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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축복 약속인데 입에 달뿐 배엔 쓰다>의 줄거리 :
일곱 나팔 재앙이 쏟아지는 세상에서 그런 재앙이 합당한 사람들과 더불어 삶의 현장을 사는 성도에게는 어떤 상황이 주어지는 것일까요? 재앙 대신에 구름 속에서 빛나는 무지개를 표시로 삼아 축복 약속이 주어집니다. 그런데 이 축복 약속이 입에는 달지만 배에는 쓰다는 것입니다. 축복 약속이란 쓰디쓴 가루약에 당의정을 입힌 것이라도 된다는 뜻일까요? 그런 축복 약속을 과연 나는 받아먹어야만 할까요?
축복 약속인데 입에 달뿐 배엔 쓰다
(요한계시록 10:1~11)
1. 내가 또 보니 힘센 다른 천사가 구름을 입고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그 머리 위에 무지개가 있고 그 얼굴은 해 같고 그 발은 불기둥 같으며
2. 그 손에는 펴 놓인 작은 두루마리를 들고 그 오른 발은 바다를 밟고 왼 발은 땅을 밟고
3. 사자가 부르짖는 것 같이 큰 소리로 외치니 그가 외칠 때에 일곱 우레가 그 소리를 내어 말하더라
4. 일곱 우레가 말을 할 때에 내가 기록하려고 하다가 곧 들으니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말하기를 일곱 우레가 말한 것을 인봉하고 기록하지 말라 하더라
5. 내가 본 바 바다와 땅을 밟고 서 있는 천사가 하늘을 향하여 오른손을 들고
6. 세세토록 살아 계신 이 곧 하늘과 그 가운데에 있는 물건이며 땅과 그 가운데에 있는 물건이며 바다와 그 가운데에 있는 물건을 창조하신 이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되 지체하지 아니하리니
7. 일곱째 천사가 소리 내는 날 그의 나팔을 불려고 할 때에 하나님이 그의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하나님의 그 비밀이 이루어지리라 하더라
8. 하늘에서 나서 내게 들리던 음성이 또 내게 말하여 이르되 네가 가서 바다와 땅을 밟고 서 있는 천사의 손에 펴 놓인 두루마리를 가지라 하기로
9.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두루마리를 달라 한즉 천사가 이르되 갖다 먹어 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 하거늘
10.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갖다 먹어 버리니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11. 그가 내게 말하기를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하더라
하나님께서 축복의 약속을 주십니다. 그 축복의 약속은 받아들일 때 입에는 달고 배에는 씁니다. 마치 쓰디쓴 가루약을 그냥 먹을 수 없어서 당의정을 입혀놓은 것과 같은 상황입니다. 다분히 속이는 것 같은 축복의 약속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사람이 무엇인가를 먹으면 입에 머무는 시간은 짧아도 배에 머무는 시간은 깁니다. 따라서 입에는 써도 배에는 단 것이 좋은 것으로 여겨지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상황은 반대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나팔 재앙까지 살펴보았습니다. 무시무시한 내용의 재앙들이었습니다. 다섯 번째 나팔 재앙은 내 마음이 무저갱의 분위기와 기운에 휩싸이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여섯 번째 재앙은 세상 것을 가질 때 성취감으로 인한 자부심과 당당함을 가지고 사는 자들에게 임합니다. 말들의 머리가 사자 머리 같은 이만 만의 마병대가 온 지구상에 퍼져가면서 이들의 마음에 불과 연기와 유황을 가득 불어넣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일곱 번째 재앙으로 넘어가기 전에 삽화처럼 끼어있는 내용이 본문입니다.
