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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계시록은 시공을 넘나들어야 보인다>의 줄거리 :
계시록의 내용을 본격적으로 소개하기 전에 사도 요한은 먼저 우리의 이해를 일깨우시며 워밍업 시키십니다. 시간과 공간에 갇힌 생각의 습관을 고스란히 유지하는 한 도저히 계시록의 내용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묘사하는 방식도 독특하게,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라고 하십니다. "스스로 있는 자"에 시간의 개념을 염두에 둔 또 다른 표현입니다.
계시록은 시공을 넘나들어야 보인다
(요한계시록 1:4~8)
4.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와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
5.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6.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7.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8.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요한계시록의 서문은 본격적인 내용을 접하기에 앞서 우리의 의식 수준을 오리엔테이션 하는 부분이라고 보시면 될 것입니다. 계시록의 내용을 올바르게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우리의 사고가 시간과 공간을 아무런 장애 없이 넘나들 수 있어야 함을 가르쳐 줍니다.
4절을 보면 계시록이 편지 형식으로 쓰이게 된 직접적 계기가 언급됩니다. 사도 요한은 아시아 지역에 있는 일곱 교회에 보내기 위해 계시록을 편지 형식으로 작성하였습니다. 여기서 ‘아시아 지역’이란 이전에 터키라 불리던 튀르키예 서쪽의 에게해와 인접한 지역을 가리킵니다. 다만 계시록을 읽었던 것은 일곱 교회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이 지역에는 골로새 교회나 드로아 교회 등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굳이 일곱 교회를 언급한 것에는 상징적 의미가 있습니다. 계시록은 기록할 당시에 있던 아시아 지역의 교회뿐만 아니라 심지어 예루살렘이나 로마에 있는 교회들을 포함하며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이 땅에 있을 하나이자 전체로서의 교회를 향하여 기록되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그것을 ‘일곱’이라는 완전 숫자를 통해서 표현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일곱 교회’란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에게 있어서 드러나는 다양한 영적인 상태를 일곱 가지의 형태로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하면 정확할 것입니다.
한편 이러한 의도를 가진 본문에서 소개되는 하나님의 이름이 특이합니다. 사도 요한은 4절에서 하나님을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장차 오실 이’라는 표현에서 예수님의 재림을 연상하게 됩니다만 본래의 뜻은 미래가 다가오면서 만나게 되는 하나님을 뜻합니다.
사도 요한의 말대로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시간에도 계시며, 이미 지나간 과거에도 계셨으며,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에도 계십니다. 다만 우리가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이기에 미래에 계신 하나님은 만날 수 없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사도 요한이 이렇게 시간과 관련하여 하나님을 언급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스스로 있는 자’이심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기 3장 14절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라고 스스로를 밝히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바로 이러한 ‘스스로 있는 자’라는 하나님의 이름을 시간의 개념에서 확장하고 변형하여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이러한 표현을 볼 때 하나님은 어느 시간대에도 계신다는 의미를 우선적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이러한 표현은 하나님은 전혀 시간의 흐름에 구애받지 않는 ‘있음’이시라는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하나님은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의 흐름 안에 계신 것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 바깥에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4,000년 전에 살았던 아브라함도 자기의 지금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3,000년 전에 살았던 다윗도 자기의 지금에서 하나님을 만났으며, 2,000년 전 예수님께서도 예수님의 지금에서 하나님을 만나셨으며, 지금 오늘을 사는 우리도 우리의 지금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시간의 흐름 바깥에 계시고 시간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을 향하여 내려오시는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시간 바깥에 보좌를 두고 계십니다. 이러한 의미를 염두에 두자면 하나님은 영원이라는 차원에 계시고, 우리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차원에 갇혀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우리에게 믿음의 의미를 보여주고자 합니다. 시간과 공간 안에 갇혀 살고 있는 우리가 시간과 공간을 만드시고 시간과 공간 바깥에 계시는 하나님을 만나 관계하는 것입니다. 시간과 공간에 갇혀 살고 있는 우리가 영원 안에 계시는 하나님을 만나야 된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사도 요한이 가르쳐주는 믿음의 내용입니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 안에서 살아가며 다양한 문제나 과제를 마주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일들은 시간과 공간 바깥에 계신 하나님에 의해서 주관되고 다스려지고 이끌려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해답은 시간과 공간 바깥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에 걱정과 근심과 불안하게 하는 사건이 생겼다면, 우리가 해야 될 일은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로 가는 것입니다. 시간과 공간 안에 갇혀서 문제나 과제의 해결을 도모하거나 삶의 환경을 바꾸려 시도하는 일은 의미가 없고 잘못된 것입니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시간과 공간의 모든 일은 영적인 세계와 연결되어야만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답은 없습니다.
