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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1,2,3 유다서-2

녹취문: 만인에게 무차별적인 옹달샘 사랑법_태승철 (요일 3:11~15)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3.11.09|조회수29 목록 댓글 0

 

www.everyday01.com -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만인에게 무차별적인 옹달샘 사랑법>의 줄거리 :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음이 없어도 박애주의자가 될 수 있고 인류애를 발휘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인본주의적인 사랑은 결국 깊이 뿌리를 쫓아가 보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입니다. 그러나 거꾸로 형제 사랑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고 여전히 생명으로 옮겨가지 못한 채 사망에 머물러 있는 상태입니다. 진정 예수님 믿어 생명을 얻었다면 만인을 향하여 무차별적인 사랑이 샘솟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만인에게 무차별적인 옹달샘 사랑법

 

(요한1서 3:11~15)

 

11. 우리는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12. 가인 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

13.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

14.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사전에서 ‘무차별’이라는 단어를 찾아보면 ‘차별하거나 가리지 않고 마구잡이임’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제목의 ‘만인에게 무차별적인 옹달샘 사랑법’이란 사람을 차별하거나 가리지 않고 마구잡이로 사랑하는 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1절을 보면 “우리는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복음으로 전달받았을 때부터 ‘서로 사랑하라’는 말을 들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가인과 아벨의 예를 듭니다. 12절을 보면 가인이 아벨을 죽인 이유가 명확하게 제시됩니다.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가인과 아벨이 생물학적으로 형제였다는 점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러한 맥락에서 모든 인간이 형제임을 강조합니다.

앞서 사도 요한은 편지의 수신자들을 ‘자녀들아, 아이들아’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그 표현이 ‘형제들아’라고 바뀝니다. 여기에는 꼭 믿는 자들만을 국한시키지 않으려는 의도가 있습니다. ‘자녀들, 아이들’이라는 호칭이 믿는 자들에 국한된 표현이라면, 사랑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하시면서 등장하는 ‘형제들아’라는 호칭은 믿지 않는 자들까지 포함하는 표현입니다. 모든 사람은 아담의 자손일 뿐만 아니라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후에 낳은 가인과 아벨이라는 형제의 자손입니다. 그런데 가인이 아벨을 죽였기에 우리는 모두 가인의 자손이자 한 형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통해 80억 인류 전체가 피할 수 없이 갖고 있는 속성을 가르쳐줍니다. 물론 가인이 아벨을 죽였기에 혈통 상으로는 아벨의 계열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관점에서 인류는 가인의 계열과 아벨의 계열로 나눠질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영적으로 가인의 계열에 속한 사람들이 아벨의 계열에 속한 사람들을 미워해서 죽이지 못해 안달하고 있음을 가르쳐줍니다. 이것이 인류에게 내재된 가인의 속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가인의 계열에 속했든 아벨의 계열에 속했든 한 하나님 아래에서 태어났고, 죄인인 가인의 후손으로서 한 형제이기에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이유입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에서 이 악함과 의로움을 구분하는 기준은 제사입니다. 가인도 제사를 드렸고 아벨도 제사를 드렸습니다. 가인은 농부라서 곡식을 제물로 바쳤고, 아벨은 양을 치는 목자라서 양을 제물로 바쳤습니다. 창세기 4장 4절을 보면 아벨의 제사를 묘사하기를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라고 하였습니다. 양의 기름으로 제사를 드리려면 양을 죽여야만 합니다. 그러나 가인은 곡식을 그냥 드렸습니다. 이러한 제사의 모습 속에서 악함과 의로움이 구분됩니다.

아벨의 제사에는 양을 죽이는 일이 있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을 향한 모든 제사는 희생 제물과 제사를 드리는 사람을 동일시합니다. 다른 종교의 제사는 신에게 뇌물을 바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제사는 죽임을 당하는 제물과 제사를 드리는 사람의 동일시를 요구합니다. 제물인 양이나 소가 죽는 것은 내가 죽는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인은 제사에 죽음의 의미를 담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곡식을 어떻게 죽이는가?’라는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분명히 곡식으로 드리는 제사 또한 기록하고 있습니다. 곡식을 가루로 만듦을 통해 죽음의 의미를 드러냈던 것입니다.

