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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2

녹취문: 오늘도 내 주변에 쏟아지는 대접 재앙_태승철 (계 16:1~11)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4.02.17|조회수46 목록 댓글 0

 

www.everyday01.com -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오늘도 내 주변에 쏟아지는 대접 재앙>의 줄거리 :

하나님의 오른손에 들린 두루마리의 내용이 어린 양을 중심축으로 하여 이루어지면서 역사는 진행합니다. 이때 어린 양을 등진 채 살아가는 사람들의 역사에 삼대 칠중 재앙이 임하게 됩니다. 일곱인 재앙에 이어 일곱 나팔 재앙이 임하고 그에 이어 마지막으로 일곱 대접 재앙이 드러납니다. 이런 삼대 재앙의 차이를 구분하면서 일곱 대접 재앙이 실제 우리의 삶에서 가지는 의미를 살펴봅니다.

 

오늘도 내 주변에 쏟아지는 대접 재앙

 

(요한계시록 16:1~11)

 

1. 또 내가 들으니 성전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일곱 천사에게 말하되 너희는 가서 하나님의 진노의 일곱 대접을 땅에 쏟으라 하더라

2. 첫째 천사가 가서 그 대접을 땅에 쏟으매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악하고 독한 종기가 나더라

3. 둘째 천사가 그 대접을 바다에 쏟으매 바다가 곧 죽은 자의 피 같이 되니 바다 가운데 모든 생물이 죽더라

4. 셋째 천사가 그 대접을 강과 물 근원에 쏟으매 피가 되더라

5. 내가 들으니 물을 차지한 천사가 이르되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신 거룩하신 이여 이렇게 심판하시니 의로우시도다

6. 그들이 성도들과 선지자들의 피를 흘렸으므로 그들에게 피를 마시게 하신 것이 합당하니이다 하더라

7. 또 내가 들으니 제단이 말하기를 그러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심판하시는 것이 참되시고 의로우시도다 하더라

8. 넷째 천사가 그 대접을 해에 쏟으매 해가 권세를 받아 불로 사람들을 태우니

9. 사람들이 크게 태움에 태워진지라 이 재앙들을 행하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이름을 비방하며 또 회개하지 아니하고 주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더라

10. 또 다섯째 천사가 그 대접을 짐승의 왕좌에 쏟으니 그 나라가 곧 어두워지며 사람들이 아파서 자기 혀를 깨물고

11. 아픈 것과 종기로 말미암아 하늘의 하나님을 비방하고 그들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더라

 

 

오늘은 일곱 대접 재앙이 직접 계시됩니다. 그중에서 우리는 다섯 번째 재앙까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대접 재앙이 하나하나 언급되는 가운데 그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흔히 일곱 대접 재앙을 언제일지 모르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예수님 재림 이전에 일어날 재앙으로 국한해서 해석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옳지 않습니다. 4장 1절의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라는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 말씀처럼 일곱 대접 재앙은 어린 양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역사 속에서 언제나 일어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오른손에 들린 두루마리의 내용은 어린 양을 중심축으로 돌아간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므로 어린 양을 중심축으로 하여 진행되는 역사의 모든 구간에 일곱 대접 재앙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삼대 칠중 재앙을 환경적이고 물리적인 차원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을 보면 두 번씩이나 회개하지 않는다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계시록에 등장하는 재앙을 환경적이고 물리적인 차원에서만 생각한다면, 계시록을 읽어도 내용 자체를 어긋나게 바라보고 있기에 회개할 수 없습니다. 삼대 칠중 재앙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육체나 우리가 속한 환경에 내리시는 일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 마음을 겨냥하고 있습니다. 혹시 환경적이고 물리적인 어려움이 재앙 속에 포함되더라도 그 재앙의 궁극적인 목표는 마음을 향하고 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을 예로 들어봅니다. 계시록의 재앙이 환경적이고 물리적인 것이라면 온몸이 돌에 맞아 피투성이가 되어 죽었던 스데반 집사님은 가장 극단적인 고통을 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 현장을 바라본다면 삼대 칠중 재앙이 임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가장 극단적인 환경적 육체적 고통의 순간에서 성령의 충만함과 은혜의 충만함은 절정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이 상황을 재앙의 상황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박해받는 것은 환난일 수는 있으나 계시록이 말하는 재앙은 아닙니다.

