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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2

녹취문: 흰 구름 타는 사람 땅을 기는 사람_태승철 (계 14:14~20)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4.02.12|조회수76 목록 댓글 0

 

www.everyday01.com -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흰 구름 타는 사람 땅을 기는 사람>의 줄거리 :

하나님께서 거둬들이실 사람과 거둬 밟으실 사람을 구분하여 보여주십니다. 이 구분은 성전에 두신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태도 여하를 기준으로 합니다. 하나님 이름을 붙잡고 매일의 삶을 흰 구름 타기로 채운 자는 하늘로 거둬들이시지만, 하나님의 이름을 무시하고 매일의 삶을 땅을 기어 다니기로 채운 사람은 거둬 밟아버리십니다. 전자는 이마에 인 침을 받은 자들이고 후자는 손과 이마에 666표를 받은 자들입니다.

 

흰 구름 타는 사람 땅을 기는 사람

 

(요한계시록 14:14~20)

 

14. 또 내가 보니 흰 구름이 있고 구름 위에 인자와 같은 이가 앉으셨는데 그 머리에는 금 면류관이 있고 그 손에는 예리한 낫을 가졌더라

15. 또 다른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구름 위에 앉은 이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당신의 낫을 휘둘러 거두소서 땅의 곡식이 다 익어 거둘 때가 이르렀음이니이다 하니

16. 구름 위에 앉으신 이가 낫을 땅에 휘두르매 땅의 곡식이 거두어지니라

17. 또 다른 천사가 하늘에 있는 성전에서 나오는데 역시 예리한 낫을 가졌더라

18. 또 불을 다스리는 다른 천사가 제단으로부터 나와 예리한 낫 가진 자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불러 이르되 네 예리한 낫을 휘둘러 땅의 포도송이를 거두라 그 포도가 익었느니라 하더라

19. 천사가 낫을 땅에 휘둘러 땅의 포도를 거두어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지매

20. 성 밖에서 그 틀이 밟히니 틀에서 피가 나서 말 굴레에까지 닿았고 천육백 스다디온에 퍼졌더라

 

 

본문을 살펴보기에 앞서 20절을 보면 생소한 표현이 등장합니다. “성 밖에서 그 틀이 밟히니 틀에서 피가 나서 말 굴레에까지 닿았고 천육백 스다디온에 퍼졌더라”라고 했습니다. 말 머리에 씌운 굴레의 높이는 땅에서 1.5m 이상 됩니다. 포도주 틀이 밟히니 틀에서 피가 나서 그 높이가 1.5m나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육백 스다디온은 320km입니다. 서울을 중심으로 한다면 반지름이 경주에 이르는 원 안이 1.5m 높이의 피바다가 된다고 생각해 보면 무척 끔찍한 광경이 연상될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중심으로 “흰 구름 타는 사람, 땅을 기는 사람”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본문은 언뜻 보면 추수가 주제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그 내용을 잘 살펴보면 추수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앞서 보았던 하나님께서 인을 치신 사람들 즉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하나님의 이름을 쓴 사람들과, 짐승에게 이마나 손에 666표를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계속 대비되고 있습니다. 특히 본문에서는 두 종류 사람들의 궁극적인 도착점이 어떻게 되는지가 드러납니다. 666표를 받고 밤낮 쉼 없이 자기가 사는 사람들과,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하나님의 이름으로 인침 받은 사람들이 어떤 연결로 이어지는가를 보여주는 계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14절을 보면 “또 내가 보니 흰 구름이 있고 구름 위에 인자와 같은 이가 앉으셨는데 그 머리에는 금 면류관이 있고 그 손에는 예리한 낫을 가졌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앞서 죽임당한 어린 양으로 묘사되었던 예수님이 흰 구름 위에 앉으셔서 금 면류관을 쓰시고 손에는 예리한 낫을 가진 분으로 묘사됩니다. 이러한 묘사는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가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 옛날에 구름은 땅과 하늘의 경계를 뜻하는 표시였습니다. 구름이란 당시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을 가리키는 하나의 상징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구름은 경계선과 같습니다. 캐나다와 미국의 국경이 있듯이, 구름은 땅과 하늘 사이의 국경과도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구름 위에서 추수를 하신다는 것은, 마치 미국 쪽에서 캐나다 쪽에 있는 사람들을 추수해서 거둬들이는 것처럼, 구름 위 하늘 쪽에서 땅에 있는 사람들을 거둬들이신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금 면류관을 쓰셨다는 것은 이 세상을 이기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이면 누구나 다 반드시 존재감을 느껴야 하고, 좋음을 흡입해야 하고, 주체성의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내가 주체가 되어서 살 것인지 하나님이 주체가 되어서 살 것인지 결정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기셨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사시는 동안에 존재감을 느끼심에 있어서 세상에 있는 것은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으셨고, 채움을 이루심에 있어서도 세상에 있는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으셨다는 뜻입니다.

