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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2

녹취문: 널조각에 기대 버티는 무저갱의 삶_태승철 (계 9:1~12)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4.01.18|조회수38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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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널조각에 기대 버티는 무저갱의 삶>의 줄거리 :

다섯 번째 나팔 재앙이 나타납니다. 하늘에서 별 하나가 떨어져 사탄이 된 자가 무저갱의 문을 엽니다. 그러자 짙은 연기가 올라와 공기와 태양이 어두워지고 전갈의 독침을 지닌 황충 떼가 나와 사람들을 찌르며 고통을 안겨 줍니다. 그런데 황충은 이런 고통을 오직 이마에 하나님의 인 침을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가합니다. 이 무저갱의 고통이 우리의 일상에서 어떻게 확인될 수 있는지를 살펴봅니다.

 

 

널조각에 기대 버티는 무저갱의 삶

 

(요한계시록 9:1~12)

 

1. 다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내가 보니 하늘에서 땅에 떨어진 별 하나가 있는데 그가 무저갱의 열쇠를 받았더라

2. 그가 무저갱을 여니 그 구멍에서 큰 화덕의 연기 같은 연기가 올라오매 해와 공기가 그 구멍의 연기로 말미암아 어두워지며

3. 또 황충이 연기 가운데로부터 땅 위에 나오매 그들이 땅에 있는 전갈의 권세와 같은 권세를 받았더라

4. 그들에게 이르시되 땅의 풀이나 푸른 것이나 각종 수목은 해하지 말고 오직 이마에 하나님의 인침을 받지 아니한 사람들만 해하라 하시더라

5. 그러나 그들을 죽이지는 못하게 하시고 다섯 달 동안 괴롭게만 하게 하시는데 그 괴롭게 함은 전갈이 사람을 쏠 때에 괴롭게 함과 같더라

6. 그 날에는 사람들이 죽기를 구하여도 죽지 못하고 죽고 싶으나 죽음이 그들을 피하리로다

 

 

본문에는 다섯 번째 나팔 재앙이 기록되었습니다. 오늘도 언뜻 보기에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내용들이 상징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여기서 ‘무저갱(無底坑)’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데 바닥이 없는 구덩이를 의미합니다. 이 단어에 주의를 기울이며 본문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다섯 번째 나팔 재앙은 하늘에서 별 하나가 땅에 떨어지면서 시작됩니다. 하늘에서 별이 떨어졌다는 이야기는 이사야에서 뚜렷하게 표현된 바 있습니다. 이사야 14장 12절을 보면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아침의 아들 계명성은 샛별을 뜻하고, 사탄을 상징합니다. 이 사탄은 무저갱의 열쇠를 가지고 무저갱의 문을 엽니다. 그리고 무저갱에서는 짙은 연기와 함께 황충이 올라옵니다. 황충은 메뚜기로 요엘서를 보면 메뚜기 떼가 일으키는 재난이 무시무시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황충 떼가 한 번 앉았다가 떠난 자리는 그야말로 초토화가 됩니다. 푸른색은 하나도 남지 않습니다.

본문은 여전히 어린 양이 인을 뗌으로써 진행되어 가는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입니다. 일곱 번째 인을 떼었을 때 일곱 나팔의 재앙이 시작되었습니다. 일곱 인 안에 일곱 나팔 재앙이 들어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사탄이 무저갱의 문을 열었다고 해도 역사의 중심축은 여전히 어린 양입니다. 어린 양의 영향권 아래에서 허락받은 대로 사탄이 역사하고 있을 뿐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무저갱의 문을 열자 연기가 나오고 황충이 나온다는 표현은, 마치 화산이 폭발할 때 용암이 흘러나오고 엄청난 가스가 뿜어져 나오는 장면을 연상시킵니다. 화산 내부의 상황이 바깥으로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무저갱의 열쇠를 가지고 문을 열었을 때 짙은 연기와 황충이 나왔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마음이 무저갱에 들어갔을 때와 똑같은 느낌을 가질 수 있도록, 무저갱의 내부 상황을 바깥으로 표출시킨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짙은 연기에 휩싸이고 황충에 쏘인다면 무저갱에 들어갔을 때와 똑같은 상황을 겪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은 우리의 일상에서 마땅히 일어날 일들로써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천 년 전에 사도 요한이 계시록을 기록할 당시에도 일어났던 일이며, 천 년 전 중세 시대에도 일어났던 일이며, 지금도 다섯 번째 나팔 재앙은 날마다 우리 삶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중입니다.

