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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행위책과 생명책의 증거 재판주의>의 줄거리 :
공생애 천년 왕국을 살던 사람들과 다른 모든 사람의 몸이 죽으면 그때의 의식 상태로 깨어나 예수님의 재림을 맞이합니다. 이때 백 보좌에 앉은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심판하십니다. 이 심판은 철저히 증거 재판주의에 따라서 진행됩니다. 이 심판에서 증거로 채택되는 것이 바로 행위책입니다. 행위책의 증거에 근거하여 생명책에 최종적으로 이름이 기입될지 여부가 확정됩니다.
행위책과 생명책의 증거 재판주의
(요한계시록 20:11~15)
11.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13.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14.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본문에는 크고 흰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서 이 세상 마지막 때 모든 사람을 심판하시는 장면이 묘사됩니다. 이미 태어났다가 죽은 모든 자들이 다시 깨어나고, 지금 살아있는 사람들도 예외 없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심판을 받습니다. 본문이 이러한 내용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주고자 하는 핵심이 13절에 드러납니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라고 하였습니다. 그 결과 불못에 던져질 자와 아버지의 보좌가 있는 천국에서 영원히 함께 살 자가 결정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생명책에 관한 언급을 계속해 왔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생명책 이외에 또 다른 책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 책은 바로 행위책입니다. 12절에서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한 권의 생명책이 있고 모든 사람 숫자만큼 존재하는 행위책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두 종류의 책을 통해 불못에 들어가 영원한 지옥을 살 자와, 보좌가 있는 천국에 들어가 하나님과 영원히 살 자들을 결정하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우선적으로 기억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을 보면 행위로 인해 지옥과 천국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라고 하는 로마서 전체의 주제에 해당되는 말씀들과 상충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제목에서 ‘증거 재판주의’라는 말을 사용해 보았습니다. 증거 재판주의란 오직 증거를 통해서만 사실 여부를 확증하는 것입니다. 증거가 없다면 범죄의 사실 여부를 확증할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씀에는 증거 재판주의에 입각한 심판을 통과해야 된다는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을 때 ‘내가 믿습니다.’라는 고백을 합니다. 기독교 종교에서는 그 입술의 고백이 구원을 얻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이라고 여깁니다. 입술의 고백을 믿음이라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구원을 결정하실 때는 각 사람의 행위를 따라 결정하신다고 합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씀은 맞습니다. 분명히 믿음으로 구원을 얻습니다. 하지만 증거 재판주의라는 말이 뜻하는 대로, 정말로 믿음이 있다면 사는 동안에 그 믿음의 증거가 나타났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한 여인이 결혼하여 임신을 하였다면 배가 불러오면서 아기가 들어있다는 증거가 나타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을 통해 예수님을 내 마음에 모셔 들였다면 예수님이 들어와 계신다는 증거가 나타나야만 합니다. 입술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다고 고백하는 자체가 믿음이 아닌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정말로 믿음이 있다면 증거로 확증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증거가 바로 말과 행위입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본문에서 언급되는 것이 생명책과 행위책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면 최후의 심판 같은 과정이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예정하셔서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들은 다 구원을 받으면 될 것입니다. 그런데 굳이 심판의 과정이 이야기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7장 21절에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러한 말씀을 하신 것은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행위책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행위책에 대해서는 책들로 언급되었습니다. 이것은 곧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행위책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전에 말씀드렸듯이 하나님께서는 마치 점선으로 우리가 해야 할 말과 행동들을 기록해 두셨습니다. 이것이 행위책의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있다면 행위책의 점선을 따라서 말하고 행동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라는 말씀을 보다 구체적으로 표현하자면 ‘믿음의 증거로 구원을 받는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있다는 증거가 나타나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증거로써 믿음이 있음을 증명해야만 합니다. 이것은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는 주장과는 전혀 다릅니다. 믿음이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 연쇄 과정 속 예수님과 연합하는 것입니다. 내가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동일시야말로 믿음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예수님과 연합했다면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승천할 수밖에 없습니다. 재림 때는 지구 위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크고 흰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서 모습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다만 재림 이전에도 예수님과 연합하여 마음이 하늘로 올라간 사람들은, 성령님이 마음의 감각이 되시는 상태에서 하나님을 대면하게 됩니다. 내 몸이 이 땅에서 사는 동안에 예수님과 연합하는 믿음이 올바르다면 믿음의 증거가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증거는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크고 흰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에 대하여 실감하는 상태로 나타납니다.