가인이 아벨처럼 의로움의 제사를 드리고자 했다면 곡식을 가루로 만들어 자기의 죽음과 동일시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죽음이 강조되는 이유는 죄 때문입니다. 가인과 아벨은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이후에 첫 번째로 태어난 자손들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인류는 죄로 인한 타락과 저주 속에 있는 자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들이 하나님과 관계하기 위해 필요한 방법이 제사였습니다. 이 제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내가 죄와 타락과 저주에 빠져있는 자임을 인정하고, 그러한 모습으로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제사에는 ‘나는 죽어야 마땅합니다.’라는 의미가 담기게 됩니다.

그런데 가인은 곡식을 가루로 만들어 자신의 죽음과 동일시하지 않고 곡식을 그대로 드렸습니다. 이는 곧 죄와 저주에 찌든 나를 하나님 앞에서 그대로 유지하고 주장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에게서도 발견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돈 문제, 건강 문제, 가족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와서 그대로 아룁니다. 이것은 죄와 저주에 찌든 입장에서 돈 문제, 건강 문제, 가족 문제를 바라보는 나의 위치를 고수하며 하나님께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가인의 계열을 주장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한편 이 세상에서 영적인 가인의 계열과 영적인 아벨의 계열은 함께 살아갑니다. 아벨 계열의 사람이 가인 계열의 사람에 의해서 죽지 않고 계속 같이 살아가야 하는 상황이 벌어질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러한 상황에서 나타나야 할 태도가 사랑임을 가르쳐줍니다.

가인 계열의 사람들과 아벨 계열의 사람들은 한 근원을 가진 형제로서 같이 살아가야 합니다. 가인 계열의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죄와 저주에 찌든 자신을 죽이려는 마음을 갖지 않는 자들입니다. 자연인으로서의 모습을 고집하고 고수하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아벨 계열의 사람들은 저주에 찌든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끊임없이 죽이려는 마음을 갖는 자들입니다. 이러한 아벨 계열의 사람들이 가인 계열의 사람들과 함께 살아갈 때 보이는 태도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13~14절을 보면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 /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소위 ‘예수 믿어 구원을 얻었다. 예수 믿어 영생을 얻었다.’라고 할지라도 거짓말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대로 세상 사람들은 근원적으로는 한 형제이지만 영적으로는 가인의 계열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들을 대하는 태도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13절의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라는 말씀에는 ‘세상이 우리를 미워할지라도 우리가 그들을 사랑해야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 말씀대로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이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좋아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랑은 전적으로 나의 내부 문제이지 내가 사랑해야 할 대상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사랑할 대상이 어떤 사람인가?’라는 문제는 사랑함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영적으로 가인의 계열인 사람들에 둘러싸여 살아갑니다. 그러한 세상 사람들이 나를 미워한다고 내가 사랑하기를 중단할 이유가 되지 않습니다. 반대로 세상 사람들이 나를 인정하고 좋아한다고 해서 내가 사랑한다면 그것은 진짜 사랑일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는 사랑은 상대방의 인격 상태에 구애받지 않습니다. 내 안에 사랑해야 하는 이유를 지니고 있기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이유는 내가 상대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발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만나기 이전에 하나님과 맺은 관계에서 사랑이 발생합니다.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음으로부터 내가 타인을 사랑할 이유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마주하는 상대가 어떤 사람이냐는 문제, 나에 대한 태도가 호의적인가 적대적인가 하는 문제는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에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하나님과 관계하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유지되는 상태가 생명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었기 때문에 우리는 누구든지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무차별적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를 보고 구분하고 차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상대하는 대상을 마구잡이로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상태를 옹달샘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도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만 강릉에서 차로 25분 정도 가면 오대산 진고개 초입에 탄산수가 나오는 유명한 샘이 있습니다. 그 샘은 사람을 가려서 물을 주지 않습니다. 착한 사람들이 올 때 샘이 많이 솟아나거나, 악한 사람들이 올 때 샘이 솟아나지 않거나 하지 않습니다. 샘은 위인이 와도 솟아나고, 지명수배자가 와도 솟아납니다. 남자가 와도 솟아나고, 여자가 와도 솟아나고, 여당 의원이 와도 솟아나며, 야당 의원이 와도 솟아납니다. 물이 샘솟는 이유가 옹달샘 외부가 아닌 옹달샘 내부에 있기 때문입니다. 샘이 지하수층과 연결되어 있으면 물은 솟아납니다.

