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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1,2,3 유다서-2

녹취문: 천국과 땅의 낙차가 만드는 내리사랑_태승철 (요일 4:1~21)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3.11.16|조회수69 목록 댓글 0

 

www.everyday01.com -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천국과 땅의 낙차가 만드는 내리사랑>의 줄거리 :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 있는 사람이 땅에서 사는 사람을 만날 때 나오는 내리사랑이 형제 사랑이다. 천국과 땅의 낙차가 만들어 질 수 없으면 사랑도 없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의미는 사람에 대한 관계 안에서 가지시는 하나님의 속성으로 천국 보좌에 계시는 분으로서 땅에 있는 사람에게서 채움을 얻으실 일이 없다는 뜻이다. 이런 하나님과 사귐을 가지는 모든 사람도 역시 사랑이다. 왜냐면 그들의 마음이 하늘에 있기 때문이다.

 

 

천국과 땅의 낙차가 만드는 내리사랑

 

(요한1서 4:1~21)

 

1.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2.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3.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지금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12.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13.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내리사랑은 손윗사람이 손아랫사람을 사랑함이고, 치사랑은 반대로 손아랫사람이 손윗사람을 사랑함입니다. 이 속담은 주로 부모와 자녀 관계에서 사용됩니다. 물론 부모가 너무 철이 안 들면 자녀들이 본의 아니게 일찍 철이 들어 부모를 돌보는 경우도 왕왕 있겠습니다만, 위아래 구분이 분명하다면 내리사랑은 모든 관계에 적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본문에서도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그러면서 특별히 내리사랑에 대한 말씀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분명히 인격적 현상입니다. 그런데 인격적 현상인 사랑은 물리적 이유를 바탕에 깔고 있습니다.

 

제가 미군 부대에서 복무하던 때의 일입니다. 미국 독립기념일 파티가 열렸습니다. 넓은 잔디밭에서 파티를 하는데 한쪽에는 헬리콥터가 있었습니다. 파티 중에 사회자가 주의를 집중시키고는 한쪽을 보게 했는데, 그곳에는 낙하산을 착용한 특수부대원 한 명이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 옆에는 석회 가루로 직경 2m 정도의 원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특수부대원이 헬리콥터를 타고 하늘 높이 올라간 후에 스카이다이빙을 해서 원 안에 착륙하는 시범을 보이는 행사였던 것입니다.

소개가 끝난 뒤 특수부대원은 악수를 하고 헬리콥터에 탑승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헬리콥터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가운데 헬리콥터는 선회하며 비행을 시작했고 더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이 올라갑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자 하늘에서 작은 점 하나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특수부대원이 스카이다이빙을 해서 떨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점을 보고 있을 때 손끝과 발끝에서 각종 색깔의 연기가 뿜어져 나옵니다. 그러더니 사람의 형체가 보일 무렵 낙하산이 펴지고 선회하며 땅으로 내려오다가 정확하게 원 안에 착지했습니다.

이 광경이 저에게는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스카이다이빙의 대전제는 하늘에서 땅으로 다이빙하기 위한 높낮이의 차이입니다. 한마디로 낙차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사랑이 이와 닮았습니다. 사랑은 인격적 현상임에도 불구하고 물리적 배경이라는 낙차를 요구합니다. 좀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를 떠올려 봅니다. 미군 부대 파티에 있던 사람들이 하늘로 올라가는 헬리콥터에서 눈을 떼지 못했던 것처럼, 제자들은 승천하시는 예수님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헬리콥터가 시야에서 사라진 후에도 계속해서 하늘을 바라보는 이유는 스카이다이버가 내려오기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제자들의 심정도 이와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이해로부터 예수님의 승천을 목격한 제자들이 이렇게까지 재림을 강조했던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이렇게 올라가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심으로써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마음도 하늘로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인격 안에서는 이상하고 신비한 일이 벌어집니다. 몸은 땅에 있는데 마음은 하늘로 올라갑니다. 인격 안에서 하늘과 땅이라는 높낮이의 낙차가 생깁니다. 사도 요한은 이 낙차가 끊임없이 유지되는 가운데 이 땅에서 우리가 만나는 형제를 사랑하게 됨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사랑은 내 인격 안에서 몸과 마음이 하늘과 땅으로 벌어지는 높낮이의 낙차가 생겨남으로써 나타나는 일입니다. 이 낙차가 만들어지지 않으면 사랑은 불가능합니다.

