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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땅짐승에게 홀려서 미쳐버린 존재감>의 줄거리 :
붉은 용인 사탄이 가하는 교인 공격의 선봉장은 바다짐승입니다. 그런데 이 바다짐승을 땅짐승이 나서서 적극적으로 도움으로써 사탄의 교인 공격의 완성도를 극한까지 끌어 올립니다. 이 땅짐승의 전략이 너무 탁월합니다. 이 교활한 전략에 넘어가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거의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있음을 느끼는 존재감이 미쳐버리는 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땅짐승에게 홀려서 미쳐버린 존재감
(요한계시록 13:11~18)
11. 내가 보매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니 어린 양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을 하더라
12. 그가 먼저 나온 짐승의 모든 권세를 그 앞에서 행하고 땅과 땅에 사는 자들을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게 하니 곧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은 자니라
13.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14. 짐승 앞에서 받은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하더라
15. 그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
16. 그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인이나 종들에게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17.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18.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한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것은 사람의 수니 그의 수는 육백육십육이니라
바로 앞에서 바다짐승에 대한 계시를 살펴보았습니다. 이어서 오늘은 땅짐승에 관한 계시가 나옵니다. 이러한 본문과 연관하여 제목에서 ‘미쳐버린 존재감’이라는 표현을 사용해 봤습니다.
요즘 인터넷상에서 새로운 말들이 많이 만들어져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 ‘미친 존재감’이라는 말이 자주 쓰입니다. 탁월함을 드러내는 사람을 향해서 쓰이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손흥민 선수가 한 경기에서 세 골을 넣는 해트트릭을 이루었다면 ‘미친 존재감을 드러낸 손흥민 선수’라는 식으로 신문 기사가 나옵니다. 또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조연이나 단역 배우가 시청자들에게 큰 인상을 남기고 각인될 때도 ‘미친 존재감을 발휘했다.’라는 말을 합니다. 한편 오늘 제목에서 언급한 ‘미쳐버린 존재감’이란 내뿜는 존재감이 아니라, 느끼는 존재감이고 드러나는 존재감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존재감입니다. 느끼는 존재감과 받아들이는 존재감이 미쳤다는 것입니다.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바다짐승과 땅짐승의 공통된 배경을 설명해 봅니다. 사람의 마음은 스스로 있게 된 것이 아닙니다. 이는 곧 태초의 깊음으로 표현되는 없음의 바다 위에 떠 있도록 만들어졌습니다. 이 바다 위에 떠 있으려면 의식으로 바람이신 하나님의 존재감을 느끼면서 받아들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존재감을 느끼는 상태가 영이시고 바람이신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럴 때 사람의 마음은 튜브가 되어서 없음의 바다에 빠지는 불안과 두려움 없이 평강 가운데 살 수 있게 됩니다.
이러한 배경으로부터 붉은 용 사탄의 선봉장인 바다짐승의 유일한 목표가 생겨납니다. 바다짐승은 모든 사람에게서 하나님 있음을 느끼는 존재감을 없애버립니다. 바다짐승이 사람의 마음에서 하나님의 존재감을 없애는 것을 목표로 역사했다면, 땅짐승은 바다짐승의 목표가 이루어지도록 하나님 이외의 존재감을 느끼도록 구체적으로 역사합니다. 11절을 보면 땅짐승의 모습을 “내가 보매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니 어린 양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을 하더라”라고 하였습니다. 바다짐승이 붉은 용의 오른팔이라면 땅짐승은 붉은 용의 왼팔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붉은 용과 바다짐승과 땅짐승이,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처럼 삼위일체를 이루고 있음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땅짐승은 마치 어린 양을 연상시키는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한다고 했습니다. 바다짐승은 붉은 용과 똑같이 열 뿔과 일곱 머리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땅짐승은 바다짐승과 같이 용처럼 말을 합니다. 붉은 용과 바다짐승과 땅짐승이 삼위일체로 합심하여 공격하는 최종 목표는 성도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미 다 붉은 용에게 넘어간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은 일상적인 삶의 현장에서 육체를 통해 다양한 대상을 마주하게 됩니다. 배우자를 마주하고, 자녀를 마주하고, 부모를 마주하고, 직장 동료와 업무를 마주하고, 친구를 마주하며, 취미생활을 마주하고, 식사를 마주할 것입니다. 