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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뿌듯한 세상적 성취감이 부르는 재앙>의 줄거리 :
여섯 번째 나팔 재앙은 세상 것을 희망하며 추구하는 단계에서는 아직 임하지 않는 재앙입니다. 세상 것을 희망하는 단계는 아직 회개의 기회로 허락하시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세상 것을 이루고 가졌다는 뿌듯한 성취감이 생기면서 반드시 찾아오는 재앙이 있습니다. 육체가 살아 있는 동안 이 세상적인 성취감을 느끼는 마음 안으로 불과 연기와 유황이 가득 차는 재앙입니다.
뿌듯한 세상적 성취감이 부르는 재앙
(요한계시록 9:13~21)
13. 여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내가 들으니 하나님 앞 금 제단 네 뿔에서 한 음성이 나서
14. 나팔 가진 여섯째 천사에게 말하기를 큰 강 유브라데에 결박한 네 천사를 놓아 주라 하매
15. 네 천사가 놓였으니 그들은 그 년 월 일 시에 이르러 사람 삼분의 일을 죽이기로 준비된 자들이더라
16. 마병대의 수는 이만 만이니 내가 그들의 수를 들었노라
17. 이 같은 환상 가운데 그 말들과 그 위에 탄 자들을 보니 불빛과 자줏빛과 유황빛 호심경이 있고 또 말들의 머리는 사자 머리 같고 그 입에서는 불과 연기와 유황이 나오더라
18. 이 세 재앙 곧 자기들의 입에서 나오는 불과 연기와 유황으로 말미암아 사람 삼분의 일이 죽임을 당하니라
19. 이 말들의 힘은 입과 꼬리에 있으니 꼬리는 뱀 같고 또 꼬리에 머리가 있어 이것으로 해하더라
20. 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손으로 행한 일을 회개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여러 귀신과 또는 보거나 듣거나 다니거나 하지 못하는 금, 은, 동과 목석의 우상에게 절하고
21. 또 그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둑질을 회개하지 아니하더라
본문에는 여섯 번째 나팔 재앙에 관한 말씀이 기록되었습니다. 여섯 번째 나팔 재앙 또한 다른 재앙들에 대한 말씀과 마찬가지로 이해하기 어려운 상징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열심히 노력하고 애써서 원하는 것을 성취합니다. 그럴 때 뿌듯한 자부심과 성취감이 생깁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는 동안 갖게 되는 세상적인 성취감은 본문에 기록된 대로 여섯 번째 재앙을 불러오게 됩니다.
본문 말씀을 보면 대체 어떤 부분이 ‘뿌듯한 세상적 성취감이 부르는 재앙’이라는 제목과 연결될 수 있을지 언뜻 생각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본문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 붙잡아야 될 키워드가 하나 있습니다. 먼저 13절을 보면 “여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내가 들으니 하나님 앞 금 제단 네 뿔에서 한 음성이 나서”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보좌 앞 금 제단에는 네 모서리에 뿔이 있는데 거기서 한 음성이 들렸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음성의 내용이 14절에서 이어집니다. “나팔 가진 여섯째 천사에게 말하기를 큰 강 유브라데에 결박한 네 천사를 놓아 주라 하매”라고 하였고, 16절에서는 “마병대의 수는 이만 만이니 내가 그들의 수를 들었노라”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요한은 그 광경을 보며 풀려난 네 천사에 의해 나타난 마병대의 수가 이만 만이라고 기록합니다. ‘이만 만’이란 이만의 만 배로써 이억이라는 엄청난 숫자입니다. 사도 요한은 셀 수없이 많은 마병대가 돌풍처럼 밀려오는 광경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마병대의 모습이 무척 특이합니다. 17~19절을 보면 “이 같은 환상 가운데 그 말들과 그 위에 탄 자들을 보니 불빛과 자줏빛과 유황빛 호심경이 있고 또 말들의 머리는 사자 머리 같고 그 입에서는 불과 연기와 유황이 나오더라고 하였고 / 이 세 재앙 곧 자기들의 입에서 나오는 불과 연기와 유황으로 말미암아 사람 삼분의 일이 죽임을 당하니라 / 이 말들의 힘은 입과 꼬리에 있으니 꼬리는 뱀 같고 또 꼬리에 머리가 있어 이것으로 해하더라”라고 하였습니다. 대체 이러한 상징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알고 있는 단어들의 내용을 기억하며 본문의 내용을 차분히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다시 13절을 보면 “여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나님 앞 금 제단 네 뿔에서 한 음성이 나서”라고 하였습니다. 앞서 본 말씀에서 우리는 ‘금 제단’이 암시하는 바에 대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린 양 십자가 제단의 불로 죄와 저주에 찌든 나를 죽이면, 부활하신 어린 양과 함께 부활한 마음은 향기로운 연기가 되어 하늘로 올라가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늘로 올라간 마음은 금 제단에 도달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는 주님이 계심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보좌 우편에 도달한다는 것은 금 제단이 의미하는 바와 같습니다. ‘하나님 보좌 우편’이란 하나님과 나 사이에 어떤 것도 끼어들 수 없는 밀착된 관계가 가능한 자리임이 강조된 표현이라면, 금 제단은 내 마음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의미를 강조한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금 제단이나 보좌 우편이나 같은 상황을 가리키는 말인데 강조점이 다른 것입니다.