 

말씀드렸듯이 본문에서는 특별히 내리사랑이 강조됩니다. 9절을 보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같은 의미의 말씀이 다른 표현으로 10절에서 반복됩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쉽게 말해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땅으로 스카이다이빙 시키셨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주신 내리사랑을 받은 우리 역시 다른 사람을 내리사랑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은 내리사랑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몸과 마음으로 사람을 만납니다. 이때 우리의 인격이 만나는 사람과 하늘과 땅의 높낮이의 낙차를 이루지 못한다면 내리사랑으로써의 형제사랑은 나타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신 내리사랑을 받은 사람이란 제자들이 눈으로 목격한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자기 안으로 받아들입니다. 거꾸로 말하자면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내 안에 받아들인 사람만이 독생자로 표현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입니다.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받아들임이란 곧 예수님과 연합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헬리콥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듯이 우리 마음은 예수님을 타고 하늘로 올라갑니다. 그리고 하늘로 올라간 마음은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하나가 되는 사귐을 갖게 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읽지 않은 14~15절을 보면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언하노니 /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독생자의 자리로 끌고 가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사귀는 것처럼 내 마음도 하나님과 사귈 수 있도록 허락하십니다. 또 이어서 16절을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증언을 받아들여서 예수님이라는 헬리콥터를 타고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과 사귐으로 하나님께서 내 안에 들어오시게 되면 그 효과가 나타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속성인 사랑이 내게 전이됩니다. 하나님이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셔서 내리사랑을 하신 것처럼, 나도 내가 만나는 사람을 사랑하게 됩니다.

이처럼 사랑은 내 인격 안에서 하늘과 땅의 낙차가 만들어지지 않으면 나타날 수 없습니다. 사랑이 나타나지 않으면 사랑이신 하나님과 사귐이 없다는 것이며, 하나님이 내 안에 거하지 않으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없으면 구원도 없습니다. 우리가 사랑을 위한 낙차를 만들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어 낙차가 생기면 반드시 내리사랑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사도 요한은 사랑이 먼저냐 믿음이 먼저냐는 질문에는 차별을 두지 않습니다. 사랑과 믿음은 거의 동일하게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읽지 않은 20절을 보면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만 보면 보이는 사람을 사랑해야 하나님도 사랑할 수 있다는 말처럼 들립니다. 다만 우리가 앞서 살펴본 내용들을 염두에 두자면 반대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어야 형제를 사랑함도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 요한 자신이 직접 경험한 일이기도 하였습니다.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 연쇄 과정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형제를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제자들끼리 누가 더 높은가를 두고 다투었고 사도 요한의 어머니는 형제인 요한과 야고보를 예수님의 좌편과 우편에 앉게 해달라고 부탁하기까지 했습니다. 사도 요한을 포함한 제자들은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간 뒤에야 비로소 형제 사랑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도 요한이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라고 말한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반드시 사람을 사랑하는 것과 같이 나타날 수밖에 없음을 염두에 두고 거의 동일하게 일어나는 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한편 8절과 16절을 보면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는 표현이 반복하여 등장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것일까요? 우리 또한 이러한 말씀을 너무나 많이 들어왔고 잘 알고 있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셨고 우리가 그분으로 인해 구원을 받았다는 것일까요? 맞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이시기에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다만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사랑이라는 속성에 담긴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천국 보좌에 계신 분으로서 땅에 있는 사람을 관계하십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땅에 있는 사람에게서 무엇인가를 얻어 채우고자 하지 않으셨습니다. 바로 이러한 상태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속성이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높은 천국 보좌에 계시기에 이 땅에 있는 사람을 향하여 사랑이십니다. 천국에 계신 분이 땅에 있는 존재를 만날 때 관계하는 방식은 다 사랑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천국과 땅이라는 낙차가 사랑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천국이 어떤 곳인지 예수님의 변화산 사건을 통해 엿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천국에서의 모습으로 드러나자 이 세상을 완전히 잊어버립니다. 예수님의 변화하신 모습을 보기 전까지 베드로의 마음에는 이 세상의 좋음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천국에서의 모습으로 변화하신 예수님을 보자마자 그렇게 좋아하고 열망하던 세상일들은 망각 속으로 사라져버립니다. 베드로에게는 세상에서 더 이상 아무것도 좋게 여겨지는 것이 없었습니다. 이로부터 천국에 계신 분들이 땅에 있는 존재를 관계할 때 어떤 태도를 취하게 되는가에 대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천국에 계신 분들은 땅에 있는 존재를 통해서 무엇인가를 얻어서 유익을 추구하고 채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천국에 있다면 채움을 이루려는 의도가 생길 수 없습니다. 따라서 천국에 계신 분이 땅에 있는 사람을 관계할 때 나타나는 유일한 태도는 사랑입니다. 오직 땅에 있는 자들에게 유익이 될 것만을 생각하는 사랑이 표현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은 천국을 필요로 하지만 천국은 이 세상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필요 없는 세상과 관계하는 이유는 주시기 위함이고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있는 자들의 유익을 위해서 관계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사랑이심이라’는 말씀은 세상에 있는 우리 인간들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속성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이 없다면 하나님을 사랑이라고 말할 이유조차 없습니다.

