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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2

녹취문: 참 교인만 아는 예수님 관계 방식_태승철 (계 1:9~20)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3.12.04|조회수68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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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참 교인만 아는 예수님 관계 방식>의 줄거리 :

참 교인만 볼 수 있는 예수님의 특이한 초상화가 있습니다. 이 초상화는 참 교인이 예수님을 관계하는 방식을 제시해 줍니다. 이 방식이 아니면 예수님을 관계할 수 없고 이 방식으로 예수님을 관계하지 않으면 교인이 아닙니다. 이렇게 특이한 초상화의 방식으로 예수님을 관계하는 사람 전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주일인데 교회 안으로 들어가고 싶으십니까? 그러면 이 초상화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초상화가 제시하는 방식으로 예수님을 관계하면 됩니다.

 

 

참 교인만 아는 예수님 관계 방식

 

(요한계시록 1:9~20)

 

9.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10.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11. 이르되 네가 보는 것을 두루마리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등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12. 몸을 돌이켜 나에게 말한 음성을 알아보려고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13.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14.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같고

15. 그의 발은 풀무 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16. 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

 

 

사도 요한은 밧모섬에서 성령에 감동되어 계시를 보게 됩니다. 이때 보았던 예수님의 기이한 모습이 13~16절에 자세히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 모습은 교인들의 마음속에 기억되어야 할 예수님의 초상화입니다. 이 초상화를 바라보면서 한 사람의 교인이 예수님과 관계하는 방식이 어떤 것인지를 떠올릴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 12절을 보면 ‘일곱 금 촛대’가 언급되고, 16절에서는 ‘일곱 별이’ 언급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읽지 않은 20절을 보면 이에 대한 사도 요한이 받은 계시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의 일곱 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요한계시록 전체는 결국 교인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지금도 보좌 우편에 계시며 하나님과 일체가 되셔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계십니다. ‘교인’이란 바로 이러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진 자들 전체를 가리킵니다. 우리 마음이 그리스도 연쇄 과정 속 예수님 안에 들어가 있는 상태가 교인이며 교회입니다. 몸이 예배당 안에 모여 있어도 마음이 제각기 각자의 관심사에 흩어져 있다면 교인일 수 없으며 이들의 모임이 교회일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몸은 사방으로 흩어져 있고 심지어 바다 건너에 가 있더라도, 마음이 그리스도 연쇄 과정 속 예수님 안에 있다면 그러한 사람들 전체가 교인이고 교회입니다.

사도 요한은 우리 마음이 예수님 안에 있기 위해서 예수님과 어떻게 관계해야 되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과 나를 동일시하여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가질 때 예수님과 연합하게 되고 예수님 안에 들어간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사도 요한 또한 본문을 통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과의 동일시를 굉장히 세분화해서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초상화는 예수님이 나에게 어떤 분이시고, 내가 예수님을 어떻게 관계해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오늘 본문에 묘사되고 있는 예수님 초상화의 의미대로 예수님을 관계할 때 우리 마음은 예수님 안에 들어갑니다. 이것이 교회에 들어감이자 교인이 되는 것입니다.

 

9절을 보면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예수의 환난’이 언급됩니다. 우리는 ‘환난’이라는 말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문장을 원문대로 직역해 보자면 ‘예수님 안에서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한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대로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 안에 들어가면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게 됩니다.

