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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하나님이 보석처럼 탐나면 흰옷을 입자>의 줄거리 :
교회를 사는 교인이라면 누구에게나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보이시는 중에 첫 번째로 보여주시는 것이 보좌가 놓인 천국에 내 마음이 들어간 상황입니다. 마음이 마주 대하는 보좌의 하나님은 다양한 보석 빛과 무지갯빛으로 묘사되십니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을 마주 대하는 나는 흰옷을 입고 금관을 쓴 한 사람의 장로로 표현됩니다. 흰옷을 입은 사람에게 천국 보좌는 보석함입니다.
하나님이 보석처럼 탐나면 흰옷을 입자
(요한계시록 4:1~4)
1.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 소리 같은 그 음성이 이르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2. 내가 곧 성령에 감동되었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3.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4. 또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쓰고 앉았더라
일곱 교회에 주시는 말씀은 당시의 일곱 교회에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지구 위에 존재하게 되는 모든 교회의 교인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서기 100년쯤에 살던 교인들부터 중세시대를 살던 교인들을 거쳐 요한계시록이 쓰이고 2,000년이 지난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의미 있는 말씀입니다. 이 일곱 교회에 주신 말씀에서 교회로 번역된 에클레시아(ἐκκλησία)는 ‘밖에서 부르시는 부름을 받아 마음이 이 세상을 떠나 천국으로 가는 것’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에클레시아가 의미하는 대로 우리의 마음이 부름을 받았다면 이 세상을 떠나 예수님과 함께 날마다 하늘로 가는 삶을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교인이고 교회를 사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바로 이렇게 교회를 사는 사람들에게 ‘마땅히 일어날 일들’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줍니다. ‘마땅히 일어날 일들’이란 요한계시록이 쓰이고 곧 보게 되었던 일곱 교회의 교인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마땅히 일어날 일들이기도 합니다. 계시록은 에클레시아의 의미대로 밖에서 부르시는 부름을 따라 예수님과 함께 세상을 떠나 천국으로 가는 자들에게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보여주는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4절에서는 그중에서도 첫 번째로 마땅히 일어날 일들이 무엇인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천국 보좌 앞으로 이끌림을 받은 상태에서 계시록을 기록하였습니다. 그리고 에클레시아가 의미하는 대로 교인으로서 부름을 받아 세상 밖으로 나가야만 하는 이유를 제시합니다. 그것이 본문이 묘사하는 상황을 통해 잘 드러납니다. 우리의 마음은 본문이 묘사하는 대로 보좌 앞에 이르기 위하여 교인으로서 부름을 받고 세상을 빠져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부름을 받아 하늘로 올라가게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땅히 일어날 일들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제대로 믿었고, 에클레시아의 의미대로 부름을 받아 세상 밖으로 나가 하늘로 이르는 교회를 살았다면, 마땅히 일어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의 묘사를 보면서 과연 이러한 일이 내게도 일어나고 있는가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2절을 보면 “내가 곧 성령에 감동되었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라고 묘사가 시작됩니다. 이 말씀은 사도 요한의 마음이 성령 안에 들어간 상태임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세상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육체에 감동된 채 살아갑니다. 마음이 육체 안에 들어가 있는 상태에서 마음은 육체의 오감을 통해 접하는 것들에 반응합니다. 한편 성령에 감동됨이란 마음이 육체 대신 성령 안에 들어간 상태입니다. 마음이 성령을 통해 보게 되고, 듣게 되고, 만지게 되는 천국 상황에 대해 반응하게 됩니다. 사도 요한은 그 마음의 느낌을 인간 세상의 언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3절을 보면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천국과 하나님의 모습이 다양한 보석으로 묘사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에는 실제로 보석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보석이란 결국 광물이고 탄소의 집합체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물질로서의 보석이 4차원 천국에 존재할 수는 없기에 하나님께서 벽옥이나 홍보석 같은 모습일 수는 없습니다. 보좌에 무지개가 둘렀다고 했는데 무지개 또한 결국 대기 중의 수증기에 햇빛이 비치며 나타나는 산란 현상에 불과합니다. 이 또한 물질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이기에 4차원 천국에 실제로 무지개가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묘사에는 분명한 의미가 있습니다.
