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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2

녹취문: 하나님 없는 박탈감과 열등감의 광기_태승철 (계 17:9~18)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4.02.24|조회수36 목록 댓글 0

 

www.everyday01.com -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하나님 없는 박탈감과 열등감의 광기>의 줄거리 :

온 세상은 박탈감과 열등감의 광기가 들끓는 광란의 도가니입니다. 하나님 없어 생긴 공백을 채우려는 흡인력이 박탈감과 열등감으로 점화될 때 나타나는 일이 바로 이 세상의 성공과 번영을 향한 광란입니다. 이 세상을 향하여 소원과 바람과 열망이 타오르고 있습니까? 일종의 광기입니다. 세상 바람 대신 하나님 없어 생기는 근원적인 박탈감과 열등감을 해소해야 합니다.

 

하나님 없는 박탈감과 열등감의 광기

 

(요한계시록 17:9~18)

 

9. 지혜 있는 뜻이 여기 있으니 그 일곱 머리는 여자가 앉은 일곱 산이요

10. 또 일곱 왕이라 다섯은 망하였고 하나는 있고 다른 하나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으나 이르면 반드시 잠시 동안 머무르리라

11. 전에 있었다가 지금 없어진 짐승은 여덟째 왕이니 일곱 중에 속한 자라 그가 멸망으로 들어가리라

12. 네가 보던 열 뿔은 열 왕이니 아직 나라를 얻지 못하였으나 다만 짐승과 더불어 임금처럼 한동안 권세를 받으리라

13. 그들이 한 뜻을 가지고 자기의 능력과 권세를 짐승에게 주더라

14. 그들이 어린 양과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그들을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도 이기리로다

 

 

지금 이 지구는 하나님 없는 박탈감과 열등감으로 들끓는 광란의 도가니라 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바벨론 음녀에 관한 이야기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바벨론 음녀는 이 세상적인 성공과 번영을 상징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 마음속에 있는 성공과 번영이라는 비전이야말로 바벨론 음녀입니다. 이러한 바벨론 음녀로 상징되는 성공과 번영이, 모든 사람에게 열망의 대상이 된 상태는 박탈감과 열등감의 광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서 제일 가까운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은 마음의 공백을 채우고자 움직일 때 제일 먼저 만나야 할 대상이 하나님이심을 의미합니다. 만약 인간에게 죄와 저주가 없는 상태에서 가장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을 ‘있음’의 대상으로 만날 수 있다면, 그 만남으로부터 내 마음의 문제는 다 해결될 것입니다. 이는 곧 내 마음이 하나님만으로 채워지고 하나님만을 소망하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좋음이 무한하십니다. 계속해서 하나님을 향하는 소망이 활발하게 움직이는 상태에서 몸으로 만나는 세상의 대상들을 관계하게 됩니다. 그렇게 이 세상을 관계한다면 박탈감이나 열등감이나 상실감은 생길 수 없습니다. 반대로 죄와 저주에 빠진 상태에서 마음은 가장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을 등진 상태입니다. 바다짐승은 이러한 죄의 상태를 절대로 돌이킬 수 없도록 굳히고자 합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동창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경차를 타고 왔는데 주차장을 보니 열 대 중에 일곱 대가 외제차입니다. 이 사람의 마음이 제일 가까이 계신 하나님을 먼저 만난 상태라면 어떨까요? 모든 사람에게는 마음의 문제가 있습니다. 비어있음을 채우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먼저 만난 사람이라면 그 비어있음의 문제를 하나님으로 해결한 상태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소망으로 마음의 문제를 해결하면 나 혼자 경차를 탔을지라도 절대로 열등감이 생기지 않습니다.

