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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삼세번 반전 역사의 탈락자와 합격자>의 줄거리 :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과 성전의 이방인의 뜰을 짓밟는 자들 사이에서 반전이 반복되는 역사가 진행됩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마음 둘 곳으로, 마음 채울 것으로 내어주신다는 약속을 붙잡은 선민과 등지고 버린 선민 사이에서 벌어지는 반전의 역사입니다. 안타까운 일은 이 축복의 약속을 달게 받은 자들 중에서도 이 반전의 과정을 통과하지 못하고 낙오하는 자들이 생긴다는 사실입니다.
삼세번 반전 역사의 탈락자와 합격자
(요한계시록 11:6~14)
6. 그들이 권능을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가 오지 못하게 하고 또 권능을 가지고 물을 피로 변하게 하고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 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
7. 그들이 그 증언을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과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그들을 이기고 그들을 죽일 터인즉
8. 그들의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그들의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
9.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보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10. 이 두 선지자가 땅에 사는 자들을 괴롭게 한 고로 땅에 사는 자들이 그들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
11. 삼 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그들 속에 들어가매 그들이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
12. 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오라 함을 그들이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그들의 원수들도 구경하더라
13. 그때에 큰 지진이 나서 성 십분의 일이 무너지고 지진에 죽은 사람이 칠천이라 그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여 영광을 하늘의 하나님께 돌리더라
14. 둘째 화는 지나갔으나 보라 셋째 화가 속히 이르는도다
앞서 우리는 하나님의 무지개 축복 약속을 둘러싸고 참 선민과 이방인 같은 선민이 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본문은 이러한 참 선민과 이방인 같은 선민을 포함한 역사가 삼세번 반전을 이루어가며 진행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참 선민은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로 묘사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만이 내 마음에서 존재감을 불러일으키고, 채움을 위한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자들입니다. 존재감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은 결국 내가 있음을 느끼는 것으로써 하나님이 마음 둘 곳이 되신다는 의미이고, 채움을 위한 욕구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은 하나님이 마음 채울 것이 되어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마음 둘 곳과 마음 채울 것이 되어 주신다는 축복 약속을 굳게 붙잡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의 약속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이방인의 뜰에 머물며 성전 뜰을 짓밟는 자들도 있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이들은 하나님의 무지개 축복 약속을 아랑곳하지 않고 등진 자들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은 축복 약속을 굳게 붙잡은 참선민과 축복 약속을 등진 무늬만 있는 선민들을 포함하는 역사에서 일어나는 반전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이 축복 약속이 실제로 성취되려면 내 마음은 어린 양 예수님이 그리스도로서 이루신 연쇄 과정의 세상 탈출과 천국 진입이라는 두 단계를 날마다 생활화해야만 합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세상 탈출의 과정이며, 승천과 보좌 우편에 계심은 천국 진입의 과정입니다. 앞서 살펴본 1~5절에는 날마다 생활화해야 하는 이 두 단계를 의인화하여 모세와 엘리야로 상징되었습니다. 모세는 그리스도 연쇄 과정 속에서 세상을 탈출하는 부분을 상징하고, 엘리야는 그리스도 연쇄 과정 속에서 천국에 진입하는 과정을 상징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살아있는 동안 일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세의 출애굽과 엘리야의 승천은 모두 살아서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몸은 살아있을 때 세상을 탈출해야 하고 천국에 진입해야만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죽어야 세상에서 나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축복 약속을 받은 자들은 살아생전에 세상을 탈출하는 자들이며, 살아생전에 천국에 진입하는 자들입니다.
앞서 본문은 참 선민과 이방인 같은 선민을 포함한 역사에 세 번의 반전이 일어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축복 약속을 받아 세상 탈출과 천국 진입을 생활화하는 자들과, 축복의 약속을 등지고 세상을 탈출할 필요도 못 느끼고 천국에 진입할 필요도 못 느끼는 자들 사이에서 어떤 반전이 이루어진다는 것일까요?