붉은 용과 바다짐승과 땅짐승이 삼위일체로 합심하여 얻으려는 최종 목표는, 성도들의 일상적인 현장에서 하나님의 있음에 대하여 존재감을 느끼는 일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끔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을 공격하는 사탄의 선봉장이 바다짐승이었다면, 땅짐승은 바다짐승의 의도를 받아들여 그 의도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완성도를 높이는 역할을 수행합니다. 그 방법이 바로 땅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영적인 의미에서 볼 때 땅이라는 것은 실제로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땅이 상징적으로 어떤 느낌을 갖게 하는지에 대해서는 쉽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땅은 발로 딛고 사는 곳이며, 든든한 것, 발판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바다짐승을 이야기할 때 바다가 실제 지구에 존재하는 오대양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던 것처럼, 땅짐승과 연관되어 나오는 땅도 지구에 존재하는 육대주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땅짐승이 만들어내는 땅이란 한 사람의 의식 속에서 생겨나는 현상입니다. 없음의 바다 위에 떠 있는 것이 피조물입니다. 그러므로 인격성이 없는 모든 삼라만상은 창조주의 뜻을 받아들임으로써 떠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과는 다르게 인간의 몸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의 몸과 저의 몸이 이렇게 존재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뜻이 몸 안으로 들어와서 튜브로 만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마음은 사정이 다릅니다. 우리 마음은 인격적 존재입니다. 따라서 무조건적으로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존재감을 받아들여서 튜브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마음은 스스로 있는 존재가 아니기에 다른 대상을 통해 안심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다른 대상의 있음이 확인됨을 통해 있음의 발판을 마련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바다짐승은 바로 이 점에서 인간의 마음이 하나님의 있음을 절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결국 마음이 있음을 느끼는 대상들은 스스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붙잡아도 결국 가라앉을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땅짐승은 탁월한 능력으로 각종 대체물을 제시합니다. 우리가 신앙을 가지고 있든 아니든, 마음으로 하나님의 존재감을 느끼든 느끼지 못하든, 몸 자체는 하나님의 뜻이 들어와서 살아있게 되는 튜브입니다. 없음의 바닷속으로 빠져든다는 것은 없어지는 것이기에 지금 있다는 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 들어오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몸이 있기에 그로부터 관계가 생겨납니다. 부모가 있고, 배우자가 있고, 자녀가 있고, 형제자매가 있고, 친구가 있고, 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는 사람들로부터 동네가 있고, 동네가 속한 도가 있고, 도가 있으니 대한민국이 있고, 대한민국이 있으니 일본도 있고 중국도 있고, 바다 건너 미국도 있고 유럽도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관계의 영역은 확장되어 나갑니다.
따라서 하나님에 의해 있게 된 것들을 ‘있다, 있다, 있다’의 확장으로 생각하다 봅니다. 가정에서는 내 몸으로부터 시작해서 부모님, 형제자매, 배우자, 자녀가 하나님으로부터 있게 된 것들입니다. 그렇다면 있게 하신 하나님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관계 속의 대상들을 ‘있다’라는 것으로 묶어버립니다. 부모든 배우자든 자녀든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뜻이 들어가서 독자적으로 떠 있는 통나무와 같습니다. 그런데 그 통나무를 개별적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하나로 묶어 뗏목으로 삼습니다. 통나무가 묶여서 뗏목이 되니까 든든해 보입니다. 이로부터 뗏목은 점점 커져갑니다. 옆집 사람도 결국 대한민국이라는 뗏목의 일부로 여기게 됩니다. 대한민국은 세상이라는 뗏목의 일부입니다. ‘있다, 있다, 있다’로 연결되는 과정을 통해 내 의식 안에서는 하나님의 뜻에 의해 있게 된 통나무들이 하나로 묶이면서 거대한 뗏목을 이루게 됩니다.
이렇게 뗏목이 이루어질 때 사람의 마음은 더 이상 다른 있음의 근거를 찾을 필요가 없게 됩니다. 뗏목을 절대 불변의 땅으로 여깁니다. 미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뉴스를 들으면 미국이 있음을 느낍니다. 또 유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뉴스를 들으면 유럽이 있음을 느낍니다. 그 있음에는 개별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내 가족으로부터 시작하여 촘촘하게 없음의 바다에 떠 있게 된 통나무들이 이어지고 이어져서 땅을 이룬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땅이 아닙니다. 없음의 바다 위에 땅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참새, 백합화, 사람의 몸, 산, 들, 강 등이 개별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있게 된 것들이고, 없음의 바다 위에 떠 있는 튜브이자 통나무들입니다. 그런데 땅짐승은 이것들을 한데 묶어서 뗏목으로 만들고 땅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에 사람들은 땅은 견고하고 움직이지 않는다고 착각하며 땅이라는 이름의 뗏목에 매달립니다.
