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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2

녹취문: 천국 보좌 앞 내 마음의 세 가지 휩싸임_태승철 (계 4:5~6a)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3.12.23|조회수44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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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천국 보좌 앞에서 내 마음의 세 가지 휩싸임>의 줄거리 :

에클레시아, 즉 밖으로 나오라고 하늘에서 부르심에 응답하여 지금 예수님과 함께 세상을 떠나 천국 보좌 우편까지 따라가는 사람, 그래서 날마다 이 땅에서 교회를 사는 사람의 마음은 천국에서 어떤 상태를 유지하며 머물게 될까요? 이 상태를 사도 요한은 세 가지로 표현합니다. 번개와 음성과 우렛소리에 휩싸이고 일곱 등불이신 성령의 빛이 휩싸이며 수정 같은 유리 바다 안에 머물게 된다는 것입니다.

 

 

천국 보좌 앞 내 마음의 세 가지 휩싸임

 

(요한계시록 4:5~6a)

 

5.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우렛소리가 나고 보좌 앞에 켠 등불 일곱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6.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본문은 짧지만, 그 속에 담긴 상징과 표현들의 의미는 귀하고 아름답기까지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1절에서 사도 요한에게 “이 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마땅히 일어날 일들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들을 접하고 있습니다. 말씀드렸듯이 계시록은 교회를 뜻하는 에클레시아(ἐκκλησία)의 의미대로 시대를 초월하여 교회를 사는 사람들에게 마땅히 일어날 일들에 대한 기록입니다. 계시록이 쓰인 시기는 96년경으로 봅니다. 다만 이것은 당시의 일곱 교회 교인들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마땅히 일어날 일들입니다. 그 마땅히 일어날 일들이 4장을 통해 전체적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각에도 천국에서는 계시록 4장을 통해 묘사되고 있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올바로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 땅에서 믿기 전과는 다른 일들이 벌어집니다. 그 사람의 태도나 생각이나 말과 행동에서 이전과는 다른 상황이 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은 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의 그림자와 같습니다. 천국에서 A라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면 마음이 천국에 올라간 사람은 땅에서 A'라는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천국에서 일어난 A라는 일이 본질이라면 땅에서는 천국의 본질적인 일의 그림자와 같은 현상으로써 A'라는 일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일은 그림자일 뿐이지만 계시록은 천국에서 일어나는 본질적인 일로 인한 것임을 가르쳐줍니다. 본문은 이러한 틀에서 천국 보좌 주변에 대한 묘사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본문 5절을 보면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우렛소리가 나고…”라고 하였습니다. 앞서 하늘에서 A라는 일이 일어나면 땅에서는 A'라는 일이 일어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보좌에서 번개와 음성과 우렛소리가 하늘에서 일어나는 본질적인 일이라면 땅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되는 것일까요?

우리는 ‘번개와 음성과 우렛소리’라는 표현으로부터 뇌성을 동반한 벼락이 치는 상황을 쉽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마음이 하늘에 올라간 사람이 보좌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음성에 휩싸이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뇌성벽력이 천지를 진동할 때 우리는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습니다. 뇌성벽력을 가장 우선적으로 강력하고 유일하게 접하고 듣게 됩니다. 에클레시아의 의미대로 교회를 살면서 마음이 이 땅을 떠나 천국 보좌 앞으로 올라간 사람들에게는 육체로 느끼는 땅의 소리는 마음에 들리지 않게 됩니다. 하늘로 올라간 마음은 뇌성벽력 같은 하나님의 음성에 휩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번갯불처럼 뚫고 들어와서 마음에 꽂히게 됩니다.