한편 반대의 경우도 가능합니다. 마음이 가장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을 외면하고 지나쳐 버립니다. 이것이 죄와 저주의 상태에서 나타나는 일입니다. 가장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을 외면하고 지나쳤으면 스스로 ‘큰일났다!’라고 생각하고 돌이킬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태에 대해 사탄은 전혀 큰일이 아니라고 유혹합니다. 사탄은 내게 가장 가까이 계시는 있음이고 좋음이신 하나님께 돌아가는 대신에, 하나님의 반대 방향에 있는 세상의 성공과 번영을 보게 하고 달려가게 합니다. 하나님이 없음으로써 생기는 박탈감을 열등감으로 전환시키는 것입니다.

 

이러한 박탈감과 열등감 그리고 마음의 공백을 채우려는 흡입력이 합쳐지면, 엉뚱한 대상을 빨아들이고자 하는 오작동이 일어납니다. 본래 사람의 마음에 존재하는 흡입력이란 하나님을 받아들이기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박탈감과 열등감에 의해 점화된 잘못된 흡입력은 바벨론 음녀와 음행하게 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바벨론 음녀가 상징하는 것은 세상의 성공과 번영입니다. 세상의 성공과 번영을 향한 소원과 열망을 품는 것은, 박탈감과 열등감에 의한 광란의 몸짓이 나타나는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늘에 있는 천사들이 볼 때 온 세상에는 예수님을 통하여 창조주이시고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있음이 소개되었습니다. 책 좀 읽었다는 스님이라면 기독교 종교인들보다 기독교에 대해서 더 잘 알고 있을 정도입니다.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들조차도 예수님의 아버지가 창조주 하나님이시며, 그 하나님께서 세상을 지으셨다는 이야기는 다 알고 있습니다. 바다짐승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모습이 이와 같습니다. 바다짐승의 과제와 사명과 임무는,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에 대하여 우리의 마음이 영원히 단절되는 것을 꾀함에 있습니다. 바벨론 음녀가 바다짐승을 올라탔다는 의미 또한 이와 관련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세상에서 성공과 번영을 바라는 것은, 하나님이 없으므로 생긴 박탈감과 열등감에 미쳐버린 상태에서 나타나는 증상입니다. 본문에서는 이러한 상태가 어떤 것인지 다양한 측면에서 묘사되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던 3절을 보면 바다짐승을 탄 바벨론 음녀에 대해 묘사하기를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탔는데 그 짐승의 몸에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름들이 가득하고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으며”라고 하였습니다. 한편 이와 관련하여 본문 9~10절을 보면 이에 대한 묘사가 이어지는데 “지혜 있는 뜻이 여기 있으니 그 일곱 머리는 여자가 앉은 일곱 산이요 / 또 일곱 왕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일곱 산과 일곱 왕이 언급되는데 산은 높고 견고한 것이며, 왕도 산과 마찬가지로 봉우리와 같은 존재입니다. 따라서 바다짐승의 일곱 머리가 산이고 왕인데 바벨론 음녀가 이것을 올라탔다는 것은 마음에서 성공과 번영을 붙잡고 소원하다가 실제로 그것을 이루었음을 의미합니다.

