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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2

녹취문: 적룡의 위협 속에 내게 태어난 예수님_태승철 (계 12:1~6)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4.02.01|조회수82 목록 댓글 0

 

www.everyday01.com -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적룡의 위협 속에 내게 태어난 예수님>의 줄거리 :

모든 사람은 육체가 있어 맺어지는 수많은 관계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세상 나라입니다. 이 세상 나라들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 됩니다. 예수님이 출생하신 하나님의 나라와 붉은 용의 나라입니다. 교회는 모든 사람이 이룬 세상 나라에 예수님을 증언합니다. 그런데 이 증언을 통하여 실제로 예수님을 만나 연합이 이루어지면 예수님이 그 나라에 출생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증언이 삼켜짐을 당해 예수님이 실제로 태어나지 못하시게 되면 붉은 용의 나라가 됩니다.

 

 

적룡의 위협 속에 내게 태어난 예수님

 

(요한계시록 12:1~6)

 

1. 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해를 옷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아래에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두 별의 관을 썼더라

2. 이 여자가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되매 아파서 애를 쓰며 부르짖더라

3. 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왕관이 있는데

4. 그 꼬리가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더라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

5.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

6.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천이백육십 일 동안 그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

 

 

우리는 일곱 번째 나팔이 불리고 본격적인 재앙이 시작되기 전에 삽입된 계시들을 보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도 무엇을 상징하고 뜻하는지 해석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적룡의 위협 속에 내게 태어난 예수님’이라는 제목은 내게서 예수님이 태어나시려고 하는 것을 붉은 용이 막으려고 한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교인이 되는 내막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앞서 성전에서 마흔두 달 동안 이방인의 뜰을 밟게 될 자들이 나타날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들이 두 증인의 증언을 받아들이고서도 이방인처럼 되어버린 이유는 붉은 용이 그들에게 들리는 예수님에 대한 증언을 삼켜버렸기 때문입니다. 똑같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을 증언으로 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중에 어떤 사람들은 증언대로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따라 세상을 탈출하고 하늘로 진입하는 일을 일상적으로 생활화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따라 세상을 탈출하고 하늘로 진입하는 일을 생활화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붉은 용이 예수님에 대한 증언을 삼켜버릴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한편 오늘 말씀은 이렇게 증언이 붉은 용에게 삼켜지지 않고 예수님이 내게서 태어나시게 되는 일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붉은 용의 위협 속에서 예수님이 온전히 내게서 태어나시는 과정과 내막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1~2절을 보면 “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해를 옷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아래에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두 별의 관을 썼더라 / 이 여자가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되매 아파서 애를 쓰며 부르짖더라”라고 하였습니다.

해를 옷 입고 발아래에는 달이 있고 머리에는 열두 별의 관을 쓴 여자는 교회를 상징합니다. 교회에 대한 언급은 앞에서부터 반복되어 왔습니다. 십사만 사천 명이라고 하는 숫자가 뜻하는 바는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이 완벽하고 온전히 충만하게 이루어짐을 뜻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단순히 숫자적으로 십사만 사천 명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완벽하고 충만한 하나님의 예정 속에서 택함을 받은 자들 전체가 한 교회를 이루게 됩니다.

교회란 아벨에서부터 시작하여 에녹과 노아와 아브라함을 거쳐 이삭과 야곱과 그 열두 아들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신약에 와서는 열두 제자로부터 시작한 모든 성도들과, 그리고 예수님 재림 때까지 태어날 모든 사람들 중에 예정과 택함을 받아 이마에 하나님의 인침을 받은 자들 전체를 가리킵니다. 오늘 본문에서 언급되는 교회는 하늘에 있습니다. 해를 옷 입고 발아래에는 달이 있는 여자가 상징하는 바가 이와 같습니다. 또 머리에는 열두 별의 관을 썼습니다. 열두 별이란 열두 지파와 열두 제자가 뜻하는 대로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을 의미합니다.

