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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1,2,3 유다서-2

녹취문: 삼위 하나님 배경으로 보호색 띠기_태승철 (요일 3:18~24)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3.11.13|조회수90 목록 댓글 0

 

www.everyday01.com -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삼위 하나님 배경으로 보호색 띠기>의 줄거리 :

세상을 대할 때면 언제나 삼위일체 하나님을 배경으로 내가 보호색을 띰으로써 하나님과 내가 구분이 어려운 상황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내가 초록은 동색인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만나는 사람을 누구든지 사랑할 때 확인되는 현상입니다. 이렇게 초록이 동색이듯 하나님과 한편이 되면 나타나는 일이 바로 확신과 담대함과 모든 소원의 성취입니다.

 

 

삼위 하나님 배경으로 보호색 띠기

 

(요한일서 3:18~24)

 

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19.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20. 이는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

21.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22.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23.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24.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우리가 세상을 대할 때 삼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배경이 되어주십니다. 그럴 때 우리는 마치 보호색을 띠는 것처럼 삼위 하나님과 구분되지 않습니다. 보호색이란 작은 파충류나 곤충 등이 주변 환경과 같은 색을 띰으로써 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보호색의 반대는 경계색입니다. 무당벌레 등은 화려한 색깔을 띠고 오히려 주변 존재들이 함부로 다가오지 못하게 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대할 때 예를 들어 가족을 대하는 상황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이 나의 배경이 됩니다. 그러면 내가 보호색을 띰으로써 내가 가족을 대하는 것인지 삼위일체 하나님이 가족을 대하시는 것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초록은 동색’이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풀과 녹색은 같은 색이라는 풀이로써 처지가 같은 사람끼리는 한편이 되기 마련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구분이 어려울 정도로 보호색을 띤 채로 사람을 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초록은 동색이듯이 삼위일체 하나님과 나는 같은 처지에서 한편이 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마음에 담을 대상은 배우자나 자녀도 아니고 형제자매도 아니고 우리나라의 형편도 아닙니다. 이러한 대상들과 한편이 된 채로 하나님을 마주 대할 수 없고 하나님과의 사랑을 이룰 수도 없습니다. 마음에 대한민국을 담고 있으면서 일본 사람이나 미국 사람이나 중국 사람을 사랑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마음에 삼위일체 하나님을 배경으로 삼았다면 삼위일체 하나님과 구분되지 않는 보호색을 띨 수 있어야 합니다. 초록은 동색이듯이 하나님과 내가 같은 편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배경으로 보호색을 띠는 것은 결국 하나님과 한편이 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하나님과 한편이 되지 못하고 다른 대상과 한편이 되어 있다면 사랑에 문제가 생깁니다. 내 가족과 한편이 되어있고, 우리나라와 한편이 되어있고, 내가 출석하는 예배당과 한편이 되어있다면 이 세상에서 다른 편이 된 사람들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과 한편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과 구분이 안 될 정도로 하나님께 녹아들어야 합니다. 보호색을 띤 것처럼 구분이 어려운 상태가 될 때 사랑도 가능해집니다.

