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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바로 나 자신이 아마겟돈 전쟁터다>의 줄거리 :
한 사람이 자기 육체가 언젠가 벗겨져 나갈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일을 사탄과 그의 수하인 두 짐승은 가장 두려워합니다. 왜냐면 이런 사실을 알아서 혹시 육체 껍데기로 접촉하는 세상과 마음이 거리를 두게 되면 사탄의 왕국은 뿌리부터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이 내게서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사탄이 벌이는 전쟁이 바로 아마겟돈 전쟁입니다.
바로 나 자신이 아마겟돈 전쟁터다
(요한계시록 16:12~21)
12. 또 여섯째 천사가 그 대접을 큰 강 유브라데에 쏟으매 강물이 말라서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되었더라
13.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14. 그들은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왕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있을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
15. 보라 내가 도둑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16. 세 영이 히브리어로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으로 왕들을 모으더라
17. 일곱째 천사가 그 대접을 공중에 쏟으매 큰 음성이 성전에서 보좌로부터 나서 이르되 되었다 하시니
18. 번개와 음성들과 우렛소리가 있고 또 큰 지진이 있어 얼마나 큰지 사람이 땅에 있어 온 이래로 이같이 큰 지진이 없었더라
19. 큰 성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만국의 성들도 무너지니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바 되어 그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으매
20. 각 섬도 없어지고 산악도 간 데 없더라
21. 또 무게가 한 달란트나 되는 큰 우박이 하늘로부터 사람들에게 내리매 사람들이 그 우박의 재앙 때문에 하나님을 비방하니 그 재앙이 심히 큼이러라
16절을 보면 “세 영이 히브리어로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으로 왕들을 모으더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아마겟돈 전쟁에 대해서는 너무나 많은 추측이 난무합니다. 아마겟돈으로 지명되는 장소 중에 단골 메뉴가 팔레스타인입니다. 지금도 팔레스타인에서는 전쟁이 일어나고 있고, 미국과 러시아가 갖고 있는 핵폭탄이 아마겟돈 전쟁을 일으킬 재료라고 생각합니다. 지구가 몇 조각이 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폭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반복하여 말씀드렸듯이 자의적 추측으로 성경 말씀을 보아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우리가 아마겟돈 전쟁을 생각할 때 잊지 말아야 되는 실마리를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15절을 보면 “보라 내가 도둑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아마겟돈 전쟁이 어떤 것인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마겟돈 전쟁이란 각 사람에게서 부끄러운 모습이 나타나게 하는 전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결코 물리적 차원에서 우주적 대 파괴가 일어나는 전쟁을 계시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도둑 같이 오실 때 자기 옷을 지키지 못함으로 벌거벗고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는 전쟁이 바로 아마겟돈 전쟁입니다. 이러한 아마겟돈 전쟁에 대한 이해를 염두에 두고 지난 시간에 살펴보지 못했던 다섯 번째부터 일곱 번째 대접 재앙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네 번째 대접 재앙과 다섯 번째 대접 재앙은 쌍을 이루고 있습니다. 네 번째 재앙에서 해가 권세를 받아서 불로 사람을 태운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해란 내 마음이 소중하게 여겨 언제나 의식의 무대에서 보이는 존재를 가리킵니다. 태양이 발광체이듯이 마음에서 빛을 발하고 있는 존재이며, 내 마음이라는 무대에서 영광을 받고 있는 존재로서 없어지면 너무나 아깝고 소중한 존재입니다. 해가 불로 사람을 태운다는 것은 그러한 존재들을 마음에 품으면 그것들이 마음을 새카맣게 태운다는 것입니다.
한편 이러한 네 번째 재앙과 쌍을 이루고 있는 다섯 번째 재앙이 기록된 10~11절을 보면 “또 다섯째 천사가 그 대접을 짐승의 왕좌에 쏟으니 그 나라가 곧 어두워지며 사람들이 아파서 자기 혀를 깨물고 / 아픈 것과 종기로 말미암아 하늘의 하나님을 비방하고 그들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만 보면 무엇인가를 쏟았는데 그것의 정체가 드러나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쏟은 것 때문에 어두워졌다는 표현으로부터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유추할 수 있습니다. 이 어두워짐이란 네 번째 재앙에서 언급된 태양과 연관됩니다.
