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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세상 실감 뭉개고 하늘 실감 북돋자>의 줄거리 :
예수님의 공생애 현상은 내 인생의 진정한 영적인 성공과 번영인 셈입니다. 그리고 이런 공생애 현상이 내게서도 일어나기 위한 실제 조건은 바로 세상 실감이 쇠하고 하늘 실감이 흥하는 상태입니다. 세상 실감은 날마다 쇠하다가 기필코 완전히 죽어버려야 합니다. 반면에 하늘 실감은 쉬지 않고 북돋아 그 강도가 날마다 최고치를 경신해야 합니다. 이 하늘 실감 자체를 가져 보세요. 그 자체가 이미 더할 나위 없는 만족과 기쁨임을 알게 됩니다.
세상 실감 뭉개고 하늘 실감 북돋자
(요한계시록 19:13~21)
17. 또 내가 보니 한 천사가 태양 안에 서서 공중에 나는 모든 새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와서 하나님의 큰 잔치에 모여
18. 왕들의 살과 장군들의 살과 장사들의 살과 말들과 그것을 탄 자들의 살과 자유인들이나 종들이나 작은 자나 큰 자나 모든 자의 살을 먹으라 하더라
19. 또 내가 보매 그 짐승과 땅의 임금들과 그들의 군대들이 모여 그 말 탄 자와 그의 군대와 더불어 전쟁을 일으키다가
20.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표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표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 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져지고
21. 그 나머지는 말 탄 자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검에 죽으매 모든 새가 그들의 살로 배불리더라
본문 13~16절까지는 공생애 현상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적나라하게 표현됩니다. 한 사람의 생애 속에 공생애 현상이 일어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17~18절은 그렇게 공생애 현상을 사는 사람이 자기 모습을 확연하게 드러낼 때, 상대적으로 공생애를 살지 못하는 사람의 모습이 어떻게 드러나는지도 보여줍니다. 그리고 19~21절은 16장에 나왔던 아마겟돈 전쟁과 관련이 있습니다. 짐승들이 천하의 군대를 모아서 싸우려고 준비한다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전쟁의 결과, 용과 짐승들이 멸망하게 된다는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이러한 내용의 말씀 중심으로 ‘세상 실감 뭉개고 하늘 실감 북돋자’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세상 실감은 뭉개고 천국 실감은 계속 북돋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현상은 우리에게서 바벨론 음녀의 기운이 퇴치되면서 나타나게 됩니다. 공생애 현상이란 예수님께서 내 몸을 이용해서 이천 년 전에 사셨던 공생애를 이어가시는 상황입니다. 이것은 진정한 내 인생의 성공과 번영입니다. 이러한 공생애 현상이 일어나기 위한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생활 현장 속에서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며 관계하는 세상 것들의 실감이 점점 약해지다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이와 동시에 약하게 시작한 하나님 실감과 천국 실감이 점점 강세를 띠면서 실감의 강도가 날마다 최고치를 경신하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 조건이 이루어지면 공생애의 삶이 시작됩니다.
계시록의 내용이 뜻하는 대로 우리는 과정을 겪습니다. 공생애 현상은 단번에 일어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벨론 음녀의 기운에 취해있는 상태에서 세상은 강렬하게 실감됩니다. 다시 말해 뜨거운 열망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열망이 식으며 점점 더 세상의 있음과 좋음에 대한 실감이 약세를 띠는 과정을 겪게 됩니다. 이와 동시에 하나님에 대한 실감과 천국에 대한 실감은 점점 더 강세를 띠게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실감이나 천국 실감은 우리 안에서 저절로 강렬해지지 않습니다. 밟아도 되살아나는 잡초와는 다르기에, 북돋아 줄 수 없다면 하늘 실감은 사그라집니다. 반면에 생활 현장에서 십자가를 붙잡고 계속 죽여도 잡초처럼 되살아나는 것이 세상 실감입니다. 오죽했으면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 10절에서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짊어지고 다닌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내 심장이나 위나 허파처럼 언제나 작동하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숨을 쉬고 있는 한 십자가에서 죽은 자라는 의식이 계속해서 살아 움직이는 것을 말합니다. 이 상태를 통해서 세상 실감은 약세를 띠고 죽게 됩니다. 그리고 반대로 하나님에 대한 실감과 천국 실감은 점점 더 강세를 띠고 날마다 새롭게 경신됩니다.