본문을 요약하자면 진실로 사랑하게 되면 내가 주님 안에 거하고 있다는 사실이 흔들림 없는 확신으로 주어진다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사랑할 때만 주님 안에 거하게 됩니다. 사랑하지 않는다면 주님 안에 거하지 않는 것이고 주님을 믿는 상태가 아닙니다. 그리고 믿음이 없기 때문에 사랑이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또 초록이 동색이듯이 세상을 대할 때는 하나님과 한편이 되고, 하나님과 내가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보호색을 띠면 내 안에는 담대함이 생깁니다. 감히 내가 생각하고 있는 일들이 하나님의 생각이라고 확신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초록이 동색인 보호색의 인격 상태에서는 이 세상에 대하여 내 속에서 생기는 어떤 소원을 구하거나 기도하더라도 하나님이 다 이루어 주십니다. 사도 요한은 이러한 본문을 통해 엄청난 신앙의 진실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믿음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면 ‘사랑하라’는 계명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천만 원을 버는 것보다 목숨까지 버릴 정도로 형제를 사랑하는 일이 더 쉽습니다. 평사원이 대리로 승진하는 것보다 사랑이 더 쉽습니다. 3kg 다이어트 하는 것보다 형제를 사랑하는 일이 더 쉽습니다. 자녀들의 성적 1등급을 높이는 것보다 사랑하기가 더 쉽습니다. 사랑하는 것은 이렇게 쉽지만 그 결과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놀라움으로 나타납니다. 사랑을 본격적으로 해본 적 없는 상태에서는 그 어떤 상상도 진실로 사랑할 때 주어지는 결과에 적중할 수 없습니다. 사랑의 결과는 상상 그 이상입니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사랑하라는 계명을 회피하거나 뒤로 미루는 것이 아니라 정면 돌파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할 때 제일 중요한 일은 믿음을 점검하는 일입니다. 우선 사랑하라는 계명을 받은 내가 누구인지를 확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대체 누구에게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신 것일까요? 나는 어떤 상태에서 사랑하라는 계명을 받게 된 것일까요?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상태에서 사랑하라는 계명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을 전혀 믿지 않고, 예수님과 전혀 관계없는 상태에서 사랑이라는 계명에 접근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킬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예수님을 제대로 믿는 사람은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이 세상에 대해 죽은 자입니다. 내가 누구냐는 질문에 대해, 엄마이고 아빠이고 직장인이고 목사이고 장로이고 권사라는 생각이 든다면 진실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내가 대통령이든 장관이든 공무원이든 택배원이든 요리사든 어떤 직업과 신분과 지위를 갖고 있든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십자가에서 죽은 자’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자아의식이야말로 예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이 죽은 자의 자아의식이 없다면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라는 계명은 이 세상에 대해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이 유지되는 나에게 주어진 계명입니다. 다만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세상에 대해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가질 때 우리의 마음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 보좌 우편까지 이르러 하나님과 사귐을 이루게 됩니다. 나는 세상에 대해 죽은 자이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 대해 살아있는 자입니다. 내 마음이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과 사귀면서 기쁨과 만족을 하나님에게서 찾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은 이 세상에서 몸으로 만나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반면 내가 세상에 대해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이 없으면 마음이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 보좌 우편에 머물며 하나님과 사귐을 이룰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엄연한 사실들을 제쳐두고 내가 누군지도 모른 채 살아갑니다. 예수님을 믿음이 무엇인지 모른 채 사랑이라는 계명을 마주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에서는 사랑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세상에 대해 죽고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과 사귐을 이룬 자들에게 주신 계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이루어지고 있는 자들이 할 수 있는 사랑의 최대치가 무엇일까요?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죽은 사람이 세상에서 만나는 사람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내가 만나는 사람에게 적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사랑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상황보다 내게 더 주어져 있는 것들을 하나님께서 재료로 쓰시도록 내어놓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사람에게 집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살아있는 몸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돈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나는 죽었으니 내가 만나는 사람은 하나님이 상대하시게 됩니다. 그럴 때 나는 내게 주어져 있는 것들을 하나님께서 재료로 쓰시도록 내어놓게 됩니다. 이것이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던 사랑 재료 재고 목록 만들기의 내용이었습니다.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힌 상황보다 더 주어져 있는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내놓으면 심지어 내 몸조차도 하나님이 사랑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6장 31~32절에서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라고 말씀하셨던 바와 같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몸을 먹이시고 입히셔서 이 세상에 내보내시면 나의 몸을 만나는 사람들도 내게 주어져 있는 것들을 통해 하나님과 관계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물질, 건강, 시간, 능력을 비롯한 모든 것을 재료로 해서 마주하는 사람과 관계해 나가십니다. 이처럼 나를 통해 내가 만나는 사람과 관계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이 사랑입니다.