나인성 과부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나인성 과부의 마음에는 외아들이 태양 같은 존재였습니다.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길을 갈 때나 집에 있을 때나, 그 마음에는 항상 외아들이 환하게 보이는 상태입니다. 그 아들이 말썽을 피울 때마다 나인성 과부의 마음은 새카맣게 타들어 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죽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어두워짐이 의미하는 상태입니다. ‘오! 나의 태양이여!’라고 말할 수 있는 대상은 언제나 마음에서 빛을 발하며 태양처럼 존재합니다. 다만 그것은 내 마음을 새카맣게 태우는 존재였지만 이제는 그 태양마저 없어졌습니다.
일곱 대접 재앙은 마음에 세상 것을 담고 있는 자들에게 내리는 재앙입니다. 이렇게 마음에 담은 것들 중에서도 태양처럼 빛나는 존재가 있습니다. 다섯 번째 재앙은 그 태양 같은 존재가 없어진 상태를 가리킵니다. 나인성 과부가 외아들을 잃는 것과 같은 상황은 누구에게나 발생할 수 있습니다. 회사를 세우신 사장님이라면 그 사업이 망해서 없어질 때 태양이 사라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어두움이 얼마나 괴로운지 혀를 깨물 정도입니다. 나인성 과부였다면 혀를 깨무는 고통을 통해서라도 외아들을 잃은 고통을 잊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마치 간호사들이 주사를 놓을 때 먼저 주사 놓을 엉덩이를 때리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맞은 고통을 느끼는 순간에 주사가 들어오는 고통을 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혀를 깨무는 것이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피가 줄줄 흐를 정도로 혀를 깨물지 않고서는 마음에 품고 있던 태양이 없어진 고통을 이기고 견딜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편 12절 이하에는 여섯 번째 대접 재앙의 시작과 함께 아마겟돈에 대한 언급이 등장합니다. 12절을 보면 “또 여섯째 천사가 그 대접을 큰 강 유브라데에 쏟으매 강물이 말라서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되었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선민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보면 유브라데 강은 앗수르, 바벨론, 메데, 바사와 같은 강대국들이 발흥하는 지역입니다. 앞서 9장에서도 유브라데에 결박되어 있던 네 천사가 풀려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네 천사는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않은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질투심을 담고 움직였습니다. 한편 본문에서는 세상을 담고 있는 상태에 대해서 유브라데 강에 동방의 왕들을 다 모아서 전쟁을 한다는 것입니다.
13~14절을 보면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 그들은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왕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있을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용은 잘 아시다시피 붉은 용으로 상징된 사탄이며, 짐승은 바다짐승을 가리키고, 거짓 선지자는 땅짐승을 가리킵니다. 용과 바다짐승과 땅짐승의 입에서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거짓 영이 나와서 이 세상의 모든 힘을 동원하여 전쟁을 준비한다는 것입니다. 그 모든 힘은 거짓으로 하는 공격입니다.
온 천하 왕들을 모은다고 하니 정말로 세상의 지도자들이 모여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장소가 팔레스타인이라 추측합니다. 말씀드렸듯이 이러한 해석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애초에 사탄은 하나님을 대적할 수 없습니다. 사탄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에 의해서 있게 된 것들입니다. 사탄은 영원 전부터 스스로 있던 존재가 아니기에 하나님을 대적할 수 없습니다. 사탄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공격할 수 있을 뿐입니다.
사람은 인격적 존재이기에 좌우로 흔들릴 수 있으며 하나님을 등질 수도 있습니다. 사탄은 이러한 사람의 인격성을 노리고 공격할 뿐이지 결코 하나님을 대적하겠다고 온 세상 왕을 동원할 수는 없습니다. 지구의 온 세상 왕들의 힘을 다 합칠지라도 하나님을 대적할 수는 없습니다. 바벨탑을 쌓을 때처럼 온 인류가 한 언어를 사용하며 한마음이 될지라도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설령 그러한 의도를 가질지라도 하나님께서 홍수로 쓸어버리신다면 그걸로 끝입니다.
