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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동질감의 축복, 이질감의 재앙>의 줄거리 :
마지막 재앙인 일곱 대접 재앙이 내려오기 전에 땅에서 올라온 짐승과 바다짐승의 우상과 666표를 떨쳐 버린 자들이 유리 바닷가에 서서 거문고를 들고 모세의 노래 즉 어린 양의 노래로 찬양을 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수정 같은 유리 바다를 통해 나타납니다. 즉 유리 바다의 투명성을 막는 이물질이 마음에 들어와 있는 사람에게 일곱 재앙은 쏟아지게 됩니다.
동질감의 축복, 이질감의 재앙
(요한계시록 15:1~8)
1. 또 하늘에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을 보매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졌으니 곧 마지막 재앙이라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
2.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3.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이르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놀라우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4.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하더라
5. 또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증거 장막의 성전이 열리며
6. 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맑고 빛난 세마포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7. 네 생물 중의 하나가 영원토록 살아 계신 하나님의 진노를 가득히 담은 금 대접 일곱을 그 일곱 천사들에게 주니
8.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으로 말미암아 성전에 연기가 가득 차매 일곱 천사의 일곱 재앙이 마치기까지는 성전에 능히 들어갈 자가 없더라
마지막으로 일곱 대접 재앙이 임하기 직전의 상태가 되었습니다. 마치 폭풍전야와도 같은 고요함 가운데 유리 바닷가에 선 자들에 의해서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가 불립니다. 본문에서 우리가 주의를 집중해야 될 여러 상징 중에 핵심 부분은 바로 유리 바다입니다. 유리 바다가 의미하는 바에 염두를 두고 본문을 보는 것이 큰 도움이 됩니다.
먼저 1절을 보면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졌으니 곧 마지막 재앙이라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마지막 재앙이라 함은 역사의 흐름에 있어서 마지막으로 일어날 재앙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일곱 대접 재앙은 예수님 재림 전에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 마지막을 역사적으로 언젠가 일어날 일로 이해한다면,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들에게는 일곱 대접 재앙이나 계시록의 말씀은 전혀 해당되지 않고 의미가 없게 됩니다.
계시록에는 삼대 칠중 재앙이라고 할 수 있는 일곱 인 재앙과 일곱 나팔 재앙, 일곱 대접 재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재앙은 순차적으로 일어나는 재앙으로 보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진노에 의한 재앙의 세 측면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중에서 일곱 대접 재앙은 세 측면의 마지막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불의한 자들을 향해 내리시는 재앙이 완결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내용상으로 일곱 인 재앙이 하나님의 진노에 의한 재앙의 삼분의 일을 보여준다면, 일곱 나팔 재앙이 또 다른 삼분의 일을 보여주고, 일곱 대접 재앙이 나머지 삼분의 일을 보여준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이렇게 이해할 때 삼대 칠중 재앙은 하나님이 주시는 계시가 될 수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이것을 역사적으로 일어날 일로 생각한다면, 아직 예수님의 재림이 일어나지 않은 상황에서는 삼대 칠중 재앙은 이미 죽은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됩니다. 절대로 이런 식으로 성경을 보아서는 안 됩니다. 해석하기가 어렵더라도 편의적으로 해석하여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고자 하는 본질적 지침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절벽같이 해석의 길이 보이지 않을 때는 기도하면서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처럼 본문 1절에서 언급된 마지막이란 하나님의 진노에 의한 재앙의 세 측면 중에서 마지막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이어서 2~3절을 보면 먼저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불이 섞인 유리 바다’가 언급됩니다. 앞서 우리는 4장에서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에 대해서 살펴본 바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이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이르되…”라는 말씀으로 이어집니다. 그렇다면 4장에서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왜 본문에서는 ‘불이 섞인 유리 바다’로 언급되고 있을까요? 불은 일곱 대접 재앙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이 불은 앞서 나온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와 연관이 됩니다. 좀 더 풀어보자면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와 일곱 대접 재앙이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에 대한 의미를 갖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 마음이 유리 바다 안으로 들어갔을 때 투명함을 방해하는 요소가 보이면 하나님 보좌 앞까지 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앞에서 한 사람이 하나님 보좌 앞까지 갈 수 있느냐 없느냐를 판가름하는 기준이 있습니다. 보좌 앞에는 유리 바다가 있기에 그 유리 바다를 통과해야만 보좌 앞까지 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보좌 앞까지 나온 자들은 네 생물이 상징하는 대로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측근이 됩니다. 우리가 그러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마음이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를 통과할 수 있어야 합니다. 유리 바다를 통과하는 동안 어떤 이질감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투명한 상태가 유지되어야만 합니다. 이는 곧 하나님이 나를 보실 때 동질감을 느끼신다는 뜻입니다.