지금까지 여섯 번에 걸친 무시무시한 나팔 재앙이 주어진 이유는 8장에 기록된 대로 어린 양 십자가 제단의 불로 죄와 저주에 찌든 자기 자신을 날마다 죽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나를 마땅히 죽이는 용도로 준비된 제단의 불들이 이 땅에 쏟아지면서 재앙으로 임하게 되는 것이 나팔 재앙들이었습니다. 한편 성도는 어린 양의 십자가 제단의 불로 죄와 저주에 찌든 자기 자신을 날마다 죽이며 사는 자들입니다. 본문에서는 여섯 번에 걸쳐 재앙이 내려오는 가운데 성도들에게 벌어지는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도들은 나팔 재앙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팔 재앙을 받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야만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1절을 보면 “내가 또 보니 힘센 다른 천사가 구름을 입고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그 머리 위에 무지개가 있고 그 얼굴은 해 같고 그 발은 불기둥 같으며”라고 하였습니다. 힘센 다른 천사가 나타나는데 이 천사는 앞서 여섯 번의 나팔 재앙을 불러온 천사나, 앞으로 마지막 일곱 번째 나팔 재앙을 불러올 천사와 다른 존재입니다. 다르다는 것에는 또 하나의 천사라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그 역할이 재앙을 주는 것이 아니라 다른 임무를 수행하는 천사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천사가 구름을 입고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머리 위에 무지개가 있다는 표현은 노아 홍수를 연상시킵니다. 노아 홍수가 임하여 세상의 모든 사람이 멸절된 뒤에 방주에서 나온 노아와 노아의 가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구름 속의 무지개를 통해 다시는 홍수로 인한 재앙을 내리지 않으실 것과 땅에서 번성하도록 축복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을 의미하는 구름 속 무지개의 모습은 이제까지 나타났던 재앙과는 분위기가 반대입니다.
또한 그렇게 축복의 약속을 가져오는 천사의 얼굴은 해 같다고 했습니다. 얼굴이 해 같다는 의미는 달과 비교할 때 분명해집니다. 달은 햇빛을 받아 반사함으로써 빛을 냅니다. 달빛은 반사체의 빛입니다. 그러나 해는 누구에게 빛을 받아서 반사하지 않습니다. 해는 스스로 빛을 내는 발광체입니다. 이로부터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주시는 구름 속 무지개의 약속이 어떤 것인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가만히 보고 계시다가 훌륭하게 잘살고 있으면 축복을 약속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결정하신 대로 축복의 뜻을 발휘하십니다. 재앙은 사람들이 사는 모습에 대해 하나님이 반응하신 결과입니다. 사람들이 사는 모습에 대한 반사작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에게 주시려는 축복은 반사작용이 아닙니다. 성도가 어떻게 사는가를 보신 후에 축복을 주시겠다고 결정하시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결정하신 대로 주시는 것입니다.
성도는 여섯 번의 나팔 재앙이 합당한 자들과 다를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직접 성도로 선택하셨습니다. 누구의 의견을 듣거나, 누구의 요청을 받거나, 사는 모습이 훌륭해서 성도로 선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해가 스스로 빛을 발하듯이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진 결정으로 축복의 약속을 발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하나 생깁니다.
창조주이시고 주권자이시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복이라고 여기시는 것을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약속을 주셨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평가될 만한 사람이 아닌데 축복의 약속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해가 빛을 발하듯이 하나님께서는 축복의 약속을 스스로 결정하신 대로 하실 것입니다. 천사의 발이 불기둥 같다는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여기에 있습니다.
여섯 가지 재앙에 합당한 자들과 함께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성도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구름 속 무지개 축복의 약속을 허락하셨습니다. 재앙을 맞이하는 사람들은 재앙에 부합한 삶을 살았기에 재앙이 임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축복을 받는 사람은 축복에 부합한 삶을 살았기에 축복이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런 자격이 없음에도 하나님께서 축복을 주시기로 결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천사의 발이 불기둥 같다고 하였습니다. 불은 태워 죽이는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세상은 땅과 바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는 곧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이 땅과 바다에 닿아서 이루어지려면 태워 죽이는 역사가 일어나야 함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이 일어나야 하는 장소는 바로 성도의 마음 안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은 태워 죽이는 역사를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이어서 2절을 보면 “그 손에는 펴 놓인 작은 두루마리를 들고 그 오른발은 바다를 밟고 왼발은 땅을 밟고”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일곱 인으로 봉해진 두루마리를 어린 양이 뗌으로써, 역사 전반에 걸친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져 감을 살펴보았습니다. 이것은 어린 양을 중심축으로 역사가 돌아간다는 표현을 통해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구름 속 무지개로 상징되는 축복의 약속을 가져오는 천사도 손에 작은 두루마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루마리는 처음부터 펴져 있습니다. 두루마리가 펴져 있다는 것은 작은 두루마리에 적힌 내용이 어린 양을 중심축으로 돌아가는 전체 역사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어린 양을 중심축으로 돌아가는 역사는 어린 양을 등지고 사는 사람과 어린 양을 향해 사는 사람 모두를 포함합니다. 작은 두루마리는 이렇게 전 세계의 역사가 진행되는 중에, 특별히 성도에게 해당되는 축복의 약속된 부분이 주어지고 성취되는 이야기가 마치 별책부록처럼 따로 구분되어 있음을 상징합니다. 전체 역사 속에서 성도들은 여섯 가지의 나팔 재앙이 내려오는 가운데 사람들과 함께 세상을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는 나팔 재앙과 관계없는 성도들에게 구름 속 무지개 약속을 주십니다. 그 약속을 받고 성취되는 이야기가 기록된 책이 천사의 손에 펴져 있는 작은 두루마리입니다.