따라서 본문을 물리적 전쟁에 대한 계시로 받아들이는 것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할 세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얼토당토않은 이원론입니다. 성경은 언제나 일원론입니다. 사탄도 바다짐승도 땅짐승도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하나님의 허락하심을 따라 인간을 대적하는 역할을 수행할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본문을 이해함에 있어서 어느 지정된 장소에 온 천하의 지도자들이 모여서 물리적 전쟁을 벌일 것이라고 해석하는 무식함을 보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본문에서 이해할 실마리를 주셨습니다. 다시 15절을 보면 “보라 내가 도둑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도둑같이 오심은 재림 때입니다. 예수님의 재림 때 죽은 자들이 깨어날 것인데 그때 벌거벗은 상태라면 육체가 죽을 때 마음이 벌거벗은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도둑같이 임하신다는 것은 거꾸로 말하면 내가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내가 죽는 그날은 바로 예수님의 재림과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육체가 죽고 백 년이 지나든 천년이 지나든 일 초도 지나지 않는 것처럼 잠들어 있다가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만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죽은 지 사천 년이 지났어도 아브라함에게는 일초도 흐르지 않은 셈입니다. 아브라함은 죽을 때의 그 상태에서 깨어나 예수님을 만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도둑같이 임하신다는 말씀은 내가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뜻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하나님에 대해 깨어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벌거벗지 않고 자기 옷을 지키는 상태입니다. 내 마음에 영이신 하나님을 받아들였다면, 육체가 죽은 후에도 영이신 하나님이 빛이 내 영을 휘감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 상태가 벌거벗지 않고 옷을 지키는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흰옷은 단순히 흰색 천으로 만든 옷이 아닙니다. 흰옷이란 변화산에서의 예수님의 모습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입으셨던 흰옷은 빛을 재료로 한 옷이었지 천 조각으로 만들어진 옷이 아니었습니다. 이처럼 흰옷이란 하나님을 받아들였을 때 하나님의 있음과 하나님의 좋음과 하나님의 주체성의 빛이 영을 휘감고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 흰옷을 입지 않았다는 것은 마음에 하나님을 담은 채 육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세상을 담은 채 육체가 죽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영은 세상을 담은 채로 깨어날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는 사도 바울이 말한 대로 배설물을 담고 있는 상태입니다. 마음에 자녀를 담았다면 내 밖에 있는 자녀는 자녀대로 존재하고 있지만 똥을 담은 것입니다. 아무리 귀엽고 소중하게 여겨질지라도 그것은 바깥에 있는 것으로 객관적 존재입니다. 내 마음에 담으면 그것은 다 똥이 될 뿐입니다. 내 영이 깨어났을 때 세상의 똥들을 가득 담은 상태에서 깨어난다면 빛을 발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바로 이렇게 더러운 것이 가득한 채로 깨어난 상태를 벌거벗은 것이라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로부터 사탄과 바다짐승과 땅짐승이 있는 힘을 기울여 싸우려는 아마겟돈 전쟁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시 14절을 보면 “그들은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왕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있을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있을 전쟁’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주석을 보면 이것을 예수님 재림 때 있을 전쟁이라고 해석하지만 예수님 재림 때 전쟁은 없습니다. 이미 모든 판이 끝났기 때문입니다. 재림하신 예수님을 향하여 돌격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있을 전쟁’이란 마음에서 일어나는 전쟁입니다.
