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요한1,2,3 유다서-2

녹취문: 십자가로 쓰는 사랑 재료 재고 목록_태승철 (요일 3:16~18)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3.11.11|조회수44 목록 댓글 0

 

www.everyday01.com -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십자가로 쓰는 사랑 재료 재고 목록>의 줄거리 :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기가 어려운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랑에 대한 이해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라는 말씀은 내가 직접 몸을 움직여 사랑이라는 행위를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내게서 사랑의 행위가 나타날 만큼 제대로 믿으라는 뜻입니다. 내 몸의 행위로 나타나는 사랑은 하나님이 내 몸을 손에 쥐시고 내가 만나는 사람을 상대하는 방식입니다. 이러한 사랑을 위해서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 바로 십자가로 기재하는 사랑 재료 재고 목록입니다.

 

 

십자가로 쓰는 사랑 재료 재고 목록

 

(요한일서 3:16~18)

 

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17.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사랑 재료에는 재고 목록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재고 목록은 십자가로 쓸 수 있습니다. 재고는 이미 창고에 쌓여있는 물품을 말합니다. 지금 내게 있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에는 우리로서는 감히 엄두가 나지 않는 요청이 등장합니다. 16절을 보면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그’는 당연히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를 사랑하셨음을 알게 하는 사건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죽음 자체가 사랑임을 알게 하는 굉장한 사건입니다. 이러한 십자가 사건은 우리에게 사랑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에 대한 대답을 제시합니다.

 

사도 요한의 말씀은 ‘예수님이 너 때문에 십자가에서 목숨을 버리셨음을 안다면, 너도 다른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은 훌륭한 일이 아니라 오히려 마땅히 해야 될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말씀을 보자면 평생 한 번이라도 이런 사랑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처럼 나도 다른 사람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일은 전설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다만 우리가 이러한 사랑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사랑에 대한 이해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라’는 말씀은 명령형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직접 몸을 움직여 사랑이라는 행위를 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사도 요한은 믿는 사람들에게 사랑하라고 하였지만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사랑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믿는 자들에게 사랑하라는 말씀은 사랑의 행위가 나타날 만큼 제대로 믿으라는 뜻입니다. 이 말을 달리하면 사랑의 행위는 제대로 믿어서 구원을 받으면 나타나리라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말하는 사랑에 엄두가 나지 않는 이유는 이웃 사랑과 형제 사랑이란 내가 하는 행위가 아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죄와 저주가 체질인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이웃을 사랑해 보고자 시도하다가 아예 포기하고, 목숨까지 바치면서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성경에 나오는 전설쯤으로 여기며 넘어가게 됩니다.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마음은 하나님 사랑을 위해 다 써야만 합니다. 이웃 사랑에 쓸 여분이 조금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잊기에 하나님 사랑이 안 되고, 하나님 사랑이 안 되기에 정작 이웃 사랑과 형제 사랑도 안 됩니다. 사람의 마음은 있음의 존재감을 의식하고, 좋음으로 마음을 채우고자 하는 욕구 작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마음의 작용은 그리스도 연쇄 과정 속 예수님과 연합하여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직면하여 하나님과 사귐을 지속하는 동안에 충족됩니다. 이것이 구원이고 예수님을 얻어서 얻게 되는 생명입니다.

한편 이렇게 예수님과 연합하여 마음이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과 사귐을 갖는 생명이 지속되는 동안에는, 몸으로 만나는 누구에게나 직접적인 반응을 일으킬 수 없습니다. 그가 아무리 나쁜 사람이든 좋은 사람이든 마찬가지입니다. 내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 지금 하나님과 사귐을 갖는 상태야말로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 생명을 누리는 사람은 몸으로 만나는 사람에 의해 선동될 수 없고 자극이나 흥분을 일으킬 수도 없습니다.

이로부터 사랑에 대한 정의를 내려 볼 수 있습니다. 사랑이란 내 마음이 예수님 안에서 천국 보좌 우편에 머무는 동안, 이 땅에 있는 내 몸을 하나님이 손에 쥐시고 사용하시면서 내가 만나는 사람을 관계하는 방식입니다. 더 줄여서 말하자면 이웃 사랑, 형제 사랑이란 하나님이 나의 지정의와 연결된 몸을 움직이셔서 내가 만나는 사람을 상대하시는 방식입니다. 내가 만나는 사람을 하나님이 상대하시는 방식이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의 사랑하라는 요청은 내가 마주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상대하실 수 있는 조건으로 만들라는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내막을 모른 채 죄와 저주에 찌든 상태에서 이웃과 형제를 사랑하려고 하지만 되지 않습니다. 결국 사랑하라는 말씀은 나와는 관계가 없는 말씀으로 여깁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처럼 다른 사람을 사랑하라고 하니 나와 아무 상관 없는 일로 여깁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오히려 마땅한 일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사랑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구원받지 못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아 누리는 생명이란 곧 마음이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과 사귐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생명의 증거는 하나님께서 이 땅에 있는 내 몸을 쥐시고 내가 만나는 사람을 상대하시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 상대하시는 방식이 사랑입니다. 따라서 정말로 구원받았고 생명을 누리고 있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그 사랑이 우리에게서도 그대로 나타나는 것이 마땅합니다. 사도 요한의 요청은 도망갈 구멍도 없이 엄격합니다. 따라서 이렇게 제시된 말씀의 기준을 간과하거나 제쳐버리고 자기 편한 방식대로 해석하는 것은 결코 믿음이라 할 수 없습니다.

