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요한계시록-2

녹취문: 어린 양과 완전한 결합이 목표였다_태승철 (계 19:1~10)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4.02.29|조회수62 목록 댓글 0

 

www.everyday01.com -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어린 양과 완전한 결합이 목표였다>의 줄거리 :

어린 양이 하나님의 오른손에 들린 두루마리의 일곱 인을 떼시면서 시작된 삼대 칠중 재앙의 역사가 끝이 났습니다. 그런데 그 끝에 일어나는 일이 어린 양과의 결혼입니다. 그러니까 이 모든 엄청난 역사가 바로 한 사람의 성도가 어린 양 예수님과의 완전한 결합을 이루는 데까지 도달하는 과정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린 양에 의해서 어린 양을 중심으로 시작한 역사는 어린 양과 함께 연합함으로 마무리가 됩니다.

 

어린 양과 완전한 결합이 목표였다

 

(요한계시록 19:1~10)

 

1. 이 일 후에 내가 들으니 하늘에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 같은 것이 있어 이르되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

2.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 피를 그 음녀의 손에 갚으셨도다 하고

3. 두 번째로 할렐루야 하니 그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더라

4. 또 이십사 장로와 네 생물이 엎드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경배하여 이르되 아멘 할렐루야 하니

5. 보좌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시되 하나님의 종들 곧 그를 경외하는 너희들아 작은 자나 큰 자나 다 우리 하나님께 찬송하라 하더라

6.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과도 같고 많은 물소리와도 같고 큰 우렛소리와도 같은 소리로 이르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7.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8.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본문에서는 소위 삼대 칠중 재앙의 역사가 끝이 난 뒤의 모습이 계시됩니다. 일곱 인의 역사는 어린 양이 하나님의 오른손에 들려있던 두루마리의 인을 떼시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일곱 번째 인 안에 나팔 재앙이 들어있었고, 일곱 번째 나팔 재앙 안에는 일곱 대접 재앙이 들어있었습니다. 이처럼 어린 양에 의해서 시작되었고 어린 양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던 삼대 칠중 재앙의 역사는 어린 양과 함께 결혼함으로써 끝이 납니다.

이제 우리는 이 역사의 성격을 규정할 수 있습니다. 어린 양이 인을 떼시며 역사는 시작되었습니다. 그 역사는 어린 양을 중심으로 진행됩니다. 그리고 곳곳에서 어린 양의 피로 승리한 성도들의 모습이 계시되었습니다. 이처럼 계시록은 어린 양을 빼면 아무것도 제대로 해석할 수 없습니다. 어린 양에 의해서 시작되고, 어린 양을 중심으로 진행된 역사의 마지막이 어린 양과의 결혼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이 엄청난 계시를 통해 밝혀진 역사가 결국 어린 양과의 완전한 결합을 위한 결혼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계시록 후반부에는 바벨론 음녀가 등장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부분이 바벨론 음녀에 관한 내용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중요하게 다루어진 이유는 예수님과의 완전한 결합을 이루지 못하게 하는, 가장 최종적이며 강력한 방해꾼이 바벨론 음녀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바벨론 음녀를 퇴치하고 드디어 어린 양과의 결혼은 이루어집니다. 계시록은 사도 요한이 알고 있던 언어를 통해 표현된 계시입니다. 따라서 사도 요한이 알고 있던 언어 속에서 결혼이란 유대의 결혼 풍습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유대의 결혼 풍습과 관련하여 마리아가 요셉과의 정혼 기간 중에 예수님을 잉태하였던 것을 떠올려 봅니다. 이스라엘의 정혼이 우리나라의 약혼과 다른 점은 아직 함께 살지는 않지만, 법적으로는 완전한 부부로 통한다는 점입니다. 일정한 정혼 기간을 거친 후에 신랑은 신부의 집에 가서 결혼 잔치를 엽니다. 그리고 잔치가 끝난 후에는 신부를 집에 데리고 와서 살게 됩니다. 어린 양이 인을 떼시면서 시작된 삼대 칠중 재앙의 긴 역사는, 바로 영적인 정혼 기간에 일어나는 사건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계시록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어린 양을 우리의 초점의 대상으로 보면 명확해집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계시록을 오해합니다. 역사 속에서 언제 있을지 모르는 예수님의 재림 직전에 지구 전체적으로 일어나게 될 재앙으로 받아들입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의 취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 뿐만 아니라, 허다한 사람들을 향하고 있는 계시록의 의미를 없애는 것입니다. 아직까지 재림이 일어나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 보자면, 이러한 해석은 이전에 죽은 사람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책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어린 양을 초점의 대상으로 놓고 계시록을 본다면 해석은 명확합니다. 어린 양이 인을 떼시며 계시록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중간중간 ‘어린 양과 함께 이긴다, 어린 양의 피로 이긴다, 죽임당한 어린 양’이라는 이야기가 반복됩니다. 어린 양을 빼면 아무것도 없는 셈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큰 성 바벨론 음녀가 퇴치당하고 멸망함과 함께 어린 양과의 결혼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이렇게 보면 계시록의 내용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명확합니다.