계시록에서 말하는 재앙이란 어린 양을 등지고 사는 사람들에게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본문에서는 삼대 칠중 재앙 중 마지막으로 대접 재앙이 계시되고 있습니다. 대접 재앙에 대한 말씀을 살펴보기에 앞서 각 재앙의 의미를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재앙을 하나씩 따로 살펴보다 보면 일곱 인 재앙, 일곱 나팔 재앙, 일곱 대접 재앙이 각각 어떤 성격을 띠고 있으며 왜 내려오는 것인지에 대해 알 수 없습니다.

일곱 인 재앙은 처음 계시된 재앙으로써 역사의 중심축이신 어린 양을 등지고 죄와 저주에 찌든 본래적 상황에 임하는 재앙입니다. 일곱 인 재앙 안에 일곱 나팔 재앙이 들어있으며, 일곱 대접 재앙도 들어 있습니다. 일곱 나팔 재앙과 일곱 대접 재앙은 재앙의 깊이를 더해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삼대 칠중 재앙이라 부르지만, 개별적인 사건이 아닌 일곱 인 재앙의 테두리 안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일곱 인 재앙은 인을 떼시는 분이 어린 양이라는 말씀이 의미하는 대로, 어린 양을 등지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기본적으로 임하게 되는 재앙을 말합니다. 어린 양을 등짐으로써 나타나는 결과들에 대해서 일곱 나팔 재앙과 일곱 대접 재앙이 등장하게 됩니다.

이러한 의미를 염두에 두고 살펴본 일곱 나팔 재앙은 어린 양을 등짐으로써 하늘을 갖지 않은 상태에 대하여 내리는 재앙입니다. 그리고 일곱 대접 재앙은 어린 양을 등짐으로써 땅을 가지는 상태에 대한 재앙입니다. 이것을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일곱 나팔 재앙은 남편이신 하나님을 마음에 안 들어 하는 상태에 대한 재앙이라 할 수 있고, 일곱 대접 재앙은 아예 하나님을 남편으로 생각하지 않고 이 땅에 있는 것들을 남편으로 삼은 상태에 대한 재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일곱 대접 재앙의 경우에는 재앙을 말씀하시기 전에 짐승들에 대한 이야기가 집중적으로 등장했습니다. 특히 666표를 준 땅짐승에 의해서 된 일은 땅을 가지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바다짐승은 하나님을 갖지 못하게 합니다. 하나님을 갖지 못하도록 효과적인 방법으로 택한 것이 땅짐승을 통해 땅의 것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렇게 땅의 것을 갖게 된 자들에게 내리는 재앙이 대접 재앙입니다.

이처럼 나팔 재앙은 어린 양을 등지고 하나님을 가지지 않는 상태에 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대접 재앙은 짐승들의 미혹을 받아서 하나님을 갖지 못하게 하겠다는 바다짐승의 바람을 완성시키기 위해, 땅짐승에 의해서 땅을 갖게 된 자들에게 내리는 재앙입니다. 이러한 재앙의 내용들은 상징적입니다. 재앙에서 표현되는 대로 현상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환경을 나타내는 언어들을 통해 표현된 것입니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일곱 대접 재앙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절을 보면 “또 내가 들으니 성전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일곱 천사에게 말하되 너희는 가서 하나님의 진노의 일곱 대접을 땅에 쏟으라 하더라”라고 하였습니다. 큰 음성이 나오는 곳을 보좌가 아닌 성전이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큰 음성으로부터 대접 재앙이 시작됩니다. 보좌에서 음성이 나온다고 해도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음성이라는 점은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런데 굳이 성전이 언급된 이유는 이 모든 재앙이 하나님의 이름과 관계되어 있음을 강조하고자 함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란 유일한 있음과, 유일한 좋음과, 유일한 주체성을 가리킵니다. 일곱 대접 재앙은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이 온 천하에 계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름을 무시하는 자들에게서 나타나는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기 위해서는 어린 양을 향해야만 합니다. 어린 양을 등진 채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도 하나님의 있음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좋음을 경멸하며, 하나님의 주체성을 모독하는 상태가 됩니다. 결국 하나님의 이름에 대하여 어린 양과 연합하여 올바른 태도를 보이지 않는 자들에게 내리는 재앙입니다. 그중에서도 대접 재앙은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되 단순히 불만을 갖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 대신에 땅의 것들을 가지는 자들에 대한 재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2절을 보면 “첫째 천사가 가서 그 대접을 땅에 쏟으매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악하고 독한 종기가 나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첫째 천사가 내리는 대접 재앙의 내용을 보면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에게 내리는 재앙임을 알 수 있습니다. 짐승의 표는 땅짐승이 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짐승의 표를 받았다는 것은 마음에 하나님 대신에 땅을 가진 것입니다. 이들에게 악하고 독한 종기가 났다고 했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이것은 몸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마음에 악하고 독한 종기가 난다는 것입니다.

