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요한계시록-2

녹취문: 인치신 자들과 666표 받은 자들의 동거_태승철 (계 14:1~13)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4.02.10|조회수98 목록 댓글 0

 

www.everyday01.com -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인치신 자들과 666표 받은 자들의 동거>의 줄거리 :

하나님께서 십사만 사천의 완전하고 충만한 예정을 따라 그 이마에 인을 치신 자들로 이루어진 그룹과 바다짐승을 섬기는 땅짐승에게 666표를 받은 자들의 그룹이 한 지구 위에서 동거하고 있습니다. 동고동락이라는 말이 있습니다만, 한 지구 위에서 동거하는 이 두 그룹은 그야말로 이고이락(異苦異樂)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불러도 고통과 즐거움이 세상 사람과 같으면 그는 인 침을 받은 자가 아니라 666표를 받은 자입니다.

 

인치신 자들과 666표 받은 자들의 동거

 

(요한계시록 14:1~13)

 

1.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더라

2. 내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물소리와도 같고 큰 우렛소리와도 같은데 내가 들은 소리는 거문고 타는 자들이 그 거문고를 타는 것 같더라

3. 그들이 보좌 앞과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4. 이 사람들은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에서 속량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5.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

 

 

앞서 본 7장에는 하나님께서 이마에 인을 치실 자들을 예정하셨다는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예정은 십사만 사천이라는 숫자가 상징하듯이 완전하고 충만합니다. 한 사람도 예정 밖에 있던 자가 안으로 들어올 수 없고, 예정 안에 있던 자가 밖으로 나갈 수도 없는 완전하고도 충만한 예정입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이렇게 하나님께서 예정하심으로 이마에 인을 치신 자들이, 짐승에게 666표를 받은 자들과 이 세상에서 동거하는 상황이 계시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읽은 1~5절에는 하나님께서 이마에 인을 치신 자들이 하늘에 소속되었다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절을 보면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서 있는데…”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것이 새 하늘과 새 땅의 상황을 말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본문의 강조점은 그것이 아닙니다. 7장이 하나님의 예정에 초점을 맞춘 계시라면, 14장은 짐승에게 표를 받지 않은 하늘에 속한 자들에게 초점이 맞추어진 계시입니다. 하나님께 인침 받은 자와, 짐승에게 인침 받은 자들에 대한 이야기인 것입니다. 본문의 중심은 우리가 읽지 않은 6~13절에 있습니다. 6~13절은 하나님께 인침 받은 자들과 짐승에게 666표를 받은 자들이 동거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와 관련하여 먼저 1~5절을 통해 하늘에 속한 자들의 특징을 살펴봅니다. 하늘에 속한 자들의 첫 번째 특징은 인침을 받음입니다. 1절 하반절을 보면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더라”라고 하였습니다. 말씀드렸듯이 하늘에 속한 자들은 이마에 하나님의 인침을 받은 자들입니다. 인침은 곧 하나님이 ‘너는 내 것이다.’라고 이마에 도장을 찍은 것입니다. 그 도장 안에 어떤 내용이 새겨져 있나 보았더니 어린 양의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이 쓰여 있습니다. 태승철의 도장에는 태, 승, 철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그 도장이 찍힌 것은 태승철의 것이라는 뜻이듯이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이마에 인을 치시고 하나님의 것으로 삼으시는 자들을 보니 그 도장에는 어린 양과 아버지의 이름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이름이라고 하지 않고 어린 양의 이름이라고 하는 이유는 번제단에서 날마다 상번제로 드려졌던 어린 양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임당한 사실을 빼면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는 앙꼬 없는 찐빵과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것이 된다는 것은 곧 어린 양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임당한 어린 양과 연합함으로써만 하나님의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늘에 속한 자들이 갖는 첫 번째 특징입니다.

 

이어서 2~3절을 보면 “내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물소리와도 같고 큰 우렛소리와도 같은데 내가 들은 소리는 거문고 타는 자들이 그 거문고를 타는 것 같더라 / 그들이 보좌 앞과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라고 하였습니다. 하늘에 속한 자들의 두 번째 특징은 땅에서 속량을 받은 자들만 새 노래를 부른다고 하였습니다.