해를 옷 입었다는 것은 교회에 포함된 교인들의 특징을 가르쳐줍니다. 교인들의 특징은 어린 양 예수님을 품음으로써 세상 탈출과 천국 진입을 통하여, 하나님께 마음을 두고 하나님만을 마음 채울 것으로 삼고 소망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인들은 세상에서는 마치 태양 같은 발광체가 됩니다. 발광체는 스스로 빛을 냅니다. 오감을 통하여 세상에서 들어오는 내용에 반응하며 산다면 반사체입니다.

예를 들어 회사에서 사장님을 마주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해를 옷 입은 여자로 상징된 교인이라면, 어린 양을 품고 있기에 세상 탈출과 천국 진입의 과정을 통하여, 마주하고 있는 사장님보다도 하나님께 마음을 두고 하나님의 존재감을 먼저 느끼며 하나님만으로 기쁨을 삼고자 할 것입니다. 사장님의 인정이나 칭찬 혹은 승진이나 월급을 마음의 채움 거리로 삼지 않습니다. 사장님이 앞에 있다는 사실조차도 자기가 마음을 두고 있고 자기 마음의 유일한 채움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앞에 있게 하셨다고 봅니다. 이러한 사람이 사장님을 대할 때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떠오르는 생각을 따라서 대하게 됩니다. 반사체가 아닌 발광체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한편 교인이 아닌 어린 양을 마음에 품고 있지 않은 사람이라면 사장님에 대한 태도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두지 않고 하나님을 마음 안으로 받아들이지도 않는 사람이라면, 사장님 앞에서 사장님의 말과 행동과 표정을 살피면서 반응하기 마련입니다. 이것은 반사체인 달이 상징하는 바입니다. 해를 옷 입은 여자가 발아래에 달을 두었다는 것은 교회가 모든 반사체를 발아래에 두는 자임을 가르쳐줍니다. 교회 자체는 해처럼 밝은 발광체입니다.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이 발광체들이고 그러한 발광체 전체의 모임이 교회입니다. 이러한 교회는 마치 해를 입고 반사체인 달을 발아래에 둔 것과도 같은 모습입니다. 반대로 교인이 아닌 모든 세상 사람들은 반사체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전제하에 이어지는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속에는 예정하신 자들이 있습니다. 그 예정하신 자가 이미 태어났다 죽었거나 아직 태어나지 않았어도 이들은 모두 교회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예정 가운데 두신 사람들의 교회에서는 일정한 순환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속에 예정하신 사람들은 세상에 태어납니다. 이 예정함을 받은 자들은 곧 인침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세상에 살면서 눈에 보이는 것과 귀에 들리는 것을 다 제쳐놓고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하나님께 마음을 두려고 합니다. 하나님만으로 마음을 채우려고 합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한 사람이 ‘세상 나라’를 이룬다는 내용의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세상 나라를 이룬다는 것은 몸이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어서라도 맺게 되는 관계가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 관계들이 하나의 나라를 이룹니다. 미국, 독일, 중국, 일본 등만 나라가 아닙니다. 나 한 사람이 몸을 중심으로 해서 맺어지는 관계들 전체를 포함하는 하나의 나라입니다. 그리고 선민들에게 있어서 이 나라는 예수님이 태어나시는 나라이기도 합니다.