종기 재앙은 출애굽 때 일어났던 여섯 번째 재앙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허락하심 아래에서 사탄이 욥에게 내렸던 병이 바로 악성 종기였습니다. 욥은 종기가 너무너무 가려워 재 가운데 앉아서 날카로운 질그릇 조각으로 자기 몸을 긁는 상황까지 되었습니다. 욥의 종기는 하나님께서 시험을 위해 사탄에게 허락하신 일이었다면 대접 재앙은 그 의도가 반대입니다. 다시 말해 욥처럼 살지 않고 짐승에 미혹된 자들에게 하나님이 내리시는 재앙입니다. 그렇다면 욥이 겪었던 종기가 마음에 생긴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요?

악하고 독한 종기는 짐승에게 표를 받은 자들에게 주어지는 재앙으로써, 마음에서 끊임없이 세상 것을 신경 쓰게 되는 상황을 가리킵니다. 신경을 씀이란 쉽게 말해 마음의 가려움입니다. 종기가 생겼다는 것은 마음에서 가려운 곳을 긁는 시원함이 없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저렇게 생각해도 답이 주어지지 않으므로 마음이 계속 가려워서 질그릇 조각으로라도 긁고 싶은 상태입니다.

마음은 영입니다. 마음에는 영이시고 바람이신 하나님이 들어오셔야만 상처가 생기지 않습니다. 한편 이 세상 것들을 받아들이고자 하지만 영인 마음에는 도저히 맞지 않는 것들입니다. 따라서 마음이 세상 것을 받아들이고 신경을 쓴다는 것은, 영이시고 바람이신 하나님이 들어오시는 대신에, 세상 것을 받아들여서 질그릇 같은 이물질로 긁어대는 것과 같은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 것을 갖고자 하지만 세상 것은 이물질이기에 마음을 가렵게 합니다. 자꾸만 긁고 싶어집니다.

제가 독일에서 유학하던 시절에 심한 아토피를 앓던 분이 있었습니다. 아토피가 있더라도 대부분 어릴 때 겪고 나이를 먹으며 나아지기 마련인데 이분은 전신이 고구마 색깔처럼 심했습니다. 몸이 가려워서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다고 합니다. 손으로 긁고 거친 헝겊을 뭉쳐서 긁다 보면 살이 찢기고 짓무르고 상처가 납니다. 그런데 마음에 세상을 갖고자 하는 자들의 상태가 이와 같습니다. 세상 것을 품고 있는 마음이 아토피처럼 한없이 가렵습니다. 악성 종기가 나서 긁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이 마음의 신경 씀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대접 재앙의 의미입니다.