사도 요한이 하나님에 대해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라는 표현을 한 이유는 곧 우리의 마음이 시간과 공간에 갇혀있어서는 절대로 안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시간의 흐름을 만드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감으로써 지금 영원과 연결될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은 시간의 흐름이 영원과 연결되는 접점입니다. ‘지금’이라는 찰나의 순간에 우리의 마음이 시간과 공간을 빠져나가 영원으로 들어갈 수 없다면 하나님을 만날 기회는 영영 없습니다.
지금이 중요한 것은 언제나 지금이기 때문입니다. 20초 뒤의 미래도 결국 지금이 될 것이고, 지금으로 왔던 시간은 과거가 되어 빠져나갈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나는 언제나 지금 존재하는 것입니다. 20초 전의 시간을 따라 내 의식이 과거로 흘러갈 수는 없습니다. 나는 언제나 지금에 남아 있습니다. 지금은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닌 시간의 흐름을 타지 않는 이상한 시간입니다. 한 시간 뒤의 미래는 이제라는 시간으로 흘러올 것이지만, 그때가 온다고 해도 내가 그 시간과 묶여서 과거로 흘러가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여전히 지금에 머물러 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금’이라는 신비한 시간을 허락하신 이유는 시간 속에 살고 있는 우리가 영원으로 진입해 들어갈 수 있는 타이밍이기 때문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지금에는 흐름이 없습니다. 항상 ‘지금’이고, 범사에 ‘지금’이고, 쉬지 않고 ‘지금’입니다. 이 ‘지금’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의 마음이 시간과 공간에 갇힌다는 것은 답이 없음을 의미합니다. 마음이 시간과 공간 속에 있는 대상에게 향하거나 과거나 미래를 향한다면 삶의 답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말씀드렸듯이 시간과 공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영원과 연결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이 영원 속으로 들어가지 않는 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답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영원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시간은 과거나 미래가 아닌 오직 지금뿐입니다. 이것은 나중에 하겠다고 미룰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지금 하나님을 부르며 시간과 공간을 빠져나가지 않는 한, 하나님과 만날 수 없고 하나님과 관계할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일어나는 어떤 문제에 대해서도 답을 찾을 수도 없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삶에 문제가 생겼고, 그 문제의 답을 얻고 싶고, 올바르게 행동하고 싶다면 여러분의 마음은 시간과 공간을 빠져나가야만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관하시고 만드신 세상 속에서 살아갑니다. 시간과 공간도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문제에 부딪힙니다. 그럴 때 우리는 시간과 공간을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야만 합니다. 하나님께로 가야 하는 시간은 바로 지금입니다.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라는 표현에는 시간과 공간 안에 갇혀 있는 우리가 ‘지금’이라는 타이밍에 반드시 시간과 공간을 빠져나가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만날 길이 없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하나님과 관계한다는 것은 인격 안에서 시간과 공간이 우습게 여겨지는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시간과 공간 속에 있는 대상들에 대해서는 마음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믿는 사람들이란 언제나 지금이라는 타이밍을 통하여 시간과 공간을 빠져나가는 것만을 과제로 삼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의식이 없다면 계시록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한편 4절 하반절을 보면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일곱 영’이란 성령을 가리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일곱’이란 완전함을 뜻합니다. 일곱이라는 숫자는 앞으로도 계시록에 계속 등장할 상징성을 띤 중요한 숫자입니다. 다시 말해 ‘일곱 영’이란 ‘완전한 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보좌에 하나님이 계시고 그 앞에 일곱으로 표현되는 완전한 영이신 성령이 계십니다. 성령이 완전하신 이유는 아버지의 전능하심을 비롯한 모든 속성과 뜻과 생각이 실시간으로 복사된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는 곧 성령이 아버지와 똑같은 분이심을 의미합니다. 보좌 앞에 성령이 계시다는 것은 곧 보좌에 계신 하나님과 관계하는 모든 상대자에게는 성령이 임하심을 가리킵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성령이 임하시지 않으면 창조주 하나님과 관계는 맺어질 수 없고 지속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상대하시고 관계하시는 모든 대상에게는 성령이 임하십니다.