천국과 보좌에 계신 하나님은 엄연한 사실이지만 우리 육체의 감각으로 보거나 듣거나 만질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앞서 말씀대로 육체에 감동되어 살아가는 처지에서는 오감으로 포착되지 않는 대상을 마음으로 느낄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성령에 감동되었을 때는 육체로는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만질 수도 없는 하나님을 마음으로 보고 듣고 느끼게 됩니다. 사도 요한의 마음이 성령을 통하여 이 세상이 아닌 4차원 세계에 있는 하나님께 가닿은 느낌을 이 세상의 언어로 표현하고자 합니다. 그 일환으로 보석과 무지개를 비유로 삼은 것입니다.
이러한 계시 속에서 하필이면 하나님께서 벽옥과 홍보석 같고 무지개가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다고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말씀드렸듯이 사도 요한은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만난 느낌을 인간 세상의 언어로 보석과 무지개로 표현하였습니다. 사도 요한의 입장에서는 그 외의 다른 방식으로 표현할 길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인간 세상에서 보석이 갖는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인간 세상에서 보석의 의미를 비유적으로 갖고 오면 보석은 작지만 가장 비싸고, 가장 고급스럽고, 가장 아름다운 좋음의 대명사입니다. 사도 요한은 마음이 성령을 통해 아버지께 가닿아서 받는 느낌을 이러한 보석의 특성을 통해 표현했던 것입니다. 이 세상 언어 안에서 보석은 특별히 여인들에게 최고의 좋음이고, 최고의 고급스러움이며, 최고의 아름다움이며, 최고의 소중함으로 통합니다. 보석은 비싸기에 실제로 소유해봤자 기껏해야 한두 개입니다. 그 보석은 주머니에 넣으면 아무도 모를 정도로 작습니다. 그런데 여인들은 그 보석을 장롱 깊은 곳에 넣어두고 때때로 꺼내보며 기쁨과 위로를 받습니다. 보석은 작지만, 그것이 주는 좋음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보는 느낌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사도 요한이 하나님을 보고 듣고 만지는 느낌을 보석으로 표현한 것은, 쉽게 말하면 여인들이 아름답게 가공된 다이아몬드를 볼 때 탐내는 마음을 갖는 것과 같습니다. 하늘에 올라가서 성령을 통하여 보이지도 들리지도 만질 수도 없는 하나님을 보고 듣고 만질 때, 여인들이 생애 처음으로 본 아름다운 보석을 탐내는 상황과 똑같은 마음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결혼 적령기의 아가씨가 취직을 했는데 같은 부서에 이제까지 만나본 적 없는 이상형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이 마치 보석처럼 여겨져서 탐납니다. 또 10년간 공무원시험 공부를 한 사람에게는 합격증이 마치 보석처럼 여겨질 것입니다. 이렇게 상사병이 날 정도의 마음이 아니라면 하나님을 만났을 때 느끼는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사도 요한이 하나님과 그 보좌를 보석에 비유한 점은 무척 독특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보석은 남자보다는 여인들에게 큰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인들에게 보석은 늘 탐나는 물건이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성령의 계시를 통해 하나님을 뵙게 되었고 보석을 탐내듯이 하나님을 탐내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직장에서 이상형을 발견했을 때 절대로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처럼 하나님이 바로 그러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한편 사도 요한은 하나님을 하나의 보석이 아닌 다양한 보석으로 묘사합니다. 다시 3절을 보면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나와 관계하는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내게 강한 의미가 있는 하나님의 속성으로 유일한 있음과 유일한 좋음과 유일한 주권자 되신다는 사실을 호소하고 믿음을 요구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믿음이 아니라 직접 보았고 하나님의 유일한 있음과 좋음과 주권자 되심을 내게로 끌어당겨서 소유해야만 하는 진짜 탐나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하나님께 탐심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쓰는 언어 안에서 하나님에 대해 가질 수 있는 마음이란 보석을 향한 여인들의 탐심 외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중에서도 두드러지게 탐나는 하나님의 속성이란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주권자 되심입니다. 하나님의 있음이란 어떻게 하든지 내 인격 안으로 끌어당기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탐나는 벽옥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좋음이란 마음 채움을 위해서 너무나 탐나는 홍보석과 같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자 되심은 늘 삶에서 적용할 수밖에 없는 내 것으로 끌어당기고 싶은 녹보석과 같습니다.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속성을 놓친다면 너무나 아깝고 억울해서 견딜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보좌가 무지갯빛으로 묘사되었습니다. 무지개에는 일곱 가지 빛이 모여 있습니다. 여기에는 모든 아름다운 보석이 총망라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벽옥과 홍보석과 녹보석을 이야기해도 하나님의 보좌에서 풍기는 기운이 내 마음에 닿을 때는 어떤 보석으로도 다 표현할 수 없는 빛깔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무지개는 하나님께서 노아 홍수가 끝난 뒤에 앞으로는 다시 홍수로 심판하시지 않겠다는 약속의 표징이었습니다. 이러한 무지갯빛은 아름다움의 완성이고, 좋음의 완성이고, 더 이상 어떤 것도 바랄 마음이 생기지 않는 충족함의 상태를 표현합니다. 충족하여 어떤 것에 대해서도 바람이나 간구가 생기지 않는 상태를 말합니다.