첫 번째 반전은 축복 약속을 받은 자들이 세상에서 잘되는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전지전능하신 창조주이시고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내 아버지가 되셔서 당신 자신을 내 마음 둘 곳이자 내 마음 채울 것으로 내어주신다는 약속은 궁극적인 극한의 축복입니다. 그런데 이 엄청난 축복 약속을 달게 받자마자 이상할 정도로 이 세상에서 잘되는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세상의 창조주이시고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주권자이신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내게 마음 둘 곳으로 주셨고 마음 채울 것으로 내어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축복의 약속을 받자마자 세상에서는 잘되는 일이 없다니, 하나님이 만드시고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세상에서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지 의아하기까지 합니다.
두 번째 반전은 축복 약속을 주시는 하나님은 좋아하지만, 축복이신 하나님은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내 마음 둘 곳이자 내 마음 채울 것으로 내어주신다는 약속은 분명한 축복입니다. 하늘의 천사들은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두근거렸을 것입니다. 천사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우리가 보고 있는 이렇게 좋으신 하나님을 축복으로 약속받다니 얼마나 좋아할까?’라고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사람들은 마음 둘 곳으로 주어지는 하나님과 마음 채울 것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을 싫어합니다. 그냥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것처럼 싫어합니다. 심지어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에게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애초에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을 싫어할 이유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 24절에서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고, 야고보서 4장 4절에서는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세상과 가까이함의 정도가 짙으면 짙을수록 하나님을 싫어하게 됩니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좋으심을 아는 천사들로서는 기절할 일이 사람들에게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주시겠다고 축복의 약속을 땅에 보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약속을 내리실 때 천사들은 사람들이 좋아서 기절할 정도라고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 하나님을 제일 싫어함을 봅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적인 축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좋아하지, 당신 자신을 축복으로 주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좋아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당신 자신을 축복으로 주시는 하나님을 싫어합니다. 축복 주시는 하나님은 좋아하지만 축복이신 하나님은 싫어하는 것입니다. 축복 주시는 하나님을 좋아하는 자들은 기독교 종교인입니다. 반대로 축복이신 하나님을 좋아하는 자들은 바로 교회입니다. 이 사실은 무서울 정도의 반전입니다. 하나님의 좋음을 알고 있는 예수님과 천사들이 볼 때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들이나 사도들이나 초대 교인들을 비롯한 믿음의 조상들이 볼 때 축복이신 하나님을 싫어함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세 번째 반전은 이루어질 수 없을 것 같은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첫 번째 반전은 하나님 자신을 축복으로 알고 받아들인 사람들에게는 이 세상 일이 잘되는 것을 좀처럼 발견하기 어렵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반전은 하나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 하나님을 축복으로 받는 것을 제일 싫어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쯤 되면 볼 장 다 봤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을 축복으로 약속받은 자들의 삶은 거지 나사로 쪽으로 기울어져 갑니다. 그리고 축복이신 하나님을 제일 싫어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교회를 없애버리고 종교로 만들어버립니다.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마음 둘 곳이 되어주시고, 마음 채울 것이 되어주시겠다는 이 놀라운 약속은 도무지 이루어질 것 같지 않습니다.
축복의 약속을 받았던 사람 중에서도 세상일이 잘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 떠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누구에게서 이 축복 약속이 이루어져서 실제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마음을 두는 자가 생길 것이며,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는 하나님으로 마음을 채우겠다고 소망하는 자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납니다. 누구도 받아들일 것 같지 않고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을 것 같은 축복의 약속이 살아서 역사하는 사람들이 세상에 띄엄띄엄 보이기 시작합니다. 세상일이 잘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도 축복의 약속을 붙잡는 자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자들조차 축복으로 주신 하나님을 제일 미워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만으로 마음을 채우려 하고 하나님만을 소망하는 자들이 세상을 걸어 다니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본문을 통해서 이 반전의 이야기들을 좀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6절을 보면 “그들이 권능을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가 오지 못하게 하고 또 권능을 가지고 물을 피로 변하게 하고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 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두 증인이 물을 피로 변하게 하고 여러 가지 재앙으로 땅을 친다는 내용은 하나님께서 열 가지 재앙으로 애굽을 치신 사건을 연상시킵니다.
