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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2

녹취문: 교회와 교인 향한 사탄의 타격 포인트_태승철 (계 12:7~17)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4.02.03|조회수67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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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교회와 교인 향한 사탄의 타격 포인트>의 줄거리 :

마귀라고도 하는 사탄은 실재하며 그 사탄의 역사도 사실입니다. 그러면 내가 지금 사탄의 권세 아래 있는지 아니면 그 권세에서 벗어났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냥 기독교 종교인이 되었으니 벗어났다고 확신하고 있습니까? 쉽게 말해 지금 내 마음의 시선이 예수님 십자가 대신 세상 것을 보고 있다면 나는 사탄의 역사에 휘말린 겁니다. 교회와 교인을 향한 사탄의 실제 공격 포인트를 정확히 짚어봅니다.

 

교회와 교인 향한 사탄의 타격 포인트

 

(요한계시록 12:7~17)

 

7.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과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8.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그들이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9.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

10.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이르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

11. 또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12. 그러므로 하늘과 그 가운데에 거하는 자들은 즐거워하라 그러나 땅과 바다는 화 있을진저 이는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줄을 알므로 크게 분내어 너희에게 내려갔음이라 하더라

13. 용이 자기가 땅으로 내쫓긴 것을 보고 남자를 낳은 여자를 박해하는지라

14. 그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그 뱀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 받으매

15. 여자의 뒤에서 뱀이 그 입으로 물을 강 같이 토하여 여자를 물에 떠내려가게 하려 하되

16. 땅이 여자를 도와 그 입을 벌려 용의 입에서 토한 강물을 삼키니

17.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과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서 있더라

 

 

사탄의 존재는 사실이며 사탄은 실제로 역사합니다. 앞서 사탄에 대해 ‘머리가 일곱이라’고 한 것처럼, 사탄은 우리와 비교할 수 없이 머리가 좋습니다. 이러한 사탄의 역사는 주로 교회와 교인에 대한 공격으로 나타납니다. 사탄의 공격은 분명한 효과를 낼 수 있는 명확한 타격점을 알고 있기에 어설프지 않습니다.

앞서 본 일곱 교회에 보내는 말씀 중에 ‘이기는 자’라는 표현이 공통적으로 들어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이기는 자’란 곧 우리가 싸워야 하는 자임을 의미합니다. 사탄이라고도 하는 마귀는 자기의 졸개인 귀신들을 동원해서 교회와 교인을 타격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사탄이 어떤 점을 타격하고자 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사탄의 공세는 오늘 이 시각에도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앞서 나의 관계의 영역이 나라이며, 각 사람의 몸은 각 나라의 중심점이 됨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 위해서는 나의 몸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관계의 영역들의 세계 속에 예수님이 태어나셔야만 합니다. 이는 곧 증언 속 예수님이 실제로 내 마음이 연합해야 될 인격적 대상임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하늘 보좌로 올려가셨습니다. 우리가 나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세상 나라 안에서 만나야 하는 예수님은 하늘 보좌로 올려가는 예수님입니다. 하늘 보좌로 올려가는 예수님을 만나려면 우리 마음도 하늘로 올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한편 마귀는 이 일을 싫어하여 막으려고 여자로 상징된 교회를 박해하고자 합니다. 앞서 살펴보았던 6절을 보면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6절의 이야기는 15절의 “여자의 뒤에서 뱀이 그 입으로 물을 강같이 토하여 여자를 물에 떠내려가게 하려 하되”라는 부분으로 이어집니다. 이와 관련하여 13~14절에서는 여자가 왜 광야로 도망가야 했으며 어떻게 도망갔는지에 대한 내용에 대한 부연 설명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앞으로 돌아가 7~12절까지는 사탄이 왜 여자를 공격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내막이 설명됩니다. 이러한 구도를 염두에 두고 본문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7~8절을 보면 미가엘 천사가 이끄는 군대와 붉은 용인 사탄의 군대가 하늘에서 전쟁을 벌였으나, 미가엘 천사의 군대가 붉은 용의 군대를 이기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붉은 용의 군대는 더 이상 하늘에서 거점을 확보할 수 없게 되었고 역할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에 분통이 터진 사탄은 땅을 향하여 총공세를 펼치게 됩니다. 여기서 교회와 교인이 타격점이 됩니다. 이로부터 땅에 살고 있는 교인과 붉은 용인 사탄이 이끄는 군대와의 싸움은 불가피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싸움에 도달하기까지의 이야기가 본문에서 전개되고 있습니다. 왜 이런 싸움이 일어날 수밖에 없게 되었는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 싸움은 앞으로 일어날 일이 아닙니다. 이천 년 전에도 교회와 교인은 사탄과 싸웠으며, 천 년 전 중세 시대에도 싸웠으며, 지금도 싸움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싸움의 내막을 아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우리는 사탄이 교회와 교인을 공격할 때 타격점을 알 수 있고 대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싸움에 대비하기 위한 방법으로 11절에서는 어린 양의 피와 어린 양에 대한 증언이 언급됩니다. 어린 양의 피와 어린 양에 대한 증언을 통하여 싸움에서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탄은 모든 공격력을 땅에 퍼붓는 데 치중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탄이 교회를 타격하는 포인트가 어딘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교인으로 속해있는 교회가 어떤 점에서 마귀 사탄의 공격을 받는지에 대해 알아야 대처도 할 수 있습니다. 이로부터 내가 지금 출석하고 있는 예배당 조직이 진짜 교회인지 아닌지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속한 예배당이 이미 마귀에게 넘어갔는지 마귀의 봉쇄에 맞서 싸우는 중인지를 구분할 수 있으며, 내가 사탄에게 어떤 공격을 받는가를 앎으로써 사탄과 싸울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실제로 우리에게서 오늘도 일어나는 일입니다.