이로부터 흰 구름 위에 앉으신 인자 같은 이로 표현된 예수님과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연합한다는 것은 흰 구름을 타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셨다는 말씀을 계속 반복하셨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마음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흰 구름을 타고 있는 상태와 같은 것입니다. 구름 위에서 낫을 들어 추수하신다는 것은, 땅에 사는 동안에 마음이 인자와 함께 흰 구름을 탄 사람들만을 거둬들이신다는 뜻입니다. 쉽게 말해 우리는 흰 구름을 타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흰 구름을 타는 자들이 하늘로 거둬들이는 대상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 예수님과 연합한다는 것은 마음이 땅에서 떠나 흰 구름을 타는 자들이 된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세상 사람들이 보자면 흰 구름을 타는 것이 아니라 뜬구름을 잡는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뜬구름을 잡는 것이 아니라 흰 구름을 타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흰 구름을 왜 타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 생깁니다.

15절을 보면 “또 다른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구름 위에 앉은 이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당신의 낫을 휘둘러 거두소서 땅의 곡식이 다 익어 거둘 때가 이르렀음이니이다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천사가 성전에서 나왔다는 것은 하나님께 명받았음을 의미합니다. 이 천사가 예수님께 추수를 하시라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전달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흰 구름을 타고 예수님과 함께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보여줍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이름을 두는 곳이라는 사실을 연관 지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실시간으로 온 땅을 지배하시고 다스리시고 계시지만, 우리가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는 하나님은 하늘에 계십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기에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땅에 하나님의 이름을 두셨고, 하나님의 이름을 두신 곳이 바로 성전입니다. 성전이 언급될 때는 항상 하나님의 이름과 연관 지어서 등장할 수밖에 없음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제외되면 아무리 화려하게 지은 성전이라도 존재 의미가 없는 건물일 뿐입니다. 성전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의 이름을 두는 곳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따라서 성전에서 나온 천사가 예수님께 낫을 휘둘러 추수를 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장면은, 우리가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흰 구름을 타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알려줍니다. 우리의 몸은 땅에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예수님을 믿어서 흰 구름을 탄 상태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낫을 휘둘러 추수를 하라는 말씀이 의미하는 것은, 마음이 흰 구름을 타고 하나님의 이름이 뜻하고 가리키는 바에 대하여 반응하는 것입니다. 이는 곧 흰 구름을 타지 않으면 하나님의 이름에 대하여 반응할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예배당에서 아무리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별의별 직분을 맡아 수행하며 충성하고, 기도를 드리고 설교를 할지라도 그 마음이 흰 구름을 타지 않으면 실제로 하나님의 이름에 반응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이름에 반응합니다. 서울역 대합실에서 기차를 기다리며 앉아있는데 갑자기 제 이름 혹은 집사람의 이름이 불렸다고 생각해 봅니다. 깜짝 놀라서 무슨 일인가 하고 즉시 반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에 대해서는 어떻게 반응하고 있을까요? 여러분의 이름이나, 가족의 이름이나,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의 이름이 들릴 때처럼 반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냉장고나 자동차나 TV 같은 물건의 이름처럼 지나가고 맙니다. 이러한 상태는 흰 구름을 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흰 구름을 타면 하나님이라는 이름에 반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눈앞에 무엇이 보여도 하나님의 이름만 들으면 그 이름에 반응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존재감이 일등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름의 존재감으로 내 의식이 꽉 차 있습니다. 이게 되지 않는다면 예수님을 따라 흰 구름을 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바로 그 점을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성전에서 나온 천사가 낫을 들고 계신 예수님께 추수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전합니다. 추수의 기준은 성전이 가리키는 대로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태도입니다. 배고플 때 TV에서 짜장면을 먹는 장면이 나오면 먹고 싶다는 반응이 나타납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 크기의 공백을 가지고 있기에 항상 채움을 소원합니다.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마음으로 먹고 싶다,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정상입니다. 배고픈 상태에서 먹고 싶은 음식에 대해 반응하듯이, 마음의 공백을 위해서 하나님을 갖고 싶다는 반응이 나타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반응이 나타나거나 나타나지 않는 것은 흰 구름을 탔느냐 타지 않았느냐에 의해 결정됩니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들었을 때 깜짝 놀랄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삶에 대해서 이 문제는 이래야 되고 저래야 된다는 생각을 하다가도 하나님의 이름을 듣는 순간 깜짝 놀라고 무릎을 꿇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감히 주인이라도 되고 주체라도 된 것처럼 문제를 생각했는지에 대해 ‘하나님! 죄송합니다.’라고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다스리시되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신 바 되시며, 참새 한 마리 떨어지는 것도 주장하시며, 백합화를 입히시고, 공중에 나는 새를 먹이시는 주체성의 주인이십니다. 이렇게 자상하게 주권적으로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 앞에서 내가 감히 내 인생에 대해서 책임지는 자의 위치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다가도 하나님의 이름을 듣는다면 소스라치며 반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반응이 나타나지 않고 여전히 666표를 받은 상태에서 밤낮 쉼 없이 세상일을 생각하고, 염려하고, 불안해하고, 세상 것을 추구한다면, 그 이유는 예수님을 믿어 마음이 흰 구름을 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 구원을 얻었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은 증거를 나타낼 수 있어야 합니다. 예배당을 다니면서 구원을 얻었다는 말은 사기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증거가 나타나야 합니다. 확신으로 믿지 말고 증거로 믿어야 합니다. 주관적인 확신은 언제나 잘못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객관적 증거로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믿음에 대한 객관적 증거란 하나님 이름에 대한 반응입니다. 이러한 반응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예수님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마음은 반드시 흰 구름을 타게 됩니다. 그리고 마음이 흰 구름을 탄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에 반응합니다. 흰 구름을 타지 않았다는 것은 마음이 여전히 땅에서 기어다니는 상태입니다. 마음의 배는 공백이기 때문에 24시간 쉬지 않고 채움을 원합니다. 그런데 땅에서 떠나 탈출하지 않고 머물고 있다면 마음의 배를 땅에 붙일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의 배는 고픈데 땅을 떠나지 않기에 땅을 기어다니며 땅에 있는 것을 먹고자 하는 것입니다.

