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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바벨론 음녀, 성공과 번영의 다른 말>의 줄거리 :
큰 성 바벨론, 음녀 바벨론, 모두 다 세상 적인 성공과 번영의 다른 말입니다. 온 세상이 이 음녀 바벨론이 풍기는 음풍에 만취된 상태입니다.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이라는 엄연한 그리고 절대적으로 우선적인 사실에 대해 실감이 죽어버렸습니다. 바벨론 음녀의 음란한 기운에 취한 자들에게서 나타나는 일이 바로 이 세상 적인 비전과 희망과 꿈에 사로잡힘입니다.
바벨론 음녀, 성공과 번영의 다른 말
(요한계시록 17:1~8)
1. 또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와서 내게 말하여 이르되 이리로 오라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가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
2. 땅의 임금들도 그와 더불어 음행하였고 땅에 사는 자들도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 하고
3. 곧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광야로 가니라 내가 보니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탔는데 그 짐승의 몸에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름들이 가득하고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으며
4. 그 여자는 자주 빛과 붉은 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더라
5. 그의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
앞장에서 일곱 번째 대접 재앙이 내려왔을 때의 모습을 묘사한 19절을 보면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 바 되어 그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으매”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요한은 본문을 통해 앞장 19절에서 언급된 큰 성 바벨론에 관한 상황을, 계시를 받은 대로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이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바벨론은 이 세상적인 성공과 번영의 상태를 일컫는 영적인 표현입니다. 세상적인 성공과 번영을 영적으로 말하자면 바벨론 음녀로 상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벨론 음녀의 상황은 하나님과 친해지고 하나님 부자가 되는 것의 반대입니다. 하나님으로 기뻐하고, 하나님께 쉬지 않고 기도하고,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범사에 감사하는 상태와는 완전 180도 대극점에 서 있는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 2절을 보면 “땅의 임금들도 그와 더불어 음행하였고 땅에 사는 자들도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 하고”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땅의 임금들’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땅의 임금들’이란 모든 시대와 각계각층을 막론하고 열망하는 성공과 번영의 상태에 도달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사업하는 사람에게 성공과 번영이 있고, 연예인들의 성공과 번영이 있으며, 정치인들에게도 성공과 번영이 있습니다. 학자들, 문학가들, 종교인들 또한 마찬가지로 각자의 성공과 번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각계각층에서 성공과 번영을 이룬 사람들을 ‘땅의 임금들’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이미 성공과 번영을 이뤄서 마음이 완전히 취해버린 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땅에 사는 자들’이 언급됩니다. ‘땅에 사는 자들’이란 이 땅에서 이루어질 성공과 번영을 향해 꿈꾸는 자들입니다. ‘땅의 임금들’이 이미 성공과 번영을 이루어 취한 자들이라면, ‘땅에 사는 자들’은 아직 성공과 번영을 이루지 못했으나 꿈과 희망과 비전에 취하여 사는 자들입니다. 소위 말하는 바대로 우리는 꿈과 비전과 희망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을 좋아한다면 바벨론 음녀가 제공하는 포도주에 취한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태는 하나님의 좋음으로 만족하고 있는 상태와는 정반대의 상태입니다.
성경에는 세상에서의 성공과 번영을 바벨론 음녀로 묘사하는 다양한 근거가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4장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중에서 마지막 시험의 내용이 기록된 8~9절을 보면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이란 바로 성공과 번영이자 본문에서 언급된 바벨론 음녀와 같은 표현입니다.
한편 이어지는 10절을 보면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이어집니다. “…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귀는 예수님께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주겠다고 시험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에서 이 세상적인 가치들이 조명을 받게 함으로써, 예수님으로 하여금 이 세상의 좋음을 실감하게 만들려는 시도를 한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은 세상의 좋음을 실감할 때 이 세상에서 성공과 번영을 꿈꾸게 됩니다.
