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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1,2,3 유다서-2

녹취문: 적그리스도의 실제 공격 포인트_태승철 (요일 2:18~29)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3.11.04|조회수55 목록 댓글 0

 

www.everyday01.com -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적그리스도의 실제 공격 포인트>의 줄거리 :

적그리스도는 누구일까요? 우선 소위 정통 교단의 사람들은 모두 다 자신들을 제외하면서 자신들이 이단으로 규정한 자들이라든지 아니면 역사적으로 기독교를 심히 탄압한 자들이라고 여깁니다. 너무나 자의적이고 막연한 이해입니다. 적그리스도는 그리스도 대적자입니다. 즉 예수님이 그리스도로서 이루신 복음 사역을 무효화시키기 위해서 정확히 공격하는 포인트가 있습니다. 이 공격 포인트를 기준으로 삼고 보면 작금의 상황은 정통과 이단 가릴 것 없이 적그리스도가 대세입니다.

 

 

적그리스도의 실제 공격 포인트

 

(요한1서 2:18~29)

 

18. 아이들아 지금은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오리라는 말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19.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라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그들이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20.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21.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알기 때문이요 또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기 때문이라

22.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냐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23.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

24.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과 아버지 안에 거하리라

25.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은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적그리스도는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적그리스도가 실제로 공격하는 포인트가 어디냐는 것을 문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공격 포인트를 모르면 적그리스도를 판별해 낼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적그리스도라는 표현을 자주 씁니다. 상식적으로 적그리스도가 누구냐고 말할 때 정통 교파의 입장에서는 이단으로 규정하는 자들을 포함시킵니다. 혹은 역사적으로 기독교인들을 박해한 네로 황제나 사도 요한 당시 도미티아누스 황제나 혹은 구약성경에서 등장하는 셀레우코스 제국의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 황제 같은 자들을 적그리스도라 이해합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이 염두에 둔 적그리스도는 이러한 사람들이 아닌 영지주의(Gnosticism)자나 에비온주의(Ebionism)자들이었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육체를 열등하게 생각해서 예수님의 인성을 부인했습니다. 한편 에비온주의자들은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했습니다. 이들은 동일하게 이단이면서 서로에게 대립각을 세웠던 것입니다. 적그리스도는 궁극적으로 마귀의 부하입니다. 마귀의 부하로서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자들이 적그리스도입니다.

적그리스도를 판별함에 문제가 있는 이유는 이러한 이단들이 다양하게 변형된 교리와 이론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이단이 아닐지라도 신학자마다 교리와 이론에 대한 이해는 조금씩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굵은 선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정통이라 하고 그 경계를 벗어난 것 같으면 이단이라고 부르고 있을 뿐입니다. 이로부터 적그리스도를 교리와 이론상으로만 구분하려는 시도에 문제가 발생합니다. 적그리스도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을 공격할 때의 포인트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이단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적그리스도의 공격을 받는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적그리스도의 공격을 받아서 적그리스도를 따르게 되거나, 스스로 적그리스도의 위치에 서 있는데도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마귀의 부하인 적그리스도는 교리와 이론의 다양성을 가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들에게 현혹되지 않고 적그리스도인지 아닌지를 판별하기 위해서는 이들이 그리스도를 공격하는 하나의 포인트를 잡아낼 수 있어야 합니다. 적그리스도가 그리스도를 대적할 때 어떤 포인트를 집중적으로 노리는지를 알아야 교리와 이론의 다양성에 현혹되지 않으며 정통파라는 자기 확신의 기만에 빠지지 않고 적그리스도와 올바른 신앙 상태를 구분해 낼 수 있습니다.

 

본문 2절을 보면 “아이들아 지금은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오리라는 말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미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음을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이기도 합니다. 적그리스도가 공격하는 포인트를 기준으로 보자면 정통이든 이단이든 교파에 상관없이 적그리스도가 대세입니다. 기독교 종교라는 울타리 안에서도 적그리스도가 유행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기준에서 적그리스도를 판단할 수 있을까요?

