음은 그 사람으로 인해 체하게 됩니다. 반대로 심성이 나쁘고 고약한 사람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이유에서 싫어한다면 마찬가지로 그 사람을 마음에 담은 것입니다. 그럴 때 마음이 체하게 됩니다. 훌륭한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사람을 마음에 담으면 체하게 되고 그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물 건너가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사랑은 마음의 관점에서 사람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사람에게 직접 반응하지 않을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개는 짖어도 기차는 간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나운 개가 일만 마리가 모여서 짖어대는 광경을 떠올려 봅니다. 그 소리가 엄청날 것입니다. 그러나 기차는 개 짖는 소리가 크다고 멈추지 않습니다. 자기 길을 갈 뿐입니다. 내 앞에 있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도 개 짖는 소리이고, 나쁜 사람이라도 개 짖는 소리입니다. 내 마음은 항상 하나님께로 가야 되기 때문입니다.
상대가 아무리 훌륭하고 대단하고 존경스러운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이 내 마음을 붙잡는 함정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은 마음에 덫, 올가미, 함정을 뜻하는 스칸달론이 됩니다. 마음이 스캔들에 휩싸이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상대가 아무리 악해도 그에게 분노하느라 마음이 걸려서도 안 됩니다. 그럴 때 또한 마음은 스캔들에 휩싸이게 됩니다. 훌륭한 사람의 존재도 개 짖는 소리이고, 악한 사람의 존재도 개 짖는 소리입니다. 마음에 담으면 무조건 체할 수밖에 없고, 체하면 어둠 속으로 끌려들어 가게 됩니다. 하늘에서의 사귐이 없어지고, 세상에서의 사랑도 없게 됩니다.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던 것처럼, 약속의 천국으로 들어갈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모세는 그 사건 이후에 당연히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했을 것입니다. 본문에서 또한 이러한 점이 강조됩니다. 1절을 보면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라고 하였습니다. 범죄하지 않아야 할 것이나 범죄하였다면 예수님께 나와서 회개의 기회를 얻으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변화산 사건에서 하늘의 모습으로 변하셨던 예수님과 이야기하던 사람들은 모세와 엘리야였습니다.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모세의 분노는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로 실수하게 허락하셨고 그 실수를 우리에게 설교로 제시하셨습니다. 악하고 패역한 사람을 만나더라도 그 사람을 마음에 받아들이고 직접 반응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마음에는 거리낌으로써의 체함이 생깁니다. 마음이 함정에 빠지고 덫에 걸리게 됩니다.
우리는 살면서 사람을 만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삶이 유쾌하지 않은 이유는 만나는 사람이 모두 못돼먹었기 때문은 아닙니다. 물론 직장 상사가 인간 이하의 인격일 수는 있습니다. 배우자가 무능할 수도 있습니다. 자녀가 말썽일 수도 있습니다. 먹지 말아야 할 음식을 먹고 체하는 것처럼 마음에 담지 말아야 할 사람을 담았기 때문에 마음은 불쾌할 수밖에 없고, 체할 수밖에 없고, 불행할 수밖에 없고, 어둠 속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에 사람을 담는다는 것은 정신 나간 짓입니다. 본래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만을 담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죽었음을 고백하는 이유도 마음에 세상을 담지 않고 하나님만을 담기 위해서입니다.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담을 때 사귐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과의 사귐은 빛과의 사귐이고 빛을 먹음입니다. 그럴 때 내 입과 행동을 통해 빛이 나타나게 됩니다.
김치를 먹으면 입에서 김치 냄새가 납니다. 불고기를 먹으면 입에서 불고기 양념 냄새가 납니다. 마음이 하늘에 올라가 빛이신 하나님을 먹으면 말할 때마다, 행동할 때마다 사랑이라는 빛의 냄새가 뿜어져 나옵니다. 사랑이라는 새 계명은 ‘사랑하라’는 계명을 따라 행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올라가는 하늘은 태초부터 있던 장소이고, 시간과 공간 바깥의 장소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그 하늘에서 빛이신 하나님을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마음은 쾌청하고 유쾌해집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는 하나님을 먹은 냄새, 빛을 먹은 냄새를 뿜어내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아무쪼록 오늘도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의식하고 기억하며 예수님과 하나 되어 하늘로 올라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럼으로써 하나님을 먹고 빛을 먹음으로써 여러분의 말과 행동을 통하여 하나님의 냄새, 빛의 냄새가 계속 퍼져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하나님의 냄새가 그들에게 생명줄이 되고 구원의 가능성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십시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그 마음이 죄에 거함이고, 그 상태에서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은 범죄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주님을 기억하여 주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소망함에 게으르지 않으면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누구를 만나 무슨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든지 사랑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랑함으로 어떤 누구에게도 마음에 체함이 없고 거리낌이 없이 쾌청한 마음을 유지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