 

사도 요한이 제시하는 사랑은 구원받고 생명을 얻었음이 기준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이 우리의 믿음을 쉽게 해주고 삶도 쉽게 해줍니다. 우리는 그동안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해 몰랐기에 쓸데없는 일들에 신경을 썼습니다. 사랑이 무엇인지를 몰랐기에 예배당 안에서조차도 사랑하는 재미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사랑에서 나타나는 기쁨을 맛보지 못한 채 엉뚱한 일에서 기쁨을 찾고자 신경을 써왔던 것입니다.

사랑에 있어서 나의 일은 사랑 재료 재고 목록을 만드는 것까지입니다. 나는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통해 내가 만나는 사람을 상대하시는 방식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랑하라는 말씀을 접할 때마다 하나님이 나를 통해 내가 만나는 사람을 상대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출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조건의 전부가 바로 사랑 재료 재고 목록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내가 만나는 사람을 사랑하실 때 절대로 필요한 조건이 사랑 재료입니다. 그 사랑 재료가 내게 있는 것이 재고입니다. 우리는 생각 속에서 기도하는 중에 그 재고의 목록을 만들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노트에 쓸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 의식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18절을 보면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말하는 형제 사랑이 말과 혀로만 하는 사랑이 되지 않고 행함과 진실함이 되기 위한 예가 17절에서 언급됩니다.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는 ‘이 세상의 재물’이 사랑의 재료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사랑에는 재료가 있어야 됩니다. 재료가 들지 않는 사랑은 말과 혀로만 하는 거짓 사랑입니다. 사랑이 내게서 이루어지려면 사랑 재료 재고 목록이 있어야만 합니다. 재고 목록이란 하나님이 나를 통해 내가 만나는 사람을 상대하실 때 ‘사랑을 위해 재료로 써 주십시오.’라고 내놓을 수 있는 것들을 말합니다. 이 재고 목록을 만드는 것이 우리가 이웃 사랑, 형제 사랑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전부입니다. 내게 있는 사랑 재료의 재고를 언제, 어떻게, 누구에게 사용하느냐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렸습니다. 나는 언제 어디서든 하나님이 나의 몸을 쥐시고 사람을 상대하실 때 필요하면 동원하실 수 있도록 사랑 재료 재고 목록에 넣어둘 수만 있으면 됩니다. 이는 곧 ‘내가 관여하지 않겠습니다. 내가 주체적으로 붙잡지 않겠습니다.’라는 마음가짐입니다.

이전에 우리가 살던 방식은 이와 달랐습니다. 내 몸이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내 명의에 속하도록 주어진 것들이 있습니다. 이전 설교에서 ‘내게 주어진 것들은 내게 주신 것이 아니라 내게 두신 것이다.’라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사랑 재료 재고 목록을 만든다는 것은 바로 이렇게 내게 주어진 것들을 하나님이 내게 두신 것으로 바꾸는 작업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무엇인가를 내게 두셨다면 거기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필요하다고 생각하실 때 언제든지 꺼내 쓰시기 위해 두셨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일이 재고 목록을 만들어 두는 것입니다.

내게 주어진 것을 단순히 내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마음으로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마음으로 붙잡고 있는 것들을 분리하는 작업이 일어나야만 합니다. 그 분리하는 작업이 16절에서 언급된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라는 말씀이 의미하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마음으로 붙잡고 있는 것들을 분리하여 재고 목록으로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줍니다.