우리의 사랑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믿어서 생명을 얻으면 우리의 몸은 이 땅에서 생명수가 흐르는 옹달샘이 됩니다. 산에 있는 옹달샘이 지하수와 연결이 되어있다면, 우리의 몸은 하늘에서 흐르는 생명수와 연결된 옹달샘입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이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사랑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내부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제까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고, 구원을 얻었다고 하면서도 사람을 만나 관계하는 방식을 선택하고자 했습니다. 끊임없이 상대하는 사람을 분별하고 판단하면서 대응할 태도를 결정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라고 하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대하든지 사랑해야 한다는 명분에 대해서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함을 명심하라고 못을 박습니다. 14절의 우리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 간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정말로 구원을 얻었고 생명을 얻었다면 무차별적인 사랑으로 증명되어야 합니다. 무차별적인 사랑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생명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지하수층에 연결된 옹달샘은 누가 오더라도 무차별적으로 샘솟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늘 생명수층에 연결되어 생명과 구원을 얻은 사람이라면 몸으로 상대하는 사람이 누구든지 무차별적으로 말과 행동에서 사랑이 나가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믿어 생명을 얻었고 구원받은 증거입니다.

 

사도 요한이 말하는 ‘생명’이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과 함께 이 세상에 대해 죽었다는 동일시의 고백이 믿음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십자가에서 시작되면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이르신 예수님과 연합하여 하늘로 따라가게 됩니다. 보좌 우편에 이르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와 교제하고 계시고, 사귀고 계시고, 일체가 되시는 관계를 누리고 계십니다. 우리 마음이 예수님 안에 들어가서 하늘 보좌까지 가면 예수님과 하나님의 사귀심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럴 때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하나님과 사귐의 증거가 나타납니다. 내 몸이 어디에 있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마음은 하나님의 있음이 유일한 존재감으로 의식됩니다. 또한 동시에 하나님의 유일한 좋음만이 소망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이것이 구원을 얻은 것이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상태입니다.

음식을 먹었으면 그 음식의 냄새가 풍기듯이, 생명을 얻은 것이 분명하다면 생명의 냄새를 풍기게 됩니다. 그 생명의 냄새가 바로 무차별적인 사랑입니다. 마늘을 잔뜩 넣은 회냉면을 먹었다면 사장님과 이야기할 때, 부하 직원과 이야기할 때도 마늘 냄새가 날 것입니다. 양치질해서 냄새의 원인을 제거하기 전까지는 누구를 만나든지 마늘 냄새를 풍깁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과 하나 되어서 생명이 주어진 상태라면 내가 지금 상대하는 사람이 누구든지 무차별적인 사랑이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사랑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생명을 얻은 사람의 몸에는 성령이 내려오셔서 행하시게 됩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언제나 아버지와 함께하셨습니다. 예수님과 아버지의 영원한 사귐이 우리 생명의 근원인 이유는 우리도 예수님 안에서 아버지와 사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분이셨기 때문에 사람을 대하실 때도 언제나 사랑으로 일관하셨습니다. 바리새인도 사랑하셨고, 세리도 사랑하셨고, 혈루병 여인도 사랑하셨으며, 거라사 광인도 사랑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로마 사람들을 극히 싫어했으나 예수님께서는 로마인과도 격의 없이 지내셨기에 예수님을 매국노처럼 여기기까지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믿음이 크다고 칭찬을 들은 사람도 로마의 백부장이었습니다. 마태복음 8장 10절에서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라고 말씀하셨던 바와 같습니다. 일제강점기 때 ‘대한민국 사람 중에 이 일본 사람처럼 훌륭한 사람이 어디 있느냐?’라고 칭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사랑은 무차별적이었고 마구잡이식이었습니다.

다만 그 사랑의 모습은 사람에 따라 달랐습니다. 바리새인에 대해서는 저주를 퍼부으시고 야단을 치시는 모습으로 사랑하셨고, 타락한 대제사장들에 대해서는 채찍을 들고 성전을 정화하시는 모습으로 사랑하셨으며, 세리와 창기들에 대해서는 이들을 부르시고 가까이하시는 모습으로 사랑하셨고,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자에 대해서는 보듬으시는 모습으로 사랑하셨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방식의 말과 행동을 하셨지만, 이것은 모든 사람을 향하여 하나님과 연결되어 계신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님으로서는 동일한 사랑이었습니다. 옹달샘이 사람을 가리지 않고 샘물이 솟아나는 것처럼 예수님 또한 사람을 가리지 않고 사랑하셨던 것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이 달랐을 뿐이지 예수님은 사랑이 아닌 말과 행동을 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당신을 팔아넘길 가룟 유다를 향해서도 사랑하셨고, 당신을 잡아 죽이고자 빌라도에게 넘기는 산헤드린 공회원들을 향해서도 사랑하셨습니다.

