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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2

녹취문: (S) 하늘에선 예배, 땅에선 사중 얼굴_태승철 (계 4:6b~11)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3.12.25|조회수49 목록 댓글 0

 

www.everyday01.com -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하늘에선 예배, 땅에선 사중 얼굴>의 줄거리 :

보좌 주변에 자리하는 네 생물에 관한 묘사가 나옵니다. 고정된 네 생물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데 그 일을 묘사하자면 네 생물의 존재처럼 느껴진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에클레시아의 의미대로 교회를 사는 사람에게 마땅히 일어날 일들 가운데 무슨 일이기에 사도 요한은 이처럼 기묘하게도 온몸에 수많은 눈이 박혀 있는 여섯 날개를 가진 네 생물로 묘사하였을까요?

 

 

하늘에선 예배, 땅에선 사중 얼굴

 

(요한계시록 4:6b~11)

 

6.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뒤에 눈들이 가득하더라

7. 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데

8. 네 생물은 각각 여섯 날개를 가졌고 그 안과 주위에는 눈들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시라 하고

9. 그 생물들이 보좌에 앉으사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돌릴 때에

10.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리며 이르되

11.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내일은 주님이 오신 날을 기념하는 성탄절입니다. 오늘은 성탄절의 의미까지 염두에 두면서 본문 말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본문 역시 교회를 의미하는 에클레시아(ἐκκλησία)에 담겨있는 내용대로 하늘로부터의 부르심에 응답해서 세상을 떠나 하나님 보좌 우편까지 예수님을 따라가는 교인들에게 마땅히 일어날 일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마땅히 일어날 일들’이란 부르심을 받아 마음이 하늘로 간 교인들과 관련하여 일어나는 일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그렇게 일어날 일들 중에서 천국 보좌 주변에 있는 네 생물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네 생물들은 하나님 보좌 주변에서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라고 쉬지 않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각각 여섯 날개를 가졌다고 했습니다. 일곱이 완전 숫자라면 여섯은 완전에서 하나가 빠진 숫자로써 완성되지 않고 끝이 없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네 생물은 여섯 날개로 계속 날갯짓을 하면서 밤낮 쉬지 않고 하나님을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라고 찬양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기가 막힌 진실이 숨어 있습니다. 네 생물이 하나님의 거룩함을 찬양함에는 쉼이 없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거룩함을 찬양하고 거룩함에 대한 감탄사가 쉬지 않고 끝까지 이어지는 이유는 이것이 진짜 쉼이고 진짜 안식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이란 궁극적인 좋으심을 가리킵니다. 네 생물은 이 궁극적인 좋으심을 쉬지 않고 찬양하며, 쉬지 않고 감탄하고, 쉬지 않고 노래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일어나야 할 진짜 쉼이며 진짜 안식이며 진짜 평강입니다.

 

6절 하반절을 보면 다소 헷갈릴 수 있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뒤에 눈들이 가득하더라”라고 하였습니다.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다고 했는데 우리의 공간 개념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보좌 가운데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어야 한다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을 정확하게 풀어보자면 ‘보좌를 가운데로 삼아서 그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네 생물은 계시록 6장, 15장에서도 등장합니다. 어린 양이 일곱 인을 떼는 일과, 하나님의 심판이 실행되는 일에 관여하고 보좌하는 것으로 언급됩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궁금증이 하나 생깁니다. 4장에서 이야기되는 대로 따라가다 보면 하나님이 앉아계시는 보좌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네 생물이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묘사는 기존에 우리가 알던 것과는 사뭇 다르게 느껴집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보좌 우편에 계신다고 이해해 왔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언급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의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계시록 1장에서 교회와 관련된 기묘한 초상화 속에서 등장하시는 예수님에 대한 말씀을 접했습니다. 13~16절을 보면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 그의 발은 풀무 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 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하나님의 보좌와 관련되어서 이러한 예수님에 대한 언급이 따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네 생물에 대한 묘사는 천국 보좌 주위에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존재에 대한 묘사가 아닙니다. 천국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공간이 없기에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라는 개념 또한 인간의 공간적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천국의 모습을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사도 요한은 마음이 예수님과 십자가에서 연합하여 세상을 떠나 하늘의 부름을 따라 하늘 보좌 우편까지 갔습니다. 그리고 보좌 우편의 자리가 어떤 자리이며, 그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성령을 통하여 보고 느낀 대로 묘사하였던 것입니다.