여기서 ‘마지막 때’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이 말은 예수님의 재림 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을 위하여 더 이상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완벽하게 모든 조건이 구비된 상태 이후를 가리킵니다. 구원을 위한 조건이란 곧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계심으로써 없던 길을 내셨습니다. 이를 통해 누구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받아들여 믿기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면, 사도 요한이 말했던 대로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과 더불어 사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귐을 이루는 상태에서는 이 땅에 남아있는 몸에서 나타나는 표정 하나, 몸짓 하나, 말과 행동 모두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 됩니다. 사도 요한은 이것을 사랑이라고 표현하였음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처럼 사도 요한이 말하는 ‘마지막 때’란 바로 이렇게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통해 구원의 모든 조건이 완벽하게 구비된 이후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마지막’이라면 ‘마지막 때’라는 표현에는 기회라는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마지막이 아직 이르지 않은 지금이 바로 구원의 기회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구원을 위한 모든 준비는 완성되었습니다.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아직 ‘마지막’은 임하지 않았습니다. 이 상태가 바로 ‘마지막 때’인 것입니다. 완벽하게 구비된 구원의 길을 따라서 우리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과 사귐을 가질 수 있는 기회의 때입니다.

이로부터 적그리스도의 공격 포인트가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적그리스도는 예수님이 그리스도로서 이루신 완벽한 구원의 길 중에 급소를 공격하고자 합니다. 그럼으로써 예수님이 그리스도로서 이루신 사역을 무산시키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서 그 믿음이 아무런 효과가 없게 만들고자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보좌 우편에 이르신 그리스도 연쇄 과정에 급소가 있다면 바로 승천입니다.

이단들조차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언급하지 않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승천을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앞선 15~16절에서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는 이유는 세상을 사랑해서 세상에 묶여있고 세상에 잠겨있던 내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서 하늘로 올라가야 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바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 가는 승천을 위해 필요한 일입니다.

영지주의자나 에비온주의자들은 주장하는 바가 서로 달랐습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공통적으로 마귀의 부하인 적그리스도로서 동일하게 드러나는 태도가 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 연쇄 과정의 급소인 승천을 노려서 우리 마음에서 승천의 부분을 잘라냈다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적그리스도의 진정한 의미를 정의해 볼 수 있습니다. 적그리스도는 우리 마음의 승천을 방해하는 자들입니다. 적그리스도는 우리 마음이 승천해야 한다는 것을 가리고 묻어두고 언급조차 하지 않습니다.

 

22~23절을 보면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냐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이 묶여있음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적그리스도가 예수님을 부인하는 방법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 당시에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던 적그리스도 중에 대표적인 자들은 바로 영지주의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의 주장을 보자면 원래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그리스도의 영이 임했습니다. 공생애 기간 동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예수님의 인격을 활용해서 사역을 마치게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그리스도의 영은 예수라는 인격을 떠나서 하늘로 올라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에는 큰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떠났기에 예수님의 부활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부활이 없다면 승천 또한 불가능합니다.

적그리스도의 교리와 이론은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됩니다. 심지어 이단들끼리 싸우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승천을 포인트로 삼아 공격한다는 것입니다. 마귀가 승천을 막으려는 이유는 마귀의 최대 관심이 우리의 마음을 실제로 살아계신 하나님과 만남을 이루지 못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어떻게 하든지 사람들의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서 실제로 살아계신 하나님과 사귐을 불가능하게 합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사도 요한의 모든 이야기는 우리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과 사귀고 있다는 전제하에 서신을 쓰고 있습니다. 마귀는 이 사귐 자체를 막기 위하여 적그리스도를 부하로 부립니다.

예수님의 육체의 부활이 중요한 이유는 승천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이 세상에 대한 죽음을 통하여 일어나는 변화는 마음이 그동안 옷처럼 입고 있던 육의 몸을 벗어버리는 그리스도의 할례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2장 11절에서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할례가 일어나면 내 마음이 육의 몸을 벗어버리고 예수님의 몸을 입게 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그리스도 즉 구세주이신 이유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당신과 함께 죽었음을 믿고 연합하는 모든 사람을 위해 당신의 몸을 내어주셨습니다. 우리가 성찬 때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는다고 하는 것은 십자가에서 육의 몸을 벗고 예수님의 몸으로 갈아입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부활할 때는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의 몸을 입고 부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승천하셨기에 부활한 우리의 마음도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게 됩니다. 이로부터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 안에 머물면서 하나님과 사귐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그리스도의 영이 예수님의 인격을 내버려 두고 홀로 하늘로 올라갔다면 결국 우리가 그리스도의 승천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적그리스도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한다는 것은 그리스도 자체를 부인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적그리스도는 그리스도라는 존재가 없다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나사렛 목수로 사시던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부인할 뿐입니다. 이들은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이 열등한 육체를 입고 이 세상에서 살 수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목적을 가지고 예수라는 인간의 육체를 잠깐 사용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드렸듯이 이러한 주장에 따르자면 우리 마음이 실제로 하나님께로 올라갈 수 있는 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적그리스도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장 18절에서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19절에서 이렇게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에 대해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라고 하였습니다.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의 마음은 하늘로 올라갈 수 없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이자 적그리스도의 특징입니다.