 

한편 사도 요한은 15절에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라고 하였습니다. 단지 미워함이 어떻게 살인과 같을 수 있는지 쉽게 와닿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성격을 자세히 살펴보면 공통점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살인이란 이 세상에서 어떤 사람의 존재를 지워버리고 없애버리는 행위입니다. 쉽게 말해 사람의 있음을 없애는 것이 살인입니다. 미워함이란 내 앞에 있는 상대방이 없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미움의 핵심은 내가 싫어하는 대상이 없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마음에서 상대를 죽이는 일이 미움입니다.

예수님도 이와 상통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 22절을 보면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라고 말씀하셨고, 28절에서는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기준에서 볼 때 우리가 마음에서 누군가를 미워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살인과 다름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미워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실제로 죽기를 바라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미워하는 동안에는 그 사람이 어디에 가서 무슨 일을 하든 적어도 내 삶의 영역에서 없어지기를 바라게 됩니다. 내 삶의 영역이라는 차원에서는 그 사람을 살인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미워함은 어떤 사람의 존재만 없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의 살인일 뿐만 아니라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그 사람을 내 삶의 영역 안에 있게 하신 분은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따라서 미워함이란 하나님의 주권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입니다.

누군가 나를 미워하고 비난한다면 그 사람이 제발 눈앞에서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미워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조차 주관하시고, 내 머리털까지 세신바 되시는 주권자이십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내가 그토록 미워하는 사람을 내 삶의 영역 안에 있게 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달리 변경할 수 없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미워한다는 것은 내 눈앞에서 존재가 없어지기를 바라는 것이고 이와 동시에 그 존재를 있게 하신 아버지의 주권에 반항하는 것입니다. 내 눈앞에서 그 사람을 통해 나타나는 아버지의 주권을 죽이는 것입니다. 따라서 미워함은 그 사람을 죽이는 살인일 뿐만 아니라 내 앞에 나타난 상대방을 통해 실현되고 있는 아버지의 주권을 죽이는 일입니다. 한 사람을 미워함이 내 삶에 내려오는 모든 일을 계산하시며 백 수, 천 수, 만 수 앞을 내다보시며 나를 이끄시는 아버지의 주권 전체를 소멸시키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천 수, 만 수 앞을 내다보시는 아버지의 주권적 이끄심을 우리 것으로 붙잡을 수 없게 됩니다.

우리는 미워하기에 앞서 ‘하나님께서 내가 싫어할 수밖에 없는 사람을 두신 이유가 무엇일까?’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미워하시기 때문은 아닐 것입니다. 취미로 우리를 괴롭히시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염두에 둘 때 열 수까지도 아니고 두 수만 지나가도 그 사람을 두신 이유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사람은 내가 미워하는 사람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함은 곧 하나님과의 사귐입니다. 반대로 내가 마음대로 사람을 미워하기도 하고 좋아하기도 한다면 그것은 곧 ‘나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주권이 지금 내 삶에 임하고 있다는 사실을 죽어도 안 믿는다.’라는 고백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늘에서 흐르고 있는 생명수 지하층에 연결된 옹달샘들입니다. 옹달샘은 샘가에 오는 사람을 봐 가며 물을 내어주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존경하는 영웅호걸이나 위인이 올 때도 샘솟으며, 모든 사람이 이를 갈며 죽이고 싶어 할 정도로 미워하는 살인범이나 가정파괴범이 와도 똑같이 샘솟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믿어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과 사귐을 이루는 생명과 영생을 얻은 자라면 이 땅에서 만인을 향한 무차별적인 사랑을 하게 됩니다. 사람을 가리지 않는 마구잡이 사랑을 샘솟게 하는 사랑의 옹달샘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만을 바라봄으로써 우리의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 아버지와 사귐을 이루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우리 마음이 생명수 강에 잠기게 하여 주시고, 우리의 몸은 만인을 향하여 무차별적 사랑을 뿜어내는 옹달샘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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