나는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죽은 자이며 마음은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과 사귐을 갖는 자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형제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십자가에서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기준으로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상황보다 더 주어져 있는 모든 것들을 하나님이 나를 만나는 사람을 위하여 쓰실 수 있는 사랑 재료로 내놓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보다 더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다만 여기에 우리의 두려움이 생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정말로 내게 있는 것들을 다른 사람을 위해 다 사용하시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두려움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두려워할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막 사용하시든, 잘 사용하시든, 부드럽게 사용하시든, 거칠게 사용하시든 그것은 하나님의 결정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세상에 대해 죽는 것이고 마음은 하늘로 올라가 기쁨과 만족을 하나님에게서만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실이라면 십자가에 못 박힌 상황보다 더 주어져 있는 것들을 하나님 사랑의 재료로 내놓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의 최대치는 십자가에서 못 박힌 상황보다 더 주어져 있는 것들을 하나님이 나를 통해 사람을 상대하실 때 쓰실 수 있는 재료로 내놓는 것뿐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형제 사랑과 이웃 사랑의 내용입니다. 실제로 무엇인가를 관계하여 주시거나, 행하시는 모든 일은 하나님이 스스로 하실 일입니다. 이 사랑 재료 재고 목록을 만드는 일이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까지 우리는 사랑과 관계된 모든 진리를 제거하고 예수를 믿는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은 다음에 가장 좋은 일이 있다면 지금 당장 죽는 것입니다. 물론 육체의 죽음을 두려워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은 후에 실제로 죽는 순간이 찾아온다면 ‘내가 정말 잘 죽었구나!’라고 느끼게 될 것입니다. 진실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이 유일한 기쁨이고 만족이시라면 이 세상에서 오래 살기를 바랄 수는 없습니다. 지금 죽는 것이 우리에게 가장 유익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려두시는 이유는 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내가 만나는 사람들을 관계하실 일만 남아있습니다. 그때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힌 상황보다 더 주어져 있는 모든 것들을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재료로 내놓게 하시려고 살려두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 가운데 나를 참여시키고자 하심입니다.

이렇게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힌 상황보다 더 주어져 있는 것들을 하나님의 사랑의 재료로 다 내어놓게 되면 특이한 일이 벌어집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과 하나가 됩니다. ‘초록은 동색’이라는 속담처럼 내가 십자가로 사랑 재료 재고 목록을 만들 때 하나님과 같은 처지에서 한편이 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사위일체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있는 피조물에게서 기쁨과 만족을 찾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삼위일체 하나님이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의 기쁨과 만족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이 세상 사람들에게 진정한 유익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삼위 하나님께서는 서로 하나가 되시는 가운데 서로를 채우고 계시기 때문에 이 세상 사람들을 통해 채워야 할 공백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 대한 관계에서 삼위일체 하나님과 같은 입장과 처지를 보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세상에 대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해 죽었다는 것은 더 이상 세상에서 기쁨과 만족을 찾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삼위 하나님께서 일체되심 가운데 서로를 채우심과 마찬가지로 나도 주님 안에 들어가서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으로 채워지기를 소망하고 삼위일체 되심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세상을 대하는 입장과 처지가 하나님과 같아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에서는 초록이 동색이듯이 세상을 대할 때 언제나 삼위일체 하나님과 한편이 됩니다.