 

무저갱이란 앞서 말씀드린 대로 바닥이 없는 구덩이로써 음부의 다른 말이기도 합니다. 사도 요한은 바닥이 없는 구덩이라는 표현을 통해 다섯 번째 나팔 재앙의 특성을 두드러지게 강조하면서 음부의 특성을 명확하게 보여주고자 한 것입니다. 바닥이 없다고 하니 허공만 있는 구덩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만, 2절을 보면 “그가 무저갱을 여니 그 구멍에서 큰 화덕의 연기 같은 연기가 올라오매 해와 공기가 그 구멍의 연기로 말미암아 어두워지며”라고 하였습니다. 무저갱은 바닥이 없는 공간인데 그 구멍에서 짙은 연기가 올라오면서 해와 공기가 어두워진다고 했습니다. 텅 빈 것이 아니라 도저히 숨을 쉴 수 없는 연기로 채워진 구덩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맨몸으로 태평양 한가운데서 조난 당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이 사람이 수영을 못해서 바다에 가라앉는데 발로 땅을 디디려 해도 디딜 수가 없습니다. 풀장 같으면 조금 가라앉아도 발이 닿아서 차고 올라 올 수 있습니다. 다이빙을 하는 깊은 풀이라도 10초면 바닥에 닿을 것입니다. 그런데 태평양 한가운데에서는 아무리 내려가도 발이 땅에 닿지 않습니다. 음부인 무저갱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다만 물 대신에 연기가 채워져 있는 구덩이입니다. 바다에 빠지면 눈 코 귀 입으로 물이 들어와서 질식합니다. 마찬가지로 무저갱은 짙은 연기의 바다라서 사람이 숨을 쉴 수 없습니다. 해와 공기가 어두워질 정도로 짙은 연기의 바다입니다.

이어서 3절을 보면 “또 황충이 연기 가운데로부터 땅 위에 나오매 그들이 땅에 있는 전갈의 권세와 같은 권세를 받았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전갈의 권세 같은 권세를 받았다는 것은 황충이 단순히 모든 것을 먹어 치우는 존재가 아니라 사람을 쏘기까지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일곱 나팔 재앙의 핵심입니다. 이러한 묘사들은 마음이 아직 무저갱에 들어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연기에 휩싸이고 황충의 독에 쏘임으로써 무저갱에 들어갔을 때와 똑같은 경험을 하게 됨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연기로 가득 채워진 바닥이 없는 구덩이에 빠지는 상태가 어떤 것이기에 황충의 독에 쏘였을 때와 같은 고통을 겪는다는 것일까요?

 

바닥이 없다는 것은 쉽게 말해 마음 둘 곳이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늘 반복하여 말씀드립니다만 우리의 마음은 영이신 하나님을 모셔 들이는 곳이기에 영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영인 마음이 육체와도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마음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스스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반드시 자기의 있음을 느끼기 위해 의지처를 발견하고자 합니다. 마음 둘 곳을 찾는 것입니다. 자기가 아닌 다른 있음에 마음을 둠으로써 자기 있음의 근거가 없을 때 생기는 두려움을 이겨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기 있음의 근거가 없는 상태가 무엇이기에 두려워하는 것일까요? 예를 들어 봅니다. 제가 아는 권사님이 이북에서 피난을 나오셨는데 같은 이북 사람을 만나서 결혼을 하셨습니다. 권사님은 평안도고 남편은 함경도 출신입니다. 남편은 탁월한 사업가이셨는데 아들이 하나 있었고 권사님이 40세 때에 췌장암으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권사님께서는 이때의 충격을 이기지 못해서 몇 년을 병원에 입원하다시피 사셨다고 합니다. 그때 한의사 선생님이 맥을 짚으면서 ‘죽은 사람의 맥 같다.’라고 하시더랍니다. 죽은 사람은 맥이 뛰지 않듯이 그만큼 맥이 약했다는 것입니다. 남편이 사업을 잘했기에 남긴 돈이 꽤 있었지만, 그 돈으로 병원 신세를 져야만 했던 이유는 권사님이 마음 둘 곳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무저갱의 짙은 연기와 황충은 사람이 마음 둘 곳을 잃었을 때 당하는 고통을 상징합니다. 나인성 과부는 외아들이 죽어서 마음 둘 곳이 없는 상태에서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이 고통이 어떤 것인지는 부모라면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혹은 아이와 함께 놀이동산에 갔는데 잠깐 한눈을 판 사이에 아이가 감쪽같이 사라졌다면 어떨까요? 마음을 두고 있던 대상이 한순간에 사라졌으므로 느끼는 고통이 바로 무저갱의 고통입니다.