우리가 금 제단에서 마음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은 아는 사람에게 선물을 주듯이 넘기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드린 마음은 공백을 채우려는 흡입력이 24시간 작용하고 있습니다. 마음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을 흡입하는 자리에 이르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마음을 예물처럼 받으시고, 하나님만을 흡입해서 가지려는 마음을 좋게 여기십니다. 이것이 마음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라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와 관련하여 네 천사에 의해 나타난 마병대의 모습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사람을 죽이는 재앙을 가져오는 마병대의 말들의 머리가 사자 머리 같다고 했습니다. 앞서 우리는 네 생물에서 사자에 대한 의미를 살펴보았습니다. 사자란 정말로 좋은 것을 가진 자에게서 나타나는 당당함을 의미합니다. 진짜 좋은 것을 가진 성취감의 드러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재앙을 가져오는 말의 머리가 사자 머리 같다는 것은 죽임을 당하는 자들의 당당함을 상징합니다. 문제는 재앙을 당하는 자들은 어린 양을 등지고 살았던 자들이고, 마음을 어린 양 제단의 불로 태워 향연으로 드리지 못하여 금 제단에 이르지 못한 자들입니다.
‘금 제단 네 뿔에서 한 음성이 났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금 제단을 통해 보실 때 올라오지 않은 마음이 있음을 보셨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성취감을 갖지 않고 여전히 세상에 남아있는 마음들에 대해 재앙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마병대의 말들의 머리가 사자의 머리 같다’는 것은 하나님이 아닌 이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해 성취감을 느끼는 자들에게 재앙이 임함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꼬리가 뱀 같고 또 꼬리에 머리가 있어’라고 했습니다. 꼬리에 사람의 머리가 있다는 것은 꼬리 자체가 인격성을 띤 뱀이라는 뜻입니다. 인격성을 띤 뱀이 한 일은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하나님과 결별하게 했습니다. 이 또한 머리가 사자 머리 같다는 표현과 의미하는 바가 같습니다. 하나님과 결별하고 이 세상 것을 성취하여 당당함을 드러내는 자들에게 재앙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한편 20~21절을 보면 이 재앙에도 죽지 않고 산 사람이 있음이 묘사됩니다. “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손으로 행한 일을 회개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여러 귀신과 또는 보거나 듣거나 다니거나 하지 못하는 금, 은, 동과 목석의 우상에게 절하고 / 또 그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둑질을 회개하지 아니하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이들은 세상 것을 소망하고 추진하고 열망하는 것은 동일하지만 성취감에 취하지 못한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리시는 자들은 성취감에 취한 자들입니다. 그리고 네 천사는 사람 삼분의 일을 죽이기로 준비된 자들입니다. 15절에 “네 천사가 놓였으니 그들은 그 년 월 일 시에 이르러 사람 삼분의 일을 죽이기로 준비된 자들이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앞서 숫자 3이란 하늘을 가리키는 완전 숫자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따라서 온전한 3을 이루지 못하는 삼분의 일은 완전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을 보니 세상의 성취감이 가득하여 겉으로 당당함이 나타납니다. 정작 그 마음을 보니 온전한 하늘의 성취감은 없고, 세상 것에 대한 온전치 못한 삼분의 일짜리 성취감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 하늘 성취감이 아닌 세상의 성취감으로 가득 찬 사람들 전체를 죽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 삼분의 일을 죽인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죽인다는 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공백의 마음은 영입니다. 영이신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지음 받았기에 영입니다. 그리고 한 번 지음 받은 영은 죽지 않습니다. 생명이란 하나님이 들어오셔서 마음이 채워진 상태입니다. 채움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인간의 영이고 마음이기에, 그 존재 이유가 채움에 있습니다. 반대로 죽인다는 것은 채움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사자 머리를 한 마병대가 불과 연기와 유황으로 사람을 죽인다고 했습니다. 이는 곧 채워져야 존재의 의미가 있는 마음에 불과 연기와 유황을 쏟아붓는 것입니다. 이러한 재앙을 당하는 자들은 이 세상 것을 희망하여 추구하고 달려가서 성취한 사람들입니다. 세상 것을 부여잡고 마음에 가득 담음을 통해 성취감과 뿌듯한 자부심도 느꼈습니다. 