 

이렇게 말씀드리자면 ‘결국 나 한 사람이 어린 양 예수님과 함께 온전한 연합을 이루기까지의 역사를 말한다면 계시록은 너무 시시한 책이 아닌가?’라고 물으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아직 복음적 세계관을 갖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반복해서 말씀드렸듯이 한 사람은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과 일대일로 관계할 수 있는 인격체입니다. 그냥 관계하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을 마음의 공백 안으로 모셔 들일 수 있는 존재입니다.

예를 들어 백만 명이 모여서 집회를 한다면 대단하게 여겨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자체로는 전혀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그 집회로 하나님이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집회에서 하나님을 받아들였다면 개별 인간이 하나님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집회 준비나 집회에 참여하는 옆 사람들과의 관계 같은 부수적인 요소들이 크면 클수록 집회를 통해서 한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이 얼마나 들어가실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이후에 처음으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났던 사건 또한 집회가 아닌 다락방에서 기도할 때였습니다. 사도행전 2장 3절을 보면 성령이 임하시는 모습을 묘사하기를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라고 하였습니다.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했다는 묘사가 중요합니다. 한 사람은 나라이자 세계이자 우주입니다. 그 한 사람이 이 땅에서 육체로 살고 있는 동안에 수없이 많은 관계를 맺고, 그 관계는 연쇄적으로 이어져 나갑니다. 그 범위만 해도 어마어마할 것입니다. 그 한 사람이 우주의 창조자이신 하나님과 일대일로 개별적 관계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절대로 시시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주를 지으신 하나님과 개인적으로 일대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한 사람은 나라이고 세계이고 우주입니다. 나 한 사람 안에서 하나님이 유일한 있음이시고, 유일한 좋음이시고, 세상을 향한 유일한 주체성으로 실감하는 일은 한 마디로 나라가 개벽하는 것이며, 세계가 개벽하는 것이며, 우주가 개벽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그보다 큰 가치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이 육체로 만나는 어떤 대상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주체성을 더 강하게 실감하게 되었다는 사실보다 중차대한 일은 이 세상에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평생 동안 아무리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도, 여러분 한 사람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나 한 사람이 그렇게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과 관계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관계할 수 있기 위해서는 예수님과 완전한 결합이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본문 7~8절을 보면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과 결합하게 될 신부를 위해 준비된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은 앞서 흰 옷으로 강조되었던 것과 동일한 의미입니다. 이 세마포 옷을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이 세계의 종말을 다룬다고 생각하는 상식의 오류 속에서 이해하자면 이 부분은 필요 없는 내용입니다. 이미 세상이 끝났는데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 필요할 이유가 없습니다. 세마포 옷을 입는다는 것은 어린 양 예수님과 완전히 결합한 상태에서 나오는 행실이 기대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를 염두에 두자면 기존에 우리가 가졌던 요한계시록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바벨론 음녀의 등장을 통하여 최종적인 단계를 지났습니다. 이것은 마치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사탄에게 마지막 시험을 당하실 때, 사탄은 천하만국과 영광을 예수님께 보입니다. 이것이 바벨론 음녀가 의미하는 바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그러한 시험을 받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천하만국과 영광이라는 마지막 시험을 통과한 후에 실질적으로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우리의 행실이 예수님처럼 오직 실시간으로 하나님과 연결된 상태에서 나오는 행실이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과 완전한 결합을 이루어야만 합니다. 그 결합을 이루기 위해서 마지막 단계로 통과하는 것이 바벨론 음녀의 퇴치입니다. 예수님께서 천하만국과 영광이라는 사탄의 마지막 시험을 이기셨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과의 완전한 결합이란 결국 십자가에서 이 세상에 대해 완전히 죽는 것이고,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에 대하여 완전히 사는 것입니다. 바벨론 음녀가 상징하는 바는 이 세상을 향한 성공과 번영의 바람과 열망이었습니다. 성공과 번영이라고 거창하게 말하지 않아도, 지금보다 더 나은 향상과 개선과 발전과 성취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바벨론 음녀의 음기에 사로잡힌 상태입니다. 그러한 상태에서는 십자가에서 죽임당한 어린 양과 결합할 수 없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예수님이라고 하지 않고 어린 양으로 표현합니다. 이 어린 양은 구약 시대 성전에서 날마다 상번제로 드려지던 죽임당한 어린 양입니다. 다시 말해 어린 양은 곧 십자가에서 죽임당한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어린 양과의 결혼인 완전한 연합이란, 어린 양의 피로 이긴다는 말씀이 의미하는 대로, 십자가 죽음을 통하여 이 세상을 향해 오늘보다 더 나은 향상과 개선과 발전과 성취를 바라는 내가 죽고 또 죽는 기간이 통과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이나 사도 베드로나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세상에 대해 완전히 죽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십자가의 취지가 완전히 받아들여진 상태입니다.