사탄의 교회 타격 포인트를 알 수 있는 힌트가 본문 7~8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과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그들이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라고 하였습니다. 하늘에서 미가엘 군대와 사탄의 군대가 싸웠지만 사탄의 군대가 이기지 못해 더는 거할 자리를 찾지 못합니다.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교회가 어떤 구성 요소를 갖고 있는지를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앞서 7장에서 교회는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든 셀 수 없는 큰 무리로 상징되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이마에 인을 치신 자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인침은 예정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이 인을 치시려고 예정하신 사람들 전체이며 하나님의 예정 속에서 성립합니다. 아담의 타락 후에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교회는 성립하게 되었고, 아벨로부터 시작하여 에녹과 노아와 아브라함을 거쳐 이어지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는 순환의 역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예정 안에서 교인으로 인침을 받은 자들은 순차적으로 세상에 태어납니다. 구약시대에 태어난 사람들은 십자가를 예표 하는 어린 양 제사를 통해 예수님을 붙잡고 마음이 하늘로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예정 가운데 하늘에 있다가 세상에 태어난 사람들은 어린 양을 힘입어 마음이 하늘로 올라갑니다. 그리고 이렇게 육체로 살 때 하늘로 올라가기를 일생의 업으로 살던 사람이 죽으면 아버지 품으로 돌아가게 되는 순환이 있습니다.

아벨로부터 시작하여 에녹과 노아와 아브라함과 다윗과 같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있다가, 세상에 태어난 후에는 마음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두고 살다가, 육체가 죽은 후에는 아버지 품에 안겼습니다. 우리 또한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있다가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마음 두는 것을 일생의 업으로 삼고 살아가는 중입니다. 또한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있지만 아직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들 전부가 교회입니다.