사자 머리가 뜻하듯이 당당함을 표현하는 사람들에게, 마치 소돔과 고모라에 불과 유황이 쏟아져 멸망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 마음에 불과 연기와 유황이 가득히 쏟아지는 것과 같은 일이 벌어지리라는 것입니다. 불은 태우는 것입니다. 불이 임할 때 성취감에 취하게 만들었던 세상 것들은 불타서 재가 됩니다. 연기가 남을 뿐인데 그 연기는 향기로운 연기가 아닙니다. 유황을 태울 때 나오는 아황산가스처럼 마음에 독가스가 가득 차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본문의 내용을 좀 더 생각해 봅니다. 다시 14절을 보면 “나팔 가진 여섯째 천사에게 말하기를 큰 강 유브라데에 결박한 네 천사를 놓아 주라 하매”라고 하였습니다. 여섯째 나팔 재앙은 금 제단에서 나온 이 음성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사탄이나 귀신이 결박되어 있었다면 이해가 쉽겠지만, 네 천사가 결박되어 있었다는 상황 자체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주석들은 이 천사들을 악한 천사들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먼저 유브라데강이란 이스라엘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가장 무섭고 두려웠던 적대 세력의 발원지입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수르, 남 왕국 유다를 초토화시킨 바벨론, 그 뒤를 이어 패권을 쥐게 되는 메데나 바사 같은 나라들은 모두 유브라데강 주변에서 일어난 세력입니다. 그러한 유브라데강에 네 천사가 결박되었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앗수르나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했던 상황을 염두에 두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이스라엘이 외적의 침입에 시달릴 때는 언제나 하나님이 아닌 세상 것을 좋아하고 추구할 때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세상 가치의 추구는 바알과 아세라 숭배로 나타났습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 대신에 재물을 더 좋아했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북 왕국 이스라엘과 남 왕국 유다는 각각 멸망했습니다.
결박당한 네 천사는 악한 천사들이 아닙니다. 하늘에서 하나님의 좋으심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팬이 된 천사들입니다. 하나님을 광적으로 좋아하는 천사들입니다. 그런데 이 천사들이 사람을 바라볼 때 분노를 느낍니다. 사람들이 가장 좋으신 하나님을 못 본 체하며 세상에 있는 것들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마치 민수기 25장에 기록된 싯딤에서의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 3절을 보면 “이스라엘이 바알브올에게 가담한지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니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바알브올은 ‘브올에서 섬기는 바알’이라는 뜻입니다. 바알은 풍요와 다산을 관장하던 남신입니다. 이스라엘 남자들이 모압 여자들과 행음하면서 바알 숭배에 참여하였고, 이스라엘 진영까지 모압 여자들을 끌어들이게 됩니다. 이때 아론의 손자 비느하스가 창을 들고 모압 여자와 행음하는 남자를 동시에 꿰뚫어 죽입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11절에서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내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내 노를 돌이켜서 내 질투심으로 그들을 소멸하지 않게 하였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네 천사는 유브라데강에서 발원한 앗수르나 바벨론이 선민 이스라엘을 멸망시켰듯이 하나님의 질투를 자기 질투로 받은 자들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아닌 세상 것을 성취하겠다고 몸부림치며 살고 있는 자들에게 재앙을 내리는 역할을 합니다. 특별히 그 대상은 세상 것을 이뤘다고 성취감에 빠져있는 자들입니다. 세상을 희망하는 단계에서는 세상을 향해가고 있을 뿐이지만, 세상을 성취한 단계에서는 이미 세상과 하나로 붙어버린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비느하스가 창으로 찔러 죽인 이스라엘 남자와 모압 여자가 한 몸이었던 것과 같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돈 벌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그런데 원하는 대로 돈을 번 사람은 이 정도면 많이 벌었다고 성취감을 갖겠지만, 이 상태는 비느하스가 창으로 찔러 죽인 남녀와 같이 세상과 내가 일체가 된 것입니다. 돈뿐만 아닙니다. 승진을 이루었다고 성취감을 갖고, 명예나 업적을 남겼다고 성취감을 가진다면 세상과 일체가 된 상황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 대해 네 천사는 분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을 결박하지 않는다면 모든 사람들이 다 죽게 생긴 상황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네 천사를 결박하셔서 세상과 일체가 된 사람들만 죽이도록 허락하십니다. 이를테면 천사들을 제지시킨 것입니다.