쉽게 말해 사도 요한은 우리 마음이 보좌 우편에 가서 머물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세상의 언어로 표현하는 과정에서 네 생물을 상징으로 삼았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보좌 우편에 올라간다는 것은, 네 생물이 보좌 주위를 둘러싸는 것과 같은 일이 일어난다는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네 생물의 정체가 무엇이냐는 것이 아니라 보좌 주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는 1장에서 언급된 예수님의 기묘한 초상화 속에 마음이 들어가 있는 상태여야 합니다. 그럴 때 마음은 보좌 우편으로 갑니다. 이미 예수님 안에 마음이 들어간 상태이기에 예수님에 대한 묘사가 필요 없습니다. 천국은 시간과 공간이 존재하지 않기에 보좌 우편이라는 장소 또한 하나님과 가장 가까움을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보좌 에 계신 하나님과 나 사이에 아무것도 끼어들 수 없는 상태를 우편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보좌 우편이 상징적으로 표현되고 있는 하나님의 보좌 가장 가까운 자리에 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느냐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보좌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을 분명히 성령을 통해 보았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네 생물이라는 상징을 통해 인간의 언어로 표현합니다. 보좌 주위에 여섯 날개를 가진 네 생물이 있다고 했습니다. 여섯 날개는 앞서 말씀드린 대로 완성되지 않고 끝이 없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앞뒤에 눈들이 가득하다고 하였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이것은 예수님을 따라 마음이 보좌 우편으로 갔을 때 일어나는 일을 이 세상 언어로 표현한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포진하고 앞뒤에 눈들이 가득하고 했는데, 주석가들이 이러한 묘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많은 오해가 빚어집니다. 천국에는 본문에서 묘사된 생물의 특이한 존재가 있다는 식으로 해석을 합니다. 눈은 예리한 통찰력을 의미하기에 예리한 통찰력을 가진 천사들 중의 어떤 존재가 하나님을 보좌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묘사된 천사가 하나님을 보좌하는 것은 본문의 맥락과 동떨어져 있습니다. 예수님과 연합하여 하늘의 부르심을 받아 에클레시아가 의미하는 대로 교회를 사는 교인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이야기입니다. 본문은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드렸듯이 계시록은 마음이 하늘로 올라간 자들에게서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의 내용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또 어떤 학자는 네 생물의 앞뒤에 가득한 눈에 대해서 하나님의 전지전능한 통찰력을 가리킨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보고 계심을 뜻한다고 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심을 의미한다면 가득한 눈들은 네 생물이 아닌 하나님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잘못된 해석이 등장하는 이유는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과 연합하여 지금 당장 하늘로 올라가야만 한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계시록 중에서 특히 4장은 그렇게 마음이 하늘로 올라갔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에 대한 묘사입니다. 이것을 모르기에 잘못된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네 생물의 앞뒤에 눈들이 가득하다는 것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눈들이 가득하다는 것은 셀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보좌 주변에 셀 수 없이 많은 CCTV가 설치된 것 같은 상황을 떠올려 보시면 이해에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보좌 주위에 있는 네 생물의 앞뒤에 눈들이 가득하여 볼 대상은 보좌에 계시는 하나님뿐입니다. 이렇듯 하나님과의 사이에 누구도 끼어들 수 없는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네 생물이 보좌에 계신 하나님만을 본다는 것은 우리에게서 일어나야 하는 일입니다. 마음이 예수님과 하나 되어 하늘의 부름을 받아 에클레시아가 의미하는 대로 교회를 살며 하늘로 올라가 보좌 우편으로 상징되는 자리에 마음이 머물게 될 때, 네 방향에서 하나님의 모습 중에 어느 부분도 놓치지 않고 하나님을 보는 일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본문에 기록된 네 생물의 앞뒤에 눈들이 가득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바라볼 때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뿐입니다. ‘거룩하다!’고 외칠 수밖에 없습니다. 거룩함이란 궁극적인 좋음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두 사람이 양가 부모님의 동의를 얻어 결혼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결혼식은 여느 날과는 다르게 좋은 방향으로 구분되는 바로 거룩함입니다. 쉽게 말해 거룩함이란 경사가 난 상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보좌 우편에 가 있다는 것은 네 방향에서 하나님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보게 될 경우에 하나님이 날 위해 무엇을 해주지 않더라도 그저 하나님의 있음 자체를 보는 것만으로도 도저히 참을 수 없이 치밀어 오르는 좋음을 느낄 것입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말은 경사 났다는 의미에서 ‘거룩하다!’일 것입니다. 한 번 외치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경사에 감탄하고 보니 또 새로운 경사가 느껴집니다. 또 ‘거룩하다!’를 외치고 보니 또 새로운 경사가 난 것으로 느껴져서 ‘거룩하다!’를 멈출 수 없습니다. 그리고 여섯 날개가 의미하는 대로 쉼 없이 하나님을 보고 경사가 났음을 외치는 것이 바로 진정한 예배입니다.