단순히 세상일에 신경이 쓰여서 밤잠을 못 잔다고 생각하지만, 이것은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내리시는 재앙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와 무관하지 않은 이유는 십자가를 생활화한다는 사람 중에도 이와 같은 마음의 가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말씀드린 대로 공중의 권세 잡은 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유행과 세상 풍조를 따르던 습관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여전히 세상 것을 담고 있는 상태가 유지되고 있습니다. 이물질을 담고 있기에 생겨난 종기가 가려워서 계속 신경을 쓰게 됩니다. 밤새 쉴 새 없이 긁다 보면 상처가 나고 짓무르기 마련입니다. 욥의 몸에 났던 종기가 마음에 나는 상태입니다. 이것이 바로 첫 번째 대접의 재앙입니다.

 

이어서 3절을 보면 “둘째 천사가 그 대접을 바다에 쏟으매 바다가 곧 죽은 자의 피 같이 되니 바다 가운데 모든 생물이 죽더라”라고 하였습니다. 바다가 죽음의 장소가 되고, 육지가 죽음의 피바다로 둘러싸인 섬과 같은 상황입니다. 이렇게 환경적인 표현으로 전달되는 계시의 내용은 무엇일까요? 땅짐승에게 미혹된 마음은 세상 것을 갖고자 합니다. 세상 것에서 있음을 느끼고, 좋음을 느끼고, 스스로 주체가 되어서 그것들을 마음에 끌어안으려고 합니다. 그럴 때 반드시 누구에게나 임하는 재앙이 바로 피바다의 재앙입니다.

이 맥락에서 바다란 사람의 마음이 수평적으로 움직이는 상태를 상징합니다. 본래 사람의 마음이란 어린 양과 함께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가져야 합니다. 하늘을 향해 수직으로 올라가야 마땅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수평적으로만 움직인다면 어떨까요? 바다는 내가 현재 있는 처지와 구분되는 상태라면, 바다 건너는 지금의 처지와는 다른 좋은 처지가 있으리라는 희망을 상징합니다. 내 희망이 이루어지는 상황과 지금 현재의 상황 사이에 바다가 놓여있는 형국입니다. 육지에 사는 사람들은 무슨 문제가 생기면 바다를 건너 다른 육지로 건너가고자 합니다. 신대륙을 발견하고자 하는 희망을 갖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보편적인 죄악 된 심리상태를 아름답게 노래한 가곡이 하나 있습니다. 음악가 현제명의 ‘희망의 나라로’라는 노래입니다. ‘배를 저어가자 험한 바다 물결 건너 저편 언덕에, 산천경개 좋고 바람 시원한 곳 희망의 나라로, 돛을 달아라 부는 바람 맞아 물결 넘어 앞에 나가자, 자유 평등 평화 행복 가득 찬 곳 희망의 나라로’라는 가사입니다. 이 노래 가사는 이 땅을 가진 자들이 드러내는 보편적 속성으로 가득합니다. 사람은 자기가 살고 있는 땅이라는 상황에 문제가 생기면 바다 건너 문제가 없는 곳을 희망하는 수평적 움직임을 보이고자 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내리시는 재앙은 바다가 피로 변해 희망조차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가짜 희망이라도 갖고자 합니다. 그것이 숨통을 열어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숨통이 막혀버리는 일이 재앙으로 내립니다. 희망할 수도 없는 상황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청년들은 결혼을 하고 행복한 가정을 꾸미기를 희망합니다. 그런데 행복한 가정에 대한 희망 자체가 근절되어 버립니다. 훌륭한 배우자에 대한 희망 자체가 근절되어 버립니다. 더 이상 삶의 어떤 영역에 대해서든 희망조차 할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내가 지금 있는 곳은 죽음의 피바다로 둘러싸인 섬처럼 느끼는 상태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위를 향하여 희망하는 수직의 희망을 모르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재앙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수평적 희망만을 알고 있는 자들에게 희망의 숨통을 끊어버리는 재앙이 마음에 임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두 번째 대접 재앙입니다.