흰옷 입고 종려나무 가지를 든 자들은 어린 양의 제단에서 날마다 불을 가져다가 자기를 죽이는 자들입니다. 이러한 자들을 제외하고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 행음하는 상태이기에 죽여야 마땅한 상황입니다. 하나님 외에 세상것에 군침 흘리며 달려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들 중에서 삼분의 일만 죽이도록 허락하십니다. 그들은 사자 머리가 뜻하는 대로 세상것을 얻었다고 성취감을 느끼는 자들입니다. 이 죽음은 몸의 죽음이 아닙니다. 그들의 마음이 생명을 얻을 수 없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세상과 하나가 되어서 성취감을 느끼는 영적 간음의 절정 상태에 다다랐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용납하실 수 없는 상태입니다. 20~21절을 보면 살아남은 자들은 여전히 세상을 향하여 우상을 숭배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다행이라고 말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적어도 아직은 세상 것을 원하는 만큼 성취하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세상것에 성취감을 느낄 정도라면 하나님께서 도저히 용납하실 수 없는 영적 간음의 절정 상태입니다. 이러한 자들의 마음에 불과 연기와 유황이 쏟아질 것입니다.
성취감을 느끼는 이유는 다양할 수 있습니다. 자녀가 일류대학에 들어간 것에 성취감을 느낍니다. 돈을 많이 벌어서 성취감을 느낍니다. 승진을 해서 성취감을 느낍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모습을 부러워하지만 정작 성취감을 느끼는 당사자는 성취감이 며칠도 못 갈 것임을 스스로 알 것입니다. 돌아서면 마음에 걱정 근심이 생깁니다. 그렇게 기쁜 일이라면 이 기쁨으로 한없이 살 수 있어야 할 것인데 그렇지 않습니다. 마음에 불이 임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취감을 가지게 했던 세상 것이 타면서 연기로 가득 차게 됩니다. 그 연기는 그냥 연기가 아니라 유황이 탈 때 발생하는 아황산가스와 같은 독가스입니다.
우리는 유명인들의 자살 이야기를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습니다. 그중에는 마릴린 먼로나 어니스트 헤밍웨이 같은 사람들이 대표적입니다. 그 외에도 우리 주변에는 세상 것에 대한 성취감을 가지고 당당함과 뿌듯함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런 사람들이 뒤로는 도저히 인간으로 할 수 없는 짓을 하거나, 갑질을 하거나, 성격파탄자가 되는 경우도 어렵잖게 볼 수 있습니다. 불과 연기와 유황이 그 마음에 가득 찼기 때문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변태들로 가득한 행음의 도시였습니다. 그 소돔과 고모라는 불과 유황이 임해서 망했습니다. 마음에 불과 연기와 유황이 부어진다는 것에는 같은 의미가 있습니다. 마음을 태워 죽이는 것과 같은 일이 벌어지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섯 번째 나팔 재앙의 내용입니다.
이 여섯 번째 재앙을 다섯 번째 무저갱의 재앙과 비교해 봅니다. 무저갱의 재앙은 육체가 살아있을 때 무저갱의 분위기가 고스란히 재현되면서 휩싸이는 재앙입니다. 무저갱 재앙이 임하는 자들은 마음 둘 곳으로 하나님이 아닌 세상 것을 붙잡는 자들입니다. 무저갱은 바다처럼 바닥이 닿지 않는 연기의 구덩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바다에 빠진 사람이 떠있기 위해서 널조각 하나를 붙잡고 몸부림을 치듯이, 무저갱의 저주를 받은 자들은 세상에서 마음 둘 곳을 찾아서 붙잡고자 합니다. 그 대상은 배우자일 수도 있고, 자녀일 수도 있고, 노후연금 등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대상을 널조각으로 잡고 살아있는 상태에서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제거하심으로써 무저갱에 들어갔을 때의 맛을 보게 하십니다.