2절을 보면 “이 여자가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되매 아파서 애를 쓰며 부르짖더라”라고 하였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에 대한 증언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예수님에 대한 증언을 하나님의 예정하심 가운데 이 땅에 태어난 사람에게 전달하면 그 사람은 증언 속 예수님을 붙잡게 됩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과 연합하게 됩니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는 나의 육체를 중심으로 맺어진 관계들의 나라 안에서 태어나십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태어나셔야만 살아있는 동안에 예수님과 연합함으로써, 세상을 탈출하고 천국에 진입해서 하나님 아버지에게만 마음을 두고 하나님 아버지로 만족과 기쁨의 삶을 살고, 그럴 때 육체를 통한 관계들로 이루어진 세상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가 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앞선 11장 15절을 다시 떠올려봅니다.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이르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이 말씀의 내막이 본문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교회가 예수님에 관한 증언을 전달해 주면 그 증언 속 예수님과 연합하여 하늘로 올라가는 바람에, 육체로 이루어진 관계들의 세상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가 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교인이 된 것에는 바로 이러한 내막이 있습니다. 이처럼 교회로 상징되는 여자가 품고 있는 어린 양 예수님에 대한 증언이 우리에게 들렸고, 그 증언 속 예수님과 연합하게 되었으므로 우리가 교인이 된 것입니다. 또 내가 육체가 있기 때문에 맺어진 관계들로 이루어진 세상 나라는, 내가 예수님을 따라 세상 탈출과 천국 진입을 생활화하는 동안, 하나님께서 내려오셔서 나의 육체를 거점으로 삼으시는 하나님 나라가 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것이 한 사람이 교인이 되고 세상 나라가 하나님 나라로 바뀌게 되는 내막입니다.

 

그런데 이 일을 방해하는 존재가 있습니다. 3~4절을 보면 “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왕관이 있는데 / 그 꼬리가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더라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라고 하였습니다. 붉은 용은 교회를 상징하는 여자가 해산하고자 하는 예수님에 대한 증언을 삼키고자 합니다. 이는 곧 한 사람이 이루는 세상 나라 안에 예수님이 태어나시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바로 이러한 위협을 뚫고 예수님이 태어나신다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편 이와 반대의 상황에서는 성전의 이방인 뜰을 밟는 자들처럼 될 수밖에 없습니다. 분명히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지만 이방인과 똑같은 상태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경우에는 예수님에 관한 증언은 들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계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은, 예수님 외에는 하나님께 마음을 둘 길이 없고 하나님으로 마음 채울 방법이 없음이 전해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증언을 듣고도 따르지 않는 자들이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지금 아버지 보좌 우편에 계심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예수님의 십자가 연쇄 과정을 길로 삼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종교적으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냥 예배당에 와서 아버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 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정말로 아버지와 인격적으로 만나겠다고 생각한다면 어린 양이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길로 삼아 따라가고자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인격적 만남을 원하지 않고 종교적인 신으로의 역할만을 기대하기에 하나님 아버지만 부르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이 벌어지는 이유는 그들의 마음 상태가 단순히 종교적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계신다는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붉은 용이 그들의 마음속에서 삼켜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시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분명히 예수님에 대한 증언은 전달되었습니다. 교회의 입장에서는 아이를 낳은 것입니다. 그런데 증언 속의 예수님이 붉은 용에게 삼켜집니다. 이러한 경우에는 하나님과 인격적 만남은 원하지 않고 종교적 신으로의 역할만을 기대하는 결과가 나타납니다.

용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고 일곱 왕관을 썼다고 했습니다. 붉은 용은 사탄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이 사탄에 대해서는 9장 1절에서 “다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내가 보니 하늘에서 땅에 떨어진 별 하나가 있는데 그가 무저갱의 열쇠를 받았더라”라고 소개되었습니다. 이 사탄이 본문에서는 붉은 용으로 상징되는데 머리가 일곱이고 뿔이 열이라고 했습니다. 머리는 지혜, 뿔은 권세와 영광을 의미합니다. 일곱은 완전을 상징하는 숫자이며, 열은 충만을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그리고 왕관을 썼다는 것은 이 붉은 용을 이길 자가 없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붉은 용이 자기가 할 일을 위해서 필요한 모든 지혜와 권세를 갖췄음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붉은 용보다 이 일을 더 잘할 수 있는 존재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지혜와 권세를 가진 붉은 용이 하는 일이란 어떻게 하든지 나의 세상 나라에서 예수님이 태어나시는 것을 막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계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에게서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뺀다면 예수님은 이름이라는 껍데기만 남게 됩니다.