적그리스도는 마음의 승천을 막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이름으로 가르치고 설교합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야 된다는 생각을 갖지 못하게 합니다. 이처럼 승천은 적그리스도의 공격 포인트입니다. 이것을 기준으로 보자면 정통 교파에 의해서 이단으로 규정되는 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정통 교파에 속한 자들조차도 얼마든지 적그리스도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지금까지 우리가 보고 듣고 만난 사람들 중에 적그리스도가 아닌 사람이 별로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인터넷에서 동영상을 통하여 접할 수 있는 설교들을 보면 우리 마음이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승천해야 함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이 말한 대로 마음이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과의 사귐이 있어야 함을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그 설교는 적그리스도의 설교이며 적그리스도를 추종하는 자들의 설교입니다. 그러한 설교가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여지고 있다면 나 자신이 적그리스도의 유전자를 갖고 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세상을 떠나야만 합니다. 마음이 세상을 떠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무효화시키게 됩니다. 이러한 일은 심지어 표면적으로는 십자가 예수님을 붙잡고 생활화하는 것처럼 보이는 자들에게서도 나타날 수 있기에 주의가 필요합니다. 이들은 십자가와 부활까지도 이야기합니다. 다만 부활을 이 세상에서 새로운 사람으로 사는 것으로 여깁니다. 마음의 승천을 잘라버리고 복음을 전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이들은 마음에 세상의 가치들을 담고 있습니다. 배우자를 담고, 자녀를 담고, 형제자매를 담고, 인생의 미래를 담고, 사업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담고 있는 것들과의 실질적인 관계에서 내 능력과 내 힘이 부족하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붙듭니다. 내가 사랑하는 세상의 가치들과의 관계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형통하게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입으로는 십자가를 강조하지만 무서운 적그리스도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몸으로 만나는 이 세상의 모든 상황과 대상들을 떠나서 예수님의 몸을 내 몸으로 입고 하늘로 올라갈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 요한이 말한 대로 하나님과의 사귐을 이룰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적그리스도는 승천을 급소로 삼아 공격해서 하나님과의 사귐을 이룰 수 없게 합니다. 하나님과의 사귐을 겨냥하지 않고 교인들을 이끌지 않는 모든 자들은 적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이 기준을 통해 나 자신이 적그리스도인지 아닌지를 판별할 수 있습니다. 제가 성도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심각한 삶의 문제를 안고 있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그런 분들에게 ‘학교에 가면 출석을 부르듯이 예배당에 출석할 것이 아니라 천국에 출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생활 현장에서 내게 닥친 모든 심각한 문제나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고 마음은 하늘로 올라가야 합니다.’라는 말을 했을 때 깜짝 놀라면서 받아들이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야 한다는 말 자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로부터 그리스도의 유전자를 갖고 있느냐 적그리스도의 유전자를 갖고 있느냐가 구분이 됩니다.

적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죽음조차 세상의 삶을 위한 일로 이용하고자 합니다. 내 능력과 판단을 죽이는 대신 하나님의 능력과 판단을 끌어들여 이 세상을 형통하게 이끌어 가겠다는 의욕에 결부시키는 것입니다. 적그리스도가 마귀의 하수인으로서 하고자 하는 일은 내 마음과 하나님의 사귐을 막는 것입니다. 하늘에 살아계신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가 당신의 독생자를 통하여 하늘로 올라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지금도 세상을 내려다보시면서 여러분의 이름을 부르시며 ‘내 아들 독생자 예수와 십자가에서 연합하여 부활의 과정을 거치고 승천하여 반드시 보좌 우편까지 이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적그리스도는 바로 하나님이 바라시는 승천과 우리를 단절시키고자 합니다. 그렇기에 승천은 적그리스도를 구분하는 핵심이 됩니다.

 

24절을 보면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과 아버지 안에 거하리라”라고 하였습니다. 당시의 교인들이 ‘처음부터 들은 것’이란 사상이나 이론이 아닌 제자들의 목격담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에 대한 목격담,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목격담, 승천하신 예수님에 대한 목격담이었습니다. 제자들은 나사렛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세상을 등지고 하늘로 올라가시는 모든 사건을 직접 목격하였습니다. 이러한 제자들의 마음은 그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내용입니다.

