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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스스로 튜브 돼야 바다짐승 이긴다>의 줄거리 :
육체를 입고 이 땅에서 살면서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성도를 향한 붉은 용 마귀의 총공세가 펼쳐집니다. 이 공격을 위한 선봉장으로 바다에서 나온 짐승이 등장합니다. 열개의 뿔과 일곱 머리를 가지고 표범 같은 몸에 곰의 발에 사자의 입을 가진 자입니다. 이제 성도는 이토록 무시무시한 바다짐승과 싸워 승리를 얻어내야 합니다. 이기는 길은 스스로 튜브 되는 것입니다
스스로 튜브 돼야 바다짐승 이긴다
(요한계시록 13:1~10)
1.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왕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신성 모독하는 이름들이 있더라
2. 내가 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
3. 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놀랍게 여겨 짐승을 따르고
4.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므로 용에게 경배하며 짐승에게 경배하여 이르되 누가 이 짐승과 같으냐 누가 능히 이와 더불어 싸우리요 하더라
5. 또 짐승이 과장되고 신성 모독을 말하는 입을 받고 또 마흔두 달 동안 일할 권세를 받으니라
6.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비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사는 자들을 비방하더라
7. 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
8.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9.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지어다
10. 사로잡힐 자는 사로잡혀 갈 것이요 칼에 죽을 자는 마땅히 칼에 죽을 것이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13장은 두 짐승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중에서 우리는 바다에서 나온 짐승에 관한 부분을 읽었습니다. 제목은 스스로 바람이 꽉 차 있는 튜브가 되어야 바다에서 나온 짐승을 이길 수 있다는 뜻입니다.
앞서 12장 17절에서는 붉은 용 마귀가 교회를 상징하는 여자의 남은 자손에게 총공세를 펼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여자의 남은 자손이란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서 이마에 인침을 받은 자들 전체인 교회를 의미합니다. 마귀는 하늘에서 쫓겨났기 때문에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있는 모든 교인들 중에서도 공격할 수 있는 대상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이 세상에 육체를 입고 태어나 살다가 육체를 벗어버리고 하나님 품에 안긴 사람들을 공격할 수 없습니다. 또한 아직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사람들도 공격할 수 없습니다. 마귀의 공격은 오직 지금 육체를 입고 이 땅에서 사는 성도들에게 국한됩니다.
마귀는 이렇게 육체를 입고 이 땅에서 사는 성도들에게 총공세를 펼칩니다. 본문을 보면 붉은 용으로 상징된 마귀가 바다짐승을 선봉장으로 세우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이 바다짐승은 일상적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예수님의 증언을 가지고 있는 성도들을 공격합니다. 12장 17절에서 언급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이란 단순히 성경에 기록된 문자대로 움직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실시간으로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과 연결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갖고 계신 생각을 실시간으로 받아서 그 생각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있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증거를 붙잡을 수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의 증언을 붙잡고 내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과 연결되고 실시간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뜻을 따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함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있습니다. 바다에서 나온 짐승은 그러한 사람들을 향하여 공격합니다.
우리는 공격을 받기에 어쩔 수 없이 싸워야 합니다. 여기서 문제가 하나 발생합니다. 바다짐승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다짐승은 공격할 때를 알고 있는데, 우리가 바다짐승이 알고 있는 것을 모른다면 싸움이 되지 않습니다. 바다짐승은 당연히 우리에게 해당되는 사실을 알고 공격합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에게 해당되는 사실임에도 모르고 있다면 바다짐승과 싸워서 이길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활화하는 참 성도를 보기가 힘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에게 치명적으로 해당되고 깊숙이 해당되는 사실임에도 바다짐승은 알고 있는데 우리는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다짐승은 이 사실에 근거하여 우리를 24시간 공격합니다.