 

우리는 내게 주어진 것들을 마음으로 붙잡게 됩니다. 마음 채움을 위해서 붙잡은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크기의 마음 공백은 이 세상의 것들을 붙잡는다고 해서 채워지지 않습니다. 채워지지 않음을 알았다면 세상 것으로는 마음 채움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주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고자 마음먹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기초로 해서 그 위에 더 많이, 더 높이 쌓으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그러나 더 쌓자, 더 많이 가지자는 마음가짐으로 세상을 사는 동안에 이웃 사랑, 형제 사랑은 죽었다 깨어나도 나타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얼마든지 내게 있는 것들을 강제로 뜯어내 다른 사람에게 주실 수도 있습니다. 재벌들이 죽을 때는 어마어마한 재산을 남깁니다. 그 재산을 두고 형제간에 싸움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돈을 번 본인은 자신을 위해 제대로 쓰지도 못한 채 죽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죽음이나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주셨던 것들을 다른 사람에게 옮길 수도 있지만 이것은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방법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믿는 사람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자발적으로 하나님이 언제 어디서든 내 몸으로 마주하는 사람들을 상대하실 때 마음대로 꺼내 쓰실 수 있도록 주어진 것들을 재고 목록에 포함시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형제 사랑과 이웃 사랑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거기까지로 정해놓으셨습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 중에 어디까지를 사랑 재료 재고 목록에 기재하여 하나님이 사용하실 수 있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 기준을 제시하셨습니다. 이 기준에 따르자면 사랑 재료 재고 목록에 들어가야 될 것은 이 세상에서 내게 주어진 것들 전부입니다. 여기에는 내 몸까지도 포함됩니다. 이런 말씀을 보자면 정말로 이런 일이 가능하겠나 싶은 생각이 들기 마련입니다. 내게 주어진 것들 중에는 소중하게 느껴지는 가치들이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많든 적든 소중한 것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것들을 마음으로 붙잡고 마음에 담고 살아갑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사람을 상대하실 때 언제 어디서나 마음대로 사용하시라고 내놓을 수 없습니다. 이로부터 주님의 십자가에서 죽어야 하는 필요성이 생겨납니다.

세상에서 내게 주어져 있는 것들을 생각해 봅니다. 집, 재산, 건강, 인생의 시간을 비롯해 다양한 요소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내 몸이 있기 때문에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몸 자체도 사랑 재료 재고 목록에 포함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히 몸이 있기 때문에 주어진 모든 것들 또한 사랑 재료 재고 목록에 기재될 수 있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사람을 상대하실 때는 내 목숨 자체를 사랑 재료로 사용하실 수도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사용하실지 모르지만 다만 그 일은 내가 하는 일이 아닙니다. 내가 직접 목숨을 바치며 사랑하려고 두리번거려도 누구에게 목숨을 바쳐야 하는지, 누구 때문에 목숨을 바쳐야 하는지, 어떤 시점에 목숨을 바쳐야 하는지, 왜 목숨을 바쳐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이웃 사랑이나 형제 사랑을 위해 쓸 여분이 없을 정도로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귐에 온 마음을 다할 때 몸에 주어진 것들과 마음은 분리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가르쳐주시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하셨습니다. 내 마음에 하나님의 이름만 남게 되는 상태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이는 곧 내 마음이 내게 주어진 그 어떤 것도 붙잡지 않는 상태입니다. ‘내게 주어진 어떤 것의 이름도 내 마음에서 없어지게 해주시옵소서.’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 재료 재고 목록을 만드는 것입니다.

나의 몸부터 시작하여 계좌에 있는 돈, 능력, 지식 등 내게 주어진 모든 것이 사랑 재료를 위한 재고 목록이 될 수 있습니다. 그동안 이것들을 나의 기쁨과 만족을 위해 쓰고자 했습니다. 내 인생의 성공을 위해, 세상에서 잘 나가기 위해 쓰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내 마음의 기쁨과 만족이 예수님을 따라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과의 사귐 속에서만 찾을 수 있음을 알았다면 이제 내 몸에 주어진 모든 것들은 재료가 됩니다. 오직 하나님이 내 몸을 쥐시고 다른 사람을 대하는 방식인 사랑을 행하실 때 언제 어디서나 쓰실 수 있도록 재고 목록을 만들어 드리는 것입니다.