한편 여기서 난해한 표현이 하나 등장합니다. 다시 10절을 보면 “또 일곱 왕이라 다섯은 망하였고 하나는 있고 다른 하나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으나 이르면 반드시 잠시 동안 머무르리라”라고 하였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흔히 알려진 잘못된 해석은 일곱 왕이 로마의 황제들을 가리킨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섯이 망했다는 것은 사도 요한이 계시를 받는 시점을 기준으로 죽은 다섯 황제를 의미하고, 살아있는 하나는 사도 요한 당시의 황제이며,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다는 것은 앞으로 와서 기독교를 박해할 자들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해석한다면 본문의 말씀은 우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기껏해야 로마 시대에 있었던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말씀드렸듯이 계시록의 말씀은 이천 년 전이나 중세 때나 지금이나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는 말씀입니다. 다섯이 망했다는 것은 세상의 성공과 번영이 산처럼 견고하고 왕처럼 권세가 하늘을 찌를지라도, 결국은 과거로 묻힐 것이고 멸망해 버릴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하나는 지금 있다는 것은 다섯이 멸망해 없어졌음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당대의 사람들은 모두 성공과 번영을 원한다는 뜻이고, 아직 이르지 않았으나 미래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성공과 번영을 계속해서 원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 없는 박탈감과 열등감이 세상의 성공과 번영을 향하는 것으로 해소하고자 광란의 몸짓을 해댑니다. 이것은 미래에도 마찬가지로 일어날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중에서 성공과 번영을 이룬 자들이 있을 때 반드시 잠시 동안 머문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 모세, 다윗, 예수님의 열두 제자, 스데반 집사, 사도 바울,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이제는 모두 죽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육체가 죽었다는 것 때문에 없어지거나 손실되거나 상실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들의 영은 고스란히 살아서 아버지 품에 잠들어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의 성공과 번영은 어떨까요? 이것들은 당대에는 산처럼 견고하게 보이고, 왕처럼 권세가 하늘을 찌를 듯이 보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의식 속에서 과거에 묻혀버리고 없어져 버린 자들의 성공과 번영에 대한 이야기가 다섯이라면, 지금 성공과 번영을 이룬 자들에 대한 이야기는 하나이고, 앞으로 성공과 번영을 이룰 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5:1:1의 비율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성공을 이야기하는 셈입니다. 여기서 다섯이라는 절대다수를 점하고 있는 성공과 번영은 이미 멸망 속으로 들어간 것들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지금 광기에 사로잡혀 성공과 번영을 추구하기를 멈추지 않습니다.

성공과 번영은 거창해 보입니다. 이러한 성공과 번영에 대한 추구는 물론이거니와 이 세상을 향해 티끌만 한 소원이라도 생긴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생기는 열등감과 박탈감의 표현입니다. 내 마음에서 가장 가까이 계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마음의 채움을 위하여 흡입력을 발동하고 움직이기 시작할 때, 하나님의 있음을 느낀다면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떠나지 못하고 머물 것입니다. 하나님을 흡입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흡입하는 상태에서 세상을 만나면 절대로 이 세상에 대해서는 소원이 생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죄와 저주의 체질 때문에 하나님을 우회해서 세상을 만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사탄은 이 상태에 대하여 반성과 돌이킴을 불가능하게 하고자 개입합니다. 심지어 사탄은 예수님도 유혹하고자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실 때 천하만국과 영광을 보이며 자기에게 절할 것을 제시하였습니다. 꼭 천하만국과 영광이대단한 가치는 아닐지라도, 사탄은 지금보다 더 나은 미래를 제시하고 향하게 합니다. 따라서 거창하지는 않을지라도 지금보다 조금만 더 나은 미래를 향하려는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이미 바다짐승의 꾐에 넘어가서 바벨론 음녀와 음행하는 상태입니다. 그 결과 티끌만 한 것일지라도 이 세상에 대한 소원이 생겨납니다.