여기서 질문이 하나 생깁니다. 우리는 육체를 입고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사는 존재인데 어떻게 영원에 계시며 시간과 공간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일까요? 이 일을 하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성령께서는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뜻과 생각을 실시간으로 복사하는 영이십니다. 따라서 성령께서 시간과 공간 안에 갇혀있는 우리에게 임하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단절될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님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단절을 극복하고 교제와 사귐을 가질 수 있게 해주십니다. 성령께서 보좌 앞에 계시다는 것은 보좌에 계신 하나님과 관계하는 모든 대상들에게 하나님과 완전히 일치하는 복사판 영이신 성령께서 임하시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정리해 봅니다. 성령은 육체를 입고 있는 우리가 시간과 공간 바깥의 영원 속에 계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관계할 수 있게 해주십니다. 우리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습니다. 그 하나님이 눈에 보이는 대상, 귀에 들리는 대상,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대상들보다 더 뚜렷한 대상으로 상대자가 되게 해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본문에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게 해주시는 성령의 역사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를 염두에 두자면 계시록은 언제인지 알 수 없는 먼 미래의 일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앞서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강조하였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서 일어나는 일들이고, 시간과 공간에 갇혀 사는 사람들이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일입니다. 가족보다도 더 뚜렷하고 쉽게 영원 속에 계신 하나님과 관계하는 역사가 펼쳐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일들을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사탄과 마귀는 이러한 예수님의 역사를 방해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전쟁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바로 이러한 실태를 보여줍니다.
나는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라고 표현된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관계를 맺어야 할 사람입니다. 우주에서 이보다 더 큰 사건은 없습니다. 우주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너의 위치에 모시고 관계하는 역사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미국이나 중국의 사정 혹은 중동의 전쟁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일입니다.
우주보다 더 크신 하나님께서는 이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나라와 민족과 개인의 역사를 주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나 같은 미물이 이러하신 하나님 아버지와 관계를 가질 수 있다니 어마어마한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내가 미물이면 미물일수록 작으면 작을수록 우주보다 더 크신 하나님과의 관계에 돌입한다는 사건의 의미는 더욱 커집니다.
중국이나 인도의 인구는 13억이 넘습니다. 미국의 인구는 4억이고, 일본은 1억 2천만이고, 우리나라는 5천만입니다. 이러한 엄청난 규모에 비하자면 이 세상에서 나 한 사람의 존재감이란 너무나 미미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미미하면 할수록 하나님과의 관계에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200개의 모든 나라 임금과 대통령과 재벌과 권력자들을 다 모아도 티끌도 안 될 정도로 크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하신 하나님을 유일한 상대자로 관계하는 사건은 어마어마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다.’라는 말을 쉽게 합니다. 그런데 이 간단한 말로 정리되는 사건이 요한계시록 전체가 겨냥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사건인가를 인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 같은 미물이 하늘에 계신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이보다 더 큰 사건은 존재하지 않기에, 마귀나 귀신들의 공격도 바로 이 일에 집중됩니다.
그렇기에 사도 요한은 급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성령을 선물로 받아 하나님과 관계함의 중요성을 가르쳐줍니다. 그리고 사탄과 귀신들이 이 일을 방해하기 위하여 어떻게 공격할 것이며, 결과적으로 어떤 승리가 일어날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대로 이 모든 일을 기록한 책이 요한계시록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회사에서 승진을 하느냐 못하느냐가 아닙니다. 자녀들이 사회적으로 성공하느냐 마느냐가 아닙니다. 우리가 처해있는 영적인 상황을 정확히 알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요한계시록의 이해를 정확하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성령님에 대한 설명에 이어서 5절에서는 예수님에 대한 설명이 이어집니다.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시간과 공간이 전부인 줄 알고 살았던 우리에게 시간과 공간 바깥에 진짜 참된 세계인 천국이 있고, 그 천국에는 유일하신 있음이고 유일하신 좋음이신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에 대해 증언하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러한 예수님을 ‘충성 된 증인’이라고 표현합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막연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주석 책들을 보아도 단순히 예수님이 이 땅의 주권자이시라는 식으로 해석합니다. 다만 여기에는 그 이상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다는 표현 또한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시간과 공간 안에서 여러분에게 존재감이 일등인 대상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임금은 한 나라에서 모든 백성에게 존재감이 일등인 자입니다. 다만 민주화 된 오늘의 세상에서 존재감이 일등인 대상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대통령의 존재감을 일등으로 느끼느냐 묻는다면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정부기관의 각료들은 대통령의 존재감을 일등으로 느끼겠지만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대통령은 먼 존재입니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존재감이 일등인 대상은 반드시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대상은 옛날의 임금과도 같습니다. 여러분이 배우자의 존재감을 일등으로 느낀다면 배우자가 임금이 된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의 존재감을 일등으로 느낀다면 자녀가 임금이 된 것입니다.