또 성경에는 바벨론 음녀와 음행하는 상태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 묘사하는 내용도 있습니다. 누가복음 16장을 보면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19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라고 하셨습니다. 바벨론 음녀와의 음행은 곧 이 세상에서 호화롭게 즐기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적인 성공과 번영은 호화로움을 제공해 줍니다. 모든 사람들은 호화롭게 즐기기 위하여 세상에서 성공과 번영을 향합니다. 호화롭게 즐기는 자들은 ‘땅의 임금들’로서 이미 성공과 번영을 이루고 취한 자들이며, ‘땅에 사는 자들’은 아직 이루지 못한 성공과 번영을 꿈꾸며 희망과 비전에 취하여 살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적인 성공과 번영으로 보이는 일이 우리에게 일어난다면 우리는 무조건 바벨론 음녀와 음행하는 것일까요? 다시 말해 바벨론 음녀와 음행하지 않기 위해서는 세상적인 성공과 번영을 무조건 내쳐야만 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욥의 경우를 통해 그 대답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욥처럼 세상적으로 성공하고 번영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하나님과 사탄의 주장이 엇갈리면서, 하나님께서는 사탄에게 욥을 시험하도록 허락하십니다.
사탄은 욥에게 세상적인 성공과 번영의 척도가 될 만한 모든 조건을 잃게 합니다. 열 명의 훌륭한 자녀를 잃게 하고, 수많은 재산을 모두 잃게 하고, 건강을 잃게 하고, 사회적인 명예와 친구들을 잃게 했으며, 심지어 아내까지도 욥을 버리게 만듭니다. 그러나 욥은 끝끝내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는 곧 욥이 세상적인 성공과 번영이 환경적으로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그것들에 밀착해 있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물론 욥도 세상적인 성공과 번영을 잃으며 괴로움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궁극적 밀착의 대상은 세상적인 성공과 번영의 내용물이 아닌 하나님 자신이었음이 시험을 통해 드러났던 것입니다.
바벨론 음녀와 음행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단순히 세상적인 척도에서 성공과 번영의 내용물이 되는 것들 자체를 터부시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내가 처한 상황이 세상의 기준에서 볼 때 성공하고 번영하는 모습이 될 수는 있습니다. 문제는 내 마음이 어떠하냐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서 세상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성공과 번영을 성공과 번영으로 여기지 않는다면 그것은 음행이 아닙니다. 그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세상의 가치는 많이 들어올 수도 있으며 없어지기도 할 뿐이지, 세상 가치가 있고 없음이 성공이나 번영의 척도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성공과 번영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시면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진정한 성공과 번영은 십자가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이 세상적인 성공과 번영의 내용물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입니다. 십자가에서 세상적인 성공과 번영의 내용물이 마음에서 완전히 제거된 상태야말로, 진정한 성공이고 하나님 부자가 될 수 있는 진정한 번영의 자리입니다.