속량이란 노예로 살고 있는 사람의 값을 치르고 자유인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있음이라는 존재감을 느끼고, 좋음을 욕구하여 채우려고 하면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사람을 땅에서 속량하셨다는 것은 땅에 있는 것들로 존재감을 느끼고 있는 상태와, 땅에 있는 것들을 욕구하며 채우려고 하는 상태에서 꺼내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린 양이 죽임을 당함으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해 하나님의 있음만을 존재감으로 느끼고 하나님만을 욕구하는 상태가 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사람들이 새 노래를 부른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젯밤까지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을 의식하며 기뻐서 노래를 했다고 해보겠습니다. 오늘 아침에 일어났더니 어제 느끼던 하나님의 있음이 아니라 새롭게 하나님의 있음이 느껴집니다. 또 어제 느끼던 하나님의 좋음이 아니라 새롭게 하나님의 좋음이 느껴집니다. 보통의 노래는 어느 한 가지 고정된 상황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당장은 ‘당신은 나의 태양입니다.’라고 노래를 하더라도 삼 년 뒤에도 그 상황이 지속될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은 날마다 새롭게 느껴지기 때문에 매일 새 노래를 불러야 하는 상황입니다. 어제 느끼던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은 지나갔습니다. 오늘 또 새롭게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을 느낍니다. 그렇기에 새 노래를 부릅니다. 그런데 이러한 새 노래는 땅에서 속량 받은 자가 아니라면 부를 수 없습니다. 땅의 것을 있음과 좋음으로 느끼는 자들로서는 도저히 부를 수 없는 노래입니다. 그렇기에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라고 하였습니다.

 

4~5절을 보면 “이 사람들은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에서 속량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속량 받은 자들이 새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이유는 순결하기 때문입니다. 순결함은 하늘에 속한 자들의 세 번째 특징입니다.

순결함이란 마음에 하나님 이외에 다른 있음과 좋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깨끗한 상태입니다. 이렇게 될 수 있는 이유는 어디든지 어린 양을 따라갔기 때문입니다. 어린 양은 우리를 세상 밖으로 탈출시켜서 천국으로 진입하게 했습니다. 그 어린 양을 따라갈 때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만을 바라보며 새 노래를 부르는 순결한 상태가 됩니다. 앞서 우리는 네 짐승과 이십사 장로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네 짐승은 하나님을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바라봄을 의미하고, 이십사 장로는 하나님을 일대일로 상대하는 측근이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일이 가능한 이유는 어린 양을 따라갔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순결한 자들에게는 거짓말이 없습니다.

 

결국 모든 특징의 핵심부에는 죽임당한 어린 양이 들어있습니다. 하늘에 속한 자들은 죽임당한 어린 양을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와 관계를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이 땅에서는 666표를 받은 자들과 함께 살아갑니다. 땅에서 하늘에 속한 자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어떠한 것인지가 우리가 읽지 않은 6~13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6~7절을 보면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주하는 자들 곧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 / 그가 큰 음성으로 이르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요약하자면 하늘에 속한 자들이 이 땅에서 살 때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영광을 돌리고 경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려워함이란 하나님을 놓칠까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영광을 돌림이란 연극 무대에서 무대 위에 있는 배우에게만 조명이 비치는 상태와도 같습니다. 내 의식의 무대에서 다른 것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찬란하게 보이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과 바다를 있게 하신 유일한 있음이시기 때문입니다. 있음은 곧 존재감입니다. 사장님 앞에서, 배우자 앞에서, 부모 앞에서, 자녀 앞에서, 형제자매 앞에서, 돈 문제 앞에서, 건강 문제 앞에서 그것들의 존재감을 제치고 하나님의 존재감을 느끼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상태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하라는 것입니다. 돈 문제가 발생했을 때 돈 문제의 존재감이 의식의 무대에서 찬란하게 빛나고자 합니다. 그럴 때 두려워하며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들이 하늘에 속한 자들입니다.