붉은 용을 뱀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바리새인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들이 입으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그 이름에 반응하지 못하고 뱀처럼 땅을 기어다니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은 마음이 배부르고자 합니다. 그런데 구름을 타지 못하면 마음의 배를 땅에 붙이고 땅에 있는 것들로 배를 채우려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편 17절을 보면 “또 다른 천사가 하늘에 있는 성전에서 나오는데 역시 예리한 낫을 가졌더라”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성전이 언급됩니다. 그리고 심판받을 자들이 어떤 자인가에 대한 말씀이 이어집니다. 심판받을 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에 대해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다고 해도 먼 나라 동화 속 이야기처럼 받아들입니다.

대합실에서 여러분의 이름이나 최측근의 이름이 불릴 때처럼 하나님의 이름이 여러분에게 반응을 일으켜야만 합니다. 그러려면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고 세상을 탈출해야만 합니다. 이 세상에 대해서 만족하려 하고, 세상에 대해 책임지려는 위치에 서려고 할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야 합니다. 이들이 바로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하나님의 이름을 쓴 사람들입니다.

반대로 666표를 받은 사람들이 어떠한지에 대해서는 18~20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포도송이가 언급되는데 대부분 좋은 의미로 쓰이지만 여기서는 다릅니다. 포도송이의 의미는 성전에서 나온 천사가 낫을 들고 거둬서 포도주 틀에 넣고 발로 밟습니다. 그러면 과육과 과즙이 흘러나와서 짓이겨집니다. 포도송이를 포도주 틀에 넣고 짓밟아서 반경 320km 영역에 1.5m 높이로 피바다가 되는 무시무시한 심판이 임하리라는 것입니다.

18절을 보면 “또 불을 다스리는 다른 천사가 제단으로부터 나와 예리한 낫 가진 자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불러 이르되 네 예리한 낫을 휘둘러 땅의 포도송이를 거두라 그 포도가 익었느니라 하더라”라고 하였습니다. 불을 다스리는 천사가 제단으로부터 나와서 큰 음성으로 포도송이를 거두라고 합니다.

우리는 8장에서 제단의 불을 담아 땅에 쏟는 장면을 살펴보았습니다. 날마다 흰 구름을 타지 못한다면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이름에 반응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상태에서는 하나님 이외에 이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해 존재감을 느낍니다. 세상 것을 먹고 싶어 침 흘리는 상태입니다. 이 세상에서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갖고 밤낮 쉼 없이 사는 상태입니다. 또한 이러한 자신을 발견하고도 하나님의 이름 앞에서 십자가를 붙잡고 자기를 죽이는 회개를 하지 않습니다. 불을 다스리는 천사는 바로 이러한 자들의 명단을 가지고 있습니다.