마귀는 하늘에서 쫓겨났습니다. 이로부터 마귀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예정 가운데 태어났다가 이미 죽어서 아버지 품으로 돌아갔거나,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들을 공격할 수는 없습니다. 하늘에 접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귀에게는 하늘이 취약점이자 급소입니다. 마귀를 쫓아내는 방법은 ‘마귀야, 물러가라!’라고 외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면 마귀는 따라올 수 없기에 쫓아내는 일이 됩니다. 마음이 하늘로 올라간 사람의 삶의 영역에서 마귀는 힘을 쓸 수 없습니다. 미가엘 천사의 군대가 붉은 용의 군대를 무찔러 붉은 용이 하늘에서 거점을 확보할 수 없게 되었다는 말씀에는 바로 이러한 내용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말씀드렸듯이 마귀는 마음이 하늘로 올라간 사람에 대해서는 어떠한 힘도 발휘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마귀는 어떤 식으로 교회와 교인을 대적한다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서 살다 죽은 사람들,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앞으로 태어날 사람들을 모두 교회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마귀는 하늘을 공격할 수 없기에 땅에서 총공세를 펼칩니다. 마귀가 공격할 수 있는 틈새는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있던 사람이 육신을 입고 이 땅을 사는 기간에 있습니다. 이 기간 동안에 마귀는 자기의 졸개인 귀신들을 동원해서 교회와 교인들을 향한 총공세를 펼칩니다. 그 이야기가 여인이 광야로 피신한 이야기와 맞물려 이어집니다.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있다가 세상에 육신을 입고 태어난 교인들로 이루어진 교회를 향한 마귀의 공세에 대해 하나님의 대처법은 무엇일까요? 그것이 바로 광야 작전입니다. 15~16절을 보면 “여자의 뒤에서 뱀이 그 입으로 물을 강같이 토하여 여자를 물에 떠내려가게 하려 하되 / 땅이 여자를 도와 그 입을 벌려 용의 입에서 토한 강물을 삼키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앞으로 일어날 재앙이나 재난에 대한 경고가 아닙니다. 히브리서 2장 1절을 보면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라고 하였듯이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땅에서 몸으로 사는 기간은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살고 있는 사람, 살다가 이미 죽어서 아버지 품으로 돌아간 사람,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들을 포함하는 전체 교회의 유일한 취약점입니다. 하나님의 광야 작전은 이들의 삶을 광야의 환경으로 바꾸십니다. 여자의 뒤에서 뱀이 물을 강같이 토한다는 것은, 사는 기간에 교회가 하늘을 잊어버리게 만들고자 함을 의미합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떠내려가게 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교회를 둘러싸고 이 세상의 관심거리들을 홍수가 나게 만들어 교회를 공격합니다. 교회가 관심할 일들이 엄청나게 많아질수록 교회는 위태로워집니다. 예배당에는 다양한 이유에서 온갖 종류의 프로그램이 존재합니다. 하늘로 올라가는 것 하나만을 유일한 관심거리로 삼아야 할 교회에, 끊임없이 세상을 향한 관심거리를 주고 영역을 넓히도록 만듭니다. 이것이 교회를 향한 사탄의 공격 포인트입니다. 이것을 모르기에 교회라는 이름으로 세워진 예배당들이 세상에 시선을 빼앗기고 종교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지금 예배당에서 교인은 하늘을 향하여 가야 한다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하늘은 까마득하게 잊고 죽은 뒤에 가는 곳으로만 생각합니다. 그 대신 갖가지 프로그램으로 온 교인들의 관심과 마음의 힘을 세상 쪽으로 쏟게 합니다. 그럴 때 강물같이 밀고 들어오는 사탄의 공격에 의해 이미 교회가 아니게 됩니다. 인침 받은 자들의 모임이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땅이 그 입을 벌려 강물을 삼켰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이 세상의 관심거리들이 다 죽어버리는 상황을 상징합니다. 교회는 바로 이러한 광야 같은 곳입니다. 광야는 단순히 삭막한 곳이 아닙니다. 하늘로 올라가야만 하는 곳입니다.

 