예배는 교인들만 드릴 수 있습니다. 교인은 위에서 부르시는 부름에 응답하여 에클레시아의 의미대로 교회를 사는 자들입니다. 에클레시아(ἐκκλησία)는 ‘~의 밖으로’라는 뜻의 전치사 에크(ἐξ)와 ‘부르다’는 뜻의 칼레오(καλέω)의 합성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밖으로 나오라는 부름을 받고 응답하는 자들은 마음이 예수님과 십자가에서 연합하여 세상에 대해 죽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갑니다. 마음이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 안에 머문다는 것은 내 마음이 네 방향에서 하나님을 빠짐없이 바라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바라볼 때 하나님께서 무엇을 해주시지 않더라도 오직 하나님 있음 자체를 보기만 해도 ‘어떻게 이렇게 좋은 일이 있을 수 있지?’라는 심정으로 최고의 경사를 느낄 것입니다. 너무나 좋고, 궁극적으로 좋고, 끝내주게 좋고, 미치도록 좋고, 기가 막히게 좋아서 끊임없이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를 연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우리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네 방향에서 놓치지 않고 바라보며 감탄사를 연발하는 일이 바로 예배라는 것입니다.

예배는 예배당에서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예배당은 예수님과 함께 있는 보좌 우편입니다. 인간은 오직 그 자리에서만 하나님을 바라보며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 예배의 내용은 성가대가 연습하여 찬양을 부르는 것과는 다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경사 났다!’라는 감탄사가 끊임없이 이어집니다. ‘경사 났다!’는 말이 끝나자마자 새로운 경사를 느끼며 감탄하는 것이 진정한 예배입니다.

네 생물의 앞뒤에 눈들이 가득하다고 했습니다. 네 생물은 그 자체로 하나의 교회입니다. 내 마음은 네 생물의 앞뒤에 있는 수없이 많은 눈들 중의 하나이어야 합니다. 어느 한 눈이 하나님을 보며 경사 났음을 느낄 때 다른 눈도 하나님을 보며 경사 났음을 느낍니다. 우리의 몸이 지구 어디에서 살더라도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모이는 곳은 보좌 우편입니다. 예를 들어 지구 전체에서 지금 십자가 생활화를 하면서 마음이 보좌 우편으로 올라간 사람이 천 명이라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그렇다면 천 개의 눈들이 보좌를 바라보는 상황입니다. 이러한 천 명의 마음에서부터 ‘경사 났다! 경사 났다! 경사 났다!’를 외치는 상황이 지구에서 벌어질 수 있는 진정한 예배입니다.