여기에 첫 번째 반전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나는 축복 약속을 받아들인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약속을 받자마자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십니다. 이 재앙은 앞서 나온 여섯 번에 걸친 나팔 재앙과는 별개의 것입니다. 그 여섯 번의 재앙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자들에게 나타나는 재앙이었다면, 본문의 재앙은 축복 약속을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재앙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런 재앙을 허락하시는 것일까요?
축복 약속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내가 진심으로 하나님께 마음을 두고 하나님으로 마음을 채우는 상태가 됨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세상 탈출이 일어나야만 합니다. 그리고 천국으로 진입해 들어가야 하나님과 직면해서 하나님께 마음을 두고 하나님으로 마음을 채울 수 있습니다. 이러한 탈출과 진입의 역사를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죽고 부활하셔서 세상 탈출을 이루셨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계심을 통해 천국 진입을 이루셨습니다. 축복 약속을 받게 되면 배에서 쓰리라는 말대로 내심 괴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죄와 저주에 찌든 체질에서 여전히 이 세상 것에 마음을 두고, 이 세상 것으로 마음을 채우려는 소원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마음 둘 곳이 되시고, 하나님께서 마음 채울 것이 되어주신다는 약속은 분명히 너무나 좋습니다. 이 말씀이 최고라는 것을 알고, 이 말씀이 진리임을 압니다. 그런데 내심으로는 여전히 세상 것에 마음을 두고자 하고 세상 것을 찾고자 합니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일어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하나님에 대해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우리의 마음 상태를 십자가로 몰아가시기 위하여 역사하십니다. 우리가 마음을 두고 있고 소원하고 있는 이 땅을 치시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자면 반전도 이런 반전이 없습니다. 창조주이시자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축복으로 가졌는데 정작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세상에서 잘되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축복 약속을 받은 뒤로 괄목할 만한 내세울 일이 없습니다. 삶이 어렵기는 마찬가지고, 오히려 더 어려워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알레르기를 일으켜 쓴맛으로 느끼는 상태를 몰아내시기 위하여 우리를 쳐서 어린 양 예수님의 십자가로 몰고 가시는 과정입니다.
이어서 두 번째 반전에 해당하는 부분이 7~10절까지입니다. 요약해 보자면 무저갱에서 두 짐승이 올라와서 두 증인을 죽입니다. 두 짐승은 두 증인에 대비되는 상징입니다. 모세와 엘리야로 의인화된 두 증인이란 하나님만으로 마음을 두기 위한 세상 탈출과 하나님만으로 마음을 채우기 위한 천국 진입을 상징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무저갱에서 나온 두 짐승이 이들을 이겼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세상을 탈출하고 천국에 진입해야 된다는 생각이 완전히 근절됨을 의미합니다.