3절을 보면 “사자가 부르짖는 것 같이 큰 소리로 외치니 그가 외칠 때에 일곱 우레가 그 소리를 내어 말하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우렛소리가 한 번만 들려도 다른 소리는 모두 묻혀 버립니다. 일곱 우레란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의 약속을 들을 때 도저히 다른 축복에 대해서는 생각할 수 없음을 가리킵니다. 오직 하나님의 축복만을 들을 수밖에 없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고, 생각할 수밖에 없을 만큼 좋은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일단 축복의 약속이 들린 사람에게는 다른 축복은 존재하지 않는 상태가 되어버립니다.
우렛소리는 다른 모든 소리를 죽입니다. 우렛소리가 날 때는 그 소리만을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무려 일곱 우레가 축복의 약속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다른 축복에 관해서는 절대로 생각할 수 없음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그 일곱 우레가 사자의 부르짖음 같다고 했습니다. 사자의 부르짖음은 축복의 약속 부분의 구체적인 내용을 뜻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본문은 여섯 번째 나팔 재앙과 일곱 번째 나팔 재앙 사이에 삽입된 내용입니다. 여섯 번째 나팔 재앙에서는 유브라데강에 결박되었던 천사가 풀리면서 이만 만의 마병대가 전 지구를 향해 달려가며 사람들에게 재앙을 퍼붓는 장면이 묘사되었습니다. 그 말들의 머리가 사자 머리 같은 모습이 암시하는 대로 이러한 재앙을 받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좋다고 하는 것들을 가짐으로써 성취감을 느끼고 그 성취감에 도취된 당당함을 보이는 자들이었습니다. 세상 것을 많이 가짐으로 당당한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사자 머리의 말들을 보내심으로써 불과 연기와 유황을 그 마음에 불어넣어, 그들이 성취했다고 하는 세상의 모든 것들을 태우십니다. 유황이 탈 때 아황산가스가 나오듯이 세상의 성취감이 불타며 나오는 연기에 마음이 질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자는 이와 같이 하나님 크기로 비어있는 마음이 채워졌을 때 나타나는 당당함을 뜻합니다. 사람은 하나님 크기의 마음이 채워지지 않은 상태에서는 열등감이 존재의 뿌리를 이루는 상태에서 살게 됩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후에 벗었으므로 무서워하여 동산 수풀에 숨었습니다. 벗었음이란 마음 채움 거리를 갖지 못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대신에 타락의 속성이 발동되면서 하나님 대신 눈에 보이고 발에 차이는 세상 것들에서 좋음을 찾아 마음을 채우게 되었습니다. 이로부터 인류의 역사는 시작되었습니다.
사자의 부르짖는 소리란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을 따라서 내게 주어지는 축복의 내용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크기로 비어있는 마음이 하나님 자신으로 채워짐으로써 당당함을 말합니다. 이 당당함은 더 이상 이 세상에서 어떤 것도 갖고 싶어 하지 않고, 어떤 것에도 목마르지 않게 됩니다. 마음이 완전히 세상을 졸업하게 되고, 완전히 세상을 떼어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을 이길 수 있고 세상을 정복하는 상태가 됩니다.