진정한 예배당은 천국 보좌 우편입니다. 그 보좌 우편에서 일어나는 일은 네 방향에서 하나님을 24시간 바라보며 경탄하고 감탄하며 경사 났다는 심정에서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그 한마디 한마디를 새롭게 느끼며 외치는 상태가 예배임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사람이 손으로 지은 건물 예배당 안에 모이는 것은 예배가 아닙니다. 몸은 예배당 안에 모여 있어도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기 일쑤입니다. 예배드리면서 기도하고 헌금하고 찬송하지만, 마음은 ‘돈을 더 벌었으면 좋겠다. 자녀가 형통했으면 좋겠다. 건강하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합니다. 이것은 예배가 아닌 우상숭배이며 영적 간음의 현장입니다. 이것을 예배라고 착각하는 것이야말로 무서운 일입니다.

 

이렇게 보좌를 둘러싼 네 생물의 앞뒤에 있는 눈들 중의 하나가 나의 눈이 되어야 합니다. 네 생물의 묘사는 바로 내게서 일어나야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탄절을 맞이해서 진정한 예배에 대해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와 관련해서 근본적인 의문을 가져봅니다. 사도 요한은 마음이 보좌 주위에 머물며 이러한 예배가 일어나는 상황을 왜 굳이 네 생물로 표현했던 것일까요?

7절을 보면 “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데”라고 하였습니다. 이 네 생물은 이 땅 위에 있는 동물들의 대표 격입니다. 영의 세계인 천국에 사자 같은 얼굴이나, 송아지 같은 얼굴이나, 사람 같은 얼굴이나, 독수리 같은 얼굴이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도 요한은 성령을 통해 천국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고 느끼며 상징을 통해 사람의 언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자는 육식동물을 대표합니다. 송아지는 초식동물을 대표합니다. 사람은 인격성을 대표합니다. 독수리는 하늘을 나는 새를 대표합니다. 이 네 생물은 땅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들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이 하늘에 올라가서 예수님의 보좌 우편으로 상징되는 곳에 있을 때, 그곳은 하나님과 나 사이에 아무것도 끼어들 수 없는 가장 가까운 곳입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을 네 방향에서 볼 때는 하나님의 어떤 부분도 놓치지 않는 것과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볼 때 24시간 경사 났다는 의미에서 ‘거룩하다!’라고 외치는 예배가 드려지게 됩니다. 이 네 생물이 땅에서 움직이는 것들을 대표한다는 것은 그러한 예배가 땅에서 일어나는 일임을 가리킵니다. 마음이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은 땅에서 사자 같은 얼굴, 송아지 같은 얼굴, 사람 같은 얼굴, 독수리 같은 얼굴의 사중 얼굴을 갖게 됩니다. 마땅히 일어날 일들이라는 말씀대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는 마땅히 사중의 얼굴을 갖고 살게 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사자는 금수의 왕입니다. 마음이 천국에 올라가 보좌에 계신 하나님의 궁극적인 좋으심을 보며 경사 났음을 느끼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사자같이 당당합니다. 이 세상 그 누구에게도, 그 어떤 문제에도, 그 어떤 환경에도 굴복하지 않는 당당함을 갖게 됩니다. 이것이 마음이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바라보며 하나님의 있음 자체를 경사로 여겨 감탄하는 예배자의 특징 중 하나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이 땅에서 살 때는 그 누구도 굴복시킬 수 없는 사자와 같은 당당함을 가지고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둘째, 송아지는 있는 힘을 다하여 평생 주인에게 순종합니다.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궁극적 경사로 느끼며 예배하는 사람은 이 땅에서 사자같이 누구에게도 굴복하지 않지만,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 한 분에게만은 끝까지 충성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사건을 통해 보여주신 충성과 순종의 모습대로 하나님의 뜻이라면 순종하며 하나님 아버지의 기쁨을 위해 살게 됩니다. 하나님이 유일한 경사이기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라면 소가 주인에게 순종하듯이 따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셋째, 사람의 얼굴은 인간성을 상징합니다. 마음이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을 궁극적인 경사로 느끼며 예배하는 사람은 세상에서 다른 사람을 자기 유익을 위한 방편으로 삼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사냥감으로 여기지 않고 나와 같은 사람으로 봅니다. 그 사람의 필요를 느끼고 그 사람을 긍휼히 여길 수 있게 됩니다. 사람을 알아보게 됩니다. 사람을 사랑하게 됩니다. 사람을 긍휼히 여기게 됩니다. 이것은 오직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 아버지를 바라보며 경사로 여기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특징입니다.