무저갱은 바닥이 없는 구덩이로써 짙은 연기로 해와 공기가 어두워지는 것 같이 앞이 캄캄하고 숨을 쉴 수 없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마음 둘 곳을 상실했을 때 나타나는 무저갱의 고통입니다. 사람이 본래 마음을 둘 대상은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타락하여 죄와 저주에 빠졌고 하나님을 잃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잃었음으로 마음 둘 곳은 없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육체를 입고 있다는 특성에 의해 육체로 만나는 대상들을 마음 둘 곳으로 붙잡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태평양 한가운데 빠진 사람이 떠다니는 널조각 하나를 붙잡고 의지하려는 상황과 같습니다.

권사님에게는 붙잡고 의지할 대상이 남편이었고, 나인성 과부에게는 외아들이 붙잡고 의지할 대상이었습니다. 놀이동산에서 아이를 잃어버리고 절망한 부모에게는 아이가 붙잡고 의지할 대상입니다. 어떤 사람은 30년 근무한 직장에서 이유도 모른 채 퇴직을 당해서 절망한다면 직장이 붙잡고 의지할 대상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다못해 정붙여 기르던 애완동물이 교통사고를 당해 죽었는데 견딜 수 없다면 애완동물이 붙잡고 의지할 대상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마음 둘 곳이 사라져 버림으로 방황하는 상태가 연기로 가득 찬 바다와 같은 무저갱 속에서 바닥이 닿지 않아 헤매고 있는 상태와 같습니다.

무저갱의 고통은 육체로 만나는 것들을 널조각으로 삼아 버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는 고통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사람은 본래 마음 둘 유일한 대상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타락하여 죄와 저주에 빠져 하나님을 등지게 되었고, 하나님을 등지는 순간 무저갱의 고통은 임하게 됩니다. 문제는 육체가 있기에 육체로 만나는 것들을 널조각으로 삼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마치 태평양 한가운데서 널조각을 붙잡고 떠 있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배우자를 널조각으로 삼고, 자녀를 널조각으로 삼고, 돈 몇 푼 있는 것을 널조각으로 삼아서 마음 둘 곳이 없는 무저갱 속에서 버티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육체가 살아있는 동안은 어떻게든 붙잡을 수 있는 것이 있기에 무저갱에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할 뿐입니다.

 

이어서 4절을 보면 “그들에게 이르시되 땅의 풀이나 푸른 것이나 각종 수목은 해하지 말고 오직 이마에 하나님의 인침을 받지 아니한 사람들만 해하라 하시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풀이나 푸른 것이나 각종 수목이란 지구상에서 살아 움직이는 동물들의 식량을 상징합니다. 결국 짐승이 풀을 먹고 성장해야 고기를 얻을 수 있으니, 사람도 결국 풀을 먹어야만 합니다. 이것을 해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먹고 살 수 있도록 내버려 두라는 뜻입니다. 무저갱이 해치도록 허락받은 것은 사람의 마음인데, 그중에서도 하나님의 인침을 받지 아니한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인침을 받지 아니한 사람들’이라는 표현을 보면 자발성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말뜻을 더 정확하게 강조하기 위해서 이러한 표현이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인침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을 자기 몫으로 가집니다. 하나님이 ‘너는 내 것이다.’라고 인을 치신 사람들의 특징은 자기도 ‘하나님도 내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만 갖겠습니다.’라고 여기며 달려드는 것입니다. 마음을 이렇게 하나님께 둘 때 죄와 저주로 인해 빠지게 된 무저갱의 처지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됩니다. 바닥이 없고 숨을 쉴 수 없는 연기의 바다인 무저갱에서 빠져나오는 길은 영원히 마음 둘 곳을 찾는 것뿐입니다. 반면 무저갱에 빠져있는데 아직 육체가 살아있다는 이유 때문에, 육체로 인연을 맺고 관계를 맺는 것들을 마음 둘 곳으로 삼는다는 것은 태평양에서 널조각에 의지하고자 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당장 버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무저갱의 상황임을 알게 하시려고 그 널조각마저 제거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다섯 번째 나팔 재앙의 내용입니다. 몸이 죽었을 때 영원히 들어가게 될 무저갱의 고통이 어떤 것인가를 아직 몸이 살아있을 때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40세에 능력 있는 남편을 췌장암에 잃은 권사님이 그 마음을 추스르는 데 몇 년이 필요했습니다. 무엇으로 마음을 추슬렀는가를 보니 외아들 때문이었습니다. 아들을 또 다른 널조각으로 잡고 무저갱의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시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던 어느 날 아들이 눈에 들어오더랍니다. 이것은 단순히 어느 권사님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권사님을 예로 들어 우리 모두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도 무저갱의 상황에서 예외일 수 없습니다. 이렇게만 보면 권사님께서 아들을 위해서 정신을 차린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실은 아들이라는 널조각으로 마음 둘 곳을 바꾸었을 뿐입니다. 세상에서는 ‘아들 때문이라도 내가 살아야 되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받아들이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주권 밖에서 자녀를 위할 수 있는 부모는 세상에 없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삐뚤어지고 부정확한 시선은 바로 부모가 자녀를 바라보는 시선입니다. 자녀에 대한 부모의 시선만큼 오해에 가득 찬 시선은 달리 없습니다. 부모의 시선 속에 객관성과 진리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착각과 오해와 자기기만에 빠져있을 뿐입니다.