따라서 마음에 세상적인 성공과 번영을 붙잡고 있는 사람에게 복음은 없습니다. 십자가 복음은 세상적인 성공과 번영의 내용물이 마음에서 완전히 제거되고 제로(0)인 상태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세상적인 성공과 번영이란 복음의 근본적 의도와는 상치합니다. 그런데 실질적으로 예배당의 상황을 보면 심각합니다. 바벨론 음녀와의 음행이 바로 예배당에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3절에서는 바벨론 음녀가 무엇을 뜻하는지 자세히 묘사되고 있습니다. “곧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광야로 가니라 내가 보니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탔는데 그 짐승의 몸에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름들이 가득하고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으며”라고 하였습니다. 여자가 탄 붉은 빛 짐승에게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다고 했습니다. 바로 바다짐승을 가리킵니다. 이로부터 여자가 바다짐승을 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4절을 보면 “그 여자는 자주 빛과 붉은 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자주 빛과 붉은 빛 옷은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에서 나타났던 것처럼 부유함과 고위층의 신분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금과 보석과 진주는 세상적인 성공과 번영의 척도가 되는 대표적 가치들입니다. 또 금잔에 가증한 물건과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다고 했습니다. 세상에서 호화롭게 즐기는 항목들이 금잔에 든 가증한 음행의 것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호화롭게 즐김이란 마음이 세상의 가치들을 기뻐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것은 무척 심각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호화롭게 즐기는 자들이 아닙니다. 실시간으로 임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가장 즐거워하는 자들입니다. 호화롭게 즐김은 삶의 모든 방면에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삶의 모든 방면에서 내가 행동해야 될 때 혹시 주머니에 돈이 넉넉하다면 그로 인해 마음에서 호화로움을 즐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십자가로 제동을 걸고 그 모든 일과 방면에서 호화로움을 즐기는 대신에, 하나님의 뜻을 묻고 따라야 할 것입니다. 돈이 조금 주어졌다고 해서 호화로움을 즐기고자 한다면 바벨론 음녀가 들고 있는 금잔에 술을 들이붓는 것과 같은 음행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바벨론 음녀가 바다짐승을 타고 있다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은 삼라만상과 더불어 없음의 바다 위에 떠 있도록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없음으로 사라지지 않고 떠 있기 위해서는 영이시고 바람이신 하나님 있음의 존재감과 하나님 좋음을 마음 안으로 욕구하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으로 채워진 튜브가 될 수 있습니다. 이로부터 바다짐승의 간악한 열망이 드러납니다. 바다짐승은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 있음의 존재감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고, 마음이 하나님의 좋음으로 채워지지 못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있음과 하나님의 좋음을 실감하는 일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고자 하는 간악한 열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해로부터 바벨론 큰 음녀가 바다짐승의 열망을 올라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이런 일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라고 하며 크고 작은 소원을 갖습니다. 세상에 대한 바람과 소원과 비전과 꿈과 희망을 갖습니다. 바로 이러한 상태가 바벨론 큰 음녀가 바다짐승을 탄 것과 같은 일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바다짐승을 올라타지 않고는 바벨론 큰 음녀가 뜻하는 대로 이 세상적인 성공과 번영을 바랄 수는 없습니다.
한편 이 짐승의 몸에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름들이 가득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주로서 지금도 사람의 오장육부와 세포의 수까지 주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을 의식하지 않습니다. 마음에서 내 몸보다도 하나님이 더 가까이 계신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 사실을 등지고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세상 것들의 가치를 향해 나갑니다. 이보다 더 심각한 하나님에 대한 모독은 있을 수 없습니다.
내 마음에서 가장 가까운 하나님을 간과하게 하는 대상은 다양할 수 있습니다. 가정에서는 배우자, 자녀, 형제자매, 부모님이 그 대상일 수 있고, 사회에서는 직장의 사장님도 그 대상일 수 있습니다. 내가 그들의 존재감을 먼저 느낌으로써 그 이름들은 모두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름들이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름들이 가득히 쓰여 있는 짐승을 올라탄다는 것은 철저하게 하나님을 모독함을 뜻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이 세상에서 큰 성 바벨론 음녀가 뜻하는 대로 지금과는 다르게 성공하고 번영하는 상태를 희망하고 꿈꾸고 비전으로 포착하고 바랄 수 있게 됩니다. 본문은 바로 이렇게 하나님을 믿는 자가 이 세상을 향하여 소원을 갖는다는 것은 이처럼 엄청난 일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어서 5절을 보면 “그의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이마’란 음녀의 이마입니다. 그런데 왜 그 이름이 비밀이라고 했을까요? 사람들은 세상에 사는 동안에 세상을 향하여 미래를 바라보며 꿈을 갖고, 비전을 품고, 소원을 갖고, 무엇인가를 바라며 살아갑니다. 이러한 희망은 아름다운 덕목으로 찬양됩니다. 하지만 이 세상을 향하여 바라거나 소망한다는 것 자체에 엄청난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세상에 대한 희망이란 결국 하나님 앞에서 벌거벗고 음행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희망처럼 절대적 의로움으로 여겨지는 가치는 달리 없습니다. 사람들은 희망을 소원, 열망, 바람과 같은 다양한 이름으로 부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을 향하여 조금이라도 소원이나 바람을 갖는다는 것은, 지금도 나의 세포 수까지 주관하시며 내 마음에서 가장 가까이 계신 하나님 앞에서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음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벨론 음녀와 더불어 음행하고 있다는 사실은 온 세상 사람들에게 다 감추어져 있는 비밀입니다.
