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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음녀 죽고 어린 양과 결합, 그다음은?>의 줄거리 :
바벨론 음녀가 죽고 어린 양의 신부들이 어린 양 예수님과 온전한 결합을 이루는 결혼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런 어린 양 결혼 잔치에 이어서 백마 탄 자가 등장을 합니다. 그러니까 성도 각 개인이 이 세상에서 성공과 번영을 향하는 마음이 어린 양 십자가에서 완전히 죽었을 때 나타나는 일에 대한 계시입니다. 도대체 '백마 탄 자'라는 상징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음녀 죽고 어린 양과 결합, 그다음은?
(요한계시록 19:11~13)
11.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그것을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12. 그 눈은 불꽃 같고 그 머리에는 많은 관들이 있고 또 이름 쓴 것 하나가 있으니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고
13.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앞서 우리는 바벨론 큰 음녀가 괴멸당하는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 안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 삶에서 바벨론 큰 음녀가 멸망 당한 뒤에는 어린 양과의 결혼이 이루어집니다. 사도 요한이 예수님과의 결혼이라 하지 않고 어린 양과의 결혼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바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과의 완전한 연합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본문 11~13절에서는 이렇게 어린 양과의 결혼이 일어난 이후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11절을 보면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그것을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존재가 백마를 타고 나타나는데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12~13절을 보면 백마를 타고 나타난 자에 대한 묘사가 이어집니다. “그 눈은 불꽃 같고 그 머리에는 많은 관들이 있고 또 이름 쓴 것 하나가 있으니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고 /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라고 하였습니다. 계시록을 해석하는 고삐가 느슨해지지 않고 어렵게 느껴지는 내용입니다.
백마를 탄 존재가 누군가에 대해 대부분 학자들은 재림하시는 예수님이라 해석합니다. 이러한 해석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19장 후반부에 여전히 바다짐승과 사탄과의 싸움이 묘사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백마를 탄 존재가 예수님이라면, 예수님이 재림하신 뒤에도 여전히 사탄과 그 짐승의 군대와 싸우신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당연히 그럴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어떤 사건인지는 베드로후서 3장 10절에서 잘 드러납니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 재림 때 우주의 물질이 다 녹아 없어질 것이고, 눈에 보이는 육체에 가려져 있던 영적인 실상이 다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상황에서는 사탄이나 바다짐승이나 땅짐승이나 귀신들이나 어떤 세력도 힘을 쓸 수 없게 됩니다. 사탄과 바다짐승이 힘을 쓰는 근거는 이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에 바벨론 큰 음녀가 등장한 이유도 이 세상의 영광을 보이며 유혹하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이 시간과 공간의 세계가 아예 없어져 버렸다면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싸워야 될 일도 없습니다.
백마 탄 자의 등장은 어린 양 예수님과의 완전한 결합을 이룬 혼인 잔치 뒤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백마 탄 자의 등장은 예수님 재림 때가 아닌, 어린 양과의 혼인 잔치를 온전히 이룬 성도가 있는 모든 시대에 나타나는 영적 현상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는 세상의 끝입니다. 곧바로 새 하늘과 새 땅이 등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에 대한 묘사는 앞으로 살펴볼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던 9절에서는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듣고 아직은 세상에 대해 죽은 자의 마음가짐으로 연합할 수 없더라도, 적어도 십자가와 연합하여 세상에 대해 죽은 자가 돼야 한다는 생각을 갖는다면 예수님과 정혼을 한 것입니다.
유대 결혼 풍습상 정혼이 이루어졌다면 결혼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예수님과의 정혼 기간에 십자가 생활화를 계속하면서, 세상에 대해 완전히 죽은 자로 설 수 있을 때, 바벨론 음녀의 기운은 완전히 퇴치된 상태입니다.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죽었기에 더 이상은 세상에 유혹당하지 않습니다. 세상에 대한 소원과 바람도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한 상태가 완전한 결혼의 상태가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다음에 일어나는 일이 백마 탄 자의 등장입니다.
이로부터 백마 탄 자가 등장하는 상황이 상징적으로 가리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 백마 탄 자라는 한 장면에 반응하기보다는 전체적인 맥락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완전히 죽고 예수님과의 결혼이 이루어졌다면, 바벨론 음녀의 음기가 스며들어 올 수 없는 상태입니다. 이때 나타나는 일이 바로 공생애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라고 하였습니다. 내 안에 그리스께서 사시는 이유는, 내가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죽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온전해짐입니다. 정혼한 마음으로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 세상에 대한 죽음이 온전해졌을 때 그 사람의 마음은 하늘로 올라갑니다. 이제 땅에 있는 몸은 주인이 없는 텅 빈 상태로 남아있는 셈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그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서 사시게 됩니다.