 

한편 5절을 보면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라고 하였습니다. 하늘로 올려가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세상 나라에 태어나셨다는 것은 마음에서 예수님의 세상 탈출과 천국 진입이 받아들여졌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연합함이 믿음이라면 내게서도 예수님과 함께 세상을 벗어나서 하늘로 올라가는 일이 일어나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이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붉은 용이 예수님을 담고 있는 증언을 삼켜버렸기 때문입니다.

예배당에서 설교를 합니다. 성경을 읽습니다. 성경 공부를 합니다. QT를 합니다. 다양한 방식으로 기독교 종교의 모임이 활성화되고 있고 진행되고 있으며 수없이 많은 프로그램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라는 말씀이 적용되느냐가 문제입니다. 땅을 벗어나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님과 연합이 이루어지지 않고,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이 빠졌다면 예배당에서 진행되는 어떤 프로그램도 의미가 없습니다. 일곱 머리와 열 뿔을 갖고 일곱 왕관을 쓴 붉은 용이,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에 대한 증언을 삼켜 먹어버렸고 빼앗은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계시록의 말씀을 나누기 전에도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에 대해 수없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렇기에 어떤 분들은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태승철 목사가 가지고 있는 강조점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십자가 복음방송과 함께 십자가 생활화하기를 중단하고 떠나버립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의 모든 말씀은 예수님의 세상 탈출과 천국 진입의 과정을 빼놓고는 전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 해를 옷 입은 한 여자가 교회를 말하는 것이고, 해산하려는 아기가 예수님임을 말하는 주석조차도 태어난 아기인 예수님이 하늘로 올려가는 것에 대해서는,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모릅니다. 이것은 내용이 어렵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앞서 말씀드린 대로 너무나 간단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에 대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종교의 하나님으로 만나려면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를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갈 수 있어야만 합니다.

 

결혼해서 법적인 부부라도 마음이 다른 곳에 가 있다면 진정한 만남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예배당에 나온다고 해서 교인은 아닙니다. 진정한 교인이라면 마음이 하나님께로 가야 합니다. 이것은 필수적인 일입니다. 신명기 6장 5절의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라는 말씀도 마음이 하늘로 올라갈 때 이루어질 수 있는 말씀입니다. 마음이 돈으로 가면 돈을 사랑하는 것이고, 마음이 자녀에게 가면 자녀를 사랑하는 것이듯이, 마음이 하늘로 가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너무나 명백하고도 단순한 사실입니다.

마음에서 하늘로 올려가는 예수님이 태어나시지 못하는 이유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싫고 땅에 있는 것들이 좋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복잡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딴소리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떤 변명을 하더라도 진리는 명확합니다. 마음에서 예수님이 태어나시지 못한다면 하나님보다 땅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땅을 탈출해야 한다는 말을 싫게 여깁니다. 하나님은 오직 종교의 하나님으로서 땅의 것을 주는 신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축복이 된다는 것은 언감생심으로 여깁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내게 복이 된다는 것이냐?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이야기다. 그것은 과욕이다.’라고 하는 사람들에게서 예수님은 태어나실 수 없습니다.

그러한 마음을 갖게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세상을 탈출해서 하나님께로 가자는 이야기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싫어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가셨는데 정작 예수님을 따른다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기 싫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내막에는 붉은 용이 있습니다. 붉은 용이 그들에게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천국에 진입하신 예수님에 대한 증언을 삼켜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빼놓는다면 사도 바울의 서신들도 읽을거리가 없습니다. 말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복음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빼놓고자 하는데도 기독교 종교는 번듯하게 유지되고 있습니다. 종교 안에 있는 교인 아닌 종교인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이 붉은 용의 나라일 뿐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증언을 듣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붉은 용이 따로 역사할 필요도 없습니다. 죄와 저주 속에 이미 잠겨있는 세상 나라로 끝날 뿐입니다. 붉은 용이 애쓰고 수고할 필요가 없이 이미 붉은 용의 몫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한 증언을 들은 자들에 대해 붉은 용은 역사합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5절의 말씀대로 들려 올려가는 예수님을 없어지게 합니다.