세상에 대한 소원이 생길 때면 우리는 얼른 마음에 하나님이 없음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로부터 생긴 박탈감과 열등감이 세상을 향한 바람으로 표현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지금 박탈감과 열등감의 광기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라는 것을 자각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광란의 몸짓을 하고 있는 나는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소원하지 않아도 이 세상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랑과 소원으로 얼마든지 충분합니다. 그 하나님을 향할 때 하나님의 사랑과 소원은 내게 나타나고 알려지면서 그대로 말하고 행동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이 세상 것을 향한다는 것은 광기 어린 박탈감과 열등감에 의한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박탈감과 열등감이 생기는 근원적인 이유는 마음에 하나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박탈감과 열등감에 사로잡혀서 세상 것을 원한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바다짐승의 역할입니다. 바다짐승은 사람들에게 왜 지금 세상 것을 추구하고자 하는지, 왜 세상 것에 목말라 하는지, 왜 세상의 성공과 번영을 이루고 싶어 하는지를 모르게 만듭니다. 마음에 하나님이 없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가려버리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 9절을 보면 “지혜 있는 뜻이 여기 있으니…”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앞으로 있을 이야기들의 뜻을 알기 위해서는 지혜가 반드시 필요하고, 지혜가 있어야만 여기서 이야기되는 일들의 뜻을 알 수 있다는 의미의 말씀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염두에 두고 11절을 보면 내용이 무척 복잡합니다. “전에 있었다가 지금 없어진 짐승은 여덟째 왕이니 일곱 중에 속한 자라 그가 멸망으로 들어가리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짐승은 바다짐승입니다. 앞서 본 13장 3절을 보면 “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놀랍게 여겨 짐승을 따르고”라고 하였습니다. 이 바다짐승이 전에 있었다가 없어진 이유는 하나님의 있음이 만천하에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상하여 죽게 된 것 같았지만 상처가 낫습니다. 이는 곧 바다짐승은 하나님 있음이 계시됨으로 인해 죽은 것같이 되었다가, 온 세상이 하나님 있음을 계시 받고서도 뭉개버렸기에 다시 살아난 상황이 되었음을 가리킵니다. 진화론을 비롯한 온갖 과학이론들이 등장하며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세상은 유일하게 있음이신 분에 의해 있게 된 것이라는 사실이 뭉개지게 된 것입니다. 이로 인해 바다짐승이 다시 살아나 득세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바다짐승을 ‘여덟째 왕’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희한하게도 ‘일곱 중에 속한 자’라는 묘사가 이어집니다. 이것을 분명하게 이해하기 위해 본문에 제시되고 있는 상황을 다시 정리해 봅니다. 바다짐승은 일곱 머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일곱 머리는 일곱 왕입니다. 일곱 왕들은 번영과 성공을 이룬 자들입니다. 그리고 바다짐승 위에 바벨론 음녀가 앉아있습니다.

바다짐승의 일곱 머리가 일곱 왕이기에 바다짐승이 여덟째 왕이라는 표현은 참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여덟째 왕이면서 일곱 왕에게 속했다고 합니다. 일곱 머리의 왕이 바다짐승의 일곱 머리인데 따로 여덟째 왕이라니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주석을 보면 거의 해석을 포기한 것 같은 분위기를 느끼게 합니다. 우리의 논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붙잡고 해석하는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그렇게 해석하면 의외로 단순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덟째 왕이면서 일곱 중에 속했다는 것은, 일곱 머리의 왕과 같은 면이 있고, 또 다른 면도 있다는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다짐승은 큰 음녀 바벨론이 앉아있는 일곱 머리 왕과 같은 면이 있기에 일곱 중에 속했다고 할 수 있으나, 다른 면도 있기에 여덟째 왕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크게 어렵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같은 면은 무엇이고 다른 면은 무엇일까요?