우리 마음이 유리 바다 안에 들어갔을 때 얼룩이 보인다든지 투명성을 방해하는 더러움이 보인다면 이질감이 느껴지는 상태입니다. 이 이질감이 하나님의 진노의 마지막 측면인 일곱 대접 재앙이 임하게 되는 이유가 됩니다. 이것이 본문에서 ‘불이 섞인 유리 바다’가 언급된 것입니다. 유리 바다를 통해서 하나님의 진노는 표현됩니다. 그런데 아예 유리 바다 안에 들어오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경우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유리 바다를 통해 사람을 보실 때 그 앞에 있는 사람의 모습이 투명하지 않으면 일곱 대접 재앙의 이유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내 마음에 더러움이 있어서 이질감을 느끼실 수밖에 없다면 그것이 불로 표현되는 일곱 대접 재앙의 직접적인 이유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를 통과할 때 투명함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투명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동질감을 느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벌레 같은 내게서 동질감을 느끼셔야 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는 생각이 드실 것입니다. 2절 하반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동질감을 느끼는 상태를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탄과 바다짐승과 땅짐승은 한마음입니다. 없음의 바다에 떠 있는 인간은 자기 존재의 발판, 자기 있음의 근거를 붙잡기 위해서 타자의 존재감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바다짐승이 원하는 것은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 있음의 존재감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땅짐승은 이러한 바다짐승의 의도를 받아들여 이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것들을 뗏목으로 엮어서 땅이라는 환상을 심어줍니다. 우리는 없음의 바다 위에 떠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받아들여 튜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땅 위에 있다고 생각한다면 튜브가 된다는 생각을 할 수 없습니다. 땅짐승은 바로 이러한 의도에서 이 세상이 땅이라는 환상을 불러일으켜, 하나님의 있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함으로 하나님의 존재감을 느끼지 못하게 합니다. 그렇게 이 세상 것들의 있음을 느끼게 된다면, 보이고 들리고 만질 수 있는 세상 것들에 대해 쉬지 않고 신경을 쓸 수밖에 없습니다. 666표에는 이렇듯 보이는 것들에만 쉬지 않고 신경을 쓴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럴 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존재감과 좋음은 완전히 우리 의식에서 사라져 버리게 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란 바로 이러한 상태를 이긴 자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자들에게서 동질감을 느끼십니다.
하나님께서 동질감과 이질감을 느끼시는 상황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부부가 마주하고 있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있음보다 아내의 있음을 먼저 느낍니다. 그럴 때 아내는 땅 짐승의 우상이 되어버립니다. 그렇게 아내의 존재감을 느끼는 남편을 하나님께서 바라보실 때 어떨까요? 보좌에서 유리 바다를 통해서 남편을 바라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이질감을 느끼실 것입니다. 의식에 하나님의 있음이 들어있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남편이 아내를 보면서 하나님의 있음을 먼저 느낀다면 어떨까요? 하나님의 존재감 안에서 하나님을 신경 씁니다. 하나님의 눈치를 보면서 아내에게 말을 하고 행동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에게 동질감을 느끼시고 ‘네 마음속에 내가 있구나. 네 마음에서 나의 좋음만을 소망하고 있구나.’라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있음이라는 속성과, 하나님의 좋음이라는 속성과,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주체성이라는 속성이 내게서 인정되고 받아들여질 때, 하나님께서는 유리 바다를 통해 이질감이 아닌 동질감을 느끼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될까요? 하나님께서 이질감이나 동질감을 느끼실 수 있다는 이야기는 실로 굉장한 이야기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3절을 보면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이르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놀라우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와 어린 양의 노래가 같은 것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이란 크고 놀라우신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한 것임이 드러납니다.
모세의 노래는 출애굽을 연상시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사백삼십 년을 노예로 살았기에, 애굽의 왕인 바로보다 더 큰 존재감은 없었습니다. 또한 바로가 통치하는 초강대국 애굽이라는 나라의 존재감과 군대의 존재감이란 어마어마한 것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노예 입장에서 몇백 년을 살아온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에서는 애굽과 바로와 그 군대의 존재감을 이길 자는 세상에 없을 것 같습니다. 자기들이 상전으로 모시는 바로가 주변 나라를 지배하는 초강대국의 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지만 열 가지 재앙과 홍해를 건너는 기적을 통해, 눈에 보이는 애굽의 존재감과 바로의 존재감과 그 군대의 무지막지한 존재감을 티끌처럼 내동댕이치십니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놀라우시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크고 놀라운 일이란 사백삼십 년 간 애굽에서 노예로 살던 선민들의 마음에서 하나님의 존재감이, 애굽과 바로와 그 군대의 존재감을 뒤엎어 버린 사건입니다. 열 가지 재앙이나, 홍해 도하 사건이나, 애굽 군대가 홍해에 빠져 죽은 사건은 놀랍지만, 그 자체로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고자 하는 포인트는, 노예였던 선민들의 마음속에서 눈에 보이는 애굽과 바로와 그 군대의 막강한 존재감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하나님의 존재감이 이기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팡이 든 팔십 세의 모세를 통해 애굽과 바로와 그 군대의 존재감을 이기셨습니다.