 

4절을 보면 “셋째 천사가 그 대접을 강과 물 근원에 쏟으매 피가 되더라”라고 하였습니다. 둘째 천사에 의해 바다가 피로 변한 것에 이어서 셋째 천사에 의해서는 강과 물 근원이 피가 됩니다. 여기서 강과 물은 마실 물을 의미합니다. 마실 물이 사라져 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앞의 바다가 피로 변한 것은 희망의 좌절이었습니다. 희망은 지금을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의 마음에 숨통을 열어줍니다. 따라서 희망이 좌절되었다는 것은 숨통이 끊어졌다는 것입니다. 한편 셋째 천사에 의한 마실 물이 피가 되는 것은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말고가 아니라 당장의 문제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재앙은 광야에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이 다투었던 므리바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열 가지 재앙을 몸소 체험하고 홍해를 마른 땅으로 건넜습니다. 그런데 당장 2~3일 마실 물이 없자 우리 중에 하나님이 있느냐며 불평합니다. 이처럼 당장 마실 물이 없다는 것은 상황이 급박해진 것입니다. 바다가 피로 변했다는 것은 앞으로 나아질 희망이 사라짐을 의미한다면, 강과 물 근원이 피가 되었다는 것은 당장 견뎌낼 수 없게 됨을 의미합니다. 미래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지금 당장 사느냐 죽느냐는 다급함이 압도하는 상황입니다. 이것이 강과 물 근원이 피가 되는 재앙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에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To be or not to be-that is the question)’라는 대사가 유명합니다. 땅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의 특징이 잘 드러난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도대체 지금 무엇 때문에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모릅니다. 지금 내가 왜 이 꼴로 있는지를 모릅니다. 지금 왜 이런 수모를 당하고 이런 부담감을 갖고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이유를 모릅니다. ‘왜 참고 살아야 되지? 왜 원치 않는 일상을 반복해야 되지?’라고 생각하는 것은 땅을 가진 자들에게 임하는 재앙입니다.

모든 재앙은 마음에 임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기에 환경적으로 지상낙원이 임할지라도 재앙은 계속됩니다. 몸은 지상낙원에 있을지라도 마음은 재앙에 처해있을 수 있습니다. 지상낙원 같은 섬에서 일 년간 머물기로 했더라도 떠나온 조국에 신경 써야 할 문제가 있다면 주어진 상황을 즐길 수 없습니다. 마음의 숨통이 트이지 않습니다. 수직의 희망을 가질 줄 모르기에 수평의 희망을 갖고자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희망의 숨통을 끊으십니다. 지금 당장 왜 살아야 하는지를 모르기에 환경적 지상낙원일지라도 의미가 없습니다.

요즘은 상황이 다소 달라졌습니다만 한때 사회보장제도가 뛰어나기로 유명했던 북유럽은 동시에 자살률이 높기로 유명했습니다. 환경적 재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는 부유층의 마나님들이 우울증으로 고생한다는 이야기는 낯설지 않습니다. 마음이 불편하기에 환경적 지상낙원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스데반 집사님과 같은 환경에 처할지라도, 마음이 수직으로 어린 양과 함께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붙잡으면 평강이 임하고 천국이 임합니다. 물이 피가 되었다는 것은 당장 마실 물이 없는 상황입니다. 광야에 나온 선민들이 므리바에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와 싸울 정도가 되었던 것과 같습니다. 지금 당장 견딜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살아야 될 이유를 느낄 수 없으니 이보다 큰 재앙은 없을 것입니다.

 

세 번째 재앙과 연관하여 6절을 보면 “그들이 성도들과 선지자들의 피를 흘렸으므로 그들에게 피를 마시게 하신 것이 합당하니이다 하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성도들과 선지자들을 죽였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물론 지금도 이슬람 국가 같은 곳에서는 박해가 존재합니다만, 우리나라나 유럽의 입장을 보면 박해를 받은 구간은 길지 않았습니다. 박해를 받지 않은 구간이 훨씬 깁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를 갖고 있을까요?