물론 삼위 하나님 사이에도 사랑은 존재합니다. 마태복음 3장 17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라고 하셨던 바와 같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언급되는 사랑 또한 예수님이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셨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삼위 하나님 안에 존재하는 사랑은 영원 전부터 있던 것으로써 우리가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라고 말할 때의 사랑과는 내용이 다릅니다. 우리가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하늘과 땅의 낙차에서 오는 사랑이라면, 삼위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은 동등한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서로가 서로를 채우심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 예수님의 자리에서 가지게 되는 하나님과의 사귐은 낙차의 사랑이 아니라 동등한 사랑을 하게 하십니다. 같은 레벨에서 사랑을 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럴 수 있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품고 헬리콥터처럼 하늘로 올라가셨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 보좌 우편이란 하나님과 같은 평면상이고 하나님과 같은 높이입니다. 바로 이 보좌 우편에서 영원 전부터 있었던 삼위 하나님의 사랑에 우리를 동참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우리 안으로 하나님이 들어오시고 내가 하나님 안으로 받아들여지는 하나가 되는 사랑을 이룰 수 있게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땅에 있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헬리콥터가 되셔서 우리 마음을 품고 하늘로 올라가십니다. 이로부터 우리는 영원 전부터 계셨던 삼위 하나님의 사랑에 동참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엄청난 이유는 예수님 안에 들어있는 우리 마음을 삼위 하나님과 같은 격으로 끌어올려 주시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과 사위일체가 되도록 끌어올려 은혜를 받고 구원을 얻은 사람의 인격에서는 마음은 천국에 있고 몸은 땅에 있으므로 격차가 만들어지게 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을 만날 때 사랑이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천국은 세상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천국은 세상을 통해 유익을 추구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유익을 추구할 필요가 없는 세상을 만드신 이유는 유익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 하나님의 세계 속으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끌어올리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간 우리 마음은 이 땅에 남아있는 몸을 통하여 유익을 추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우리를 살려두신 이유는 몸으로 만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게 하심입니다. 쉽게 말해 내리사랑을 위해 우리를 살려두고 계신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을 보면 참 엄청난 내용이 가득합니다. 17절을 보면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공생애 때 어떻게 사셨는지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우리의 삶 또한 똑같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또 하나의 예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공생애 때 예수님께서 나사렛에서 사셨던 것처럼, 실제로 내가 가정이나 직장에서 예수님과 같아야 함을 의미합니다. 즉 예수를 믿는 것은 예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마음은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과 같은 레벨에서 삼위일체 되심에 참여합니다. 하나님과 사귐을 갖는다는 표현 자체가 동등한 레벨임을 가리킵니다. 물론 이러한 내용은 우리가 감히 말하기도 두려운 내용입니다. 벌레 같은 우리가 하나님과 동등한 입장에서 삼위 하나님의 관계에 참여한다는 것은 은혜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 은혜를 실제로 받은 사람은 몸 둘 바를 몰라야 정상입니다. 하늘에서만 동등한 레벨로 사귐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땅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라는 말씀은 예수님처럼 되라는 의미가 아니라 제대로 믿으면 예수님처럼 된다는 의미입니다.