넷째, 독수리는 사람들의 시선을 하늘로 끌어당기는 동물입니다. 이는 곧 이 땅에서 땅만 바라보고 있던 사람들의 시선을 하늘로 향하게 함을 의미합니다. 천국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있음 자체를 경사로 느끼는 사람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이상한 기운을 느끼게 합니다. 그 이상한 기운이란 바로 땅에 내려온 하늘의 기운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어디를 가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땅을 바라보며 살아갑니다. 땅에 사로잡힌 가치관을 갖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늘에서 예배하는 사람은 이러한 세상에 역행하는 기운을 풍기며 사람들로 하여금 땅이 아닌 하늘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들의 안중에 없었던 천국이라는 세계가 있음을 느끼게 하고 알게 하고 감지하게 해줍니다. 이것이 바로 독수리의 얼굴을 한 하늘 예배자입니다.

 

마지막으로 10절을 보면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리며 이르되”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이십사 장로는 천국에 올라간 내 마음을 바라보시는 하나님 속에서의 나의 모습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이십사 장로들처럼 대표자로 보시며 한 사람씩 뽑으신 사람으로 여기십니다.

그 이십사 장로가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린다고 했습니다. 이십사 장로는 하나님 보좌 앞에 있는 내 모습입니다. 하나님께 내가 그렇게 소중한 존재임을 의미합니다.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을 바라보며 마음에서 경사 났음을 쉼 없이 느끼는 동안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에서 “항상 기뻐하라 / 쉬지 말고 기도하라 /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경사 났음을 강하게 느낄 때 그것이 하나님의 덕분임을 잊을 수는 없습니다. 서로 좋아하여 마음을 주고 데이트하던 연인에게는 결혼이 경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바라보며 궁극적인 경사를 느끼자 분명히 내가 주님을 의식하고 바라보고 기억했지만, 그것이 내가 한 일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세상을 빠져나와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경사스러움을 만난 상황은 이긴 자에게 주시는 면류관과 같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겼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내 힘으로 된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11절을 보면 장로들이 찬양하기를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바라볼 때는 경사 났음을 느끼는 한편 하나님의 주권자 되심의 사랑과 은혜를 바라보게 됩니다. 내 나름대로 싸워서 이기라는 말씀대로 애를 썼지만 이 경사스러움 속에서 보니 이 승리의 결과는 내가 받을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받으셔야 할 것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승리는 온전히 아버지의 사랑이었고, 온전히 아버지의 뜻이었고, 온전히 아버지의 선택과 긍휼히 여기심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만이 세상을 뿌리치고 하늘로 올라가는 승리를 가능하게 하신 분이시기에, 면류관 쓰기를 당치 않은 일로 여김이 관을 벗어 드리는 것으로 상징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드려야 할 예배의 의미입니다.

 

내일은 주님이 오신 날을 기념하는 성탄절입니다. 우리 몸은 사방에 흩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도 내일도 우리 마음은 지금 아버지께로 가서 모일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은 하늘에 모여서 하나님께 감탄의 찬양을 드리고, 땅에 흩어져 있는 몸은 사자의 얼굴, 송아지의 얼굴, 사람의 얼굴, 독수리의 얼굴이라는 사중의 얼굴로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럴 때 느끼는 모든 승리의 기쁨을 아버지 덕분으로 돌리며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서 마땅히 일어날 진정한 예배임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교인이 되는 것과 생활 현장에서 교회를 사는 것은 진정한 하늘 예배자로 땅에서 사중 얼굴을 하는 삶이라는 것을 기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기억이 우리의 현실이 될 수 있도록 은혜 내려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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