이처럼 땅짐승에 속은 사람들은 깊음으로 표현된 없음의 바다 위에 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있음의 존재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느낍니다. 땅짐승의 공략은 탁월합니다. 모든 사람은 개별적으로 없음의 바다에 떠 있습니다. 그런데 땅짐승은 그것을 의식 안에서 묶어버리고 광활한 뗏목으로 만들고 땅이라 이름 붙였습니다. 견고하여 움직이지 않기에 그 위에 있으면 마음이 가라앉을 일이 없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킵니다.
이것은 결국 바다짐승이 원하는 일입니다. 바다짐승은 성도들 즉 교인들의 마음에서 하나님의 있음에 대한 존재감을 없애고자 합니다. 그 뜻을 받아들여서 하나님의 존재감을 다른 것의 존재감으로 대체시키는 것이 땅짐승입니다. 더 이상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감을 붙잡지 않아도 괜찮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견고한 땅을 우리 의식 속에 환상으로 심어준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환상입니다. 내 마음에 대해서 조금도 안정되지 않고 견고하지 않습니다. 어떤 것도 마음의 평강을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환상으로 인해 하나님의 존재감은 완전히 상실되고 맙니다. 교인들 중에서도 하나님의 존재감 없이 일상을 살아가는 모습은 보편화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감은 예배당에서 와서 예배를 드릴 때나 잠깐 있을 뿐이지 실제 생활 현장에서는 조금도 의식되지 않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12절을 보면 “그가 먼저 나온 짐승의 모든 권세를 그 앞에서 행하고 땅과 땅에 사는 자들을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게 하니 곧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은 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처음 짐승이란 바다짐승을 가리킵니다. 바다짐승에게 경배하게 한다는 것은 다시 말해 바다짐승이 제일 좋아하는 것으로 예물을 바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바다짐승이 좋아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다짐승은 사람들이 자기를 좋아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바다짐승이 좋아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자기의 일상적인 삶의 현장인 부모 앞에서, 배우자 앞에서, 자녀 앞에서 그들의 존재감 때문에 하나님의 존재감을 싹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땅짐승은 바다짐승의 뜻을 받들어서 하나님의 존재감을 느낄 필요가 없을 정도로 내 마음에 대해 안정감을 느낄 수 있는 대체물을 만듭니다. 그것이 바로 땅입니다. 땅짐승은 사람의 의식 속에서 하나님에 의해 없음의 바다 위에 떠 있는 것들을 묶어서 뗏목으로 만들고 땅이라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러한 땅짐승의 역사에 휘말리지 않은 사람은 전혀 없습니다. 이것이 바다짐승에게 경배하게 했다는 것이며,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존재감이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람은 존재감을 느껴야만 합니다. 그런데 땅짐승은 그 존재감을 미쳐버리게 만듭니다. 쉽게 말해 ‘와! 땅이 있구나!’라고 착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없음의 바다 위에는 마음이 든든하게 발을 딛고 설 수 있는 땅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없음의 바다 위에 떠 있는 통나무들뿐이기 때문입니다. 땅짐승이 우리의 의식 속에 만들어낸 착각일 뿐입니다. 지구 위에 존재하는 오대양 육대주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땅짐승이 꾸며낸 마음의 발판으로써의 땅은 우리 의식 속에 존재합니다. 이 세상에 눈에 보이는 것들을 의식 속에서 믿음직한 근거로 느끼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상황을 정확히 짚어내십니다. 마태복음 10장 34~36절을 보면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가정을 마음이 든든하게 딛고 설 발판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가정이 편안하면 하는 일이 다 잘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 거짓말입니다. 예수님은 마음에서 가정을 베어내십니다. 내 몸과 아내의 몸과 자녀의 몸과 부모의 몸이 다 묶여서 뗏목처럼 되어버린 상황에서 그 묶인 끈들을 다 끊어버리라 말씀하십니다. 산산이 끊어져서 각자가 하나님의 존재감을 받아들임으로 튜브가 되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사탄은 이와는 반대의 일을 합니다. 계속 사람들을 묶습니다. 의식 속에서 있게 된 모든 것들을 ‘있다, 있다, 있다’라고 느끼며 뗏목으로 만듭니다. 그리고 그 뗏목 위에 마음이 있게 됨으로써 하나님을 찾지 않아도 없음의 바다에 빠지는 불안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착각하게 만듭니다.