이 재고 목록을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내 마음이 십자가에서 죽음으로써 몸과 몸이 있기 때문에 주어진 것들로부터 완벽한 분리가 일어나야만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를 골로새서 2장 11절에서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라고 표현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할례는 내 마음에서 육의 몸을 잘라내는 사건입니다. 이는 곧 육의 몸에 주어진 모든 것들이 분리됨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몸과 몸에 관련된 일들이 분리되어서 하나님의 주권에 넘어간다고 생각합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하나님의 주권에 넘어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사람을 상대하실 때 동원하시고 사용하시는 재료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몸과 분리되어서 하늘로 올라가고 나면 하나님의 주권적 사용하심은 다름 아닌 내가 만나는 사람을 향하여 사랑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사랑 재료 재고 목록은 ‘하나님! 하나님께서 내가 만나는 사람을 상대하실 때 내 몸과 내 몸에 주어진 모든 것들을 마음대로 사용하십시오.’라는 마음가짐에서 생겨납니다. 우리는 그 재고 목록을 하나하나 꼽아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몸에서 옷이 분리되면 알몸이 되듯이, 마음에서 몸과 몸에 관련된 모든 것이 유착되지 않고 분리되는 알마음의 상태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내어드린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당장 다른 사람을 위해 내 계좌에 있는 돈을 다 쓰시든지, 다른 사람을 위해 예수님처럼 내 몸을 당장 죽게 하시든지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설령 그렇게 하실지라도 마음은 자유와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내게서 사랑이라는 행위가 나타나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사랑 재료 재고 목록을 만드는 것이 전부입니다. 이렇게 내 몸과 몸에 주어진 모든 것들을 하나님 사랑의 재료로 내어드리는 재고 목록을 작성하고 나면 삶은 자유롭고 가볍고 평안하고 즐거워집니다. 이것이 삶을 가장 쉽게 사는 비결입니다. 쉽게 살면서도 헛됨이 없습니다. 결실과 알곡이 채워지는 삶이 됩니다. 진정한 결실과 알곡이란 세상에서 사람들의 기준을 따라 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사랑이 나타나는 것 자체가 결실이고 알곡입니다. 우리는 몸에서 나타나는 행위의 결과나 열매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우리 몸에서 나오는 행위 자체가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이란 하나님을 모셔 들일 수 있는 공백의 마음입니다. 영이신 하나님을 모셔 들이는 곳이기에 공백의 마음은 영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죽으면 영을 제외한 모든 것들은 없어질 것입니다. 사는 동안에 없어질 것들을 붙잡고 죽네 사네 발버둥 치며 구걸해서는 안 됩니다. 죽기 전에 마음에서 몸과 몸에 주어진 모든 것들을 분리해야 합니다. 죽을 때 영인 마음이 가지고 갈 수 없는 모든 것들을 분리하여 사랑 재료 재고 목록에 기재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야말로 날아다니는 삶이 됩니다.

사랑 재료 재고 목록에서 내게 주어진 것의 많고 적음은 관계없습니다. 내게 주어진 것이 적다면 재고 목록도 간단해지니 오히려 더 유리합니다. 제대로 구원받아 사랑을 증거로 드러내고자 한다면 많이 가졌으면 많은 것을 재고 목록에 올려야 하고, 적게 가졌다면 적게 가진 것을 재고 목록에 올려야 할 뿐입니다. 그렇기에 세상 기준을 가지고 부자나 가난함을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부자는 부자대로 가난한 자는 가난한 자대로 자기 몸까지도 재고 목록에 올려야 되기 때문입니다.

몸까지 사랑 재료 재고 목록에 올린 사람의 자유로움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의 자유로움, 그 존재의 가벼움은 누구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이와는 반대로 살고자 합니다. 많으면 많은 대로, 적으면 적은 대로 이 세상 것을 쌓아가며 살기에 세상 무게에 짓눌려서 사는 게, 사는 게 아닙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죽으셨기에 나도 남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세상 무게에 짓눌려 있는 한 이러한 말씀은 전설처럼 느껴지고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고 불가능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이 불가능함이 현실이 될 때 우리는 구원을 얻은 것이고 생명을 얻은 증거를 갖게 됩니다. 그 불가능해 보이고 전설처럼 보이는 일은 간단합니다.

십자가가 기준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음으로써 마음에서 몸과 몸에 주어진 모든 것으로부터 분리합니다. 그리고 내게 주어져 있는 것들이 무엇인가를 하나하나 꼽아봅니다. 그러면서 기도 속에서 재고 목록을 만듭니다. 그럴 때 재고 목록으로 만든 모든 것들 속에서 자유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 모든 것들은 자유의 계기가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사람을 상대하실 때 적절하게 사용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내게 주어진 모든 것들이 사랑의 재료로 쓰이는 모든 순간에 하늘에서 마음이 누리는 기쁨은 배가 될 것입니다. 이 땅에 남아있는 몸과 지정의의 기능이 하나님의 뜻과 찰떡궁합이 되어서 호흡을 맞추며 진행되는 삶에서 느껴지는 기쁨보다 큰 기쁨은 이 세상에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 재료 재고 목록 만들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지금 죽어도 천국이기에 두려워할 일이 없습니다. 천국은 이 세상 좋음을 다 가져도 좁쌀알만큼도 안 될 정도로 큰 좋음의 왕국입니다. 걱정하지 마시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주의 기도를 드리는 중에 마음에서 몸에 주어진 모든 것들을 분리하고 사랑 재료 재고 목록 만들기를 끊임없이 해나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의 기도를 통하여 몸이 있어 주어져 있는 모든 것들과 몸까지 포함하는 사랑 재료 재고 목록에 기재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내가 만나는 사람을 상대하실 때 티끌만큼의 방해도 없이 마음껏 사용하실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