어제보다 오늘 더 강세를 띠는 하늘 실감을 경험하셨다면, 하늘 실감 그 자체가 내게 얼마나 큰 만족이고 기쁨이 되는지를 아실 것입니다. 세상 것은 실감하고 나면 손에 쥐고자 소원하고 추구하고 노력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늘 실감은 다릅니다. 실감 자체가 북돋아지기 시작하면 그 자체로 만족과 기쁨이 됩니다. 물론 하늘 실감이 날마다 경신되어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천국에 대한 소망이 날마다 커짐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세상 실감과 다른 점은 세상 실감은 아무리 노력해도 이루어진다는 보장이 없지만, 하나님과 천국에 대한 소망은 약속이 있습니다. 세상 실감에 대해서는 극소수의 사람만이 바벨론 음녀가 상징하는 성공과 번영을 이룹니다. 그러나 하늘 실감은 소망하는 대로 성공과 번영을 이루게 됩니다.
요한계시록을 대표하는 키워드 둘을 꼽는다면 첫 번째는 ‘어린 양’이고, 두 번째는 ‘싸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곱 교회에 관한 모든 말씀 속에는 이기는 자에 대한 언급이 나옵니다. 그리고 기회만 있으면 깨어있으라는 요청이 나옵니다. 오감을 통해 접하는 현장에서 세상 실감은 가만히 놔두면 저절로 강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 실감이 강해지면 천국 실감은 뭉개지고 맙니다. 이로부터 요구되는 것이 싸움입니다. 오감을 통해 세상 것들이 내 마음을 향해 쇄도해 들어오고 실감되는 삶의 현장에서, 사도 바울처럼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심장과 허파가 몸 안에 있는 것처럼 항상 의식 속에 붙박이로 유지하는 것이 싸움입니다. 세상 실감은 곧 육체의 실감이고, 하늘 실감은 곧 믿음의 실감입니다. 십자가를 붙잡는 믿음이 없다면 하늘 실감은 생길 수 없고 강화될 수도 없습니다. 본문은 이러한 대전제하에 공생애가 어떻게 이루어지는 지를 보여줍니다.
13절을 보면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라고 하였습니다. 피 뿌린 옷을 입었다는 것은 한 사람에게서 공생애 현상이 일어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공생애 현상의 가장 큰 특징은 예수님의 말씀에서 잘 드러납니다. 요한복음 5장 19절을 보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8장 26절에서는 “내가 너희에게 대하여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나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 말하노라 하시되”라고 하였고, 이어서 28절에서는 “…또 내가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보여주신 공생애의 핵심이고 특징입니다.
이러한 공생애 현상이 우리에게서 일어날 때 피 뿌린 옷을 입었다고 이야기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공생애 현상 전체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바탕에 깔려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세상에 대한 죽음입니다. 세상에 대한 나의 죽음을 예수님께서 대신 이루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또한 십자가 사건 이전에도 천하만국과 그 영광에 대해 마음이 죽은 상태였습니다. 그 상태에서 공생애는 진행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 없이 하실 수 있었던 그 상황을,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이루어낼 수 있습니다. 피 뿌린 옷을 입었다는 것은 이처럼 바벨론 음녀의 음기를 차단하고 천하만국과 그 영광의 실감에 대해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피 뿌린 옷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였습니다. 성경 66권과 실시간으로 내게 전달되는 하나님의 말씀은 모두 세상에 대한 죽음을 근거로 해서만 의미가 있고, 들릴 수 있고, 그 말씀대로 살 수가 있습니다. 성경 말씀 전체는 세상에 대한 죽음을 요청합니다. 이는 곧 하나님에 대해서만 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신명기 6장 5절을 보면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라고 하였습니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하기 위해서는 이 세상을 향한 마음과 뜻과 힘은 완전히 죽어야만 합니다. 마음의 한 방울, 뜻의 한 방울, 힘의 한 방울도 세상을 향해서 쓰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 하나님 말씀이고 성경 전체의 요청입니다.
14절을 보면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라고 하였습니다. 내게서 공생애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은 내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 있고, 땅에서는 예수님이 내 몸을 이용해서 당신의 공생애를 이어가시는 상황이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때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여전히 내 몸입니다. 이 상황에서 하늘 군대가 지원을 나오는 일이 벌어집니다.