한편 여기서 해석하기 어려운 부분이 한 곳 있습니다. 13절을 보면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라고 하였습니다. 이 부분은 해석의 어려움 때문에 학자들이 고민합니다. 땅짐승이 무엇이며, 땅이 무엇이고, 바다가 무엇인지도 잘 모르는 상태에서 올바른 해석은 어렵습니다. 또 이어서 14절을 보면 “짐승 앞에서 받은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하더라”라고 하였습니다. 땅에 거함이란 마음이 하늘에 가 있지 않은 상태를 의미합니다. 미혹한다는 것은 땅짐승의 역사에 넘어가지 않은 자가 없이 설득된다는 것입니다.
땅짐승은 불이 하늘로부터 내려오게 하는 등 큰 이적들을 행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먼저 땅짐승이 이러한 이적을 행하는 목적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하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실 때의 모습을 떠올려 봅니다. 애굽에 내린 열 가지 재앙은 기적이었습니다. 홍해가 갈라진 것도 기적이었으며, 요단강이 갈라진 것도 기적이었습니다. 선민들이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먹고 마시며 살았던 것도 기적이었습니다.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들과 대결할 때 엘리야의 제단에 불이 내려온 것도 기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기적과 이적을 보이신 취지는 하나였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도 않는 하나님의 있음을 드러내는 증거로 삼으신 것입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의 존재감을 느끼라!’라는 취지에서 나타난 일이었습니다.
열 가지 재앙이 없었다면 이백오십만 이스라엘 백성이 사백삼십 년 동안 노예 생활을 하다가 일치단결하여 애굽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백오십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있음을 드러내셨습니다. ‘너희는 바로가 세상에서 가장 강한 자라고 생각했지. 그러나 나는 지팡이 든 할아버지 모세를 통해서 바로가 다스리는 애굽 전체를 초토화시켰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 무슨 생각이 드느냐?’라고 물으신 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열 가지 재앙을 보면서 여호와 하나님이 정말로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강하신지에 대한 것은 나중 문제이고 일단 하나님이 정말로 있음을 느꼈습니다. 이백오십만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은 하나님에 대한 존재감으로 가득 찰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적과 이적을 일으키신 취지가 여기에 있습니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도 않는 하나님의 있음을 각인시켰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땅짐승이 일으키는 이적에는 어떠한 의미가 있을까요? 땅짐승도 보이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땅짐승을 따릅니다. 사도 요한은 이 현상을 땅짐승이 일으킨 이적 때문이라고 풀이합니다. 마치 하나님이 모세를 통하여 열 가지 재앙의 기적을 일으키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며 일치단결하여 출애굽을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땅짐승이 열 가지 재앙의 기적을 일으키기라도 한 것처럼 모든 사람이 일치단결하여 땅짐승의 말을 따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단순히 땅짐승이 큰 이적을 행하고 불이 하늘에서 내려오게 하는 현상적 예언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상황을 인간의 언어로 풀어내는 과정에서, 땅짐승이 모든 사람의 마음을 다 엮어서 끌고 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땅짐승을 추종하게 된 것은 모세가 애굽에서 행한 것 같은 기적을 행한 것과 똑같은 것이다.’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어서 15절을 보면 “그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만약 하나님의 존재감보다 내 앞에 있는 사장님의 존재감을 먼저 느낀다면 사장님이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을 통하여 영적인 상황을 보고 있는 것을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바로 우상에게 생기를 주는 모습이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상이 되는 대상은 다양할 수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보면서 자녀의 존재감을 하나님의 존재감보다 먼저 느낀다면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의 존재감보다 다른 대상의 존재감을 느끼면 다 우상숭배입니다. 존재감이 미쳐버린 상태입니다. 어차피 인간은 존재감을 느낄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졌습니다. 스스로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닌 다른 존재, 즉 타자의 있음을 느껴야만 하는 존재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우상숭배는 땅짐승에 속아서 이 세상을 땅이라고 착각하며 존재감이 완전히 미쳐버린 상태에서 나타나는 일입니다.
마지막으로 16~18절을 보면 666에 대한 언급이 나옵니다. 18절을 보면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한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것은 사람의 수니 그의 수는 육백육십육이니라”라고 하였습니다. 666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대대로 논란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666이란 어떤 특정한 대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6은 7에서 하나가 모자란 수입니다. 7은 완전수로 성경 특히 구약에서는 엿새 동안 일하고 이레째에 쉬는 안식일을 가리키는 숫자입니다.