 

다시 5절을 봅니다.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모두 나라를 이루고 있습니다. 나 한 사람이 나라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아기로 태어나셔서 내가 이룬 나라 안에 들어오시게 되면 철장으로 다스리시는 일이 이루어집니다. 철장은 쇠로 만든 지팡이입니다. 예수님께서 쇠지팡이로 하시는 일은 부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스림이라는 표현에서 다스리는 대상들을 북돋아서 형통하고 번영하도록 해주시는 것을 생각합니다. 정치의 목적도 이와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시는 일은 다릅니다. 나의 세상 나라에 받아들여지고 태어나신 예수님은 하늘로 올려가는 분이십니다. 이 예수님을 놓치지 않으면 예수님께서는 내 육체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세상 나라를 다스려 가십니다. 그런데 잘 북돋아 형통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쇠지팡이로 깨뜨리고 부수십니다. 예수님이 부수시는 것은 그동안 내 마음 둘 곳으로 작용했던 것들입니다. 그동안 내 마음 채울 것으로 소망했던 것들입니다.

이어서 6절을 보면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천이백육십 일 동안 그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라고 하였습니다. 교회가 광야로 피신했다는 것은 출애굽을 연상시킵니다. 출애굽 한 선민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서 복된 삶을 살기 전에 광야를 지나야만 했습니다. 광야로 피신했다는 것은 철장으로 다스리신다는 말씀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광야는 마음 둘 곳이 없는 곳이고, 마음 채울 것도 없는 곳입니다. 그러한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사십 년을 지내는 동안 오직 하나님께만 마음 둘 것을 훈련했습니다. 하나님만으로 마음이 만족하기를 훈련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유일한 마음 둘 곳으로 삼고, 하나님을 유일한 마음 채울 것으로 삼았을 때 일어나는 일이 복지의 삶입니다.

천이백육십 일을 광야에서 양육을 받는다는 것은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어떤 것에도 마음을 두지 않는 훈련의 과정을 의미합니다. 천이백육십 일은 삼 년 반입니다. 칠 년이 과정의 완전한 마침을 의미한다면 삼 년 반은 그 과정을 통과하는 중임을 의미합니다. 그 양육 과정은 하나님을 제외한 어떤 것으로도 마음 둘 곳으로 삼지 않고, 어떤 것으로도 마음을 채우지 않는 훈련입니다. 이것이 광야로 표현되었습니다.

 

지금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 중에 존재감이 느껴져서 괴로워하고 계십니까? ‘이건 아니다.’라고 생각하고 계신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마음 둘 곳을 깨뜨리는 철장입니다. 그러한 마음을 두고 있는 나 자신을 때려 부수려고 하신다면, 여러분은 예수님이 태어나신 나라가 되어서 광야에서 양육을 받는 중입니다. 끊임없이 세상 것을 원하고 세상 것의 존재감에 휩쓸리고 있는 나를 철장으로 다스리며 십자가에서 죽이는 광야의 훈련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젖과 꿀이 흐르는 복지에 이르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설 5장 16~18절에서 “항상 기뻐하라 / 쉬지 말고 기도하라 /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러한 복지의 삶을 향해 가는 중입니다. 우리 중에는 이미 복지에 들어간 사람도 있을 것이며, 이제 막 예수님이 태어나시는 첫 단계를 겪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다만 우리는 누가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있는 자인지를 알 수 없습니다. 아무쪼록 여러분에게서 붉은 용이 무력화됨으로써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계신 증언 속 예수님이, 여러분의 나라에 태어나심으로 온전히 연합하시는 놀라운 축복이 현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어설프고 미흡하며 여전히 불완전합니다. 그래도 십자가 붙잡고 세상 탈출을 시도하며 천국 진입을 소원할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서 붉은 용의 능력이 막혔기 때문임을 알며 감사드립니다. 광야의 훈련이 끝나게 하시고 복지를 살기 위하여 오늘도 십자가 철장을 들고 우리를 다스리시는 예수님 앞에 무릎 꿇을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붙잡아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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