복음은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것을 목격한 현장에서 만들어졌습니다. 승천까지 이루신 그리스도의 사역과 그것을 목격한 제자들이 함께 복음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교리나 이론이 아닙니다. 제자들의 마음이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갔던 것처럼, 우리 또한 복음을 받아들이고 의식으로 붙잡을 때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게 됩니다. 이것이 복음의 전부입니다.

하지만 복음은 별의별 교리와 이론의 가르침으로 뒤범벅이 되고 말았습니다. 심오한 것 같기도 하고 복잡한 것 같기도 해서 어렵게만 느껴집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보자면 10년, 20년, 30년 목회를 하면서도 단 한 번도 모든 생활 현장에서 지금 내 마음이 예수님과 함께 하늘로 올라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예수님의 인성도 인정하고 신성도 인정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되심도 인정하고 삼위일체도 인정하며 천국도 인정할 수 있습니다. 교리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단 한 번도 교인들의 마음이 모든 생활 현장에서 예수님과 함께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과 사귐을 가져야 한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적그리스도입니다.

백번 양보하자면 목사님이나 신학교 교수들조차도 못 듣고 못 배워서 못 가르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모든 생활 현장에서 십자가의 예수님과 연합하여 부활 승천의 길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과 사귐을 가져야 한다는 말을 단 한 번도 못 들었고 못 배웠다면 가르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전했을 때 받아들인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도 많을 것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해온 목회가 틀렸다는 것이냐!’라고 받아들인다면 영적 유전자 자체가 적그리스도일 것입니다.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십자가 복음 방송을 듣고 2년 만에 자신이 해왔던 목회가 가짜였다며 목회 자체를 접으신 목사님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분은 십자가를 생활화를 제대로 아시고 3년 후에 다시 목회를 시작하셨습니다. 영적 유전자가 그리스도의 유전자를 가진 분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승천하여 천국에 출석할 수 있어야 합니다. 비록 이제까지는 ‘아버지! 저 왔어요!’라고 대답할 수 없는 삶을 살았더라도 이제는 바뀔 수 있어야 합니다. 제자들 또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과 승천을 마주하기 전까지는 그랬습니다. 그러나 적그리스도의 유전자가 아닌 그리스도의 유전자를 가진 자라면 예수님께 정을 갖기 마련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승천을 생각조차 못했습니다. 그렇기에 이들은 십자가 사건 앞에서 도망쳤습니다. 다만 제자들은 잘못된 믿음을 갖고 있었지만 이들의 마음에는 예수님과 함께했던 3년간의 정이 있었습니다. 이 정이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실 때 예수님을 따라서 하늘로 가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10년, 20년, 30년을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마음이 주님과 함께 승천해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살았을 수도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했던 3년처럼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살아왔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에 대해 정이 들었다면 기회는 있습니다. 공생애 때 제자들처럼 비록 잘못된 신앙생활을 했더라도 예수님에 대한 정이 들었다면 ‘예수님이 올라가신 승천의 길을 같이 가야 한다.’라는 요청 앞에서 만사를 제쳐두고 하늘로 올라가려고 할 것입니다.

제자들은 공생애 때 예수님을 오해했고 믿음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우리 또한 그래 왔을 수 있습니다. 이제까지 적그리스도적인 위치에서 신앙생활을 했더라도 예수님에 대한 정은 있을 것입니다. 그 예수님께서는 하늘로 올라가시며 우리에게 ‘마음으로 아끼고 사랑하며 붙잡고 있던 세상 것들을 놓고 나와 함께 하늘로 가자.’라고 요청하십니다. 적그리스도의 유전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유전자를 받은 자들이라면 이 요청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주님! 내가 마음에서 배우자를 버리겠습니다. 자녀를 버리겠습니다. 심지어 내 몸까지도 버리겠습니다. 세상을 끌어안고 있던 나는 십자가에서 죽겠습니다. 완전히 세상을 버린 상태에서 주님과 함께 부활하여 기꺼이 주님을 따라 아버지가 계신 천국으로 가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함께 사귐을 갖겠습니다.’라는 결단을 하게 됩니다.

이제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시며 ‘나와 함께 세상을 떠나자’고 하실 때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생긴 정 때문에 예수님을 버릴 수 없어서 세상 것을 버리는 사람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자들이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 뒤늦게나마 부르시는 음성을 따라 결단하여 적그리스도의 모든 냄새와 흔적과 기운을 완전히 깔끔하게 정리해 내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리스도의 유전자가 적그리스도의 기운을 완전히 이기는 은혜를 날마다 경험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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