백마 탄 자가 나타났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가 이와 같습니다. 어린 양의 신부가 될 수 있을 만큼, 온전한 결합이 이루어진 그 사람에게서 공생애의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공생애를 이어가시려고 해도 몸이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의 어린 양 신부의 마음이 예수님과 연합하여 하늘로 올라간다면, 땅에는 주인 없는 몸이 하나 생기게 됩니다. 그 주인 없는 몸에 대해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사시게 됩니다. 예수님과 똑같은 분이 들어오셔서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라는 고백은 내 안에 성령이 사신다는 의미입니다. 성령은 아버지로부터 오는 성령이 있고, 예수님으로부터 오는 성령이 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나오면 예수님의 복사판 영이시고,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나오면 아버지의 복사판 영이십니다. 하나의 영이십니다.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 주인 없는 몸을 통해 예수님의 영이 공생애를 이어가십니다. 이처럼 백마 탄 자는 예수님이 내 몸을 통하여 이 땅에서 당신의 공생애를 이어가시는 현상을 가리킵니다.
바벨론 음녀는 한 인격이 아닙니다. 이 세상적인 성공과 번영 그 자체를 의인화하여 상징한 것입니다. 백마 탄 자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공생애의 현상을 의인화하여 상징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영이 당신의 신부가 된 사람의 몸을 통하여, 이천 년 전에 공생애를 사셨듯이 공생애를 이어가시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백마 탄 자의 등장이란, 재림 예수님의 출현이 아니라 공생애 예수님의 재출현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가 어린 양의 신부들에 의해서 계승되는 상황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의 모습을 예수님의 공생애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기준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광야로 나가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사탄에게 세 가지 시험을 받으셨는데, 마지막 시험에서 사탄은 예수님에게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입니다. 그 탐스러움을 가지기 원한다면 사탄에게 경배하라는 시험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탄을 퇴치하십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예수님은 인간으로 오셨지만,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이미 바벨론 음녀의 음기를 완전히 차단하셨다는 뜻입니다.
사탄이 제시했던 천하만국과 그 영광이란, 곧 세상적인 성공과 번영이며 사치와 호화로움을 상징하는 바벨론 음녀입니다. 마지막 시험이란 이 바벨론 음녀를 퇴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시험을 다 끝내신 후에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이때 바벨론 음녀가 퇴치된 상황은 예수님 안에서만 일어난 일입니다. 예수님과 동고동락했던 열두 제자조차도,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여전히 바벨론 음녀에 정복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조국의 독립을 바랐고, 독립한 이후에는 장관 자리를 차지하겠다는 꿈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십자가의 어린 양과 온전히 결합하여 세상에 대한 죽음을 이룬 신부들의 삶은 예수님의 공생애와 마찬가지 상황입니다. 주변이 바벨론 음녀에 의해 정복당한 채로 살고 있는 가운데, 공생애의 현상을 일으키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공생애를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만 상대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만을 소망하고, 하나님만의 존재감으로 충만합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내 몸을 움직이는 삶은, 공생애를 사셨던 예수님이 재출현하셔서 사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공생애 때 예수님이 내 몸에 들어오셔서 사시는 현상이 백마 탄 자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세상적인 성공과 번영이 바벨론 음녀로 의인화되었던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묘사는 순차적 전개로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사탄은 예수님께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이며 시험했고, 예수님께서는 그 시험을 이기고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앞서 바벨론 음녀가 멸망 당하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바벨론 음녀의 멸망에 이어서 예수님과의 온전한 결합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세상에 대해 완전히 죽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퇴치하신 것처럼, 우리가 세상에 대해 완전히 죽었다는 것은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퇴치한 것입니다. 세상에서 아무 바람이 없기에 그다음에 나타나는 일은 당연히 공생애의 삶입니다.
어린 양이 인을 떼시며 시작되었고 어린 양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던 삼대 칠중 재앙의 역사 속에서, 성도는 어린 양의 피로 죄를 이기고 바벨론 음녀를 괴멸시켰습니다. 그렇게 도달한 곳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온전히 결합하는 결혼식이었습니다. 그 결혼이 이루어진 상태에서 이제 본격적으로 공생애 때 예수님의 삶이 재현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여기까지 갈 수 있어야 합니다.