십자가는 세상에 대한 죽음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죽는 자가,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향하여 향상과 개선과 발전과 성취를 원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있는 한 어린 양 예수님과의 온전한 결혼은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온전한 결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그 사람의 행실이 여전히 바벨론 음녀의 음기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십자가조차도 이 세상에서의 향상과 개선과 발전과 성취를 위한 하나의 도구로 생각하기에, 어린 양과의 온전한 결합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1절을 보면 “이 일 후에 내가 들으니 하늘에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 같은 것이 있어 이르되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이 일 후에’란 바벨론 음녀가 멸망한 뒤를 의미합니다. 이 의미가 굉장히 큽니다. 십자가 생활화의 마지막 단계는 이 세상을 향한 나의 소원이 완전히 죽는 것입니다. 어차피 이 세상에서 일어날 향상과 개선과 발전과 성취 같은 것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향상도 아니고 개선도 아니고 발전도 아니며 성취도 아닙니다. 그저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과정일 뿐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완전히 죽는다고 해서 삶이 버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한 나라이고, 한 세계이고, 한 우주인 나 한 사람의 세계 속에서 당신의 주권을 중단시키거나 휴업하시는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바랄 필요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우리 마음이 바벨론 음녀의 음기에 정복될 때 나타나는 일은 성공과 번영의 추구입니다. 이것은 향상과 개선과 발전과 성취를 바람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사치와 호화로움으로 이어집니다. 별의별 대단한 말로 꾸미고 가릴지라도 바벨론 음녀의 음기에 정복된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세상에서 사치하고 싶은 것이고 호화롭게 사는 것으로 귀결됩니다.

앞서 살펴보았던 18장 13절에서는 바벨론 음녀의 음기에 사로잡혀서 추구하게 되는 사치 품목들이 언급됩니다. “계피와 향료와 향과 향유와 유향과 포도주와 감람유와 고운 밀가루와 밀이요 소와 양과 말과 수레와 종들과 사람의 영혼들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종들과 사람의 영혼들이’ 언급됩니다. 이것은 쉽게 말해 세상적인 인기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 주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내게로 끌려오기를 바랍니다. 바벨론 음녀의 음기에 사로잡혔을 때 마지막으로 바라는 것이 인기라는 것입니다.