인천공항을 가보면 창밖으로 활주로가 보입니다. 활주로에는 이륙에 방해될 아무런 장애물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미국 나사에서 로켓을 쏠 때 보면 주변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올라가는 것이 목적인 곳은 아름다울 필요가 없습니다. 아름다운 정원이 필요 없고, 인공폭포를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주목적이라면 이 땅의 것은 아무것도 두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모든 교인들의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는 곳입니다. 사탄에게 있어서 하늘은 취약점입니다. 그렇기에 사탄은 교인들의 마음이 하늘로 가지 못하고 땅에 묶이도록 세상의 관심거리를 강물같이 토해내며 총공세를 펼칩니다. 그러나 진짜 인침을 받은 자들의 교회는 강물같이 쏟아지고 있는 세상의 관심거리의 홍수를 땅이 그 입을 벌려 삼켜서 광야의 상태를 유지합니다. 이 교회는 지역 예배당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온 지구에 흩어져 있는 하나의 교회에 대해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이미 살다가 죽어서 하나님께로 돌아간 사람, 지금 살고 있는 사람,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을 포함합니다. 마귀가 이 교회를 공격하는 포인트는 세상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저는 태어나면서부터 교회라고 불리던 예배당에 출석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언제 어디서든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는 사람이 교인이라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제가 목회를 그만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야 한다는 말이 통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예배당은 조직으로써 운영되고 확장되어야 한다는 당위적 목표를 갖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에서는 예배당 조직이 갖고 있는 속성을 이기고 마음이 하늘로 올라갈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버린다는 심정으로 혼자 말씀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많지 않지만 이 말씀을 듣고 각자의 삶의 현장에서 십자가를 붙잡고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평생의 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교회입니다. 예배당 조직으로서의 교회를 포기하자 저도 모르는 사이에 진짜 교회가 생겨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교회에 필요한 것은 인간적인 조직이 아닙니다. 사탄의 공세를 이겨내기 위해 하나님의 광야 작전을 생명처럼 붙잡는 곳입니다. 광야는 마음 둘 관심거리가 아무것도 없는 곳입니다. 사탄은 이것을 알기에 세상의 관심거리로 마음을 빼앗기 위해 공격합니다. 사탄이 강물같이 토해내는 공세에 이미 많은 예배당들이 먹히고 떠내려갔습니다. 그 증거는 마음이 세상에 대한 관심거리로 가득함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이 교회에 대한 사탄의 공격 포인트라면 교인에 대한 공격 포인트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해주었던 말씀을 기억합니다. 갈라디아서 3장 1절을 보면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십자가가 밝히 보였지만 갈라디아 교인들은 그 십자가를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바라보기 싫어서 바라보지 않았던 것이 아닙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꾐을 받았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 요한은 본문 8절에서 사탄에 대해 말하기를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라고 하였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지 않는다면 다른 것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십자가를 바라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탄의 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애초에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해당이 없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어린 양이 십자가에서 못 박히신 사건을 밝히 바라보지 않는 자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십자가를 안 보거나 잊은 것이 아니라 사탄이 역사하여 꾀였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돈 문제를 생각하고 있다면 마음으로 돈을 보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것은 꼭 해결되어야만 하는 급한 문제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급한 문제는 따로 있습니다. 사탄에게 꾐을 당했기 때문에 그 문제가 꼭 해결되어야만 하는 급한 문제로 여기게 되었을 뿐입니다. 우리는 죄와 저주의 체질을 갖고 있습니다. 죄와 저주에 빠져있기 때문에 십자가를 바라봐야만 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지 않고 죄와 저주에 빠진 채 삶의 현장으로 나가 직장에서 사장님을 보고, 가정에서 배우자와 자녀를 보고, 내 몸을 보고 건강을 봅니다. 죄와 저주를 그대로 안고 나간 상태에서 원하는 대로 일이 잘 풀리든 안 풀리든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죄와 저주의 확산, 죄와 저주의 연장, 죄와 저주의 재생산을 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마귀는 ‘십자가는 나중에 봐도 된다. 당장 급한 일부터 해결하자.’라고 꾑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들을 관심거리로 들이대며 십자가를 외면하게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17절을 보면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과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서 있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여자의 남은 자손이란 바로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믿는 자들입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공격하는 포인트는 마음의 시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건을 밝히 바라보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건보다 더 급하게 봐야 할 일, 더 소중한 일, 더 치명적인 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마귀는 세상일들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보다 더 급하고, 더 소중하고, 더 치명적인 것으로 여기게 합니다. 그 일이 정말로 중요해서가 아니라 마귀에게 꾐을 받아 세상일들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죄와 저주의 체질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대로 나간다면 절대로 안 됩니다. 죄와 저주의 연장과 재생산과 확장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하늘을 잃어버리고, 몸은 관계들로 이루어진 세상 나라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지 못하기에 하나님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십자가를 바라봐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 마음은 하늘로 올려가는 예수님을 따라서 하늘로 올라갑니다. 하늘은 사탄이 어떤 힘을 동원해도 공격을 가할 수 없는 곳입니다. 그럴 때 몸의 관계로 이루어진 세상 나라도 하나님의 나라로 바뀝니다. 마귀가 힘을 쓸 수 없는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문제는 사탄의 꾐을 당해서 마음의 시선이 십자가에서 끊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에덴에서 뱀이 선악과를 보도록 꾀었던 것과 같습니다.