일곱 머리는 큰 음녀 바벨론이 올라타고 앉아있는 일곱 왕들입니다. 일곱 왕은 세상에서 성공과 번영을 이룬 자들입니다. 이렇게 성공과 번영을 이룬 자들은 옛날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고 앞으로도 있을 것입니다. 이들의 속성이 10절에서 언급되었습니다. “또 일곱 왕이라 다섯은 망하였고 하나는 있고 다른 하나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으나 이르면 반드시 잠시 동안 머무르리라”라고 하였습니다. 다섯으로 이야기되는 절대다수는 과거에 묻혀버립니다. 우리가 성공한 사람에 대해 일곱 번을 이야기한다고 치면 그 중 다섯 번 정도는 과거에 대한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활동 중인 성공과 번영한 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있고, 앞으로 성공하고 번영할 자들에 대한 이야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활동 중인 자들이나 앞으로 있을 자들이나 잠시 동안 있다가 없어지리라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시대에 똑같이 5:1:1의 비율로 성공과 번영에 대한 이야기는 계속되리라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여덟째 왕이란 바다짐승이 성공과 번영을 추구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면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곧바로 하나님의 있음을 표적으로 삼아 정면 돌파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있음을 정면에서 비난합니다. 성공과 번영의 추구는 하나님을 가리기 위한 방법이었습니다. 일곱 머리 왕들로 표현되는 상황은 ‘성공과 번영을 향해 달려가자!’라고 외치는 것이라면, 여덟째 왕으로 표현되는 상황은 ‘하나님이 있기는 어디에 있느냐!’라고 공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있음을 가리려는 의도는 같기에 일곱 머리 왕에게 속해있으나, 같은 의도를 표현하는 방식이 다르기에 여덟째 왕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일곱 머리 왕으로 표현된 상황이 세상의 성공과 번영을 실감함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면, 여덟째 왕으로 표현된 상황은 하나님이 없다는 주장을 정면에서 주장하고 관철해 나가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12절을 보면 열 뿔에 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네가 보던 열 뿔은 열 왕이니 아직 나라를 얻지 못하였으나 다만 짐승과 더불어 임금처럼 한동안 권세를 받으리라”라고 하였습니다. 일곱 머리가 일곱 왕이라고 했는데, 또 열 뿔이 열 왕이라는 표현이 무척 혼란스럽습니다. 바다짐승의 일곱 머리 왕이 세상의 성공과 번영을 이룬 자들을 의미하는 속성을 갖고 있다면, 열 왕은 아직 나라를 얻지 못한 왕이라고 했습니다. 바다짐승이 여덟째 왕이라는 것은, 아직 나라를 이루지 못한 열 왕과 함께 할 수 있는 부분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나라를 이루지 못한 열 왕은 성공과 번영을 희망하는 모든 자들을 상징합니다. 이들을 왕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성공과 번영에 대한 희망이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강력하기 때문입니다. 가장 강력함이라는 요소가 왕으로 상징된 것입니다. 열 뿔의 왕은 성공과 번영을 희망만 하는 사람들입니다. 바다짐승은 이러한 사람들도 품어줍니다. 쉽게 말해 ‘너희는 아직 성공과 번영을 이루지 못했다. 그렇지만 괜찮다.’라고 꾀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이미 성공과 번영을 이룬 일곱 머리 왕과는 차별화되는 여덟째 왕의 모습입니다. 결국 일곱 머리 왕과 같은 속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있음을 제거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습니다. 한편 바다짐승의 또 다른 면이 있다면 하나님의 있음을 정면으로 공격하면서, 아직 성공과 번영을 이루지 못한 자들을 품는다는 것입니다.

 

한편 우리가 읽지 않은 15절 이하를 보면 바다짐승과 열 뿔이 음녀를 미워해서 망하게 하고 벌거벗게 하여 그 살을 먹고 불로 사른다는 끔찍한 묘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상의 성공과 번영을 상징하는 바벨론 음녀가 바다짐승을 타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바다짐승과 열 뿔이 바벨론 음녀를 미워해서 망하게 한다는 것일까요? 환장할 노릇입니다.