두 증인이 세상 탈출과 천국 진입의 메시지가 의인화된 것이라면 두 짐승은 이와 반대입니다. 두 짐승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로 하여금 마음속에서 세상을 탈출할 마음을 갖지 못하게 하고, 천국으로 진입하지 못하게 하는 모든 증언과 설교와 메시지를 상징합니다. 두 짐승은 이 세상을 마음 둘 곳으로 인정합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마음을 채울 수 있다고 약속합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축복 약속을 왜곡합니다. 하나님 자신을 마음 둘 곳으로 마음 둘 것으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세상 것을 축복으로 주시는 것이라고 바꿉니다. 마음이 세상을 탈출하고 천국으로 진입하는 일은 살아생전에 일어나야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두 짐승은 하나님 이름을 부르는 자들로 하여금 그러한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하고 아예 마음에서 근절시켜 버립니다. 그런데 이들이 두 증인을 이긴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자신을 축복 약속으로 받아들인 자들 중에서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두 짐승의 설교를 따라 세상으로 돌이킴을 의미합니다. 세상 것에 마음을 두고 세상 것으로 마음을 채우려는 죄적 본질에 주저앉게 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8절을 보면 하나님의 축복 약속은 결국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에게서 완전히 거부되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그들의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희의 마음 둘 곳이 되며, 내가 너희의 마음 채울 것이 될 것이다.’라는 축복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 이 약속을 길거리에 나뒹구는 시체를 아무도 장사 지내지 않는 것처럼 그렇게 경멸하며 소홀히 여기며 무시한다는 것입니다. 이방인들과 똑같이 하나님 자신을 축복으로 주신다는 약속을 무시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소돔과 애굽이 언급되는데 실제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은 예루살렘입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소돔과 애굽이 언급된 것에는 공통적 상징성이 있습니다. 소돔에는 선민인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살고 있었습니다. 롯은 소돔에서 빠져나와야만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애굽도 선민들이 빠져나와야 할 곳이었습니다. 여기서 십자가가 언급되었다는 것은 십자가를 통해 소돔과 애굽 같은 상황에서 빠져나와야 함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선민을 자처하는 자들이 빠져나올 생각은 하지 않고 소돔과 애굽에 주저앉아 버립니다. 빠져나오라고 십자가 사건이 일어났는데 십자가를 붙잡지 않고 빠져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10절을 보면 이상한 일이 일어납니다. “이 두 선지자가 땅에 사는 자들을 괴롭게 한 고로 땅에 사는 자들이 그들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축복 약속을 전하는 두 증인의 죽음을 마치 성탄절처럼 축하할 일이라고 여기면서 서로 선물을 교환할 정도로 기뻐하고 좋아합니다. 이것은 이미 우리에게서도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십자가 복음방송이 어떤 사람에게는 마음이 너무 불편하고 괴로울 수 있습니다. 단 한 번의 설교도 예외 없이 이 세상에 마음을 붙이고 편안하게 살도록 놔두지를 않기 때문에 지긋지긋하게 여깁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이 좋은 것이지 하나님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그러할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하나님 자신이 축복이라는 소리가 제일 듣기 싫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이 세상의 가치들이 축복이어야만 합니다. 왜 자꾸 바라지도 않은 하나님 자신을 주신다고 하는지 지긋지긋하게 여깁니다.
내 마음이 영이신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을 갖기 위해서는 세상 것은 아무것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살아오며 마음 붙였던 세상 것은 얼마든지 많습니다. 가지고 싶었던 세상 것도 많습니다. 가지고 있는 것들 중에 아까워하는 세상 것도 있습니다. 그것들을 다 마음에서 버려야 하나님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십자가 사건의 내용입니다. 따라서 십자가는 세상을 향해 있는 마음에는 재앙입니다. 일곱 인 재앙, 일곱 나팔 재앙, 일곱 대접 재앙을 다 합쳐도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보다 더 큰 재앙은 없습니다. 세상을 향해 있는 마음을 다 빼앗아 가기 때문입니다.