가톨릭에서는 성탄절에 바티칸 성당 발코니에 교황이 나타납니다. 그러면 광장에 모여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교황을 보며 열광합니다. 이 상황이 바로 사람의 영혼들로 사치하고 있는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마치 BTS 콘서트의 표가 몇 초 만에 매진되어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연예인들은 이러한 인기를 꿈꾸며 달려가는 자들입니다. 연예인뿐만이 아닙니다. 목사님도 정치인도 이러한 인기를 꿈꾸며 달려갑니다. 그렇기에 수적인 부흥을 원하는 목사님은 절대로 어린 양과의 완전한 결합을 이룰 수 없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삼대 칠중 재앙의 역사가 진행됨으로써만 어린 양과의 완전한 결합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수적인 부흥을 원하는 목사님들은 이것을 참 쉽게도 이야기합니다. 예수님 믿었으니까 다 예수님의 신부가 된 것이라고 이야기해 버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은 정혼한 신부가 되었을 뿐입니다. 정혼했다면 결혼까지 가야만 합니다. 정혼이 깨진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마리아가 정혼 기간에 예수님을 잉태하였을 때, 요셉이 결혼을 조용히 깨뜨리려고 했던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정혼 기간은 결혼이 깨질 수 있는 기간입니다. 그렇다면 삼대 칠중 재앙의 역사를 거쳐 바벨론 음녀의 음기를 완전히 퇴치하고, 세마포 옷을 입고 어린 양 예수님과 함께 결혼하는 자가 얼마나 될까요?

 

1~3절을 보면 “…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 /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 피를 그 음녀의 손에 갚으셨도다 하고 / 두 번째로 할렐루야 하니 그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더라”라고 하였습니다. 바벨론 음녀를 완전히 퇴치한 상태에서 나오는 노래입니다. 바벨론 음녀가 심판을 받아 멸망해서 타 죽는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간다는 것은, 이러한 일이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모든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이자 성도인 사람들에게서 나타날 일임을 의미합니다. 개별적 나라인 성도의 마음 안에서 바벨론 음녀가 타 죽는 연기가 계속해서 하늘로 올라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벨론 음녀가 타 죽는 것과, 하나님의 구원과 영광과 능력을 찬양하는 모습이 맞물려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노래의 가사는 마치 주기도문에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라는 부분과 비슷하게 느껴집니다. 으레 하는 말이나 찬송가의 가사처럼 이해하고 넘어갑니다만 여기에는 중요한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은 어린 양과 함께 완전한 결합을 이루게 되는 상태를 전제로 합니다. 어린 양과 함께 완전한 결합을 이룰 때 하나님의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흔히 구원은 죄로부터의 탈출이라고 이해합니다. 그런데 죄로부터의 탈출은 교리입니다. 그 교리가 실제로 이루어지는 구원이란, 우리 마음이 세상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어서 바벨론 음녀에 대한 심판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바벨론 음녀는 곧 세상을 향한 성공과 번영에 대한 추구이고, 사치와 호화로움에 대한 동경심입니다. 이것이 뿌리째 뽑히지 않는다면 구원이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구원이란 마음이 세상을 완전히 탈출하는 것이며,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완전히 죽는 것이며,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향해 가는 것이고, 하나님과 함께 머무는 것입니다.