사도 요한은 일곱 가지 무지갯빛이 보좌에서 퍼져 나오는 가운데 서서, 벽옥과 홍보석을 이야기한 후에 무지개에 이어 녹보석을 이야기합니다. 이는 곧 하나님의 있음과 하나님의 좋음이 내 것이 되면, 개인적으로 무지갯빛으로 상징되는 상황 속으로 들어가게 됨을 의미합니다. 무지개는 약속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무지갯빛이 나오는 보좌는 모든 약속이 성취된 상태로써 나를 위해서는 어떤 바람이나 간구도 생기지 않는 상태가 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갖는다는 것은 이처럼 표현할 수 있는 모든 좋음의 빛깔을 다 갖게 되는 것과 같다는 의미입니다.
이어서 4절을 보면 “또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쓰고 앉았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해석이 학자마다 판이합니다. ‘이십사 보좌’를 구약의 열두 지파와 신약의 열두 제자를 가리킨다는 해석이 있는가 하면, 구약의 이십사 반차의 제사장을 가리킨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혹은 이십사 명의 대선지자와 소선지자들을 가리킨다는 해석도 있으며, 천사장이라는 해석도 있고, 우주적 교회의 대표들을 가리킨다는 해석도 있으며, 유대인과 이방인 교회의 대표들을 가리킨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근거 없어 따질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성령 안에서 보좌에 계신 하나님 앞에 설 때 하나님은 정말 탐나는 보석처럼 여겨질 것이고, 하나님이 앉아 계신 보좌 자체가 보석함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이때 문제는 그렇게 탐나는 보석이신 하나님 앞에 있는 나는 누구냐는 것입니다. 저는 아내 앞에서 남편입니다. 자녀 앞에서 아버지입니다. 교인들 앞에서 목사입니다. 그렇다면 여인들의 심정으로 보석처럼 탐내야 하는 보좌에 계신 하나님 앞에서 저는 누구일까요? 사도 요한은 천국에 올라간 자신을 제삼자처럼 언급합니다. 세상의 모든 여인들이 탐낼 정도로 아름답고 소중하고 고급스럽고 최고로 좋은 보석이신 하나님 앞에 나는 흰 옷을 입고 금관을 쓴 이십사 장로와 같다는 것입니다.
장로는 백성의 대표입니다. 대표로 뽑혀서 아버지 보좌 옆에 앉아있다는 것은 아버지의 최측근이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십사라는 숫자가 아니라 아버지의 최측근이라는 위치입니다. 여기서 ‘이십사’라는 숫자는 완벽한 대표성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대하실 때는 모든 교인들의 대표로 대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최측근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흰 옷을 입고 금관을 써야 합니다. 흰 옷은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 아들의 신분으로써 세상에 물들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아들의 신분이 지켜지는 상태는 세상이 마음에 스며들지 않고 세상에 얼룩지지 않는 상태입니다. 삶의 환경과 조건이 안정되고 모든 것이 형통하게 여겨질 때조차도 그것이 마음에 스며들지 않아야 합니다. 지상낙원이라는 남태평양 섬에 가면 바닷물은 에메랄드 빛깔이고 기후는 온화하며 풍경과 환경이 기가 막힙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마음이 지상낙원에 물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곳에서도 지금 교회를 살아야 하고 마음은 지상낙원을 떠나 하나님께로 가야만 합니다. 아무리 안정되고 형통한 삶의 환경이 주어지더라도 물들면 안 되고 얼룩져서는 안 됩니다.