반면 마음이 하늘을 향해 있는 사람들에게는 십자가는 재앙이 아닌 복음입니다. 십자가는 하늘에 있는 보화 같은 축복이신 하나님 자신을 내 마음 둘 곳과 마음 채울 것으로 접근해 갈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마음이 하늘을 향해있는 자들에게 십자가는 복음이고 축복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세상을 향해있는 자들에게 십자가는 재앙입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장 18절에서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두 증인의 메시지는 결국 세상을 탈출하여 천국으로 진입해서 하나님께 마음을 두며, 하나님으로 마음을 채우자는 것입니다. 두 짐승은 이 메시지를 전하는 두 증인을 완전히 죽이는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종교 생활을 하며 예배당을 들락거리지만, 마음에서 두 선지자는 죽어버린 상태가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역사는 이렇게 끝나지 않습니다. 마지막 반전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저 자신도 놀라는 일입니다. 제가 이러한 내용의 메시지를 전하다 보면 ‘대체 누가 이 메시지를 받아들여서 하나님의 축복 약속을 실제로 받아 누릴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11절을 보면 “삼 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그들 속에 들어가매 그들이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삼 일 반은 잠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두 증인이 죽어서 없어졌다고 생각했습니다. 두 증인은 세상을 탈출하여 천국으로 진입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상징합니다. 이는 곧 하나님께 마음을 두고 하나님으로 마음을 채워야 한다는 축복의 약속이기도 합니다. 이 축복의 약속은 세상은 물론이거니와 교회 안에서조차 없어졌다고 느껴집니다. 그런데 이 약속이 어느 사이에 마음에서 들리는 자들이 생겨납니다. 예전에는 두 증인의 메시지가 밖에서 들려오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께서 십자가 복음방송을 통해 말씀을 듣고 계신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밖에서 안으로 들리던 세상 탈출과 천국 진입의 메시지가 이제는 한 사람 안에서 살아서 움직이게 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것을 보며 완전히 다른 종자의 사람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이어서 12절을 보면 “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오라 함을 그들이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그들의 원수들도 구경하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이 부분의 해석에 있어서 학자들은 하늘로 올라가는 일은 예수님 재림 때나 일어날 일인데 어떻게 벌써 이런 일이 있는가에 대해 고민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고민할 바가 전혀 없습니다. 그동안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통한 승천의 이야기를 수만 번은 더 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 현장에서 나타났습니다.
또 13절을 보면 “그 때에 큰 지진이 나서 성 십분의 일이 무너지고 지진에 죽은 사람이 칠천이라 그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여 영광을 하늘의 하나님께 돌리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지진으로 성처럼 견고한 건물이 십분의 일이 없어지고 칠천 명이 죽는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축복의 약속이 마음 안에서 성취되는 자들에게 나타나는 평강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를 상대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장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처럼 무시무시한 요동이 일어나더라도 위에서 올라오라는 부르심을 받아 마음이 세상을 탈출하여 하늘로 올라가는 자들은 평안과 평강이 절대로 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축복의 약속을 자기 안에서 성취한 사람들은 이 약속이 입에서 달게 느껴질 뿐만 아니라 배에서도 달게 느껴집니다. 자발적으로 세상을 탈출하여 천국으로 진입하는 일을 날마다 반복하며 삽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이 세상에서 그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평강이 깨어지지 않습니다. 지진으로 성 십분의 일이 무너지고 칠천 명이 죽자,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는 모습은 평강의 모습과 상대적으로 대비됩니다.
이러한 평강의 모습이 잘 드러난 사건이 예수님의 재판 과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지진이 일어나서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는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평안하셨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돌에 맞아 죽는 순간은 지진으로 인해 굳건하게 지은 성들이 무너지고 칠천 명이 한 번에 지진의 구덩이에 빠져 죽는 것과 같은 무시무시한 상황과도 같습니다. 그런데 스데반 집사님의 마음은 여전히 고요했습니다. 13절의 말씀은 이러한 상대적 차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나 스데반 집사님과 같이 평강을 누리는 사람들이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지막 반전입니다.
첫 번째 반전은 축복의 약속을 받은 자들에게는 세상에서 기릴만한 좋은 일이란 발견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반전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축복의 약속으로 주셨음을 제일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반전은 세상 탈출과 천국 진입이라는 메시지 자체가 그 누구에게도 들릴 수 없을 것 같은 느낌 속에서도 이것을 자기 안에서 실현시키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지진이 일어나서 성 십분의 일이 무너지고 칠천 명이 죽는 상황 속에서도 평안이 깨어지지 않는 자들이 한둘씩 띄엄띄엄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이 삼세번의 반전의 역사 속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탈락하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합격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세 번의 반전이 여러분 각자에게서 온전히 일어나는 삼세번 반전 역사에서 합격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어린 양 예수님이 못 박히신 십자가를 보며 소돔과 애굽 같은 이 땅을 탈출하여 천국으로 진입하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지진이 일어나 성 십분의 일이 무너지고 칠천 명이 죽는 것 같은 일이 일어나더라도, 예수님처럼 스데반 집사님처럼 사도 바울처럼 내 안에는 평강이 유지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