이제까지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부를 때 언제나 몸과 가까운 세상과 한편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 대상은 배우자나 자녀나 부모 같은 가족일 수도 있으며, 심지어 나라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 우리나라에 은혜를 베푸셔서 앞날이 평탄하게 하시며 위정자들에게 지혜를 주셔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정치를 잘할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라는 기도는 우리에게 어색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마음이 세상의 대상들과 한편이 된 상태에서는 하나님과는 다른 편입니다. 우리 편 바깥에 계신 하나님을 찾았던 셈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 한편이 될 수 있을까요? 이 세상을 대하는 입장이 같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조금이라도 만족 거리를 찾고 조금이라도 ‘이렇게 됐으면 좋겠다, 저렇게 됐으면 좋겠다.’라는 소원이 생긴다면 이미 하나님과 구별되는 경계색을 띤 것입니다. 하나님과 완전히 분리된 채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로서 십자가에 못 박힌 상황보다 더 주어져 있는 모든 것은 사랑을 위한 재료들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상황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육체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인간관계 등에서 아무리 힘들더라도 더 주어진 것이 없는 사람은 세상에 없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상황은 밑바닥 중의 밑바닥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께 주어진 것이라고는 살아있는 몸 하나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몸 하나를 하나님께서 마음대로 세상을 사랑하시기 위한 재료로 내놓으셨습니다. 그 결과 십자가 사건이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내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초록이 동색이듯이 하나님과 한편이 되어 보호색을 띠고 하나님을 배경으로 구분이 안 되는 상태가 되는 것이 사랑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사랑의 최대치는 십자가에 못 박힌 상황보다 더 주어진 것들을 하나님 사랑의 재료로 온전히 내놓는 것뿐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이 분명하다면 이것은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과 같은 입장과 같은 편이 되고, 이 세상을 대할 때 하나님과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같은 처지가 되면 내가 예수님 안에 들어있다는 굳건한 확신이 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고 죄인임을 회개해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죄 사함 받았음을 인정하면 구원받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것이 정말로 구원의 확신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내가 예수님 안에 들어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상태입니다. 예수님 안에 들어있다면 세상에 대해 죽은 것입니다. 세상에 대해 죽었는데 하나님께서 아직도 내 몸을 살려두고 계신 이유는 몸 때문에 주어진 모든 것들을 사랑의 재료로 내놓게 하시기 위함임을 알게 됩니다. 그렇게 사랑의 재료로 내놓을 때 하나님께서 내 몸을 움직이시는 사랑이 표현됩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예수님 안에 들어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다른 길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십자가에서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을 가지고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과 사귀는 중에 이 세상에서는 사랑 재료 재고 목록을 만들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의해서 진실한 사랑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러한 결과나 나타나기 전까지는 구원받았다는 확신은 불가능합니다. 사랑의 단계가 없는 구원의 확신은 전부 자기기만에 불과합니다. 사랑의 단계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구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이것이 중요하기에 사도 요한은 힘주어 사랑하기를 요청합니다.

 