안식일이란 이 세상에서 하던 모든 일을 끝내고 오직 하나님께만 관심을 쏟는 날입니다. 물론 육일 동안도 하나님과 동행해야 됩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날마다 어린 양이 번제로 죽었습니다. 번제단에서 죽는 어린 양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존재감을 느끼지 않는 나를 죽여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감을 제일 먼저 느끼는 사람으로서 삶의 현장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에 더해 안식일은 삶의 현장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다 끊고 하나님만 세상에 있는 것처럼 생각해서 하나님께만 집중하는 날이었습니다.
이로부터 666의 의미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666이란 하나님 이외에 이 세상 것에 있음, 있음, 있음을 안식일을 통해 끊어냄 없이 계속해서 이어가는 상태입니다. 계속해서 세상 것들의 있음만을 의식하기를 끝없이 이어나가는 것입니다. 마음에서 세상 있음에 대한 의식이 끊어져야 하나님의 있음은 들어올 수 있고 하나님의 존재감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666은 마치 잠 못 이루는 밤처럼 완전히 세상으로 달아오른 상태입니다. 의식에서 안식 없이 세상 것의 있음을 느끼기를 이어갑니다. 있음을 느끼는 존재감이 미쳐버린 상태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있음을 느끼는 세상 것들은 본래 스스로 있지 않은 것들입니다. 하나님에 의해 있게 된 것들입니다. 그런데 땅짐승은 이것들을 뗏목으로 만들었고 땅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사람들은 이 거짓말에 속아서 뗏목을 마음이 딛고 설 수 있는 견고한 땅으로 믿게 되었습니다. 배우자, 자녀, 형제자매, 부모, 이웃을 묶어서 가정이라는 뗏목을 만듭니다. 같이 일하는 동료들을 묶어 회사라는 뗏목을 만듭니다. 가정과 회사라는 뗏목을 이어서 더 큰 뗏목을 만듭니다. 그리고 이어서 나라라는 뗏목을 만들고, 나라라는 뗏목을 이어서 세계라는 뗏목을 만듭니다. 땅짐승은 이렇게 해서 교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있음을 느낄 필요가 없게 만듭니다.
17절을 보면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라고 하였습니다. 왜 굳이 매매를 못하게 한다는 것일까요?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회사에 나가면 직장 상사나 업무에 대해 항상 그것들의 있음인 존재감을 느껴야 할 것 같습니다. 그것들의 존재감을 느끼지 않고 하나님의 존재감을 느끼면 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땅짐승은 이러한 조바심과 불안감을 넣어줍니다. 매매를 할 수 없게 한다는 것은 경제체제가 악한 권력자에 의해 장악당해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먹고 살 것을 사고팔 수 없게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것들은 사람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666은 이 세상 것들을 있다고 느끼는 것을 잠시라도 쉬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세상 것들의 있음을 계속 이어가고, 의식 속에서 세상 것들이 계속 켜져 있는 상태입니다.
이 666을 깨부수는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세상에 대해서 죽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사건의 반대되는 사건이 있다면 하나님에 대해서 죽고 불철주야 세상에 대해서만 살아있는 것입니다. 세상 것을 걱정하고, 세상 것을 생각하고, 세상 것을 염려합니다. 세상 것을 계획하고, 세상 것을 바라며, 세상 것을 추진합니다. 끝없이 세상 것으로만 이어지는 666의 상황이 일어나는 이유는 땅짐승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땅짐승은 의식에서 잠시라도 세상 것을 잊거나 중단하면 살지 못할 것이라는 강박관념을 넣어줍니다.
매매를 할 수 없게 한다는 의미가 여기에 있습니다. 모든 사람 속에 ‘어떻게 삶의 현장에서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대상들을 대하여 있음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어떻게 삶을 살 수 있겠는가?’라는 강박관념을 넣어준다는 것입니다. 666은 끊임없이 세상의 있음에서 있음으로 이어지는 뗏목을 땅이라고 믿으며 환상에 빠져있는 상태입니다.
이 666을 깨부수는 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완전히 죽고 세상에 대해서만 끝없이 불철주야로 살아있는 상태에서 안식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북구의 밤에 해가 지지 않는 백야현상이 일어나면 사람들이 잠을 자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세상에 대해 이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666을 깨부수고 666 대신 777이라는 하나님의 숫자를 우리 이마와 손목에 표로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늘에 계신 삼위일체 하나님과 땅에 있는 동서남북에 흩어진 우리 교인들이 하나가 되는 사위일체의 삶을 통하여 땅짐승의 교활한 666 계책을 날마다 깨부수며 살아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