모든 사람은 비어있는 마음을 채우기 위하여 세상에 굴복합니다. 열등감에 절어서 살아갑니다. 그것이 세상 것을 가지고 싶어 함으로 나타납니다. 세상 것에 대한 목마름으로 나타납니다. 세상 것을 많이 가진 자 밑에 굴복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세상 것이 없으면 죽는 줄 알고 벌벌 떠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일곱 우레는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으로 우리의 빈 마음을 채워주시겠다는 구름 속 무지개 축복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받아들여서 다른 축복을 축복으로 여기지 않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세상의 가치를 얻는 것을 축복으로 여긴다면, 사자가 부르짖는 일곱 우렛소리가 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내 마음이 비록 하나님으로 다 채워지지 않고 마음의 공백에 허덕일지라도 그만큼 하나님을 향하고, 하나님을 간구하며, 하나님으로 채워지지 못함에 대한 안타까움에서 원한이 생길 정도라면 하나님 자신이 축복인 것을 알아들은 것입니다. 이는 곧 본문에 나오는 대로 그 사람 속에서 천사가 사자처럼 일곱 우렛소리로 부르짖고 있는 상황입니다.
4절을 보면 “일곱 우레가 말을 할 때에 내가 기록하려고 하다가 곧 들으니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말하기를 일곱 우레가 말한 것을 인봉하고 기록하지 말라 하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 소리를 듣고 ‘하나님으로 배부를 것이다. 하나님으로 부자가 될 것이다. 하나님을 가질 것이다. 이 축복의 약속이 최고다.’라고 기록하고자 하지만 기록하지 말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녹음이나 영상 혹은 인쇄를 통해 내용을 보존하거나 퍼트릴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모든 기록은 들은 것을 손으로 직접 쓰는 필사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사도 요한이 기록하고자 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을 널리 퍼트리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막으십니다.
우리는 일곱 인으로 인봉된 두루마리가 펼쳐지면서 일어나는 일들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중에서 본문은 성도에게 해당하는 축복의 약속에 대한 부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부분을 인봉하라 하십니다. 이러한 축복은 사람이 필사해서 널리 알린다고 해서 알려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6장 9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와 마찬가지입니다.
태양 빛과 같은 하나님의 자발적 축복의 약속은 성도에게만 유효합니다. 성도에게는 이 약속이 일곱 우렛소리처럼 들리고, 하나님 자신을 채워주시겠다는 사자의 부르짖음으로 들립니다. 지금 방송을 통해서 ‘하나님을 가지는 것이 최고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해 주셨습니다. 하나님 부자가 되세요.’라고 아무리 말해도 성도가 아닌 사람은 그 의미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인봉하라 하신 것은 모든 사람에게 이 말이 받아들여지기를 바라서 하는 필사는 필요 없는 짓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으로 마음이 채워져서 이 세상에 있는 어떤 것도 필요가 없을 정도로 당당해지리라는 축복의 약속은 성도에게는 일곱 우렛소리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이 소리를 들은 성도는 다른 축복은 축복으로 여겨지지 않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본문 9~10절을 보면 무척 특이한 표현이 등장합니다.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두루마리를 달라 한즉 천사가 이르되 갖다 먹어 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 하거늘 /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갖다 먹어 버리니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성도의 마음에 사자의 부르짖는 소리와 일곱 우렛소리로 예고하신 축복의 약속이 들릴 때 이보다 더 좋은 축복이 없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축복의 약속대로 마음이 하나님으로 배부르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입에는 꿀 같이 달다는 표현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그런데 그 축복의 약속이 배에서는 쓰게 느껴진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앞서 천사의 발이 불기둥 같다고 했습니다. 일곱 우렛소리로 들리는 축복의 약속을 받고 하나님만이 유일한 축복인 것을 알게 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달게 받아들여도 내 존재의 체질은 여전히 죄와 저주에 잠겨있고 찌든 상태입니다. 여기서 문제가 생깁니다. 