그러한 삶을 사셨던 대표적인 예가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서 사람의 몸을 입고 사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셨던 것처럼 언제나 아버지가 계시는 하늘에 올라가 계십니다. 본문에서 표현되고 있는 보좌로부터 나오는 뇌성벽력과 같은 하나님의 음성에 휩싸여 계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일이 요한복음 8장 26절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대하여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나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 말하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조용했으나 그 말씀에 담긴 의미는 엄청납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하늘로 올라가 계심으로 보좌에서 나오는 아버지의 음성이 번갯불처럼 예수님의 마음에 꽂히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언제나 하늘 보좌에서 들리는 뇌성벽력에 휩싸여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에게도 일어나야 할 일입니다. 누구든지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게 되면 그 마음은 보좌에서 나오는 뇌성벽력에 휩싸이게 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마음은 몸으로 사는 땅에서 들리는 소리를 따라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도 이 세상에서 들리는 대로 따라가지 않습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8장 47절에서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증거는 마음이 아버지 보좌 앞으로 갔음을 의미합니다. 아버지 보좌 앞으로 가지 못했다면 아버지께 속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아버지께 속했다면 아버지의 음성을 듣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늘로 올라간 마음은 뇌성벽력 같은 아버지의 음성에 휩싸이기 때문에 다른 소리가 들릴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다면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것이고, 하나님께 속하지 않았다면 너희 마음이 아버지 보좌 앞으로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 보좌로부터 나오는 뇌성벽력에 휩싸인 예가 사도 베드로와 사도 요한이 산헤드린 공회에서 재판을 받는 사건에서 나타납니다. 사도행전 4장 18~20절을 보면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산헤드린 공회 앞에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이 있는 곳을 하나님 앞이라고 말합니다. 산헤드린 공회에서 재판받던 베드로와 요한의 마음은 ‘바깥으로 나오라’는 뜻대로 에클레시아를 살고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의 마음은 산헤드린 공회라는 상황에 대해서 죽고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서 보좌로부터 나오는 뇌성벽력에 휩싸였습니다. 이들은 산헤드린 공회의 요청을 귀로 듣지 못했던 것은 아닙니다. 산헤드린 공회의 요청이 마음에 들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시간과 공간 바깥 천국에서는 지금도 모든 사람을 향하여 하나님은 우렛소리와 같은 음성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다만 많은 사람들이 그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내 몸이 처한 상황에 대해 죽어야 합니다. 그리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까지 가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이 세상을 떠납니다. 그럴 때 우리 마음은 지금도 보좌에서 나를 향해 울려 퍼지고 있는 하나님의 뇌성벽력과 같은 음성에 휩싸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나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은 하나님의 음성을 따르게 됩니다.

 

이어서 5절 하반절을 보면 “…보좌 앞에 켠 등불 일곱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일곱이라는 수는 완전함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성령님께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으로서 보좌에 앉아계시는 하나님 아버지와 조금도 다르지 않고 모자람이 없는 하나님이십니다. 성령님께서는 하나님의 인격성을 그대로 복사하신 영이십니다. 인격성의 대표는 언어성입니다.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의지, 하나님의 계획은 모두 언어성입니다. 바로 이러한 인격성이 성령님께 실시간으로 복사됩니다. 하나님께서 A와 B와 C라는 생각을 하고 계신다면 그 생각은 하나님 밖에 존재하시는 성령님께 실시간으로 복사됩니다. 또 하나님께서 다른 생각을 하신다면 그 생각도 마찬가지로 성령님께 복사되어 나타납니다.

본문을 보면 이러한 성령님이 ‘일곱 등불’로 비유되었습니다. 우리는 성령에 감동되었다는 말을 자주 씁니다. 이는 곧 성령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 마음이 무엇인가에 반응하기 위해서는 대상과의 만남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마음이 직접 어떤 대상과 만날 수는 없습니다. 반드시 중개자 역할을 하는 무엇인가가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의 마음은 육체를 통해 세상을 만납니다. 육체의 오감이 세상에 반응하게 하는 중개자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육체에 감동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성령에 감동되었다는 것은 성령이 중개자가 되시는 상태입니다. 마음이 육체가 아닌 성령 안에 머물 때 성령께서는 육체의 오감으로는 볼 수 없었던 영적인 세계를 보게 하십니다. 마음이 육체에 갇혀있는 동안 영적인 세계는 어둠 속에 묻혀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육체를 떠나 예수님과 연합하여 성령 안으로 들어가면 육체의 오감과는 별개로 그동안 암흑 속에 묻혀서 느낄 수 없었던 영의 세계가 펼쳐집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성령님이 일곱 등불로 묘사되신 것입니다. 마음이 육체 안에 갇힌 상태에서는 영의 세계를 접할 수도, 느낄 수도 없습니다. 그랬던 영적인 세계가 성령 안에 들어감으로써 환히 보이게 됩니다. 마치 칠흑 같은 어두움에 덮여있던 방에 전깃불을 켜면 모든 것들이 드러나듯이 성령 안에 들어가면 영적 세계에 대한 전깃불이 켜집니다.

우리 마음이 교회를 살아서 보좌 앞으로 가게 되면 첫 번째로 우렛소리와 같은 하나님의 음성에 휩싸입니다. 두 번째로 영적인 세계가 보이게 되는 성령의 빛에 휩싸이게 됩니다. 5절에서는 바로 이러한 모습이 묘사되었습니다. 이어서 이렇게 성령으로 휩싸일 때 이 땅에서 나타나는 일은 우리의 의식 속에 하나님의 있음이 보석처럼 느껴집니다. 하나님의 존재감을 느낌으로 행복합니다. 또 하나님의 좋음으로 채워지며 만족합니다. 하나님의 있음과 하나님의 좋음과 하나님의 주권자 되시는 주체성이 내 의식에서 환히 보이게 됩니다.