하늘 군대의 지원을 받으면 나타나는 일이 바로 베드로와 요한이 산헤드린 공회에 잡혔던 사건입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이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조금도 굽힘 없이 당당하게 하늘에서 전해지는 말씀을 내뱉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 사건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돌에 맞아 죽는 상황에서 조금도 굽힘 없이 상황 전체를 이겨나갈 수 있는 힘이 생겼습니다. 바로 이러한 모습이 하늘 군대가 지원을 나오는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하늘 군대가 하는 일이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전쟁하듯이 눈에 보이는 사탄의 진영과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는 전쟁이 계속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쟁이 있든 없든 한 사람의 마음속에서는, 세상의 있음과 좋음에 대한 실감이 완전히 죽는 역사가 하늘 군대가 하는 일입니다. 어떤 위협적인 환경이나 극한의 고통을 겪는 상황에서도 내 마음이 강렬하게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을 실감하며, 세상 실감을 극복해 나가는 상태가 되는 것이 하늘 군대의 지원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또 15절을 보면 “그의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그들을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라고 하였습니다.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온다는 것은 공생애 현상이 일어날 때, 내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과 몸으로 하는 모든 행동은 세상의 기준을 따르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언어는 건강, 형통, 성공, 번영과 같은 세상적인 가치들에 찌들어 있습니다. 세상적인 가치들에 찌든 언어로 인해 풍습이 생깁니다. 그 풍습은 생각과 말과 행동에 대한 습관으로 작용합니다. 그러나 공생애 현상이 일어날 때는 세상 가치에 찌든 언어, 관습, 행동 원리와 같은 모든 것들이 깨어져 나갑니다. 절대로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행동 원칙이나 상식의 기준대로 말하거나 움직이지 않습니다. 실시간으로 세상 실감이 뭉개지고 하늘 실감이 강화되고 있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정확하게 들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갑니다. 이 세상 사람들의 관습적인 생각과 판단 혹은 행동 원칙을 따르는 일이 중단됩니다.
또 철장으로 다스린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바벨론 음녀로 상징되는 성공과 번영이라는 음기에 취해서 이루어진 언어의 체계, 논리의 체계, 가치관을 깨부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몸으로 맺는 관계 속에서 세상의 체계와 가치관이 부서져 나가는 것입니다. 이 공생애 현상은 우리에게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계시록에서 우리에게 일어날 수 없는 일은 한 마디도 언급되지 않습니다.
이어서 16절을 보면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라고 하였습니다.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는 공생애 현상이 나타날 때 세상에서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 상태가 됨을 의미합니다.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란 예수님의 이름입니다. 그런데 내게서 공생애 현상이 일어나면 예수님이 내 안에서 활동하고 계시는 상태가 됩니다. 공생애 현상을 구성하고 있는 부분들을 지금 말씀하시는 가운데,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는 사람의 몸은 이 세상에서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신 예수님의 보좌가 된다는 뜻입니다.
한편 17~21절까지는 하나님의 큰 잔치가 열리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잔치는 앞서 언급되었던 어린 양의 잔치와는 별개입니다. 이제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는 하나님과 천국에 대한 실감이 북돋아집니다. 이것은 십자가를 붙잡고 주의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잠깐 여담입니다만 현재 주기도문에 관한 책의 원고가 거의 마무리되어 가고 있습니다. 원래는 더 일찍 나와야 했습니다. ‘정하고 직함은 하나님께만 하라’는 책에서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여기서 정직이라는 단어에 하나님의 사랑이 좀 눌린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은 그대로 놔두고 아예 직접적으로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한 ‘하나님 사랑의 생활화’라는 책을 쓰고 있습니다. ‘정하고 직함은 하나님께만 하라’에서 소재들을 몇몇 채택하면서 100페이지 정도 더 늘어난 개정증보판을 만들어서 현재 교정 작업 중입니다. 이 책을 쓰느라 주기도문에 관한 책이 늦어지게 되었습니다. 350페이지 정도 되는 ‘하나님 사랑의 생활화’라는 제목의 책이 나올 것이고, ‘주의 기도의 생활화’라는 책도 나올 것입니다.