박해가 없더라도 성도들과 선지자들을 죽입니다. 이것은 성도들과 선지자들의 인격의 정체성과 연관이 있습니다. 성도로 살아있다는 것은 어린 양과 함께 하나님의 이름이 가리키는 있음과 좋음과 주체성을 마음에 받아들이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늘을 가지는 것입니다. 성도들과 선지자들을 죽임이란 바로 이러한 정체성을 없애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성도들과 선지자들을 대할 때 하늘을 가졌다는 정체성의 인격을 무시합니다. 저 사람 마음에 하늘을 가졌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며 뭉개고 무시하고 경멸하고 비아냥거립니다. 마음이 하늘을 향하고 하나님을 갖는 것은 있을 수 없는 허황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도로서의 인격적 정체성을 아예 마음에서 없애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그래? 나를 가지고 사는 자들이 그렇게 우습단 말이지. 네가 경멸하고 무시할 정도로 허황되다는 것이지. 네가 한 번 당해 보라.’라고 하시며 재앙을 내리십니다. 지금 당장 자기 존립의 근거를 잃어버리게 하시고, 내가 살아야 되는 마땅한 이유를 찾지 못하는 상황을 재앙으로 내리십니다. 마음에서 성도들의 존립 자체를 죽였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7절을 보면 “또 내가 들으니 제단이 말하기를 그러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심판하시는 것이 참되시고 의로우시도다 하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제단이란 어린 양의 십자가 제단을 가리킵니다. 땅을 가진 자들은 지금 당장 왜 살아야 하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자기 존재의 기반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경험할 수밖에 없는 심판이 임합니다. 어린 양을 붙잡고 땅의 것을 가지려는 자기를 죽이려 하지 않고, 하늘 것을 가진 자들을 그 마음에서 아예 존재를 뭉개버리고 없애버리는 살인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게는 세 번째 대접 재앙이 마땅히 내릴 심판이라는 것입니다.

 

8~9절을 보면 네 번째 대접 재앙이 계시됩니다. “넷째 천사가 그 대접을 해에 쏟으매 해가 권세를 받아 불로 사람들을 태우니 / 사람들이 크게 태움에 태워진지라 이 재앙들을 행하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이름을 비방하며 또 회개하지 아니하고 주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더라”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비방한다는 것은 지금 하나님에 의해 주어지는 재앙에 대해 분노한다는 의미합니다. 세상에는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비방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자신에게 재앙이 주어지는 상황에 대해서 분노할 수는 있습니다. 쉽게 말해 ‘이런 개 같은 경우가 있나.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 만약에 신이 있다면 저주나 받아라.’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비방하고 회개하지 않음에 대한 언급은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재앙에서 모두 언급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태양이 권세를 받아 불로 사람들을 태운다고 했습니다. 9절을 보면 ‘주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더라’라는 말씀이 등장하는데, 이러한 표현은 다른 구절에는 없으며 해와 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광이란 내 의식이라는 무대에서 하나님이 유일하게 찬란한 빛을 드러내는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을 태우는 태양이란 하나님 이외에 내 마음에서 ‘오 나의 태양이여!’라고 불리는 대상을 가리킵니다. 나인성 과부에게는 외아들이 마음의 태양이었습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에게는 서로가 마음의 태양이었습니다. 사업하는 사장님에게는 사업장이 마음의 태양일 수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새카맣게 타들어 가는 것은 마음의 태양 때문입니다. 이 세상 것들이 마음에 태양으로 들어앉아 있습니다. 내게 가장 소중하고, 가장 아깝고, 가장 귀하게 여겨지는 대상들이 내 마음의 영광을 독차지하는 태양입니다. 그 태양 때문에 속이 새카맣게 타고, 부글부글 끓고 있다면 네 번째 대접 재앙이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어린 양을 등진 상태가 불러오는 재앙이 일곱 인 재앙입니다. 그리고 어린 양을 등졌음으로 나타나는 결과로써 하나님을 가지지 않고 거부하는 상태에 대한 재앙이 일곱 나팔 재앙이었습니다. 그리고 본문을 통해 살펴보는 일곱 대접 재앙은 하나님을 싫어하는 정도를 넘어서, 하나님을 제쳐놓고 하나님 대신에 땅을 갖는 사람들에게 내리는 재앙입니다. 나머지 다섯 번째부터 일곱 번째 재앙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이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역사의 중심축이신 어린 양을 붙잡고 수직 상승 운동을 오늘도 빗발치듯이 해낼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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