사도 요한이 말하는 ‘예수님 안에서의 환난’이란 당시의 상황을 염두에 둘 수 있습니다. 당시 로마 황제는 도미티아누스로서 교인들은 극심한 박해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환난에는 이러한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전 설교에서 말씀드린 대로 우리 마음이 예수님 안에 들어가게 되면 인격 안에서 천국과 세상의 낙차가 생깁니다. 마음은 천국에 가 있고 몸은 세상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마음이 하늘에 올라가 있는 상태에서는 몸으로 사는 세상의 삶 전체가 환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에서 영원토록 계시다가 내려오셨습니다. 천국이 어떠한 곳인지를 아시는 분으로서는 이 땅에 몸을 입고 사시는 것 자체가 환난이었습니다. 이것이 교인에게 적용되는 환난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제대로 믿으면 마음이 온전히 예수님 안에 들어가 하늘로 올라갑니다. 그럴 때 우리 마음에서는 천국과 땅의 낙차가 생기고, 몸으로 사는 이 땅의 삶은 그 자체가 환난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 8절에서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라고 하였고, 빌립보서 1장 23~24절에서는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라고 하였습니다. 천국에 대해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대해서, 복음에 대해서 말씀을 전하는 일이 아니라면 지금 당장이라도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가장 좋기에 이 세상의 삶을 환난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환난에 이어서 ‘나라’가 언급됩니다.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 천국과 세상의 낙차가 생기면 몸이 거하는 세상의 삶은 온전히 아버지의 주권적 뜻이 내려와 다스리시는 아버지의 나라가 됩니다. 이처럼 ‘나라’는 아버지의 주권에 의해서 이끌려 가는 삶의 모습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의 진정한 기쁨과 만족은 하늘에 있고, 내 삶은 아버지의 주권에 의해 이끌려 가는 독특한 형태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참음’이 따라옵니다. 마음이 하늘을 소망하지만 아직은 갈 수 없기에 참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마음이 예수님 안에 들어간 사람은 누구나 몸으로 사는 세상 전체를 환난으로 느끼며 동참하게 됩니다. 오직 아버지의 주권적 뜻이 나를 통해 온전히 펼쳐지는 ‘나라’에 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정해진 기간까지 세상에서 취할 수 있는 태도로써 ‘참음’에 동참하게 됩니다. 이 세상을 참으면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굉장히 큰 자유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더 이상 구애받을 일이 없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가고 싶은데 못 가고, 이루고 싶은데 안 이루어지는 일은 없습니다. 참음은 세상에서 온전한 자유를 누림으로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 마음이 예수님 안에 들어갈 수 있느냐가 중요해집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관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문제는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관계하느냐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본문을 통해 그 대답을 가르쳐줍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본문에서 언급되는 일곱 교회는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교회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일곱은 완전한 숫자로서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존재할 하나이자 전체인 교회를 가리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교회는 예수님 위에 세워졌습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 이루신 죽음과 부활과 승천의 사건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그리스도 연쇄 과정 속 예수님과 관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 요한은 그 관계 방식이 어떻게 되어야 내 마음이 예수님 안에 들어갈 수 있는지에 대해 예수님의 기이한 초상화를 통해 가르쳐줍니다.

 

먼저 13절을 보면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촛대 사이에 계시다’는 것은 교회가 예수님이 그리스도로서 이루신 사건 위에 세워졌음을 가리킵니다. 교회는 추상적 개념입니다. 예수님을 관계하는 대상은 교회가 아닌 교인입니다. 단지 한 사람이 예수님을 올바르게 관계할 때 교인이며, 예수님을 올바르게 관계하는 사람 전체가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는 개인으로 예수님과 관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개인이 관계하는 예수님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띤 모습을 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모습은 당시의 임금이나 왕의 모습을 가장 간략하게 묘사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예수님을 왕으로 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왕이라고 하니 다소 멀게 느껴지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왕을 본 적도 없고 왕과 관계해 본 적도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왕은 이 세상에서 내 의식으로 포착해야 될 존재감이 일등인 대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인 성 과부에게는 남편이 죽고 외아들 하나가 있었습니다. 이 과부에게는 외아들이 존재감의 일등 대상이었기에 외아들이 왕이었던 셈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해당됩니다. 여러분에게 첫 번째 존재감의 대상이 건강이라면 건강은 여러분의 왕입니다.

이로부터 예수님께서 왕의 모습으로 묘사되신 것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추상적으로 만난 적도 없는 이 세상의 왕을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 중에서 예수님을 존재감의 일등으로 삼아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왕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는 왕의 존재감이 일등입니다. 다른 신하나 호위무사의 존재감이 일등이 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님과 관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은 예수님 안에 들어가야 합니다. 이것을 실제로 이루기 위해서는 우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일등으로 의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즉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이 우리에게서 존재감의 일등으로 의식되어야 함을 가리킵니다.

 

이어서 14절을 보면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같고”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다’라는 것은 예수님이 내게서 존재감이 일등이 되실 때 오류와 잘못과 부패가 전혀 없게 된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회사에서 일할 때 마음에서 사장님의 존재감이 일등인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회사에서는 사장님이 나의 왕인 셈입니다. 그런데 사장님이 내게 존재감이 일등인 상태라고 해서 사장님이 하는 일에 오류가 없거나 부패가 없거나 더럽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일이 다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왕처럼 존재감이 일등 되는 일은 모두 잘못과 오류를 포함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과 운명을 같이 하는 사람들도 동일한 잘못과 오류에 빠져듭니다.