십자가 번제단은 하나님의 이름에 반응하지 못하는 나를 불태워 죽이는 장소입니다. 불을 다스리는 천사는 번제단의 불을 자기를 죽이는 용도로 쓰지 않는 자들의 명단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은 666표를 받은 자들입니다. 모든 인간은 죄와 저주 속에서 태어나 하나님의 이름에 반응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십자가 제단에는 그 모든 인간들에 대해 각각 자신을 불태워 죽이기 위한 용도의 불이 할당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하루가 지나고, 한 달이 지나고, 일 년이 지나고, 십 년이 지나도 자기에게 할당된 불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에 반응하지 못하는 자신을 죽일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불을 다스리는 천사는 그 명단을 갖고 있다가 심판을 내립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이름에 반응하지 않은 채 세상의 이름에 반응하고, 하나님의 존재감을 제치고 세상 것들의 존재감을 부여잡고, 하나님의 좋음보다 세상의 좋음을 욕구하며, 하나님의 주체성보다 자기의 주체성을 앞세웁니다. 이들을 포도에 비유하자면 포도알마다 하나님의 이름이 가리키는 ‘있음’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좋음을 경멸하고, 하나님의 주체성을 모독함의 과즙이 꽉 차 있는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1년에 365알의 포도송이가 만들어진다고 치면, 그 포도알마다 하나님의 이름에 전혀 반응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있음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좋음을 경멸하며, 하나님의 주체성을 모독하여 자기가 주체 되므로 과즙이 꽉 차 있는 상태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이름에 반응하지 않는 자들에게서 나타나는 특징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있음을 무시합니다. 하나님의 좋음을 경멸합니다. 하나님의 주체성을 모독합니다. ‘나는 세상 것들의 좋음을 소망하기는 했지만, 하나님의 좋음을 경멸한 적은 없다.’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유일한 진짜 좋음이신 하나님을 소망하지 않고 이 세상에서 피조물들의 좋음을 소망했다면 그 자체로 하나님의 좋음을 경멸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있음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좋음을 경멸하며, 하나님의 주체성을 모독함으로 하루를 채웠다면, 사회에서는 모범 시민으로 살았을지라도 심판의 대상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정직하고 근면하게 살았어도 핑계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무시와 경멸과 모독함으로 채워진 포도알들이 삶에 가득히 채워지며 무르익어 가고 있을 뿐입니다.

낫을 든 천사는 그 포도를 다 추수하여 포도주 틀에 넣고 밟아버립니다. 20절을 보면 “성 밖에서 그 틀이 밟히니 틀에서 피가 나서 말 굴레에까지 닿았고 천육백 스다디온에 퍼졌더라”라고 하였습니다. 피가 난다는 것은 몸에서 피가 새 나가고 있는 상태입니다. 우리 마음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새 나가서는 안 되고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께로 가야 합니다. 본문에서는 그 마음이 새 나가는 상황을 피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벗어나 유출되어 삶이라는 껍데기 안에 과즙처럼 가득 찰 수 있습니다. 마음이 하나님께 다 드려지는 대신에 하나님의 있음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좋음을 경멸하고, 하나님의 주체성을 모독하는 과즙으로 평생을 가득 채웁니다. 하루에 포도 한 알을 채우고, 일 년이면 365개의 알이 맺힌 포도송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 포도가 밟힐 때 삶이라는 껍질이 터지면서 몸 밖으로 피가 흐르듯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벗어나 흘러나온 유출된 피들이 낭자할 것입니다. 그 피가 반지름 320km의 1.5m 높이로 피바다가 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만 드려져야 되는 마음을 하나님과의 관계 밖으로 유출시키고 있습니다. 자기 삶이라는 껍질 안에 하나님의 있음을 무시함과 하나님의 좋음을 경멸함과 하나님의 주체성을 모독함으로 채워나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에 반응해야 됩니다. 하늘로 드려지는 자들의 추수나 거둬들여 밟아버릴 자들에 대한 추수도 전부 하나님의 이름이 기준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에 반응하려면 예수님을 믿고 흰 구름을 타야 됩니다. 흰 구름을 타지 않으면 땅에 있는 것의 존재감, 땅에 있는 것의 좋음, 땅에 있는 것에 대한 자기의 주체성을 고집하게 되고 결국 거둬 밟히는 운명을 피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는 하나님께서 거둬들이시는 사람과 하나님께서 거둬 밟으시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 흰 구름을 타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흰 구름을 탄 상태에서 하나님의 이름에 충만하고 온전하게 반응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대합실에서 갑자기 예기치 않게 들린 측근의 이름을 듣고 반응하듯이, 하나님의 이름에 대해 반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기 위하여 오늘도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흰 구름을 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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