하늘에 속한 자들은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든, 어떤 문제에 봉착하든, 그것들의 존재감이 의식의 무대에서 일등이 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하나님의 존재감이 세상 것의 존재감에 가려지는 것이 두렵습니다. 하나님만이 의식의 무대에서 찬란하게 빛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있음에 종속되어 ‘있게 된 것들’에 대해서는 늘 십자가에서 죽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있음에 의해서 파생된 하늘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들이 의식의 무대에서 일등이 되고 영광을 받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십자가를 붙잡습니다. 이들이 하늘에 속하여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한편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은 이와는 대조적입니다. 8절을 보면 “또 다른 천사 곧 둘째가 그 뒤를 따라 말하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에게 그의 음행으로 말미암아 진노의 포도주를 먹이던 자로다 하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큰 성 바벨론은 이 세상적인 성공과 번영이 이루어진 상태를 상징합니다. 바벨론 나라가 실제로 존재하던 기간은 150여 년 정도에 불과합니다. 고려도 600년이고 조선도 500년 역사를 유지했던 것에 비하면 별나게 짧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벨론은 지구상에서 가장 현란하고 찬란한 문명을 이룬 대표적 나라로 꼽힙니다. 이러한 큰 성 바벨론은 소위 지상천국이 이루어진 상태를 말합니다. 이 세상적인 가치들을 모아서 쌓고, 누리고, 그것들에 취하는 성공과 번영이 이루어진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큰 성 바벨론은 ‘모든 나라에게 그의 음행으로 말미암아 진노의 포도주를 먹이던 자’라고 언급됩니다. 다시 말해 음녀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세상적인 가치들로 흠뻑 젖은 상태는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에 닿아있는 상태와 대조적입니다. 세상 가치들에 점령되고 취한 상태가 음행으로 표현되었습니다. 큰 성 바벨론은 이러한 음행이 절정에 이른 상태이며, 가장 지독하게 음행에 깊이 빠져버린 상태입니다. 앞서 하늘에 속한 사람들은 자기의식의 무대에서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하나님이 찬란한 빛을 받으시는 상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만 보이는 상태입니다. 반면 큰 성 바벨론의 영적인 의미는 이 세상 가치들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찬란한 빛을 받고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언급된 ‘모든 나라’는 실제로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미국, 일본, 중국 같은 나라들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각자의 육체를 중심으로 맺어진 관계들로 이루어진 나라를 갖고 있습니다. 이것을 확산시키고 연장시키면 관계는 지구 끝까지 도달합니다. 지구 전체가 내 몸을 중심으로 나의 나라가 됩니다. 여러분도 몸으로 맺는 관계를 연쇄적으로 확장시킴을 통해 지구 전체가 여러분의 나라로 갖게 됩니다. 모든 나라는 이렇게 모든 사람이 각각의 나라를 이루고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큰 성 바벨론은 이러한 모든 나라에 음행을 하고 진노의 포도주를 먹게 합니다. 진노의 포도주를 먹는다는 것은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끌고 감을 의미합니다. 세상 사람들과 세상에 먹혀 버린 예배당들은 새 노래가 아닌 꿈과 비전과 희망이라는 세상 노래를 부릅니다. 이것은 음녀 바벨론이 그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내릴 수밖에 없는 포도주를 먹인 결과입니다. 세상의 꿈과 희망과 비전 등에 취해버리게 만든 것입니다.

큰 성 바벨론은 세상 모든 가치들을 많이 모으고, 높이 쌓아서, 누리고 취하는 세상적인 성공과 번영이 이루어진 상태입니다. 큰 성 바벨론은 모든 사람 각자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내릴 수밖에 없는 포도주를 먹이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끌어들이는 포도주는 이 세상에서 미래를 향해 갖는 꿈, 비전, 희망, 소원 같은 것들입니다.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이 꿈과 비전과 희망에 대한 노래를 멈추지 못하는 이유는 큰 성 바벨론이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게 하고 취했기 때문입니다.

 

한편 이들이 살아가고 있는 모습이 9~10절에서 세 번째 천사의 음성을 통해 드러납니다. “또 다른 천사 곧 셋째가 그 뒤를 따라 큰 음성으로 이르되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신다는 내용이 다시 한번 반복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란 하나님의 진노를 희석시킬 수 있는 여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게 되리라는 말씀이 이어집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집안의 형통과 번영을 바라고 있습니다. 그리고 집안이 잘되기 위해서는 아이들이 성공해야만 한다는 소망을 갖습니다. 이러한 마음은 음녀인 큰 성 바벨론의 포도주를 마셔서 취한 상태입니다. 그 상태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게 하십니다. 그리고 이것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중입니다.