앞서 우리는 하나님의 있음이 벽옥으로, 하나님의 좋음이 홍보석으로, 하나님의 주권자 되시는 주체성이 녹보석으로 묘사된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종합적으로 하나님은 아름다움을 총망라한 무지갯빛으로 묘사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무지갯빛으로 묘사되는 일곱 가지 색깔이 완벽한 아름다움이고 좋음이시라는 것은 성령의 전깃불이 켜질 때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게 되면 성령님의 빛에 휩싸이게 됩니다. 이로부터 영적인 세계, 특히 천국에 대한 의식이 눈에 보이는 것들에 대한 의식보다 더 강력하게 살아나게 됩니다. 마음이 온통 천국에 가 있는 사람으로서 이 세상을 살게 된다는 것에 의미가 있습니다.

 

한편 6절 상반절을 보면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라고 하였습니다. ‘유리 바다’는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이 세상을 사는 우리 사이에 놓여있는 장애를 상징합니다. 유리 바다는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죄인들로서는 통과할 수 없는 장애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 승천하여 보좌 우편에 이르는 상황은 유리 바다 속에서 머무는 상황과도 같습니다.

여기서 유리를 의미하는 헬라어 휘알로스(ὕαλος)의 어원인 휘오(υοι)는 ‘비가 내리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어원으로부터 빗방울을 염두에 두고 휘알로스라는 표현이 등장했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다만 유리의 특성 자체를 놓고 보자면 당시의 유리는 지금 같은 가공된 유리가 아닌 투명한 돌멩이를 가리키는 표현이었습니다. 본문에는 그 투명한 정도가 수정 같다고 묘사됩니다. 이렇게 투명한 유리 바다에 마음이 머문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내 마음 상태가 수정 같은 유리 바다 안에 들어가 있을 수 없다면 보좌에 계신 아버지께로 갈 수 없습니다. 우리를 수정 같은 유리 바다에 들어가게끔 해주시는 역사는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입니다. 이는 곧 수정 같은 유리 바다에 들어갈 상태가 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보좌에 접근할 수 없는 상태임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수정 같은 유리 바다라는 장애가 더는 장애가 되지 않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계신 보좌 앞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유리 바다라는 장애를 넘어가야만 하는데 우리는 건널 수 없습니다. 그 장애를 제거하신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유리 바다 안에 들어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유리 바다는 투시경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이 유리 바다에 들어가면 실오라기만큼이라도 이물질이 있든지 더럽다면 그것이 다 투시되어 드러납니다. 마치 병원에서 엑스레이나 CT나 MRI를 찍는 것과 같습니다. 겉으로 보이지 않는 몸속의 병변을 찍는 것과 마찬가지로 유리 바다는 내 마음이 하나님 보좌 앞에서 용납될 수 없는 이물질이 투시되어 나타남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투시될 때 이물질이 섞인 상태의 마음은 아예 하나님의 보좌 우편으로 올라갈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주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따라 보좌 우편으로 올라갑니다. 십자가에서 주님이 죽으신 것은 내가 세상에 대해 죽은 것입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이르셨습니다. 우리의 의식이 바로 이러한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따를 때 마음은 하늘로 올라가게 됩니다. 그런데 의식이 주님을 따를 때 십자가의 죽음이 철저하지 못해서 세상과 연관된 것들이 무엇이든 남아있다면 마음은 하늘로 올라갈 수 없습니다. 올라간다고 한들 유리 바다에서 마치 엑스레이나 CT나 MRI를 찍는 것처럼 내게 존재하는 이물질이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건물에 화재가 났을 때 경보가 울리고, 도둑이 침입했을 때 경보가 울리는 것처럼 이물질이 포함된 마음은 하늘에 올라갈 수도 없거니와, 하늘에 올라가 유리바다 속에 들어갈지라도 천국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똥바가지처럼 여겨져서 받아들여질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공생애를 사셨습니다. 이 땅을 사시는 동안에도 예수님의 마음은 천국에 올라가서 수정 같은 유리 바다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예수님의 마음은 유리 바다에서 종적을 감추는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용납될 수 없는 그 어떤 이물질도 포함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유리 바다에 들어가신 예수님의 마음은 구분되지 않는 상태였던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 상황도 마찬가지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몸은 돌에 맞아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이 열렸다는 표현대로 그 마음은 보좌 앞 유리 바다에 들어간 상태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스데반 집사님의 마음은 수정 같은 유리 바다와 구분되지 않고 투명한 상태로 동일하게 보였을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마음이 유리 바다 안에 있다는 것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종적을 감춘 것처럼 보였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수정 같은 유리 바다 속에 내 마음이 들어갔을 때 눈에 띄지 않게 종적을 감춰버릴 정도로 투명한 상태가 되어야 함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주님께서는 요한복음 17장 21절에서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라고 간구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하나 되는 상태입니다. 하나님의 속성과 내 마음이 구분되는 이물질을 갖고 있지 않는 상태입니다. 하나님과 하나 된다는 것은 바로 유리 바다로 내 마음이 들어갔을 때 수정 같은 투명함에 드러나는 이물질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유리 바다가 뜻하는 바입니다.