이처럼 흰 옷이 강조되는 이유는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빛을 다양하게 뿜어내는 보석 같은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흔히 배우 지망생이 처음으로 영화에 출연하면 은막에 데뷔한다고 합니다. 스크린이 하얀 은막인 이유는 영사기의 빛을 가장 잘 반사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스크린이 빨간색이라면 영사기에서 나오는 빨간빛은 전혀 구분되지 않을 것입니다. 스크린이 검은색이라면 영사기의 빛을 다 흡수해서 화면이 전혀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오직 스크린은 흰색이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필름에 담겨있는 모든 색깔을 온전히 반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흰 옷을 입어야 하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빛을 발산하는 보석 같은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보석을 가졌을 때처럼 하나님 있음을 좋게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내 마음이 세상에 물들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있음은 벽옥에 비유될 수 있는 푸른빛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 마음이 세상에 얼룩지고 세상이 스며들어서 물들었기에 하나님의 벽옥 같은 있음이 비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좋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좋음을 그렇게 믿으라고 말씀드려도 내 마음에 하나님의 좋음이 와닿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마음이 은막처럼 흰색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세상에 스며들어서 얼룩졌기에 하나님의 영롱한 홍보석의 빛깔이 온전히 살아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좋음에 대해 아무리 많은 말을 들어도 그 좋음을 느끼지 못합니다.
사데 교회나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해서 흰 옷이 강조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석 같은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보좌는 나의 보석함이 되어야 합니다. 보석의 좋음은 빛깔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석으로 상징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주권자 되심의 속성이 그만큼 탐나는 것임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지갯빛을 가지신 탐나는 보석과도 같습니다. 내 마음이 흰색이 아니라면 그 하나님의 아름다운 빛깔이 찬란하게 비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빛깔이 비칠 수 있기 위해서는 세상에 얼룩진 마음이 희게 정화돼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주님의 십자가 생활화의 필요성이 생깁니다.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에서 이 세상에 대해 죽었다는 자아의식이 견고하고 충만해서 세상에 대해 차가워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내 마음이 흰색을 띨 수 없습니다. 주님의 보혈로 세상의 얼룩이 다 빠져나가 흰색이 될 수 없다면 절대로 보석빛을 발하시는 하나님의 좋음이 내게서 느껴질 수 없습니다.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가 칭찬을 받았던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들은 환난과 궁핍에 처해있었고, 작은 능력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마음에 스며들지 않았고 이들의 마음은 은막 같은 흰색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은막이 영사기의 빛을 반사하듯이 보석 같은 하나님의 빛을 온전하게 드러낼 수 있었습니다. 서머나 교인들과 빌라델비아 교인들은 보석 같은 하나님의 맛을 알았던 것입니다.
세상의 여인들이 보석을 탐내듯이 우리는 하나님을 탐내야 합니다. 직장에서 이상형을 발견한 아가씨에게는 다른 남자는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탐내고 있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갖고 싶은 것이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바로 그런 분이 되셔야 합니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갖고 싶지 않을 정도로 탐내는 대상이어야 합니다.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십자가의 주님과 연합하여 하늘로 올라감을 의미합니다. 그럴 때 탐내는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내어주십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하나님의 좋음을 느끼지 못한다면 아직도 우리 마음이 세상에 스며들고 얼룩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싸움을 해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가진다는 것은 내 마음을 흰색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내 죽음으로 받아들여서 이 세상에서 좋다는 모든 것들이 마음에 스며들어 얼룩을 만들지 못하게끔 십자가를 붙잡고 싸워야 합니다. 이 싸움에서 이긴 자들이 바로 금관을 쓰게 됩니다.
이십사 장로는 이렇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마음을 흰색으로 만든 자들이며, 무지갯빛의 보석이신 하나님이 그대로 다 비쳐서 좋음으로 느낄 수 있는 자들입니다. 이렇게 할 수 있기 위하여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날마다 치열한 싸움을 하며 이긴 자들로서 마음을 흰색으로 지켜나갔습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한 사람씩 뽑으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이러한 사람들을 한 사람씩 일대일로 상대하시며 측근으로 여기실 것입니다.
본문에 기록된 천국의 상황은 우리에게서 오늘도 마땅히 일어날 일들입니다. 하나님께서 탐나시고, 그 탐나는 하나님의 좋음을 충분히 느끼고 싶으시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붙잡고 흰 옷을 입으시면 됩니다. 오늘도 내 마음을 얼룩지게 만드는 세상의 모든 세력에 대하여 십자가로 이김으로써 금관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의 여인들이 진심으로 탐내는 보석 같은 하나님을 탐내게 해주시옵소서. 그 탐나는 하나님을 온전히 좋음으로 느끼기 위하여 주님의 보혈로 마음을 흰색으로 유지하게 하시고, 흰색으로 유지하는 싸움을 이김으로써 금 면류관을 쓸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