하나님만이 마음을 채울 수 있는 유일한 축복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나를 너희에게 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죄와 저주에 찌든 배에서 달게 느끼는 것은 세상의 가치들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약속은 세상의 가치를 달게 느끼는 상태의 배에서는 일종의 재앙으로 역사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아닌 세상 것들로 마음을 채워 사자처럼 당당해진 사람들의 마음속에 하나님께서는 불과 연기와 유황을 불어넣으시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불과 연기와 유황이라는 재앙을 불러들이는 세상의 성취감은 마음의 뱃속에서 달고 맛있게 느껴지기 마련입니다. 반면 하나님 자신을 유일한 축복으로 주시겠다는 약속은 이마에 인침 받은 성도에게는 기쁜 소식입니다. 입에 달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 것은 아무것도 필요 없고, 세상 것에 대해 목마르지 않을 만큼 사자처럼 당당해지는 상황이 실제로 벌어지려고 할 때는, 마음의 뱃속에서 하나님만으로 만족하라는 이야기는 쓰디쓴 약처럼 느껴집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죄와 저주에 찌든 나의 체질과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침 받은 성도임에도 불구하고 죄와 저주에 찌든 체질은 끊임없이 세상 것을 목말라합니다. 마음의 뱃속에 세상 것이 들어오는 것을 달게 느끼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상황은 불과 연기와 유황을 불러들이는 결과로 이어집니다. 그렇기에 성도들은 하나님만으로 만족하고자 하지만 상황이 녹록하지 않습니다. 오감을 통해 접하는 세상에서 죄와 저주에 찌든 체질로, 그동안 좋아하고 갈망했던 것들에 대한 습관이 당장 죽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으로 만족함이 쉽지 않기에 축복의 약속이 마음의 뱃속에서 쓰게 느껴집니다.
이것은 마치 마약 중독자를 감옥에 가두어서라도 마약을 끊게 하고자 할 때 금단현상 때문에 손톱이 빠질 정도로 벽을 긁으며 괴로워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십자가 복음을 듣는다고 저절로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지고 기뻐지는 것이 아닙니다. 죄와 저주에 찌들어 살던 세월의 습관과 체질은 당장 없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은 죄와 저주에 찌든 내 체질에 대해서는 우선 재앙으로 역사합니다.
힘센 다른 천사가 땅과 바다를 밟고 있는 발이 불기둥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이 천사는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시는 구름 속 무지개 축복을 상징하는 존재입니다. 그 천사의 발이 불기둥이라는 것은 죄와 저주에 찌든 나의 체질이 불태워져야 함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에서 갖기 원하는 것들을 마음에서 불살라 없애듯이 세상에 대한 나의 욕구는 죽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수 없다면 천사가 땅을 발로 밟고 있다는 의미대로 하나님의 뜻이 세상에서 이루어질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을 쓰게 느끼는 상황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할 수 있다는 약속을 받아들였음에도, 하나님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세상에 대해 부족함을 느끼는 갈등이 쓴맛입니다. 쓴맛이란 곧 받아들여지지 않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구름 속 무지개 축복의 약속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나를 끊임없이 어린 양 십자가 제단의 불로 죽여야 합니다. 십자가 보혈의 능력으로 이 체질과 습관을 제어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존재하는 죄와 저주의 체질과 습관은 몸이 죽을 때까지 없어지지 않습니다. 다만 육체로 사는 동안 이것을 제어하는 능력을 키워갈 수 있을 뿐입니다.
계시록 10장에서 묘사되고 있는 기이한 형상의 힘센 다른 천사는 축복의 약속입니다. 이 축복의 약속이 우리에게는 전혀 기이하지 않고, 전혀 낯설지 않고, 전혀 이색적이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도록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죄와 저주의 체질이 억압되고, 소멸되고, 죽이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언제까지 하나님의 구름 속 무지개 축복의 약속이 내 마음에서 쓴맛이 나며 재앙으로 작용할 수 있겠습니까? 어린 양 십자가 제단의 불로 나를 죽이는 일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도록 박차를 가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우리가 온전히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을 받아들이게 하셔서, 입에 단 것이 배에서도 달게 느껴짐으로 약속된 축복이 성취되는 은혜를 실제로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