세상의 성공과 번영을 희망하는 것은, 하나님이 없음으로써 생긴 박탈감과 열등감의 광기 어린 몸짓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열 뿔은 왕처럼 세상의 성공과 번영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여전히 그것을 열망하는 사람들입니다. 성공과 희망이 그들의 마음에서 권세를 부리는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제2의 열등감이 생겨납니다. 성공과 번영을 계속해서 희망하다 지친 자들이 생깁니다. 바다짐승은 이들로 하여금 지쳐버리는 것을 다른 방향으로 고무시키고 다시 살려내기 위해서, 눈에 보이는 성공과 번영한 자들에 대하여 박탈감과 열등감을 느끼게 합니다. 마치 ‘못 먹는 감 찔러나 본다.’라는 속담이 있듯이 이미 성공하고 번영을 이룬 자들에게 열등감을 느끼며 공격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공산주의입니다. 성공과 번영을 이룬 자들도 악하기 그지없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성공과 번영을 소망하고 희망하다가 지쳐서, 이미 이룬 자들을 증오하고 미워하는 자들도 악하기 그지없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모든 시대에 항상 존재합니다. 이들의 삶의 방식은 미래를 향하지 않습니다. 지금 육체를 갖고 있는 상태에서 느끼는 기쁨과 쾌감에 마음과 뜻과 힘을 다 쏟아붓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맛집에 열광하고, 눈으로 보는 영상에 열광하고, 게임에 열광하며 지금이 즐겁기를 바랍니다. 미래의 성공과 번영을 위해서는 많은 수고와 노력과 근면과 절제와 성실이 요구되는 것을 압니다. 물론 이것도 전부 박탈감과 열등감에 미친 상태에서 나오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박탈감과 열등감에 미치는 것조차 할 수 없다고 여겨서, 아예 미래를 잘라버리고 지금에 머물고자 합니다. 지금 하늘을 향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육체가 느낄 수 있는 기쁨과 만족에 마음과 뜻과 힘을 기울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14절을 보면 “그들이 어린 양과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그들을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도 이기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열 뿔 다음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을 향하여 소원을 갖거나 이 세상에서 기쁨과 만족을 찾으려고 하는 것은 어린 양 십자가에 정면충돌하는 것입니다. 그 대상이 무엇이 되었든지 이 세상을 향한 바람이나 소원 혹은 열망이, 십자가 복음과 정면충돌을 일으키는 이유는 십자가는 세상에 대한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대한 소원과 열망이 죽어야 하나님을 향한 소원과 열망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세상의 가치가 아무것도 없는 자리입니다. 그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 세상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소원하지 않겠다는 고백입니다. 열 뿔로 상징되는 미래를 향한 희망은 십자가를 믿는 사람들과는 완전히 대극점에 서 있습니다. 섞일 수 없고, 타협할 수 없고, 어울릴 수 없는 이질적인 그룹이고 존재와 속성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 속에 여전히 세상을 향한 바람이 있다고 할지라도 이 사실은 알아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서 죽었다면 세상에 대한 소원은 생길 수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배당 안에서는 이 세상을 향한 강렬한 소원과 열망이 표현되고 있습니다. 예배당마다 하나님이 없어서 생긴 박탈감과 열등감에 의한 광란의 도가니가 되고 말았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세상에 대해 죽었기에 세상에 대한 바람이 나타날 수 없습니다. 세상에는 오직 하나님의 바람과 소원만 있으면 됩니다. 바람은 우리의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박탈감과 열등감에 미쳐 돌아가서 세상에서의 성공을 바랍니다. 그러다가 세상에서 성공과 번영조차 이루기 버겁고 힘들어지면, 성공과 번영 따위를 위해 지금을 숨죽이고 살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지금 몸으로 느낄 수 있는 모든 기쁨에 총력을 기울이고자 합니다. 그리고 성공과 번영을 이룬 자들을 향한 공격의 화살을 퍼붓게 됩니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빈부의 갈등입니다.

그러나 이룬 자들도 악하고 이룬 자들을 공격하는 자들도 악한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이룬 자들을 공격하게 되는 것은 사탄의 수하인 바다짐승이 제2의 열등감을 만들어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이 없어서 생기는 근원적인 박탈감과 열등감에 빠져 있습니다. 그래서 성공과 번영을 추구하지만 이것은 광기입니다. 이러한 열등감에 미쳐버린 상태에서 도저히 성공과 번영을 이룰 수도 없다고 여겨지면 제2의 열등감이 등장합니다. ‘될 대로 되라’는 케세라세라 식으로 육체의 기쁨에 전념하면서, 성공과 번영을 이루는 자들을 저주하고 증오하는 마음을 갖고 세상을 살게 됩니다.

 

한 마디로 이 세상은 근원적 열등감에 사로잡혔든지 제2의 열등감에 사로잡혔든지 열등감에 미쳐버린 광란의 도가니가 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이 가운데서 우리는 어린 양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음으로써 영원히 소멸하지 않는, 참된 성공과 번영을 지금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 이루어내는 자들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없어 마음속에 생기는 박탈감과 열등감의 광기로부터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온전히 빠져나온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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