이러한 모세의 노래와 어린 양의 노래가 같다는 것은 이와 똑같은 일이 어린 양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린 양의 십자가를 붙잡는다는 것은, 내 몸부터 시작해서 그동안 내게 소중하다고 여겨졌던 모든 존재들에 대해 죽는 것입니다. 그럴 때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하나님의 존재감을 느끼게 됩니다. 어린 양 십자가를 붙잡고 세상에 대해 죽고 하나님의 존재감을 느끼는 사건 속에는, 열 가지 재앙이나 홍해 도하 사건이나 광야에서 사십 년을 먹고 사는 기적이 일어나는 것과 똑같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에게도 날마다 일어나야 하는 일입니다. 여러분이 자녀 앞에서 하나님의 존재감을 먼저 느낀다면, 그 순간은 열 가지 재앙과 홍해 도하 사건과 광야 사십 년을 먹고 마신 기적이 한꺼번에 일어나는 현장과도 같습니다. 이러한 역사가 일어나지 않고서야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존재감을 붙들기 위해, 눈에 보이는 자녀의 존재감을 티끌처럼 내동댕이치는 역사는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린 양이 십자가에서 죽은 사건은, 우리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존재감을 일등 자리에 세우기 위해 일어난 열 가지 재앙이며 홍해 도하 사건과도 같습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본문에서는 모세의 노래와 어린 양의 노래를 연관 지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존재감이 바뀌는 것이야말로 세상을 탈출하는 것입니다. 애굽을 탈출하듯이 세상을 탈출한다는 것은 세상에 있는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존재감을 느끼지 않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렇듯 십자가 어린 양 사건은 굉장한 사건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으로 십자가를 바라보실 때 이 세상에 대해 느끼는 존재감은 죽고, 예수님을 따라 마음은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의 존재감을 느끼게 됩니다. 이 세상의 좋음에 대해 죽었기에 하나님만을 유일한 좋음으로 소망하게 됩니다. 이 세상에 대한 나의 주체성을 죽이고 하나님의 주체성만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렇게 할 때마다 열 가지 재앙과 홍해 도하 사건을 경험하는 것과 똑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세의 노래와 어린 양의 노래를 부르는 이유입니다.
열 가지 재앙과 홍해 도하 사건, 이백오십 만 명이 사십 년을 물 한 모금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광야에서 먹고살 수 있었던 크고 엄청난 일은, 모두 어린 양이 죽임당한 십자가 안으로 섭렵되었고 흡수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십자가를 붙잡음으로써 이 어마어마한 기적을 날마다 생활화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 생활화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의식에는 하나님이 아닌 눈에 보이는 이 세상 것들의 존재감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리고 공백의 마음은 하나님이 아닌 이 세상 것들에 대한 소망이 수시로 대상을 바꾸어가며 모든 바람이 세상을 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상태에 대해 이질감을 느끼실 것입니다.
한편 5절을 보면 “또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증거 장막의 성전이 열리며”라고 다시 성전이 언급됩니다. 그리고 6절에서는 일곱 대접 재앙을 일으키는 천사들이 성전에서 나오는 모습이 묘사됩니다. 성전을 증거 장막이라고 한 이유는 성전은 하나님의 이름을 두신 곳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들을 때 어린 양의 십자가를 바라보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존재감을 느끼지 못하고, 하나님의 좋음을 느끼지 못하고, 하나님의 주체성도 느끼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질감을 느끼시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주체성을 온전히 인정하고, 내 마음에서는 오직 하나님만을 소원하고, 하나님의 있음만을 신경 쓸 때 하나님께서는 나를 보시며 ‘너는 내가 끌어안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나의 아들이다.’라고 동질감을 느끼실 것입니다. 한편 이와는 반대로 어린 양을 바라보지 않는다는 것은, 열 가지 재앙과 홍해 도하 사건과 광야에서 사십 년을 먹고살았던 기적과 능력이 함축되어있는 십자가를 놓쳐버린 것입니다. 그러한 상태에서는 바로의 존재감을 하나님 앞에서 버리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열 가지 재앙이 없었다면 선민들은 모세의 있음은 봤을지라도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열 가지 재앙을 일으키셨고, 선민들은 비로소 모세의 있음이 아닌 하나님의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있음의 크기가 바로의 있음보다 더 크게 느껴지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처해있는 상황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바로에게 둘러싸여 살고 있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배우자, 자녀, 부모, 형제자매, 알고 있는 사람들, 각종 문제들이 바로의 존재감을 가지고 우리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바로의 존재감을 이길 수 있을까요? 