이어서 백마 탄 자의 이름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11절에 “… 백마와 그것을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비슷한 묘사가 앞서 계시록 3장의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나온 바 있습니다. 14절을 보면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라고 하였습니다. 이 ‘충성되고 참된’이라는 표현이 본문에서도 그대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백마 탄 자는 예수님이 내 몸에 들어오셔서 당신의 공생애를 이어가시는 삶의 현상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충성과 참됨을 한데 묶어서 ‘아멘이시요’라고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완전한 결합을 이루어서 세상에 대해 완전히 죽은 사람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며 세상을 접하더라도 반응할 마음이 없는 상태입니다. 마음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과 함께 하늘로 올라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완전한 결합을 이룬 신부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은 충성입니다. 실시간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내려오게 됩니다. 그 뜻이 어떤 것이라도 충성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경우는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는 일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경우는 돌에 맞아 죽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는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결박당할 것을 알면서도 올라가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아버지의 뜻이라면 무엇이든지 아멘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충성됨입니다.
이것은 신약 시대에만 일어났던 일이 아닙니다. 기생 라합의 경우에는 고국이 죄악으로 가득 찼으므로 멸망 당하리라는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 아멘으로 받아들였던 것을 생각하면 충성됨이란 참 어렵고 보통 힘든 일이 아닙니다. 정말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죽을 때 자기 고국에 대해 죽고, 가족에 대해 죽고, 심지어 자기 몸에 대해서도 죽을 수 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처럼 몸이 돌에 맞아 죽을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아멘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오직 마음이 세상에 대해 십자가에서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나타나는 일이 죽음 가운데서도 깨지지 않는 평강이었습니다. 이것은 이 세상의 기준에서 이해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나라를 판 기생 라합은 매국노입니다.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얼굴에 기쁨이 넘쳤던 스데반 집사님은 정신이 나간 사람입니다.
또한 ‘진실’이라고 했습니다.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죽고 공생애를 사는 자들은,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대로 자기의 편견과 선입견과 호불호의 기준과 자기 판단과 생각을 통해 반응하지 않습니다. 실시간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뜻으로 말하고 행동합니다. 진실이란 거기에 오류와 거짓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완전한 결합을 이루어서 세상에 대해 죽고 신부가 된 자들에게서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사실 때의 모습을 떠올려 봅니다. 요한복음 5장, 8장, 14장에서 계속 이야기되었던 것이 ‘아버지가 내 안에서 행하신다’라는 말씀이었고, ‘나는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노라’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세상을 향해 스스로 생각조차 해서는 안 됩니다. 스스로는 상상도 하면 안 됩니다. 스스로는 무엇인가를 바라서도 안 됩니다. 생각이나 판단이나 바람을 비롯한 모든 것은, 아버지를 바라보고 있는 중에 내려오는 아버지의 뜻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이 상태까지 갈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완전히 결합하여 세상에 대해 죽은 자라는 의식이 고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다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또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라고 하였습니다. 공의란 개인적이고 사적인 편견이나 판단이나 감정이나 기호 혹은 호불호가 전혀 개입되지 않은 상태에서, 오직 실시간으로 내려오는 하나님의 뜻만을 받아들여서 말하고 행동함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의로움이 나타나는 것이 공의입니다. 내가 하는 말이 개인적인 이득이나 호불호 때문에 반응하지 않게 됩니다.
이것은 십자가에서 이 세상에 대해 완전히 죽어서, 더 이상 바벨론 음녀의 음기가 조금도 침투되지 않는다면, 세상에서 나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런 바람이 생기지 않습니다. 이 상태에서는 공의가 담기지 않은 말과 행동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것이 과연 이루어질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생길 수 있겠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계시록은 우리 같은 버러지 인생에도 이러한 일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약속을 주시는 것입니다. 나 한 사람이 몸으로 사는 현상이 백마 탄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충성, 진실,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는 것은 백마 탄 자로 상징되는 한 현상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어서 12절을 보면 “그 눈은 불꽃 같고 그 머리에는 많은 관들이 있고 또 이름 쓴 것 하나가 있으니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고”라고 하였습니다. ‘눈이 불꽃 같다’는 것은 나의 삶의 현상이 공생애로 바뀌었을 때, 관계하는 대상이 사람이든, 사건이든, 사물이든, 어떤 상황이든 불꽃 같은 눈으로 꿰뚫어 보듯이 말하고 행동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돈 문제를 앞에 두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불꽃 같은 눈으로 돈 문제의 본질을 꿰뚫어 본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말과 행동과 반응을 보이게 됩니다. 