십자가를 붙잡고 하는 주기도를 통해서 하늘 실감은 북돋아질 수 있습니다. 이 기도를 중단하면 하늘 실감이 북돋아질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이렇게 하늘 실감이 북돋아지면 앞에서의 일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내게서 하늘 실감이 날마다 강화되면서 공생애 현상이 짙어지는 것은, 단번에 이루어지는 일이 아닌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공생애 현상이 점점 짙어질 때는 내 옆의 사람들과의 차이도 점점 짙어지게 됩니다. 본문에서는 그 상황이 하나님의 잔치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17~18절을 보면 “또 내가 보니 한 천사가 태양 안에 서서 공중에 나는 모든 새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와서 하나님의 큰 잔치에 모여 / 왕들의 살과 장군들의 살과 장사들의 살과 말들과 그것을 탄 자들의 살과 자유인들이나 종들이나 작은 자나 큰 자나 모든 자의 살을 먹으라 하더라”라고 하였습니다. 한 사람에게서 공생애 현상이 실제로 일어난다는 것은,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진짜 사람이 나타난 것입니다. 공생애 현상이 일어나는 사람이 진정한 인간입니다. 예수님이 인간으로 오셔서 사셨던 공생애의 삶이란, 하나님이 본래 창조 때 생각하셨던 인간의 원형이었습니다. 따라서 한 사람에게서 공생애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은 하나님의 개념 속에 진짜 인간이 등장한 것과 같습니다.
진짜 인간이 등장했다면 상대적으로 그 옆에서 공생애 현상이 일어나지 않은 채 살고 있는 사람들은, 진짜 인간과는 동떨어진 존재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로부터 모든 새들을 향하여 살을 먹으라고 외친다는 것의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소나 돼지나 양이나 닭 등의 다양한 가축을 기르는 이유는 그 살을 먹기 위해서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개념 속에 본래 인간이라는 단어를 사전적으로 정의하자면 ‘공생애를 사는 자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모진 싸움의 과정을 거치면서 점점 더 공생애 현상이 나타날 만큼, 하늘 실감이 강화되는 사람이 진짜 인간입니다. 반면에 세상 실감만을 갖고 사는 사람들은 하늘 실감이 뭉개진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살을 먹기 위해 기르는 짐승이나 가축과 같은 수준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관점은 아닙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에 대한 실감이 없고, 천국 현실에 대한 실감이 없고, 오직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세상 실감에 대해서만 반응하는 사람이라면, 고기를 먹으려고 기르는 가축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왕이고 장군은 대단하게 여겨지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모든 새들에게 그들의 살을 먹으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는 왕이든 장군이든 죽여서 살을 먹어야 할 가축과 다름없는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또 내가 보니 한 천사가 태양 안에 서서’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태양은 발광체로써 하나님을 상징합니다. 태양 안에 섰다는 것은 하나님의 빛에 휩싸여 있는 상태입니다. 공생애 현상을 산다는 것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고, 코로 냄새 맡고, 입으로 맛보는 육체의 오감으로 만나는 세상에 대하여 반응하는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뜻대로 발광체가 빛을 발산하듯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공생애 현상을 살 때 우리 마음은 발광체이신 하나님의 빛에 휘감겨 있습니다. 우리 마음이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따라 하늘에 올라가서 하나님의 빛에 휘감겨 있을 때, 땅에서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은 하늘의 뜻이 내려와 발산됩니다. 육체의 오감으로 접하는 것들에 대해 반응하는 삶이 아닙니다.