어떤 분이 말씀하기를 아이가 어릴 때부터 대통령이 되겠다는 꿈을 가졌다고 합니다. 이제는 아이가 대학을 다니고 있는데 여전히 그 꿈을 놓지 않고 있음을 보고, 이분은 아이가 큰 꿈을 가진 것을 굉장히 좋아하시며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저 재미 삼아 하신 이야기이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미국의 한 젊은이가 하버드 대학에 들어가 유력한 정치인이 되겠다는 꿈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영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이 젊은이의 마음은 바다짐승에 올라탄 채로 바벨론 음녀의 술에 취해 음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전혀 깨닫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비밀입니다.
천하에 해서는 안 될 가장 더럽고 못 되고 악한 일이 있다면 이 세상에서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살면서 조그만 바람조차 가질 수 없단 말인가?’라는 질문이 생깁니다. 이에 대해 답변을 드리자면 안 됩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을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하셨습니다. 독생자를 주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세상을 사랑하고 계신다는 증거입니다. 세상 속에는 나도 있고 내가 관계 맺고 있는 모든 대상들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고 자발적이시고 창조성이 무한하시며 모든 의도와 계획이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아끼지 않고 주실 정도로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하시는 세상에 대해서, 우리가 우리를 위하여 소원해야 될 일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본래 소원이나 바람이 근본적으로 성립될 수 없는 판 위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을 사랑한다는 것은 전지전능하시고, 무한히 자발적이시고, 무한히 창조적이시고, 무한히 의로우신 하나님이 나를 향해 갖고 계신 사랑에 대한 사족이고, 걸리적거림이며, 훼방이고, 방해일 뿐입니다. 내가 삶에 대해 하나도 소원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소원하고 계십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아끼지 않을 정도로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한 사랑으로 나의 삶을 계획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대한 소원이란 크든 작든 하나님의 사랑을 무시하는 음행입니다. 세상에는 이 사실을 스스로 깨달아 아는 자가 없기에 비밀이라고 한 것입니다.
또한 바벨론 음녀에 대해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음행은 이 세상의 성공과 번영에 대한 소원에서 비롯됩니다. 성공과 번영이란 결국 세상적인 가치들을 많이 모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있음을 실감하고 하나님의 좋음을 열망해야 할 마음으로 세상 가치들의 있음을 실감하고 세상 가치들의 좋음을 열망합니다. 본문은 이러한 음행이 성공과 번영이라는 바벨론 음녀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한편 우리가 읽지 않은 6절을 보면 “또 내가 보매 이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지라 내가 그 여자를 보고 놀랍게 여기고 크게 놀랍게 여기니”라고 하였습니다. 성도들과 예수의 증인들을 같이 봅니다. 큰 성 바벨론 음녀가 진정한 교인들의 피에 취했다는 것은 곧 교인들을 죽였음을 의미합니다.