한편 본문을 보면 다소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습니다. 20절을 보면 “이는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이건 내가 잘못했다. 이건 사랑이 아니다. 내가 십자가에서 내려와서 행한 말과 행동이다.’라고 반성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다만 그렇다고 할지라도 내 중심에 죽은 자의 자아의식이 존재하는 한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는 몸이 있기 때문에 주어진 모든 것들을 재료로 삼아 하나님이 사랑하실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함이다.’라는 근본정신은 유지됩니다. 이러한 근본정신이 있다면 순간순간 잘못하여 책망할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구원의 확신은 흔들리지 않으리라는 말씀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24절을 보면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대로 우리는 주안에 거해야 하며, 주 안에 거하는 것은 사랑을 통해 확신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기 위하여 산다는 의식이 진실하다면 순간적인 잘못을 저질렀더라도 주안에 거한다는 확신은 흔들리지 않으리라는 것입니다. 내 마음보다 더 크신 하나님께서 나의 중심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또 앞선 21절을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라고 하였습니다. 담대함이 강조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가정이든 직장이든 삶이 이루어지는 환경에서 생각을 하며 살아갑니다. 예수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죽은 자로서 마음은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과 사귀고 있는 중에, 십자가에서 죽은 상태보다 더 주어져 있는 것을 사랑의 재료로 내놓는 마음가짐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때 내게서 떠오르는 모든 생각은 하나님 아버지의 생각이라고 믿을 수 있는 담대함이 생겨납니다. 벌레 같은 내가 하는 생각이 하나님 아버지의 생각과 다를 바가 없음을 확신할 수 있는 담대함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 담대함은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죽은 자로서 마음은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과 사귐을 유지하며, 십자가에 못 박힌 상황보다 더 주어져 있는 것을 다 사랑의 재료로 내놓는 마음을 유지해 나가는 동안에 생겨납니다. 그 중심에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이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자이기에 위로는 하나님과 사귐이 있고, 십자가에서 죽은 자이기에 아래로는 사랑 재료 재고 목록을 만드는 마음가짐으로 세상을 접하게 됩니다. 이 상황이 흔들림 없이 유지된다면 내가 하는 생각이 하나님 아버지의 생각이라고 믿어도 될 정도의 담대함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벌레 같은 내가 어떻게 하나님과 같은 생각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십자가에서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이 유지될 때 그 일이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면 어차피 십자가에서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가져야만 합니다. 그것을 이 세상에 적용할 때 ‘내게 주어진 모든 것은 하나님이 쓰세요. 하나님께서 나를 만나는 사람을 상대하시기 위하여 필요한 대로 쓰세요.’라는 마음가짐을 유지해 나갈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절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러한 고백을 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모든 것을 가져가셔서 노숙자로 만들지는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아버지를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여러분을 안 좋게 만들고 여러분이 만나는 사람들만 좋게 만드시려고 사랑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행여 스데반 집사님처럼 돌에 맞아 죽는 상황이 벌어져도 우리의 삶과 인생에 필요하기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절대로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믿고 ‘아버지! 십자가에 못 박힌 상황보다 더 주어져 있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 아버지가 두신 것입니다. 제가 만나는 사람을 위해 필요한 대로 다 재료로 쓰세요. 아무 염려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다 하세요.’라고 고백하며 아버지 앞에 내어드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물론 십자가에서 진실로 죽었다면 아버지께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자발성을 원하신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네가 십자가에서 죽었다더니 자발적으로 몸에 주어진 모든 것을 내놓을 수 있느냐?’라고 말씀하실 때 ‘내놓을 수 있습니다. 저는 주님과 함께 죽었기 때문입니다. 저의 기쁨과 만족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서 찾겠습니다. 몸까지도 아버지의 사랑 재료로 다 쓰시길 바랍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는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한 마음가짐에는 기가 막히는 일이 일어납니다. 이 세상을 향해 마음의 소원이 생길 때 그것은 내 마음의 기쁨과 만족을 위한 일이 되지 않습니다. 내 마음은 하늘에 올라가 아버지만을 소원하는 상태이기에, 세상에 대해서는 사랑 재료 재고 목록을 만드는 마음가짐을 갖게 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생기는 세상에 대한 소원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다 들어주십니다. 그것은 담대함이 의미하는 대로 아버지의 생각과 같기 때문입니다.

 

사랑이라는 단계에서 세상을 향해 삼위일체 하나님을 배경으로 보호색을 띠게 됩니다. 나와 삼위일체 하나님이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동일해집니다. 나에게서 떠오르는 모든 생각과 소원이 이 세상을 향해 갖고 계신 하나님의 뜻과 계획과 일치합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무엇을 이루고 싶어 할지라도 내 마음의 기쁨과 만족을 위한 일이 되지 않습니다. 내 마음의 기쁨과 만족은 계속 하늘에서 하나님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상태에서는 바라는 일이 다 이루어지게 됩니다. 사도 요한은 바로 이런 신비가 사랑함 속에 들어있음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사람들은 죽어도 알 수 없는 사랑함 속에 담겨있는 신비한 은혜와 차원이 다른 행복을 내 것으로 챙길 수 있도록 붙잡아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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