우리의 힘으로는 이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열 가지 재앙과 홍해 도하 사건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기적이 없었다면 노예로 살던 선민들은 바로의 존재감을 뿌리칠 수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이 세상 것이 좋다고 여기는 세상의 노예로 살고 있습니다. 그러한 노예로 살던 우리가 무슨 수로 세상의 존재감과 좋음과 나의 주체성을 뿌리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크고 놀라운 일들을 함축하여 십자가 사건을 일으키셨습니다. 십자가 사건은 주머니에 지갑을 넣고 다니는 것처럼 언제 어디서든지 꺼내 활용할 수 있습니다. 열 가지 재앙과 홍해 도하 사건 같은 어마어마한 기적을 생활화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른 기적을 기대하며 살아갑니다. 이 세상에서 조그마한 것을 갖고 싶어 하며 그것들을 갖기 위해 기적이 동원되기를 바라며 신앙생활이라고 해왔습니다. 십자가 속에 담겨 있는 이 어마어마한 기적을 다 포기하고 내동댕이쳤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이 들릴 때마다 이 기적을 생활화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7절을 보면 “네 생물 중의 하나가 영원토록 살아 계신 하나님의 진노를 가득히 담은 금 대접 일곱을 그 일곱 천사들에게 주니”라고 하였습니다. 네 생물은 가장 가까운 곳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최측근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최측근으로서의 네 생물의 자리란 하나님의 있음의 존재감이 머리를 뚫고 나갈 정도로 충만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네 생물처럼 우리가 하나님 있음의 존재감을 느끼지 못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유리 바다를 통해 우리를 보실 때 이질감을 느끼실 것입니다. 그리고 일곱 대접 재앙이 쏟아지게 될 것입니다.
4절을 보면 독특한 표현이 등장합니다.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하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주의 이름’이란 하나님의 이름을 가리킵니다.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열 가지 재앙과 홍해 도하 사건 같은 크고 놀라운 기적이 함축되어 있는 십자가 사건을, 밥 먹듯이 생활화할 때 하나님의 이름처럼 좋은 것은 없다는 뜻입니다.
두려워함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잠시도 놓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처럼 내 마음에서 영화로운 대상이 없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어린 양의 십자가 사건만 붙잡을 수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떠올릴 때마다 네 생물이 보듯이 하나님의 존재감을 가까이 느끼고, 하나님의 좋음을 향하여 소망이 가득하게 되고,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주체성이 온전히 떠맡고 계시기에 걱정할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유리 바다를 통해 나를 보시면서 아무런 장애가 없는 동질감을 느끼실 때의 은혜와 축복을 상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지금 내 몸으로 만나고 있는 이 세상의 환경과 삶의 조건이 어떠한지는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이런 일은 다 잊어버리고 일단 할 일을 하면 됩니다. 내가 잘 사느냐 못 사느냐, 일이 잘 풀리느냐 마느냐는 다 하나님 아버지의 주권 안에 있습니다. 그러한 일들에 대해서는 아버지께서 생각과 소원을 갖고 계십니다. 아무쪼록 우리 모두에게서 유리 바다를 통해 세상을 보시는 하나님의 눈에 이질감을 느끼는 어떤 요소도 없기를 바랍니다. 그 이질감은 우리의 의식이 이 세상 것의 있음을 하나님의 있음보다 먼저 느낄 때, 이 세상의 좋음을 하나님의 좋음보다 먼저 바라고 소망할 때, 하나님의 주체성을 인정하지 않고 내 주체성으로 세상을 향하려고 할 때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만져지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의 존재감과 좋음과 주체성을 인정할 수 있고, 세상 것들에 대한 있음과 좋음과 나의 주체성을 뒤집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동질감을 느끼실 때 주시는 은혜와 축복을 기대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반대로 이 동질감이 없다면 하나님께서 나를 이질적 존재로 느끼심으로 일곱 대접 재앙을 기대해야 할 것입니다.
아무쪼록 열 가지 재앙과, 홍해 도하 사건과, 광야에서 이백오십 만을 사십 년 동안 먹이시고 입히셨던, 그 전지전능하시고 크고 놀라운 기적들이 십자가 하나에 농축되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로지 십자가 하나 가졌다면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오늘도 그 기적 사건을 통해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모든 것들에 대한 존재감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존재감으로 뒤바뀌어야 합니다. 그 옛날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일어났던 놀라운 뒤집힘이 우리에게도 날마다 일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출애굽 때 사백삼십 년을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 마음 안에서 일어난 존재감의 뒤집힘, 좋음을 향한 소망의 뒤집힘, 주체성의 뒤집힘이 우리에게서 날마다 모든 순간마다 일어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