사람은 존재감이 일등인 대상을 따르게 됩니다. 존재감이 일등인 두목을 마음에 모셨을 때 두목과 운명을 같이 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길로 들어갑니다. 독일의 히틀러가 정권을 잡았을 때 독일 전체가 히틀러를 존재감의 일등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히틀러와 함께 잘못된 길로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내게서 존재감이 일등 되실 때는 그런 일은 생기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오류와 잘못과 오해와 부패가 없으신 분이시기에 내게도 오류와 잘못과 오해와 부패가 사라지게 됩니다.

여러분의 건강에 문제가 생기고, 자녀에게 문제가 생기고, 사업이 어려움에 처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오류 없이 행동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 잘못됨이 없으려면 방법은 하나입니다. 무조건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을 첫 번째로 의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돈 문제, 건강 문제, 자녀 문제, 사업 문제, 인간관계 문제 등에 오류가 없으려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첫 번째 존재감으로 붙잡으면 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붙잡는 일에는 분야가 없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붙잡는 일은 종교가 아닌 우리의 삶의 문제입니다. 삶에서 무슨 문제가 생겼더라도 그 문제 앞에서 오류 없이 행동하고 싶다면 십자가에서 못 박히신 예수님을 떠올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예수님께서 왕처럼 첫 번째 존재감의 대상이 되셔야만 합니다. 그럴 때 여러분의 삶에서 잘못과 오류와 곡해와 부정과 더러움이 없게 됩니다.

또 ‘그의 눈이 불꽃 같고’라고 했습니다. 이는 곧 예수님께서 우리 속을 들여다보심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마음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외의 다른 대상을 먼저 붙잡고 받아들이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건강 문제, 자녀 문제, 돈 문제, 사업 문제 등 다양한 세상일과 대상을 마음에 담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내 속을 불꽃 같은 눈으로 들여다보시면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보다 먼저 들어와 있는 것들을 결코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조건 우리 의식에서 첫 번째 대상이 되셔야 합니다. 내 몸을 포함하여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 중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일등으로 의식해야만 합니다. 예수님을 일등으로 의식할 때 몸에 대해서도 오류가 없습니다. 건강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와 인생의 모든 문제와 삶의 영역에 대해 틀림이 없는 유일한 길은 진리이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제일 먼저 떠올리는 것뿐입니다. 마음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보다 더 먼저 의식되는 대상이 있다면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불꽃 같은 눈으로 내 속을 들여다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또 15절을 보면 “그의 발은 풀무 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라고 하였습니다. 당시에 가장 단단하다고 여겨지던 물질은 풀무 불에 단련한 주석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발이 풀무 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다’는 것은 주석보다 단단한 것이 없기 때문에 그 발로 밟으면 세상에 깨지지 않을 것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씀드렸듯이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왕 같은 일등 존재감의 대상으로 의식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 모든 문제에서 오류와 잘못과 부정과 악이 없어집니다. 그런 상태에서 세상을 살게 되면 내 마음에서 예수님은 이 세상의 모든 관심거리를 다 발로 밟아버리십니다. 어떤 대상도 내 마음에서 관심이 될 수 없게끔 정복해 버리십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오직 내 마음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만을 향하여 유일한 관심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도록 준비시키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예수님을 첫 번째 존재감의 대상으로 붙잡습니다. 그럴 때 내게는 오류가 없어지고 악이 없어집니다. 모든 잘못과 오류로부터 해방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돌아보며 예수님보다 먼저 붙잡고 있는 것이 없는지 확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불꽃 같은 눈으로 심령 깊은 곳까지 들여다보시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당신 자신이 들어있는지를 살펴보시며 요구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십자가에서 못 박히신 예수님을 의식에 깊이 받아들이게 되면 예수님께서는 풀무로 단련한 빛난 주석 같은 발로 모든 관심을 뭉개버리시고 깨뜨려 버리실 것입니다. 어떤 상황과 문제도 내 마음에서 관심거리로 등장할 수 없게 만들고 정복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이 유일한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준비시키십니다.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라는 말씀도 같은 맥락입니다. 바다에 바람이 불면 높은 파도가 치면서 큰 소리를 냅니다. 나이아가라 폭포에서는 엄청난 물이 낙하하며 큰 소리를 냅니다. 파도치는 곳이나 폭포 옆에서는 아무리 소리쳐도 들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음성이 많은 물소리와 같다는 것의 의미가 이와 같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왕 같은 일등의 존재감으로 의식할 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음성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상태가 되게 하십니다.