이와 비교하여 여섯 번째 재앙은 하나님께서 들어오셔야 채워질 수 있는 크기의 마음이 무저갱이 되어버리는 재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저갱을 열 때 짙은 연기와 황충이 나왔습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에 불과 연기와 유황이 들어와서 가득해진 것입니다. 다섯 번째 재앙은 무저갱의 분위기에 휩싸이는 것으로써 마음 둘 곳에 연관하여 나타났습니다. 한편 여섯 번째 재앙은 마음 채움과 연관하여 나타나는 것으로써, 사자 머리가 뜻하는 대로 세상 것에 성취감을 느끼는 자들의 마음이 당당함으로 느껴짐으로, 불과 연기와 유황으로 가득 찬 무저갱이 되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인격 자체가 근본적으로 망가지는 일은 세상 것을 성취하기 위해 달려가고 있는 자들에게서는 아직 나타나지 않습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덜 나타납니다. 완전한 인격 파탄은 세상의 성취감에 취했을 때 나타납니다. 천 년 전이나, 이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사람의 삶은 다르지 않습니다. 세상 것에 대한 성취감으로 일체를 이룬 상황은 유브라데강에 네 천사가 결박되어 있다가 풀리듯이, 그러한 질투와 분노로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의 마음에 불과 연기와 유황으로 채우실 것입니다. 이 세상 것을 가졌다는 성취감에 취하는 모든 자들은 여섯 번째 나팔 재앙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
성취감에 목말라하던 자들이 어느 정도 성취했음을 자각할 때 나타나는 대표적인 일이 인격 파탄입니다. 미국이나 유럽을 비롯한 서구 선진국들에서 온갖 변태적인 행음이 벌어지고 각종 마약이 유행하고 있음을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일찍이 민주주의가 발달하여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었고, 인간이 성취할 수 있는 한계에 도달할 정도로 사회가 발전하자 오히려 퇴폐와 부패와 썩음이 나타납니다.
세상 것을 가진 당당함의 문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 것은 있어도 있는 것이 아니고, 없어도 없는 것이 아닙니다. 있어도 하나님의 뜻대로 있는 것이고, 없어도 하나님의 주권하에서 없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닿을 대상이 아닙니다. 세상 것이 없음에 마음이 닿아서 희망하고 달려가는 것도 문제이고, 희망하던 세상 것을 실제로 성취했다고 마음이 취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은 성취감을 가지고 당당하게 사자 머리 같은 모습을 보이는 자들에게 임하는 재앙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성취가 하늘의 것이 아닌 세상의 것입니다. 금 제단에 올라간 마음으로 하나님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것을 성취해서 성취감에 취해버린 행음의 절정에 도달한 자들에 대한 재앙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도저히 그 꼴을 보실 수 없다고 여기시며, 하나님의 질투심으로 마음이 분노하는 네 천사를 유브라데에 묶어두셨다가 성취감에 취한 사람들을 죽이게 하십니다. 아직 세상 희망을 향해가는 어설픈 자들은 그 대상이 아닙니다.
네 천사는 마치 ‘네가 성취했다고 그렇게 당당하냐? 그렇다면 내가 진짜 당당함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마.’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당당함을 상징하는 말들로 이루어진 이억의 마병대를 오늘도 전 세계에 퍼뜨리며 세상에서 크든 작든 성취감을 갖는 모든 자들의 마음에 불과 연기와 유황을 퍼붓고 있습니다. 20~21절은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세상 것을 성취하기 위하여 달려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당시의 우상숭배는 일종의 재테크 방법이었습니다. 어떻게 돈을 버느냐, 어떻게 재산을 불리느냐, 어떻게 풍요와 다산을 이루느냐, 어떻게 부흥하고 발전하는 삶을 사느냐의 방법 중 하나로 우상숭배가 이용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상숭배는 단순히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 아닌 재산 증식의 방편이었습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세상 것을 성취하는 단계로 못 가서 안달복달 살고 있습니다. 이것을 이루었으면 좋겠고, 저것을 이루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더 많이 가졌으면 좋겠다, 하나님으로 배불렀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갖는 사람들은 거의 없습니다. 모두가 세상 것으로 배부르려는 세상 성취감을 향해 달려가고자 합니다.
그러나 성취감에 도달하는 그 순간 하나님의 질투를 품은 네 천사는 마병대를 보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네 천사들의 분노를 제지하고 계시지만 내가 세상 것에 대해 성취감을 느끼고 당당하고 뿌듯해할 때, 불과 연기와 유황의 재앙은 마음에 가득히 스며들어 오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 재림 때까지 태어날 모든 인간에게 마땅히 적용될 일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도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불쌍히 여기셔서 하나님의 질투로 분노하는 네 천사의 재앙을 맞이할 정도까지는 이르지 않게 해주셨습니다. 세상 것에 성취감을 느끼는 자리에 가지 못하도록 틀어막아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이제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 이전에 목숨 걸고 세상 것을 성취하고 싶어 했던 그 열정으로 하나님만을 성취하기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