 

세상일이 급하게 여겨지고 보암직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해결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먹음직스럽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렇게 느껴지는 일에 대해 ‘이것은 보암직한 일도 아니고 꼭 이루어지면 좋은 먹음직스러운 일도 아니다. 나는 지금 꾐을 당하고 있다.’라고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마귀는 교회를 공격할 때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공격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있는 자들 전체를 포함합니다.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서 태어났다가 이미 죽어서 하나님께로 돌아간 자들, 지금 세상에서 살고 있는 자들, 아직 태어나지 않는 자들이 교회입니다. 하늘에서 쫓겨난 마귀의 공격 포인트는 지금 땅에 살고 있는 자들에게 집중됩니다. 땅에서 살고 있는 교회를 광야가 아닌 세상 관심거리들의 홍수 속에 잠기게 공격합니다. 또한 여자의 남은 자손으로 상징된 교인들의 시선을 공격하여 어린 양을 바라보지 못하게 합니다.

이 공격 포인트를 알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마귀를 쫓아내려 상대하지 말고 십자가로 시선을 돌리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마귀의 공세는 무력화됩니다. 우리에게는 죄와 저주의 체질이 있습니다. 그러한 체질을 가지고 자녀 문제에 손을 댄다면 십자가를 놓쳤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놓친 것은 그냥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라 마귀에게 꾐을 받은 것입니다. 죄와 저주의 체질이 있는 우리에게 가장 급한 일은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인데, 꾐을 받아서 십자가를 놓치고 자녀를 보게 된 것이고 ‘자녀의 문제가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할 때 마귀에게 먹힌 것입니다.

마귀는 이러한 공격 포인트에 총공세를 펼쳐옵니다. 우리는 최대한으로 그 공격에 대응하여 싸움을 효과적으로 이길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인침을 받았다는 증거가 무엇일까요? 어떤 사람들은 인침 받았기에 싸울 필요조차 없다고 생각합니다. 인침 받았으니 구원은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침 받음의 증거는 싸워서 이김으로써 나타납니다. 싸우는 자야말로 인침 받았다는 증거를 가진 자입니다.

십자가 생활화도 매너리즘에 빠질 수 있습니다. 매일 듣는 말이고, 그 말이 그 말 같습니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실제로 십자가를 바라보며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내일 들을 말씀도 똑같은 말로 들릴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을 만났다면 내일 들을 말씀은 새로운 말씀이 됩니다. 그렇기에 내일 또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모레 들을 말씀은 또 새롭게 됩니다.

그 말씀이 그 말씀 같고 다 아는 말씀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매너리즘에 빠진 것입니다. 십자가의 이론을 알고 있어도 십자가 예수님과 함께 죽음을 인정하지 않고 하늘로 올라감을 중단했기 때문입니다. 실제 만남이 없는 십자가 복음 말씀은 매너리즘에 빠지게 되고, 결국 십자가를 버리게 되고, 십자가를 바라보지 않게 됩니다. 단지 십자가를 바라보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온통 세상 것을 마음 시선의 목표로 삼게 됩니다. 마음을 세상에 빼앗기고 흘러 떠내려가게 됩니다. 인침을 받은 자는 싸우는 자임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교회와 교인 각자를 향한 사탄의 공격 포인트를 명확히 알고, 온 교회가 힘을 합하여 광야 작전을 수행하게 해주시옵소서. 교인 각자가 오직 십자가 어린 양에게 시선을 고정시키는 한 가지 작전으로 능히 천하를 지배하는 마귀의 공세를 무력화시킬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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