구원이 하나님께 있는 것처럼 영광도 하나님께만 있다고 했습니다. 영광이란 우리의 마음에서 무엇인가가 일등으로 환하게 보이는 현상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에서 무엇인가가 환하게 보이는 상태입니다. 그 영광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은, 하나님만이 우리 마음에서 일등으로 환하게 보여야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린 양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완전히 죽지 않으면 하나님을 환하게 볼 수 없습니다. 그 대신에 돈이 환하게 보입니다. 배우자나 자녀나 부모가 환하게 보입니다. 성공과 번영이 환하게 보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상태가 아닙니다. 영광은 오직 하나님만이 환하게 보이는 상태입니다. 우리 마음이 이 세상을 떠나는 구원의 역사가 하나님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능력하면 우선 출애굽의 기적을 생각해야 합니다. 열 가지 재앙, 홍해를 가르심, 광야 사십 년을 이백오십만 명이 먹고 살 수 있었던 것이 대표적입니다. 이것이 기적과 이적과 표징으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를 지닐까요? 홍해 도하 사건과 같은 하나님의 능력은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주체성을 실감함으로 내게서 나타납니다. 눈으로 보는 어떤 대상보다도 더 강하게 하나님이 유일한 있음이심을 실감합니다. 하나님이 유일한 좋음이심을 실감합니다. 하나님이 살아서 세상을 다스리고 계신다는 주체성이심을 실감합니다. 대통령 앞에서도, 직장 상사 앞에서도, 아내와 자녀 앞에서도, 그들의 존재감보다도 하나님의 주권이 꿈틀거리며 움직이심을 실감하게 됩니다. 이것이 능력입니다. 이 능력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원과 영광과 능력은 어린 양의 십자가 사건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어린 양의 십자가 사건 안에 지금도 완전히 충전되어 있고, 집약되어 있고, 농축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그 십자가를 붙잡을 때 하나님의 구원이 내게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내게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내게 실제로 효과를 발휘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구원과 영광과 능력으로 수행하시는 일이 마지막으로 바벨론 음녀의 퇴치입니다. 바벨론 음녀가 이렇게 강력한 원수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최종단계로서의 바벨론 음녀는 이 세상을 향한 향상과 개선과 발전과 성취에 대한 소원입니다. ‘세상에서 더 나아지고 싶다.’라는 소원은 성공과 번영이라는 거창한 꿈을 향한 바탕이 됩니다. 성공과 번영처럼 거창한 것이 아니라도 ‘지금 형편보다는 좀 나아졌으면 좋겠다.’라는 바람은 누구나 가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미 성공과 번영을 향한 바람을 갖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러한 바람이 생기는 이유는 십자가에서 어린 양과 함께 결합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며, 그 대신 바벨론 음녀의 음기가나를 사로잡은 것입니다.

 

십자가 복음의 근본 취지는, 십자가에서 이 세상에 대해 죽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에게 받아들여졌기를 바랍니다. ‘내가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죽어야 하나님을 향해서만 살 수 있고, 하나님만을 좋음으로 욕구할 수 있다.’라고 받아들이셨다면 여러분께서는 어린 양 예수님과 정혼한 자들입니다. 그렇게 정혼한 자들에게는 어린 양 예수님에 의해서 시작되고, 어린 양 예수님을 중심으로 진행되며, 어린 양 예수님과 함께 결합함으로 끝이 날 삼대 칠중 재앙의 역사가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삼대 칠중 재앙의 역사가 진행되는 가운데, 흰옷을 입은 성도들의 모습이 삽입되어 있었습니다. 그렇게 내 옷을 어린 양의 피에 빠는 십자가 생활화가 진행되며, 마지막 단계에서는 사치와 호화로움을 향한 죄와 저주에 찌든 자의 본능적인 욕구가, 궁극적으로 퇴치되고 멸망하고 재가 되어 연기가 피어오르는 상황을 거치게 됩니다. 여러분께서 이러한 과정을 통해 어린 양과 함께 완전한 결합을 이루게 됩니다. 이렇게 완전한 결합을 이루고 난 뒤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다음 단락부터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삼대 칠중 재앙의 장황한 역사가 바벨론 음녀를 퇴치함을 통하여 끝나고, 어린 양과의 결합이 온전히 이루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완전히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이 굳건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간절한 바람이 하루빨리 이루어질 수 있도록 아버지의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실제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