 

이때 내 마음은 보좌로부터 들려오는 뇌성벽력과 같은 아버지의 음성만을 듣습니다. 그 음성을 발하고 계시는 아버지는 성령 안에서 볼 때 유일한 있음이시고 유일한 좋음이시고 유일한 주권자 되시는 주체성이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주체성은 내 마음과 의식이 성령의 빛에 휩싸일 때 뚜렷하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내 마음의 의식은 오직 하나님의 존재감만을 느끼게 됩니다. 사장님 앞에서도 사장님의 존재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감을 느낍니다. 마치 우렛소리가 들리듯 하나님의 음성만 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성령의 전깃불과 같은 조명 아래에 있을 때는 눈앞의 사장님보다 하나님의 존재감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성령의 전깃불 아래에서는 눈에 보이는 돈 문제, 건강 문제, 자녀 문제보다 하나님의 있음이 더 확실하게 보이며 존재감을 느끼게 됩니다. 성령의 전깃불 아래에서 하나님의 좋음이 확실하게 보일 때는 서머나 교회나 빌라델비아 교회처럼 환난과 궁핍이 임하고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오직 하나님만을 욕구하고 하나님만을 소망함으로 마음이 가득 차게 됩니다. 또한 성령의 전깃불 아래에서 내 주체성으로 세상을 대하지 않고 하나님의 주체성만이 강력하게 보이게 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주권자 되심만을 인정하고 세상을 향한 나의 주권자 되는 책임적 위치를 완전히 부인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있음과 하나님의 좋음과 하나님의 주권자 되심은 성령의 전깃불 아래에서 내 마음의 의식 부분과 욕구 부분과 주체성 부분에 온전히 받아들여지게 됩니다. 이 상태에서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 속으로 들어가면 이물질이 발견되지 않습니다. 바로 이 상태로만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이 주님과 함께 하나님 보좌 앞으로 나갈 때 우렛소리와 같은 하나님의 음성에 휩싸이게 됩니다. 마음이 육체 안에 거하며 육체에 감동되었을 때와는 전혀 다르게 귀에 들리는 어떤 소리보다 하나님의 음성만 듣고 따라가게 됩니다.

또한 그렇게 주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 보좌 앞에 있을 때는 성령의 전깃불 아래 있음으로써 마음이 육체 안에 갇혀있을 때 전혀 보이지 않던 하나님의 있음과 하나님의 좋음과 하나님의 주체성이 벽옥과 홍보석과 녹보석처럼 찬란하게 빛남을 보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이 있음과 좋음과 주체성만을 마음의 세 가지 방면으로 흡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주체성을 온전히 흡수하고 있는 마음 상태에서 유리 바다로 들어가 머물 때 어떤 이물질도 발견되지 않음으로써 하나님과 온전히 하나 됨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따라, 하늘 보좌에 앉아계신 아버지의 부르심을 따르는 것은, 몸이 어떤 상태에 있든지 어떤 문제를 만나든지 마음은 하늘로 올라갑니다. 이는 에클레시아가 의미하는 대로 교회를 사는 사람들에게 지금도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렛소리 같은 음성이 보좌에서 울리는 상황, 성령의 전깃불이 켜진 상황, 유리 바다로 들어갔을 때 종적을 감출 정도로 투명해져서 하나님과 하나 되는 상황은, 오늘 이 시간에도 교회를 사는 모든 교인들에게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는 모든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사도 베드로와 사도 요한이 산헤드린 공회에서 재판을 받을 때도 마음이 하늘로 올라갔듯이, 스데반 집사님이 돌에 맞아 죽는 상황에서도 마음이 하늘로 올라갔듯이, 주님을 바라보며 하늘로 올라가서 우렛소리, 성령의 전깃불, 유리 바다에 여러분의 마음이 휩싸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십자가를 바라보며 주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죽고 부르심에 응답하는 교회를 사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천국에 올라간 마음이 세 가지에 휩싸여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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