예수님 안에 들어가면 다른 음성이 들릴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빛난 주석 같은 발로 모든 관심거리를 깨뜨리심으로써 하나님만이 유일한 관심거리가 되게 하심은 물론이고, 예수님의 음성으로 우리의 마음을 휘감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단 한 번도 자의적으로 말씀하신 적이 없기에, 예수님의 음성에는 언제나 아버지의 뜻이 담겨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들어갈 때 생기는 일도 이와 같습니다. 예수님 안에 우리 마음이 들어가면 아버지의 뜻과 생각을 받아들이신 예수님께서 그 생각과 뜻으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입을 통하여 들려지는 아버지의 뜻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됩니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예수님의 기이한 초상화를 묘사함을 통해 예수님과의 관계가 어떤 것이며 어떻게 관계해야 하는지에 대한 방식을 가르쳐줍니다.

 

마지막으로 16절을 보면 “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왕 같은 일등 존재감의 대상으로 마음에 받아들이면 예수님께서는 빛난 주석 같은 발로 세상의 관심거리를 부수심으로써 하나님만이 유일한 관심이 되게 준비시키십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의 음성 외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게 해주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가 일등 존재감이 될 때 나타나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에서 나타나는 일이 오른손의 일곱 별과 관련된 일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20절을 보면 “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의 일곱 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일곱 별이란 일곱 교회의 사자임이 언급됩니다. 교회로 보내는 사자는 결국 교인을 이끄는 사자입니다.

예배당은 교회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시장에서 장을 보는 동안에도 마음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일등 존재감으로 의식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시장에서 하는 생각과 말과 행동에는 오류가 없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유일한 관심거리가 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됩니다. 시장에서 하는 모든 행동은 일곱 별이 의미하는 대로 하나님의 사자가 달라붙은 상태에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시장에서 장을 보는 일조차도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 됩니다.

예수님의 기이한 초상화가 뜻하는 대로 예수님과 관계해서 마음이 예수님 안으로 들어간 사람에게는 음식을 먹는 일도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고, 잠을 자는 것도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달라붙어서 이끌어가는 상황이 됩니다. 밥을 먹어도 교회 안에 있는 것이고, 회사에서 근무해도 교회 안에 있는 것이 됩니다. ‘일곱 별이 교회로 보내는 사자’라는 뜻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자를 예배당으로 보낸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예수님 안에 들어가 있다면 시장에 있어도 교회 안에서 시장을 보는 것이고, 가정에 있어도 교회 안에서 가정생활을 하는 것이며, 직장에서 근무할 때도 교회 안에서 근무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예수님 안에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사도 요한이 묘사한 예수님의 초상화의 모습대로 예수님과 관계하는 사람들 전체입니다. 여러분이 가정에 있든 시장에 있든 여러분의 마음이 본문에 기록된 초상화의 모습대로 예수님과 관계한다면 여러분은 이미 교회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모두 예수님 안에 받아들여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 안에 들어와 있는 내 마음에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전달해 주십니다. 이로부터 내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움직이는데 날선 검이 되어 모든 거짓이 제거되고, 아버지의 뜻이 예수님을 통해서 내게 전달됩니다. 이어서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고 한 것은 우리 마음이 예수님 안에 들어있을 때 어두움의 구석은 조금도 남아있지 않게 됨을 의미합니다. 우울함, 불안, 근심, 걱정 같은 모든 어두움이 사라지고 오직 아버지의 햇빛 같은 밝음만이 예수님을 통해 전달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러한 삶을 살아가는 동안에 모든 교인은 각자의 삶에서 교회를 대표하게 됩니다.

 

오늘은 주일입니다. 여러분께서 진정으로 주님의 교회 안에 들어가고 싶으시다면 사도 요한이 묘사한 초상화가 뜻하는 대로 예수님과 관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예수님 안에 들어갔다면 여러분은 교회 안에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예배당에 나가더라도 초상화가 의미하는 방식대로 예수님과 관계하지 못하고 마음이 예수님 안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교회 바깥으로 튕겨져 나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몸이 예배당에 들어가 있느냐 혹은 예배당 바깥에 나와 있느냐는 교회에 속함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아무쪼록 참 교인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에 묘사된 예수님의 기이한 초상화의 의미가 여러분에게서 이루어짐으로써 진정한 교인이 되시고, 여러분이 계시는 곳에서 교회를 대표하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묘사된 예수님의 기이한 초상화가 우리 마음의 길임을 알게 하시고 이 길을 따라 예수님 안으로 온전히 들어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빛이신 아버지의 밝음이 내 삶의 구석구석을 비추는 광명의 삶을 살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어둠의 세상 어디에 있든지 참 교인으로서 교회를 대표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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