불과 유황이 떠오르는 대표적 사건은 소돔의 멸망입니다. 소돔은 동성애로 대표되는 성적 타락과 음행에 의해 멸망 당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나와 무관한 일이 아닙니다. 내가 자녀의 성공과 번영을 희망한다면 영적인 음행입니다. 자녀의 존재감을 하나님의 존재감보다 우선시하고, 자녀의 성공과 번영을 통하여 기쁨을 누리고자 하는 시도이기 때문입니다. 자녀를 바라보며 내가 꿈꾸는 성공과 번영을 이루기를 원하는 부모의 마음은 자녀 때문에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갈 수밖에 없습니다. 자녀뿐만이 아닙니다. 음녀인 큰 성 바벨론으로부터 포도주를 먹음으로 이 세상에서 꿈과 비전과 소원을 갖게 된 모든 자들은, 정작 그 꿈과 비전과 소원 때문에 불과 유황으로 속이 새카맣게 타들어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꿈은 이루어진다. 비전을 품어라.’라고 끊임없이 거짓말을 이어갑니다. 이것은 지금도 예배당에서 계속되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두 날개로 날아오르라고 합니다. 이것은 영적인 음란함이며 소돔에 내렸던 불과 유황을 자처하는 것이고, 음녀인 큰 성 바벨론에게 포도주를 얻어먹고 취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영적으로 모를 수 있을까요? 이와 관련하여 12절 이하에서는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여전히 666에 대한 해석에는 많은 혼란이 빚어지고 있습니다. 최근에도 코로나19 사태와 관련하여 예방접종을 받는 것이 666표를 받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까지 나왔습니다. 어떻게 이따위 어리석은 생각을 할 수 있는지 의아할 정도입니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이야말로 짐승에게 현혹된 상태입니다.

666이 무엇인가는 본문 11절에서 잘 드러납니다.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이름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이 세상 것을 소망하는 상태는 큰 성 바벨론으로부터 진노의 포도주를 마셨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불과 유황이 내려온다는 것은 속이 새카맣게 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간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이름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라고 하였습니다. 밤낮 쉼을 얻지 못하는 것이 666표의 의미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듯이 6은 완전을 의미하는 숫자인 7에서 하나가 모자란 숫자로서 666은 안식이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6이 나왔으면 7이 이어지며 안식이 있어야 합니다. 구약성경에서 말하는 안식이란 곧 세상에 대한 끝남이고 죽음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만 마음과 뜻과 힘이 온전히 몰입되는 상태가 안식이고 쉼입니다. 666은 바로 이러한 쉼이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세상이 끊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끊어짐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날마다 죽는다는 말씀처럼, 아예 자아의식이 예수님과 함께 죽음으로써 세상에 대한 죽음의 상태가 지속되는 것입니다. 안식일만 아니라 아예 안식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죽은 자가 되는 것에는 쉼과 안식 속으로 들어간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처럼 죽임당한 어린 양 안에 들어가서 세상에 대해 죽고 세상이 완전히 끊어진 상태에서 쭉 살아가는 삶이 쉼과 안식입니다.

반대로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은 쉼이 없습니다.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는 말씀대로 밤낮 세상 것을 생각합니다. 세상 것을 추구합니다. 세상 것을 걱정합니다. 세상 것을 염려합니다. 세상 것에 매여 있습니다. 세상 것에 끌려갑니다. 세상 것에 종속됩니다. 머리가 터지도록 오직 세상 것만 생각합니다. 배우자 생각하다가, 사업 생각하다가, 건강 생각하다가, 자녀 생각하다가, 돈 생각하다가, 발생한 문제에 대해 생각하고, 과제와 업무에 대해 생각하고, 성과를 생각하고 승진을 생각합니다. 세상에 대한 생각이 끊임없이 이어져갑니다.