이것은 성도가 아닌 사람들에게는 애초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실시간 뜻을 따르는 계명을 지키고 예수님의 증거를 붙잡은 사람이 아니라면, 이미 아담 때 마귀의 유혹에 넘어감으로써 마귀의 수중에 있는 자들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에 대해 마귀는 공세를 펼칠 필요가 없습니다. 마귀는 성도들만 공격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공격이 일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천 년 전에도, 천 년 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성도들은 계속해서 바다짐승의 공격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님에 대한 증언과 무관하게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은, 이러한 공격을 받을 필요가 없을 만큼 이미 마귀의 손에 장악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붉은 용인 마귀는 성도들을 공격하는데 바다짐승을 선봉장으로 내세운 것일까요? 우리는 바다가 무엇을 상징하는가를 알아야 바다짐승과 싸워 이길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해석은 바다가 뜻하는 바를 정확하게 제시하지 못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 8절을 보면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라고 하였습니다. 짐승이 싸움을 걸어올 때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창세 이전의 상태입니다. ‘창세 이후’란 태초에 하나님의 창조가 시작되기 이전을 가리킵니다. 세상이 창조되기도 전에 이미 내 이름은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었습니다. 기록되지 않았다면 바다짐승을 이길 수 없고 바다짐승을 경배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창세 이전의 상태는 태초의 상태로 지금도 여전히 존재합니다. 그 상태를 배경으로 싸움이 치러지기에 우리도 그 상태를 분명히 알아야만 합니다. 태초에 창조가 이루어지기 전은 그야말로 없음의 무(無)의 상태입니다. 창세기 1장 1~2절을 보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만 계시고 아무것도 없는 무의 상태가 ‘깊음’으로 상징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창조 이전에는 시간도 없고 공간도 없었습니다. 따라서 이 상태를 시간과 공간 속에 살고 우리의 언어로는 창조 전의 모습을 정확히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단지 상징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 뿐입니다. 물론 상징적으로 표현한다고 해서 사실이 아닌 것은 아닙니다. 사실을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기 위해 상징을 사용했다는 점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창세기에서 태초 이전의 상태는 깊음으로 상징되었습니다. 깊음이란 쉽게 말해 바닥이 없는 바다를 가리킵니다. 없음의 바다이고 무의 바다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은 없음의 바다 위 수면을 운행하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영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루아크(רוּח)는 바람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영을 상징적인 언어로 표현하자면 바람이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바람이시기에 없음의 바다 수면 위로 떠다닐 수 있었습니다. 바람은 바다에 빠지지 않습니다. 바다에 빠지지 않는 이유는 영이시며 바람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영이시고 바람이신 하나님께서는 없음의 바다 위에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늘과 땅과 그 가운데 존재하는 모든 삼라만상이 ‘있다’라는 개념은 없음의 바다 위에 떠 있는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내 몸이 있다는 것은 그냥 있게 된 것이 아닙니다. 없음의 바다 위에 만들어졌습니다. 반대로 몸이 죽는다는 것은 없음의 바닷속으로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이탈리아 베네치아에는 수상 가옥들이 많습니다. 10층이 넘는 빌딩조차 바다 위에 세워져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의 모습이 이와 같습니다. 우주에 있는 태양과 달과 무수한 별들로부터 시작하여 지구의 삼라만상은 없음의 바다 위에 있게 된 것들입니다. 영이시고 바람이신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면 마치 튜브처럼 없음의 바다로 가라앉지 않고 떠 있게 되는 것입니다.
강릉 바닷가에 있는 소나무 한 그루조차도 영이시고 바람이신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여 없음의 바다 위에 튜브처럼 떠 있는 상태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고 있는 이 세상의 비밀입니다. 그리고 바다짐승은 이 비밀을 알고 우리를 공격합니다. 하늘을 나는 갈매기도 없음의 바다 위에 떠 있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갈매기는 의식하지 못하는 채로 갈매기의 모양이 되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있는 중입니다. 갈매기라는 튜브로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비 한 마리도 나비라는 튜브입니다. 마주하고 있는 배우자도 배우자라는 튜브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육체는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제가 이렇게 생긴 것은 제가 그렇게 되고 싶어서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들어와 이러한 모습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제 몸도 튜브입니다. 문제는 인격성을 가지고 있는 마음입니다. 마음도 영이시고 바람이신 하나님을 받아들여야 가라앉지 않습니다. 마음이 가라앉으면 두려움과 우울함과 불안함을 견딜 수 없습니다. 우울증이나 공황장애 같은 질환들도 마음이 없음이라는 바다 위에 떠 있지 못하고 가라앉기 때문입니다.