무저갱에 빠진 상태에서는 누구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자녀를 사랑한다고 말하고, 애인을 사랑한다고 말하고, 나라를 사랑한다고 말할지라도 그것은 자기기만일 뿐입니다. 마음이 무저갱에 빠져서 질식할 것 같으니까, 널조각을 찾고 있다가 무엇인가를 붙잡았을 뿐입니다. 어떤 사람은 나라를 널조각으로 붙잡고, 어떤 사람은 배우자를 널조각으로 붙잡고, 어떤 사람은 자녀를 널조각으로 붙잡습니다. 하다못해 애완용 강아지나 고양이를 널조각으로 붙잡아서 마음을 두고자 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살겠으니까, 이곳저곳에 마음 둘 곳을 찾고 있을 뿐입니다. 숨을 쉴 수 없는 짙은 연기의 바다에 빠진 사람은 누구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 사랑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영적인 세계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모르는 장님과 같은 상태일 뿐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온 세상의 모든 문학가와 사상가와 철학자들이 아무리 사랑을 말할지라도 장님일 뿐입니다. 어린 양에 의해서 역사가 진행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어린 양 제단의 숯불로 나를 죽이지 않으면 진리를 알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말하는 모든 철학과 사상과 가르침은 거짓말일 수밖에 없습니다. 무저갱에 빠진 상태에서 육체가 살아있다는 이유 때문에, 육체로 만나는 것들 중에 하나를 널조각으로 붙잡고 겨우 버티고 있는데, 누가 누구를 가르치고 누가 누구를 사랑하겠습니까? 정말로 죄송하지만 웃기는 소리입니다.

권사님께서 남편을 잃었을 때 느꼈던 캄캄함과 질식할 것 같은 고통은 남의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인침 받지 못한 사람들이 육체가 죽었을 때 무저갱에 들어가서 영원히 당하게 될 고통입니다. 육체가 있는 동안에는 육체로 만나는 것들에서 마음 둘 곳을 찾습니다. 자기를 속이면서 버티고 있는 중입니다. 태평양 한가운데서 널조각 하나를 붙잡고 수면 밖으로 고개를 내밀며 빠지지 않으려고 버티는 상태가 지구의 80억 인구가 처해있는 상황이고, 어린 양을 등지고 사는 모든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계시록은 바로 이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5절을 보면 황충과 관련하여 “그러나 그들을 죽이지는 못하게 하시고 다섯 달 동안 괴롭게만 하게 하시는데 그 괴롭게 함은 전갈이 사람을 쏠 때에 괴롭게 함과 같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앞서 예로 든 권사님의 남편이 돌아가신 후에 죽은 사람처럼 병원 신세를 졌다고 했습니다. 몇 년 동안 붙잡을 널조각 없이 바닥을 찾느라 질식할 것 같은 상태에서 버티셨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아들을 새로운 널조각으로 붙잡고 무저갱과 같은 상태에서 벗어납니다. 다섯 달 동안만 괴롭게 하라는 것은 바로 이러한 기간을 의미합니다.