 

문제는 제대로 믿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사도 요한은 이와 관련하여 적그리스도를 또 언급합니다. 적그리스도의 문제는 내리사랑을 원천적으로 막는 것입니다. 내리사랑을 막는다는 것은 내 마음이 예수님의 헬리콥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과 동등한 레벨에서 일체되심에 참여할 수 없게 됨을 의미합니다. 일체되심에 참여하여 사귐이 없다면 몸이 남아있는 이 땅에서 내리사랑도 불가능하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얻게 되는 은혜의 전체 구조는 완전히 와해됩니다.

우리에게서 사랑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내리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리사랑이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는 높낮이의 낙차가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낙차가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복음이 왜곡되게 받아들여졌고 뒤틀려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복음 속에 불순물이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다시 14절을 보면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언하노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증언에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에 대한 증언이 있으며, 못 자국 난 몸으로 부활하신 것에 대한 증언이 있고, 그 몸으로 승천하신 것에 대한 증언이 있습니다. 그러나 적그리스도는 예수님이 육체로 이 땅에 오셨음 자체를 부인합니다. 2장에서 말씀드렸습니다만 예수님께서 육체로 오셨음을 부인함으로써 나타나는 일은 곧 승천에 대한 부인입니다. 이를 통해 헬리콥터가 하늘로 올라가듯 예수님께서 승천하셨음을 잘라내고 우리 마음이 하늘로 올라갈 수 없게 합니다. 적그리스도는 우리의 마음이 지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올라가 삼위 하나님과 사귐을 가져야 된다는 사실을 잘라냅니다. 이렇게 잘못된 믿음을 받아들인다면 인격에서 하늘과 땅의 낙차가 생기지 않고 내리사랑도 나타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인격은 하늘과 땅이라는 낙차가 나타나는 공간이어야 합니다. 한 사람의 인격이라 함은 몸과 영을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내 인격 속에서 땅에 있는 육체와 하늘에 있는 마음이 낙차를 만들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스카이다이빙과 같은 하나님의 사랑이 이 땅에 내려오면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우리 마음이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은 하늘에서 내려오면 안 됩니다. 우리 마음이 하늘로 올라감으로써 몸으로 만나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 오직 내리사랑으로써만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이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과 동등한 레벨에서 하나님과 사귀는 대신 이 땅에서 다른 사람과 동등하게 머물고자 한다면 거기에는 사랑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낙차가 없는 동등한 관계란 사냥의 대상이 되어버립니다. 마음이 땅에 있는 한 땅에서 채움 거리를 찾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한다고 해도 실제로는 자녀에 대한 사냥입니다. 부부간에 사랑한다고 해도 실제로는 배우자에 대한 사냥입니다. 가난한 나라에 가서 봉사한다고 해도 실제로는 가난한 사람들을 이용하여 내 마음을 채우려는 사냥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오직 천국과 땅이라는 천지간의 낙차가 한 인격 안에서 만들어질 때 이루어집니다. 이 낙차는 육체로 오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따르며,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인정할 때, 보좌 우편에서 하나님과의 사귐이 이루어짐을 통해 만들어집니다. 반대로 마음이 땅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인정하면서도 낙차는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마음이 세상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기에는 세상에 좋은 것이 너무나 많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매여 있기에 세상을 떠날 생각을 못합니다. 이렇게 낙차가 만들어지지 않는 인격 안에서는 누구를 만나도 사냥감으로 생각할 뿐 그 사람을 위하는 내리사랑은 생길 수 없습니다. 사랑은 오직 내리사랑으로써만 가능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 인격 안에는 언제나 십자가에서 보좌 우편까지 이르는 높이의 낙차가 유지될 수 있도록 은혜를 내려주시옵소서. 그러기 위하여 오늘도 십자가 예수님과 함께 내가 죽었다는 자아의식이 꺼지지 않게 하시며, 그럼으로써 마음이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과의 사귐이 지속되는 하루가 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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