 

한편 12절을 보면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세상 것들은 끊임없이 의식의 무대에 치고 들어와 ‘내가 주인공이다!’라고 외칩니다. 성도의 인내란 십자가를 붙잡고 이러한 세상 것들을 끊임없이 죽이는 것입니다. 세상에 반응하지 않고 세상 것들을 죽이다 보면 실시간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움직이게 됩니다. 이러한 일은 마음이 어린 양 예수님 안에 들어가는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밤낮 쉬지 않고 큰 성 바벨론이 먹인 포도주에 취해서 이 세상의 성공과 번영을 향해 달려갑니다. 지금보다 나아지기를 바라고, 미래에는 무엇인가 얻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달려가지만, 그 마음에는 불과 유황이 내린 상태이기에 고난의 연기가 끊임없이 올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에 대해서 소원을 갖는다는 것은 내가 소돔이 되는 것입니다. 음행하기로 작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통치하고 계시는데 내가 따로 소원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통치자에게는 통치를 통해 도달하려는 목적지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목적지를 향한 소원을 가지고 통치하고 계시는 삶 속에서 내가 소원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따로 소원과 꿈과 희망과 비전을 갖게 되었다면 음녀 바벨론이 주는 술을 마시고 취했기 때문입니다. 비전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음행에 끌려 들어가 취했다는 증거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666에 대한 해석은 분명합니다. 다시 11절을 보면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이름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라고 하였습니다. 666은 777이 되지 못하는 안식이 없는 상태입니다. 13절을 보면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순서를 따라서 논리적인지 모릅니다. 이 말씀에서 지금 이후가 언제를 말하는 것이고, 주 안에서 죽는 것이 육체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인가에 대한 논란이 있습니다. 지금 이후란 이 글을 읽는 모든 사람의 지금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재림할 때도 아니며, 재림 직전도 아니며, 사도 요한이 계시록을 기록하던 시점도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말씀을 나누고 있는 시간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것입니다. 여기서 죽음이란 마음의 죽음입니다. 그럴 때 앞에서 말한 밤낮 쉼이 없으리라는 이야기와 반대되는 일이 일어납니다. 주 안에서 세상에 대해 죽으면 수고를 그치고 쉼은 찾아옵니다.

 

그리고 13절 하반절에 기가 막히는 말씀이 이어집니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번역의 실수를 정정하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는 부분을 정확히 해석하자면 ‘그들의 행함이 따를 것이니라’라는 뜻입니다. 666표를 받은 자들은 마음이 이 세상 것의 있음과 좋음에 매인 상태입니다. 밤낮 쉼 없이 음녀 바벨론이 주는 포도주를 마시고 취해서 비전과 꿈과 희망을 향해 달려갑니다. 그러나 주 안에서 세상에 대해 죽은 자들은 쉼을 얻습니다. 놀라운 것은 쉼을 얻고 있는데 몸을 움직이는 행동이 뒤따른다는 것입니다.

주석을 보면 이 부분을 하나님의 심판 때 그들의 행위가 낱낱이 드러날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한 이해로는 행위로 구원받는다는 해석이 되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무척 놀라운 말씀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우리는 주 안에서 죽을 때 쉼을 얻습니다. 죽었기에 무엇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도 없고, 처리할 일도 없고, 이루어야 할 일도 없고, 세상에 대한 꿈도 비전도 희망도 없습니다. 마음이 어린 양과 함께 하늘로 올라갔기에 평안할 따름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몸에서 행동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마음은 쉬는데 몸은 움직이며 해야 할 일을 다 합니다.

 

하늘에 속해서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하나님의 이름으로 인침 받은 자와, 땅에 속해서 짐승에게 666표를 받은 자는 확연히 다른 모습으로 한 지구 안에서 동거하고 있습니다. 다만 동거하지만 같은 고충과 같은 즐거움을 느끼며 동고동락(同苦同樂)하지 않습니다. 다른 고충과 다른 즐거움을 느끼는 이고이락(異苦異樂)합니다.

하늘에 속한 자들이 느끼는 고충이란 끊임없이 의식의 무대 위에 쇄도해 들어오는 이 세상 것들에 대한 있음의 존재감을 십자가에서 죽이는 것입니다.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의 고충이란 의식의 무대에서 이 세상 것들에 찬란한 영광을 돌리며 바라보는 중에, 자기가 원하는 바벨론을 향하여 뛰어가고 싶지만,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기에 생기는 고충입니다.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들의 즐거움은 바벨론에 도달하는 것이지만, 우리의 즐거움은 하늘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한 지구 위에 동거하는 하늘에 속한 자들과 짐승에게 666표를 받은 자들의 이고이락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사람들과 한 지구 안에서 동거하는 가운데 이고이락의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