이렇게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대로 반응하는 삶은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의 삶이 아닙니다. 그들의 행동은 짐승의 몸짓이며, 그들의 말은 짐승의 울부짖음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세상 실감 때문에 공생애 현상이 일어나지 않는 사람, 하늘 실감이 북돋아지지 않은 사람, 날마다 하늘 실감이 경신되지 않는 사람이 그러합니다. 무한히 크신 하나님, 무한히 큰 천국이기 때문에 우리의 실감 또한 날마다 경신되어야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하늘의 뜻이 내려와 발산될 수도 없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짐승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왕이든 장군이든 상관없습니다. 하늘 실감이 죽어버린 자들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인간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저 사람은 왕이라서 실제로 권력을 행사하고 있지 않습니까?’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왕의 권력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짐승 같은 존재를 주권적으로 이용하고 계실 뿐입니다. ‘왕들의 살과 장군들의 살과 장사들의 살과 말들과 그것을 탄 자들의 살과 자유인들이나 종들이나 작은 자나 큰 자나 모든 자의 살을 먹으라 하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왕, 장군, 장사를 비롯하여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언급되다가 말이 갑자기 튀어나옵니다. 이들 전체가 말처럼 하나님의 주권을 실행하시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자 소모품에 불과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이 이동하기 위한 수단이듯이 왕도 수단이고, 장군도 수단이고, 장사도 수단이고, 큰 자나 작은 자나, 자유인이나 종들도 모두 하나님이 쓰시는 수단이자 주권적 역사를 이끌어 가시기 위한 소모품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큰 잔치가 되는 이유는 사탄과의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욥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욥 한 사람 때문에 기뻐하시고 사탄에게 자랑하십니다. 요한계시록의 키워드가 ‘어린 양’과 ‘싸움’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싸움은 사탄과의 싸움입니다. 사탄은 내 속에 있는 죄성을 이용해서 큰 음녀 바벨론을 내세워 미인계를 통해 우리를 미혹합니다. 이 싸움이 하나님의 큰 잔치가 되는 이유는 사도 바울처럼 십자가 죽음을 짊어지고 다님으로써, 세상 실감을 뭉개고 하늘 실감을 북돋아서 공생애 현상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나 한 사람을 보며 ‘인간 하나를 발견했다!’라는 기쁨을 느끼실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마음에 잔치처럼 여겨지리라는 것입니다.
한편 하나님의 개념 속에서 공생애를 사는 사람이 발견되는 순간, 상대적으로 공생애의 삶을 살지 못하는 모든 사람은 인간이 아님이 확연해지고 뚜렷해집니다. 이러한 차이에서 하나님 마음에서 진짜 인간을 발견하셨다는 기쁨의 잔치가 벌어짐과 동시에, 그렇지 못한 자들은 말하는 짐승, 생각하는 짐승, 돈을 추구하는 짐승, 결혼해서 남편이나 아내가 된 짐승, 왕 자리에 있는 짐승, 장군 자리에 있는 짐승, 장사들의 자리에 있는 짐승, 자유인의 자리에 있는 짐승, 노예의 자리에 있는 짐승으로 여겨질 뿐입니다.
우리에게서 공생애 현상이 중단된다면, 하늘 실감은 뭉개지고 세상 실감이 극대화될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개념 속에서 더는 인간이 아닙니다. 개와 돼지와 소와 닭 같은 짐승처럼 여겨질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인 어린 양의 피로 이길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든지 세상 실감을 뭉개고 사탄에게 틈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하늘 실감을 날마다 북돋아서 실감의 강도를 매일매일 경신해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 붙잡고 하는 주기도를 통하여 역대 최고치의 하늘 실감의 강도를 날마다 경신해 나가는 것입니다. 십자가 붙잡고 하는 주기도를 통해 확보된 실감을 유지하기 위하여, 삶의 환경에서 주기도의 구절들을 통해 쉬지 말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19~21절에는 아마겟돈 전쟁의 결과가 묘사됩니다. 이러한 공생애 현상이 일어나는 사람에게서 벌어지는 아마겟돈 전쟁은, 완벽한 어린 양의 승리이자 나의 승리로 결론지어집니다. 바다짐승과 666표를 나눠주던 땅짐승은 완전히 멸망 길로 들어가게 됩니다.
공생애 현상이 일어날 수 있도록 피 뿌린 옷으로 상징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마음에 입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붙잡고 생활 현장에서 세상 실감을 뭉개고 하늘 실감을 날마다 북돋아, 직장에서 가정에서 하나님 있음과 하나님 좋음에 대한 천국 실감을 유지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령이 오셔서 나의 몸을 장갑 삼아 사시는 공생애 현상이 일상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어린 양 예수님의 죽음보다 내게 실제로 더 큰 이득을 주는 일은 세상천지에 없습니다. 내가 살아있는 한 몸 안에서 심장이 뛰듯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심장 옆에 세워두고, 세상 실감을 뭉개고 하늘 실감이 날마다 북돋아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우리 삶이 날마다 공생애 현상으로 이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