한편 타락 이후에 인간의 마음은 없음의 바다로 가라앉으려고 하는 자기 자신을 지탱하기 위해 어떤 방식을 취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육체로 관계하는 것들을 널조각으로 붙잡는 것입니다. 육체는 지금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여서 육체라는 튜브로 떠 있지만 마음은 사정이 다릅니다. 타락하여 더는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마음이 깊음의 바다, 없음의 바다로 빠지지 않기 위해 육체의 오감으로 포착하는 대상들 중에서 널조각을 찾게 되었습니다.
타락하여 하나님을 등진 사람은 더는 영이시고 바람이신 하나님을 마음에 받아들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마음이 튜브가 되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영이시고 바람이신 하나님이 다 빠져나가 마치 바람 빠진 튜브처럼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육체가 살아있는 동안에 마음은 없음의 바다에 가라앉지 않기 위하여 눈에 보이는 피조물들을 붙잡으며 발버둥을 칩니다. 이것이 인간의 실존입니다.
바다짐승은 이러한 인간의 실존에 대해 정확히 알고 공격해 옵니다. 다만 말씀드렸듯이 모든 인간을 공격하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미 공격할 필요가 없을 만큼 마귀가 원하는 대로 하고 있습니다. 다만 바다짐승은 성도들을 공격합니다. 본문은 바다짐승이 성도들을 공격해 들어오는 상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상황을 보면서 짐승에게 경배한 적이 있는지 검토해 볼 수 있습니다. 아마 거의 모든 사람이 짐승에게 경배했던 경험을 떠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1절을 보면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왕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신성 모독하는 이름들이 있더라”라고 하였습니다. 바다짐승은 뿔이 열이요 그 뿔에는 열 왕관을 가졌다는 것은 성도를 대항하고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하기 위해 완벽한 권세를 갖추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모독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해치기 위한 경쟁이 있다고 한다면 바다짐승이 단연코 일등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일곱 머리를 가졌다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해치는 일에 있어서는 지혜가 완벽하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머리들에는 신성 모독하는 이름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는 곧 바다짐승이 싸우는 방식을 가르쳐줍니다. 바다짐승은 이름의 차원에서 싸움을 걸어온다는 것입니다. 신성 모독하는 이름들을 인간에게 주입하는 것입니다.
이 구절을 해석하는데 많은 학자들이 신성 모독이라는 대목에서 고민합니다. 역대로 로마 제국의 황제들 중에는 자신을 신격화했던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학자들 또한 이러한 황제들을 떠올리며 바다짐승이 이들을 가리킨다고 해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설령 로마의 모든 황제가 자신을 신격화했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기껏해야 수십 명일 뿐입니다. 지구상에 존재해 온 인구에 비하자면 몇 명 되지도 않는 숫자입니다. 황제 한 사람이 자신을 신격화하는 것은 대수롭지도 않은 일입니다.