사람들은 마음에 세상을 담고 세상의 있음만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배우자의 있음, 자녀의 있음, 몸의 있음, 몸으로 만나는 여러 대상들의 있음을 느끼며 삽니다. 그리고 그것들의 좋음을 추구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어떤 계기를 통해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들게 되고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에 대해 의식하기 시작합니다. 이제 마음에서 하나님이 크게 보이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내 앞에 보이는 배우자의 있음, 자녀의 있음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있음이 더 크게 느껴집니다. 그러면서 있음을 느끼던 것들에 대해서는 하나님에 의해 있게 된 것들임을 깨닫게 됩니다. 자녀조차도 있음을 느껴야 될 존재가 아님을 알게 됩니다. 이것을 깨닫는 날이 바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있음과 좋음을 느끼게 되는 날부터, 사탄과 바다짐승과 땅짐승은 총력을 기울여 거짓으로 무장된 군대를 보내기 시작합니다. ‘온 천하 왕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있을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왕이란 내 마음에서 있음을 느낄만한 권세가 있는 것들입니다. 사탄은 총력을 기울여서 이러한 존재들을 내세우며 우리 마음에 전쟁을 걸어옵니다. 돈 문제, 건강 문제, 자녀 문제, 배우자 문제는 마음에서 있음을 느끼게 하는 강력한 권세들입니다. 이러한 모든 권세야말로 본문에서 언급된 온 천하의 왕들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거짓으로 동원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 마음에 대고 ‘지금 네 몸이 아픈데 건강보다 중요한 일이 어디 있느냐? 지금 네 자식이 이런 문제를 일으키는데 그것보다 중요한 일이 어디 있느냐?’라고 합니다. 이처럼 내 마음에서 있음을 느낄 수 있을 만한 권세가 있고, 내 마음에 대하여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들이 본문에서 말하는 온 천하의 왕들입니다. 저를 예로 들자면 태승철의 몸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관계의 영역이 하나의 나라를 이룹니다. 사탄은 이 관계의 나라 안에서 있음을 느끼게 하는 강력한 권세를 가진 모든 것들을 총집결해서 전쟁을 걸어옵니다. 절대로 하나님의 있음과 하나님의 좋음을 마음에 받아들이지 못하게 막고자 하는 것입니다. 죽을 때 하나님의 있음이라는 존재감과 하나님의 좋음을 소망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도록 있는 힘을 다해서 공격을 해옵니다.
이처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은 하나님이 제일 크신 분이심을 깨닫는 날입니다. 하나님이 유일한 있음이시고, 유일한 좋음이시고, 유일한 주체성이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탄은 내 마음에 아마겟돈 전쟁을 일으킵니다. 아마겟돈 전쟁이 일어나는 장소는 하나님의 유일한 있음과, 유일한 좋음과, 유일한 주체성을 깨달은 사람의 마음임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성경을 바르게 이해할 수 없게 만드는 대표적인 이유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세상을 내려다보실 때 한 사람이 갖고 있는 비중에 대한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엄청난 오해가 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들조차 이러한 오해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나라와 민족이 로마의 식민지로부터 독립하는 것이야말로 예수님이 이루실 위대한 큰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한편 수가성 여인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방인으로 내친 여자였고, 심지어 이방지역 사마리아 사람들도 내친 여자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서 가장 보잘것없어 보이는 한 여인을 붙잡고, 당신이 그리스도임을 전하셨고 수가성 여인은 그 말씀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지쳤던 몸에 생기가 돌면서 기쁨이 충만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장면에서 작은 자를 버리시지 않는 예수님의 사랑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정말로 수가성 여인은 작은 자일까요? 세상 사람들의 시각에서 볼 때는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관점은 달랐습니다. 큰일을 하시고자 한다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다만 무엇이 큰일이냐가 다릅니다. 예수님께는 제도적으로 이스라엘 나라가 로마 제국의 식민지에서 독립하는 일보다 이 세상 사람들에 의해서 내쳐진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여인 하나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일이 더 큰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작은 일에 신경을 쓰셨던 것이 아니라 그 일이 더 크기에 집중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 있어서 제도적이고 정치적인 관점에서 이스라엘이 식민지에서 독립하는 일은 대수로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수가성 여인이라는 한 사람의 몸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관계의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로 바뀌는 일이야말로 중요하고 큰일이었습니다. 우리는 아마겟돈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도 바로 이러한 관점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팔레스타인에 200개 나라의 왕들이 모여서 하나님을 대적할 것이라는 해석은 엄청난 일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애초에 하나님을 대적할 수도 없으며, 그런 것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큰일도 아닙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한 사람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피조물의 세계에서 한 개인이 갖고 있는 비중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모른다면 성경 전체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큰일이라고 하면 우주적인 사건을 떠올리지만 사람의 마음이 우주보다 큽니다. 우주는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 없지만 우리의 마음은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겟돈 전쟁은 분명히 어마어마한 전쟁입니다. 