이로부터 예수님께서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다는 말씀의 의미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내가 느끼는 존재감의 일등 자리에는 시간과 공간의 세계에서 그 어떤 존재도 들어설 수 없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오직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만이 존재감의 일등 자리에 서시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예수님이 첫 번째 관심의 대상이 되실 때, 우리 마음은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서 시간과 공간 바깥에 계신 하나님을 일대일로 만나고 관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다는 것은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 승천하셔서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음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지금 우리 마음속에서 일등의 존재감을 차지하고 있는 시간과 공간의 어떤 존재보다도 위에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고백함의 의미도 여기에 있습니다. 내 마음에서 임금이 되고 존재감의 일등 자리를 차지하는 모든 것들이 십자가를 통하여 쓸려나가고 죽어 없어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셨다’고 했습니다. 시간과 공간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은 죽음으로써 끝이 납니다. 있음에서 없음으로 바뀌는 사건입니다. 이러한 죽음은 시간과 공간 속에 있는 모든 것의 끝을 가져다주는 사건입니다. 예수님께도 모든 있음을 삼켜버리는 죽음이 임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죽음을 뚫고 다시 있음의 세계로 나가셨습니다. 십자가의 예수님과 연합함이란 있음의 차원에서 없음으로 들어가는 일이 영원히 사라지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시간과 공간 안에 있는 모든 존재의 특징은 있다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있음을 없음으로 바꾸는 죽음이 임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죽음이 임했음에도 죽음을 뚫고 나오셨고 있음이 되셨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에서 세상의 모든 존재감을 없애고 예수님과 연합하게 되면 우리의 마음은 예수님과 함께 영원한 있음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여러 가지 사건이 있을 수 있습니다. 몸이 아플 수 있습니다. 직장에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가정에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이렇게 시간과 공간 안에서 육체로 만나는 모든 상황과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은 시간과 공간 바깥 세계와 연결이 관건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시간과 공간 안에서 만나는 문제들을 붙잡아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을 따라 시간과 공간 바깥으로 나갈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어서 5절 하반절에서 6절을 보면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이라고 하였습니다. ‘죄’란 영원하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지음 받은 인간의 마음이 시간과 공간 안에 갇힌 것입니다. 죄에 빠진 인간은 시간과 공간 안의 대상들에게서 존재감을 느끼고 좋음을 찾고자 합니다. 기뻐하고 만족하고자 ‘이렇게 됐으면 좋겠다, 저렇게 됐으면 좋겠다, 어딜 가면 좋겠다, 무엇을 가지면 좋겠다.’라는 소원을 갖습니다. 이것이 모조리 다 죄악입니다.
우리가 가져야 될 것은 시간과 공간 바깥에 계신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시간과 공간 안에 있는 모든 문제는 시간과 공간 바깥으로 나가야만 해결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주님께서는 나라가 임하게 해주셨습니다. ‘나라가 임함’이란 이 땅에서 내 몸으로 맺는 모든 관계에 대해 하나님 아버지의 다스리심이 임하는 상태입니다. 내 마음이 시간과 공간 바깥으로 나갈 때, 시간과 공간 안으로는 절대적인 하나님의 주권과 다스리심이 임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시간과 공간 바깥으로 나가야만 합니다.
한편 마귀와 귀신들은 바로 이점을 끊임없이 공략하여 우리 마음을 시간과 공간의 세계에 묶어두고자 합니다. 마귀와 귀신들은 나 같은 미물이 지구에 있는 나라와 민족뿐만 아니라 우주의 수많은 별들의 운명까지도 한 손에 쥐시고 이끌어 가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그 꼴을 배가 아파 두고 보지 못합니다. 마귀와 귀신들은 아버지가 나 같은 미물을 사랑하시는 상황을 시샘하고 질투하며 견디지 못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존재합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무한한 우주를 지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는 무한한 우주보다도 독생자가 더 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독생자를 나 때문에 투입하셨습니다. 내가 이토록 중요하기에 마귀나 귀신들은 전력을 다해서 공략해야 될 목표물이 나 외에 달리 없습니다. 나보다 더 큰 사건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세상에서 잘 생겼든 못생겼든 그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인간 세상에서 어떤 존재이며 어떤 위치에 있는가도 문제가 아닙니다. 부자이든 가난하든 상관이 없습니다. 나의 존재는 나라가 망하고 흥하는 것보다도 더 큰 사건입니다. 그렇기에 한 사람의 인격 안에서 시간과 공간의 경계가 허물어져 나가고 영원이 일상이 되어야 합니다. 영원이 일상인 상태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인격적 체질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계시록의 의미 또한 온전히 흡수할 수 있음을 기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계시록의 의미를 살펴봄을 통해 사방이 막힌 상태에서 벽이 허물어지고, 장애가 없어지며, 막힌 것이 뚫리는 쾌청한 자유가 임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시간과 공간이 가벼이 여겨지고 영원의 세계가 일상이 되는 놀랍고도 신비로운 은혜를 끊임없이 확인하며 진짜 내 것이 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