직장에서 과장님이나 부장님을 대면하고 있습니다. 과장님과 부장님의 속을 꿰뚫어 본 자라야만 할 수 있는 말과 행동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돈 문제에 대해 죽었습니다. 과장님과 부장님에 대해서도 죽었습니다. 내 마음은 오직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의 있음이라는 존재감에만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렇게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서 주인 없는 몸에는 생각과 감정과 의지의 기능이 있습니다. 그 몸 안으로 하나님의 뜻을 받으시던 공생애 때 예수님이 내려오십니다. 돈 문제나 과장님과 부장님의 문제에 대해, 창조주이자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보시는 가운데 생각하시는 뜻이 내게 주어집니다. 그렇기에 그 속을 꿰뚫어 보는 사람이라야 할 수 있는 말과 행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백마 탄 자로 상징되는 공생애 현상이 나타날 때 불꽃 같은 눈이 항상 작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또 ‘그 머리에는 많은 관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관으로 번역된 헬라어 디아데마타(διαδήματα)는 왕이 쓰는 왕관을 의미합니다. 운동 경기에서 승리자가 쓰는 월계관을 의미하는 스테파노스(στέφανος)와는 구분됩니다. 그렇다면 그 머리에 많은 왕관을 썼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이 땅에 예수님은 계시지 않지만, 예수님이 공생애를 사실 때와 같은 현상은 우리를 통해 나타납니다. 바벨론 음녀가 성공과 번영을 상징하듯이, 공생애 현상은 하나의 현상을 상징하는데, 이 하나의 현상에 참여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바벨론 음녀가 탄 짐승은 머리가 일곱에, 뿔이 열이고, 그 머리에는 일곱 왕관이 있다고 했습니다. 한편 왕관이 많다는 것은 이 공생애 현상에 참여하는 자들이 많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어린 양의 신부가 될 때 우리의 삶은 왕의 삶이 됩니다. 이것이 계시록 5장 9~10절에서는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어린 양 십자가의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린 자들은, 마음이 하나님께 올라갔음으로 마음을 드린 것입니다. 그렇게 마음이 올라가고 몸이 남아있는 자들이 땅에서 왕노릇 한다고 했습니다.
왕정 체제의 특징은 말하는 사람이 왕뿐입니다. 반대로 민주주의 특징은 내가 하는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있고, 또 다른 사람이 말을 할 때 내가 들어주는 것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 땅에서 왕 노릇을 한다는 것은, 이 땅에서는 오직 말하는 자로서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 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만 그 말은 내가 하는 말이 아닙니다. 실시간으로 임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따른 말과 행동입니다.
그리고 희한한 것은 이 상황에 이어서 언급되는 것이 ‘또 이름 쓴 것 하나가 있으니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고’라고 하였습니다. 참 어려운 말씀입니다. 백마 탄 자가 예수님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예수님밖에 모르는 이름이 있다는 식으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당신의 피 한 방울, 물 한 방울까지 다 쏟아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에게 허락된 모든 것을 우리에게 다 주셨고 통째로 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감추어진 예수님의 이름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이름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바벨론 음녀가 성공과 번영 자체를 의미하듯이, 백마 탄 자는 공생애 현상을 의미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공생애 현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며, 공생애 현상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은 땅에서 말하는 자로서 왕 노릇하게 됩니다. 말하는 자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남의 말을 무시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회사에서 사장님과 부장님의 말을 듣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사장님과 부장님의 말을 들으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만 듣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세상에 대해서는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말하는 왕이 된 것입니다.
이러한 왕 노릇은 사람마다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특성을 갖게 됩니다. 저와 여러분은 모두 십자가 예수님과 연합함으로써 공생애 현상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공생애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 구체적인 삶의 모습을 보면 저의 삶의 환경과 여러분의 삶의 환경이 완전히 다릅니다. 여러분의 삶의 환경에 대해서는 오직 여러분 자신만이 유일한 이름이고 소유자입니다. 여러분의 몸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삶의 환경은 여러분 한 사람뿐입니다.
여러분 각자만이 내가 공생애를 살고 있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습니다. 물론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께서 아실뿐, 여러분이 공생애를 사는지 아닌지에 대해서 세상에서는 알 자가 없습니다. 이 땅의 특수한 환경 속에서 내가 지금 공생애를 살고 있느냐 아니냐에 대한 것은 나 자신만이 압니다. 본문 말씀은 이처럼 백마 탄 자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공생애 현상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백마 탄 자로 상징되는 공생애 현상이 우리에게도 하루빨리 나타날 뿐 아니라 온전히 정착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것을 위해 바벨론 음녀의 음기에 완전히 방어막을 칠 수 있도록 주님의 피로 무장되게 하심으로써, 백마 탄 자로 상징되는 공생애 현상이 우리의 일상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