성경에서 육체를 죽인 살인에 대하여 율법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 22절에서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라가’라 함은 곧 바보라고 욕했다는 것입니다. 내가 마주하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내 앞에 있게 하신 자들입니다. 그런데 내 마음에서 그들이 없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 그들은 쓸데없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살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있기를 바라신 것에 대해 없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바벨론 음녀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했다는 말씀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있음을 실감하며 하나님의 좋음으로 만족하고 기뻐하려는 진정한 교인들을 마음에서 근본적으로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교인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예배당 상황을 생각해 봅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적인 성공과 번영을 원하면서 예배당에 나옵니다. 목사님들조차도 수십억, 수백억, 수천억을 들여서 휘황찬란한 예배당을 짓지 않으면 성공한 목회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수적인 부흥이 없으면 성공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예배당에서는 복음 자체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을 찾기 어렵습니다. 제 주변에 있는 목사님들 중에서도 정말로 진리와 복음 자체에 관심을 갖고 있고, 하나님 자신에게 관심을 갖는 분들을 찾기 어렵습니다. 다들 관심을 두는 것은 어떻게 부흥할 것이냐, 어떻게 성공할 것이냐에 대한 것입니다. 성공의 기준은 결국 예배당의 넉넉한 재정이고 많은 교인 숫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만으로 만족하는 거지 나사로와 같은 성도들을 이미 목사님이 그 마음에서 죽여 버린 것입니다. 그 목사님을 따르는 성도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 마음에서 하나님만으로 만족하는 거지 나사로와 같은 십자가 자리에 머물러 있는 성도들을 죽여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성도의 정체성이 그 마음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습니다.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했다는 말씀에는 이러한 의미가 있습니다.
7~8절에서는 다시 바다짐승에 대한 언급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중에서 8절의 앞부분을 보면 “네가 본 짐승은 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니…”라고 하였습니다. 앞서 13장에서 바다짐승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 3절에서 “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놀랍게 여겨 짐승을 따르고”라고 하였습니다. 이 상황을 8절에서는 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으나 장차 올라올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있게 하신 유일하게 스스로 있는 자라는 사실은 성경을 통해 세상에 계시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있음을 실감하지 못하게 함을 사명으로 삼는 바다짐승에게는 치명적인 공격입니다. 그런데 상하여 죽은 것 같이 되었던 머리가 낫는 일이 벌어집니다. 온 유럽이 기독교인이라는 상황에서 진화론이 탄생하고, 산업 혁명과 더불어 과학이 대두됩니다. 동시에 하나님이 세상을 있게 하셨다는 창조의 사실은 거부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하나님의 있음을 실감하지 못하도록 완전히 바깥으로 밀려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바다짐승이 다시 살아난 모습의 의미입니다.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은 모든 자들은 하나님의 있음을 실감하는 대신에 이 세상 것들의 있음을 실감하는 쪽으로 몰입합니다. 세상의 있음을 실감한다면 이 세상에서 성공과 번영을 바랄 수밖에 없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환경적인 부족함을 느끼며 지금과는 다른 더 나은 환경을 향한 소원을 갖는 것에는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앞에서 바다짐승을 올라타고 성공과 번영을 일컫는 바벨론 음녀와 음행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세상을 향한 소원이 생겨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세상의 모든 가치를 소원함이 죽어버리고,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만을 실감할 때 이 세상을 향하여 소원을 갖게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유일한 소원이 있다면 그것은 하늘에서 이루어진 아버지의 뜻이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세상 것을 가지고 싶거나, 세상 형편이 나아지기를 원하는 소원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한 소원은 없어도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는 말씀처럼, 하나님께서는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세상에 사는 우리의 삶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계십니다. 내가 소원하지 않아도 삶은 오히려 온전해집니다. 내가 신경을 쓰면 쓸수록 망가지는 삶을 중단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방해만 하지 않는다면, 시편 23편 1절의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다윗의 노래는 우리들의 노래가 될 수 있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비밀로 가려져 있는 바다짐승을 올라탄 바벨론 음녀와 음행하는 이 세상 것을 향한 소원은, 십자가에서 죽게 하시고 다시는 우리 마음에 생기지 않게 기적 같은 은혜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