그 이유는 우주보다 더 큰 우리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크심을 깨달았고 하나님의 좋으심을 깨달았음에도 불구하고, 사탄은 그 하나님을 실제로 마음 안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전쟁을 걸어옵니다. 우리의 마음이 우주보다 크기에 이 전쟁 또한 우주에서 일어날 수 있는 전쟁보다도 더 큰 전쟁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우주보다 크기에 우주의 티끌 같은 지구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신경을 써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의 마음 자체보다 더 위대한 일은 지구 위에 없습니다. 그런데 지구 위에서 일어나는 일 때문에 마음을 빼앗긴다면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우주보다 더 큰 마음을 배우자에게 빼앗기고, 자녀에게 빼앗기고, 각종 문제들에 송두리째 빼앗긴다면 개구리 같은 거짓 영이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급한 문제부터 생각해라. 돈 문제가 급하지 않느냐? 자녀 문제가 급하지 않느냐? 건강 문제가 급하지 않느냐?’라는 거짓말로 우리를 속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조차 여기에 다 속아 넘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있음을 믿는다고 하고, 하나님이 유일한 채움이시자 좋음이심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마음을 다른 일에 빼앗깁니다. 거짓 영이 총공세를 펼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아마겟돈 전쟁에서 붉은 용의 진영이 승리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그저 마음을 세상에 빼앗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주님께서는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니 깨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우리는 죽을 때의 마음 상태를 가지고 깨어날 것입니다. 깨어났을 때 마음이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거짓 영에 속은 상태라면 어떨까요? 이론적으로는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마음을 세상에 빼앗겨서 세상을 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재림 때 네 속에는 세상을 담은 그것이 담겨진 것이 아니고, 네가 담았던 세상은 엄연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에는 똥을 담은 상태라는 것입니다. 벌거벗은 상태와 마찬가지이기에 따로 심판을 하지 않더라도 스스로 지옥으로 걸어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방금 태어난 손자의 모습을 마음에 담고 죽었다고 해보겠습니다. 그런데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손자를 실제로 마음에 담을 수는 없습니다. 무엇을 담았나 보니 똥을 담은 것입니다. 아무리 좋아 보이는 것이라도 마음에 담는 순간 배설물과 같습니다. 깨어있지 못하고 거짓 영에 속아서 하나님의 있음보다 더 먼저 있음을 느끼고, 하나님의 좋음보다 더 먼저 좋음을 느껴서 그것들을 소망하다가 언제 올지 모르는 죽음이 온다면, 반드시 부끄럽기 그지없는 모습으로 깨어나게 될 것입니다. 요나가 배 밑으로 도망가서 숨었던 것처럼 너무나 창피하여 스스로 지옥 가장 깊은 곳까지 들어가겠다고 아우성을 치는 상황이 벌어지고 말 것입니다.
한편 17절 이하를 보면 일곱 번째 대접 재앙에 대한 계시가 이어집니다. 17~18절을 보면 “일곱째 천사가 그 대접을 공중에 쏟으매 큰 음성이 성전에서 보좌로부터 나서 이르되 되었다 하시니 / 번개와 음성들과 우렛소리가 있고 또 큰 지진이 있어 얼마나 큰지 사람이 땅에 있어 온 이래로 이같이 큰 지진이 없었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되었다 하시니’라는 말씀에 큰 의미가 있습니다. 이 말씀을 풀어보자면 이제 육체가 죽는 일이 일어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결국 사탄과 바다짐승과 땅짐승의 모든 역사는 육체가 살아있는 동안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들은 우리의 육체가 죽기 직전까지 공격을 이어갑니다.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이 아닌 세상을 담고 죽도록 역사합니다. 그러나 육체가 죽을 때 그 역사도 끝이 납니다. 우리는 내가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알 수 없습니다. 언제 죽든지 세상을 담은 상태에서 죽었다면 사탄의 역사에 진 것입니다. 세상을 담게 되는 이유는 그것이 급하고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탄의 속임수입니다. 속아 넘어간다면 세상일들을 정말로 급하게 해결해야 할 일로 여기게 됩니다. 그렇게 세상을 담고 죽었다면 사탄과 바다짐승과 땅짐승은 축배를 들 것입니다. 본문의 의도는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일곱 번째 대접 재앙은 이렇게 마음에 세상을 담고 죽은 자들에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마음에 하나님을 담은 자들에게 육체의 죽음은 이 세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고의 일입니다. 사람들은 건강과 장수를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조차 마찬가지입니다. ‘김 장로님이 구십 세가 넘으셨는데도 정정하신 걸 보면 참 복을 많이 받으셨다.’라는 말을 쉽게 합니다. 그런데 오래 사는 것이 정말로 복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십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이 계시는 천국이 세상과 비교할 수 없이 좋은 곳이라는 것을 천군 천사는 다 알고 있습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세상은 천국과 비교할 수 없이 열악한 곳입니다. 세상이 열악한 곳임을 아셨기에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자마자 곧바로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마치 줄행랑을 치시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렇다면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천국이 얼마나 좋은 곳인지를 아시면서 이 땅에서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게 하신다면 그것은 복이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천국의 좋음을 아시고 세상의 열악함을 아시면서 나를 건강하게 오래 살도록 이 땅에 남겨두신다면, 사명 때문이거나 하나님께서 미워하시기 때문입니다. 뚜렷한 사명을 깨닫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건강과 장수를 기원하고, 또 그것이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고 있다면 하나님이 지독하게 미워하시는 것입니다.