상징적으로 ‘열 달’은 붙잡을 널조각 하나 없이 완전히 무저갱에 빠져서 견딜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견딜 수 없음을 피할 수 없이 영원히 당하는 곳이 무저갱이고 지옥입니다. 지옥의 맛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경험 속에서 마음 둘 곳이 사라졌을 때 어떤 고통을 느꼈는가를 기억해 보시면 됩니다. 그 고통이 빠져나갈 수 없이 영원히 지속되는 상태가 다름 아닌 무저갱입니다. 육체가 죽으면 하나님의 인침을 받지 못한 모든 사람이 그렇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살아있는 동안에 무저갱의 분위기를 야박하게 미리 맛보게 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 때문입니다. 혹시 돌아설 마음을 갖기를 바라시며 무저갱 속의 분위기를 꺼내어 느끼게 하십니다. 육체가 죽으면 어떤 고통을 받는지 미리 가르쳐주시며 ‘지금 네가 마음 둘 곳으로 붙잡고 있던 것들을 내가 제거해 보겠다. 이제 네 마음의 고통을 한 번 살펴봐라.’라고 말씀하고 계신 셈입니다. 질식할 것 같아서 죽고만 싶은데 죽을 수도 없습니다. 그런 상황과 고통을 영원히 당하며 살아야 할 것임을 알았다면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도 마음 둘 곳이 사라지는 고통을 경험해 보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무저갱의 고통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마음 둘 곳이 사라진 순간에 느껴지는 고통이 바로 무저갱의 고통입니다. ‘너는 육체가 살아있기에 육체로 만나는 무엇인가를 널조각으로 붙잡고 버티고 있을 뿐이다. 무저갱 속에 있으나 바닥이 없다는 무서움을 스스로 속이고 있고 임시로 면하고 있을 뿐이다. 결국 육체가 죽으면 빠질 무저갱의 고통을 알았다면 이제 돌아서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누가 인침 받은 자인지 알 수 없습니다. 인침 받았다고 해서 처음부터 세상에서 널조각을 찾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갖고 싶다고 달려드는 사람은 없습니다. 알아서 하나님께 마음을 두는 사람도 없습니다. 전부 무저갱 속에 빠져있는 죄와 저주 속에서 육체로 만나는 대상을 널조각 삼아 버티다가 어린 양 예수를 믿고 돌이킨 것입니다. 어린 양 예수의 십자가 제단에서 나를 죽이기를 일로 삼으면서 하나님을 갖게 되고 마음을 두게 되는 과정을 겪습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널조각을 제거하심으로써 무저갱의 고통을 느끼는 사람에게 어린 양을 제시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마음 둘 곳을 하나님으로 바꾸라고 말해주는 것은 기회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단번에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람이 하나님의 인침 받은 자가 아니라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사도행전 8장 3절을 보면 회심하기 전 사도 바울에 대해 묘사하기를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교회를 잔멸한다고 번역된 원문은 잘 가꾸어진 포도원을 멧돼지가 초토화하는 모습으로 비유한 것입니다. 사울이 교회를 초토화할 때 누구도 그가 하나님께 인침 받은 자임을 알 수 있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지금 널조각을 잃어버려 무저갱의 고통을 당하면서도, 하나님께 돌아서려는 마음을 갖지 못한다고 해서, 그가 하나님의 인침을 받지 못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의 육체가 없어졌을 때 들어가야 하는 짙은 연기의 바다인 무저갱의 상황을 세상에서 경험하게 해주십니다. 사탄을 일꾼으로 사용하셔서 겨우겨우 버티는 널조각을 없애심을 통해 계속해서 미리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아무쪼록 우리 생애에서 마음을 두었던 널조각이 사라진 고통의 기억을 되살려서 무저갱으로부터의 완전한 대탈출을 이루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어린 양만을 있는 힘을 다해 바라보는 하루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황충에 관한 묘사는 주일 저녁 온라인 교회 모임을 통해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마음 두며 붙잡고 있었던 널조각들을 제거하심으로 무저갱의 고통이 어떤 것인가를 맛보게 하셨음에 감사드립니다. 또한 그것에 힘입어 오직 하나님만을 향하여 마음 둘 수 있도록 인도하심이 태산 같은 은혜임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오늘도 오직 어린 양과 함께 하나님께만 마음을 다 둘 수 있기 위하여, 이것을 본래의 과업으로 삼을 수 있도록 우리를 붙잡아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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