말씀드렸듯이 바다짐승의 공격 대상은 성도들입니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신성 모독이란 곧 신의 속성에 대한 모독입니다. 바다짐승은 유일한 신이신 하나님의 속성을 모독합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 하십니다. 그런데 인간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첫 번째 속성은 바로 ‘있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있는 자’이십니다. 이것이 인간과 관계된 하나님의 첫 번째 속성입니다. 이는 창조의 이야기에도 연관이 있습니다. 창조는 곧 있음과 없음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왜 세상 만물이 있게 되었는가? 유일하게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이 창조하셨기 때문이다.’라는 있음과 없음의 가장 본질적인 문제를 창세기 처음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잘나고 못남에 대한 문제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합니다. 모든 삼라만상은 없음의 바다 위에 떠 있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있음이란 없음의 바다 위에 가라앉지 않고 떠 있는 상태입니다. 부모님이 아직 살아 계신다면 아직 없음의 바다에 빠지지 않고 떠 있는 상태입니다. 신성 모독이 이와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유일하게 스스로 있음입니다. 영이시고 바람이신 하나님만이 없음 속에 잠길 수 없는 속성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 이외의 모든 것들은 없음 위에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다 없음의 바다로 빠질 운명을 갖고 태어났습니다.
모든 삼라만상은 인격이 없기 때문에 무의식중에 자기 안으로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여서 튜브처럼 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은 인격체이기 때문에 스스로 선택해야만 합니다. 영이시고 바람이신 하나님을 환영하고 받아들이는 인격적 작업이 없으면 튜브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자리가 있습니다. 첫 번째 존재감을 느끼는 대상입니다. 인간이라면 첫 번째로 있다고 느끼는 대상이 하나님이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의 존재감을 느껴야만 인간의 마음은 튜브가 되어서 없음의 바다에 빠지지 않습니다.
첫 번째 있음의 자리는 하나님의 자리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장님 앞에 있어도 첫 번째로 하나님의 있음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보다 사장님의 있음을 우선적으로 느낀다면 하나님의 자리에 사장님을 끌어들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성 모독입니다. 하나님만이 들어오셔야 될 자리는 내가 느끼는 첫 번째 존재감의 대상이 있어야 될 자리입니다. 그 자리에 배우자를 끌어들였다면 신성 모독입니다.
하나님만이 유일한 있음이시기에 내가 없음의 바다에 빠지지 않으려면 하나님의 존재감만을 첫 번째로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첫 번째 존재감의 자리에서 하나님 이외에 다른 것을 느끼고 있다면 하나님 자리에 다른 대상을 앉힌 것입니다. 스스로 있는 자 대신에 있게 된 것들을 앉힌 상태야말로 신성 모독입니다.
우리는 신성 모독을 크게 오해합니다. 깡패, 도둑놈, 양아치, 사기꾼, 강도 같은 나쁜 말을 하나님께 적용하는 것을 신성 모독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진정한 신성 모독이 아닙니다. 내게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입니까? 가장 소중한 대상이 자녀라면 자녀로 신성 모독을 하고 있는 것이고, 가장 소중한 대상이 배우자라면 배우자로 신성 모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대상은 부모일 수도 있고 내 몸일 수도 있습니다. 내게 가장 소중해서 보석같이 여겨지는 대상의 이름이 하나님이 아니라면 그것들은 하나님의 첫 번째 속성인 스스로 있음을 모독하는 이름들이 됩니다.
사탄은 이 존재감의 첫 번째 자리에 영이시고 바람이신 하나님을 차단하여 우리의 마음이 튜브가 될 수 없게 합니다. 육체가 있는 것은 사실이기에 살아있는 동안 육체로 볼 수 있는 대상들을 붙잡고, 깊음의 바다에 빠지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게 만듭니다. 이것이 바다짐승의 공격 목표이고 목적입니다.
6절을 보면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비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사는 자들을 비방하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사탄은 우리를 공격할 때 끊임없이 비방하고 신성 모독하는 말을 합니다. 쉽게 말해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도 않는 하나님과 천국 따위를 무엇 때문에 염두에 두고 사느냐? 설령 죽은 뒤에는 천국에 가고 싶을지라도 살아있는 동안에는 눈에 보이는 확실한 것을 붙잡으라. 정신 빠진 사람들이나 눈에 보이지 않고 들리지도 않는 하나님에게 마음을 두고, 하나님의 존재감을 첫 번째로 느끼라고 한다. 그냥 자연스럽게 살아라. 눈에 배우자가 보이면 배우자의 존재감을 느끼면 된다. 눈에 친구가 보이고, 형제자매가 보이고, 부모가 보이면 그들의 존재감을 느끼면 된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하나님을 느끼겠다고 꾸역꾸역 발버둥 칠 필요가 없다.’라고 장광설을 토해 냅니다. 이것이 사탄의 공격이고 비방이며 훼방입니다.