마음에 하나님을 담은 자가 이 세상에서 육체로 사는 동안 일어날 수 있는 최고의 일은 바로 육체가 죽는 것입니다. 반대로 마음에 하나님을 담지 못한 자에게 육체의 죽음은 하나님을 담을 수 있는 기회에 대한 완전한 상실이자 재앙의 극치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계시록을 살펴보며 계속 회개하라는 요구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일곱 번째 대접 재앙에 이르러서는 회개가 요구되지 않습니다. 이미 회개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19~21절을 보면 육체의 죽음과 연관하여 온갖 재난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육체를 접촉점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육체로 만나는 세상이 천년만년 견고할 것이라 생각하며 삽니다. 그런데 그 견고하게 느꼈던 세상과의 접촉점인 육체가 죽어버립니다. 18~19절을 보면 “번개와 음성들과 우렛소리가 있고 또 큰 지진이 있어 얼마나 큰지 사람이 땅에 있어 온 이래로 이같이 큰 지진이 없었더라 / 큰 성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만국의 성들도 무너지니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바 되어 그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으매”라고 하였습니다. 그냥 지진이 나는 것도 아니라 더 이상 큰 지진은 없다는 의미입니다. 한 마디로 육체의 죽음은 이 세상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견고하게 믿었던 세상의 모든 관계는 육체의 죽음과 함께 모조리 사라집니다. 부부관계도 부모 자녀관계도 육체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나인성 과부가 외아들을 그렇게 사랑했을지라도 육체를 벗고 영으로 만나면 서로 누군지 알아보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살아서도 치매에 걸려서 기억에 장애가 생기면 가족을 알아보지 못하는데, 아예 육체가 죽어서 영으로 만난다면 육체로 맺었던 관계는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마음의 상태입니다. 육체를 입고 있을 때 하나님 대신에 온갖 대상들을 담았다는 사실은 남아있습니다. 마음에 똥만 차 있는 상태임이 드러날 것입니다. ‘되었다 하시니’라는 말씀에는 끝이라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우리는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죽음은 찾아올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더는 기회가 없습니다. 마음에 하나님을 담지 않고, 세상을 담고 살던 사람들에게는 육체의 죽음은 가장 큰 재앙으로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마음에 하나님을 담고 살던 사람들에게 죽음이란, 육체를 입고 사는 동안 일어날 수 있는 최고의 일로 여겨질 것입니다.
앞서 우리는 모세의 노래와 어린 양의 노래와 새 노래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이와 비견될 사탄의 노래가 있다면 ‘개똥밭에 굴러도 저승보다 이승이 낫다. 죽은 사람만 불쌍하다.’라고 할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배설물의 노래이고 사탄의 노래입니다. 의식 속에 이러한 생각이 들어와 있다면 돌이켜야만 하는 난감한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대접 재앙들이 우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을 만큼 오늘도 주님의 십자가로 무장하게 하시고 하나님만으로 의식과 마음을 가득 채울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