한편 이와 관련하여 7절을 보면 이상한 말씀이 등장합니다. “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이 10절로 이어집니다. “사로잡힐 자는 사로잡혀 갈 것이요 칼에 죽을 자는 마땅히 칼에 죽을 것이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이 땅에서 핍박과 괴로움과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지는 자들은 사탄이 성도들과 싸워 이긴다는 말이 나오게 하는 장본인들입니다.
이들은 겉으로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예수님의 증언을 붙잡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삶에서 당하는 어려움과 환난을 세상 탈출할 계기로 삼지 못한 자들입니다. 오히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정말로 사랑이시고 주권자이시고 나의 아버지이심을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내가 이렇게 암에 걸려서 아픈데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이 맞나? 십자가를 붙잡고 생활화한다고 해도 눈에 보이게 삶에서 달라지는 것은 없지 않은가?’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몸으로 사는 환경과 몸으로 맺는 관계 속에 이 세상에서 말하는 성공이나 형통이나 번영이 이루어지지 않는 기간을 참지 못한 자들입니다. 삶의 어려움과 환난을 세상 탈출할 계기로 삼는 대신에 오히려 계속해서 하나님의 있음을 의심하고 회의적으로 생각합니다. 이러한 태도가 나타나는 이유가 8절에서 제시됩니다.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었음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요?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은 십자가의 예수님이십니다. 어린 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들은 오늘도 십자가 예수님을 시선에서 놓치지 않습니다. 눈앞에 누가 보이든지 그들의 존재감을 십자가에서 죽이고, 오직 예수님을 따라 세상에 대해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유지하고자 합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존재감만을 우선하여 받아들이려고 싸우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회사에서 과장으로 있으면서 하나님의 존재감보다 부장님의 존재감을 먼저 느낀다면 바다짐승을 경배하는 것입니다. 눈앞에 있는 아내가 바가지를 긁는다고 미움이 생겼다면 미움의 방식으로 아내의 존재감을 먼저 느끼게 된 것입니다. 그 아내를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존재감을 느끼지 못하고 눈으로 보는 대로 아내의 존재감을 먼저 느끼고 있다면, 아내의 탈을 쓰고 나타난 짐승의 공격 앞에서 무릎 꿇고 경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문제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 문제에 대해, 돈 문제에 대해, 건강 문제 등에 대해 그것들을 주관하시는 주권자 하나님의 존재감을 제쳐두고, 주어진 문제들의 존재감을 먼저 느끼게 되었다면 바다짐승으로 상징된 붉은 용의 총공세 앞에서 무릎 꿇고 경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들은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을 바라보면서 싸웁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 귀에 들리는 것들,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들이 내 마음에서 첫 번째 존재감의 대상이 되려고 하는 모든 순간을 그대로 놔두지 않고 십자가에서 죽습니다. 그러나 이 싸움을 날마다 하지 않으면 깊음의 바다 위에 만들어진 마음이 가라앉는 불안과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하여 어쩔 수 없어서라도 눈에 보이는 것들을 붙잡게 됩니다. 스스로 튜브가 되지 못하기에 널조각을 의지하는 바다짐승에게 경배하는 자들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을 놓치지 않음으로써 영이시고 바람이신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뜻으로 가득 채워진 튜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일상이 무의 바다, 없음의 바다 위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잊지 않게 해주시옵소서. 그러기 위하여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을 붙잡고 하늘과 연결됨으로써 영이시고 바람이신 하나님의 존재감으로 가득 채워지는 하늘 튜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