내 마음이 하나님을 직면하여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을 가장 크게 실감한다면, 이 땅에서 실감한 상태로 말하고 행동하게 됩니다. 반면 하나님에 대한 실감이 제로인 상태에서, 오직 눈에 보이는 것들만을 실감하며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같을 수 없습니다. 믿음은 행위로써 증거가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은 예수님과의 실제적인 결합입니다. 결합했다면 내 마음은 천국에 가 있게 되고, 마음이 천국에 갔다면 하나님을 실감함이 나타나며, 하나님을 실감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나타나야 할 믿음의 증거입니다.
입술로 ‘나는 믿습니다!’라고 떠들고 천국 간다고 확신하더라도, 그 사람의 행위가 실제로 하나님을 강력하게 실감하는 중에 나타나는 말과 행위가 아니라면 불못에 들어갑니다. 아무리 믿는다고 주장하고 예배당 조직이 믿는 사람이라고 인정했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기독교 종교인 전체가 그렇게 생각하더라도 그들의 삶에서 예수님과 연합하는 믿음의 결과로써의 증거가, 하나님 실감 속에서 나오는 말과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증거 재판주의에 입각한 최후의 심판 자리에서 결코 천국에는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이해를 통해 행위책을 보면서 생명책에 이름이 확정됨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언뜻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사람의 이름을 생명책에 다 적어놓으셨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생명책에 관해 성경에 기록된 내용들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생명책에 기록된 이름이 지워진다는 언급이 다수 존재합니다.
출애굽기 32장 31~33절을 보면 “모세가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 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게 범죄하면 내가 내 책에서 그를 지워 버리리라”라고 하였습니다. 또 다윗은 시편 69편 28절을 보면 “그들을 생명책에서 지우사 의인들과 함께 기록되지 말게 하소서”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여기서 모세는 생명책과 관련하여 자신을 언급하고, 시편에서 그들이라고 언급되는 자들은 선민들입니다. 이로부터 생명책에는 선민들 전체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들 모두에게 당신 자신을 계시해 주십니다. 쉽게 말해 ‘얘들아, 나 있다. 그리고 내가 너희의 마음을 채울 수 있는 유일한 좋음이다. 또한 너희가 이 세상에서 몸으로 사는 동안에 너희 삶을 주관하는 유일한 주권자이다.’라고 계시해 주십니다. 선민들은 곧 하나님을 계시받은 자들입니다. 출애굽 때 이스라엘 백성은 열 가지 재앙이나 홍해를 건너는 기적들을 통해 하나님의 있음을 바로의 있음보다 월등한 존재감으로 경험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나님을 계시받은 사람 중에서 결국 가나안 복지에 들어간 사람은 남자 육십만 명 중에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뿐이었습니다. 나머지는 선민이었음에도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는 데 실패했습니다.
이처럼 생명책에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있음을 계시해 주신 모든 사람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생명이란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만질 수 없는 하나님의 있음을 실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끊어진 상태가 죽음이기에, 하나님과 마음이 연결되어 있는 상태가 생명입니다. 생명책에는 하나님의 유일한 있음을 인정할 수 있고, 하나님의 유일한 좋음을 인정할 수 있는 모든 사람의 이름이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기록된 가운데 살면서 실제로 하나님을 얼마나 실감하느냐는 것입니다. 세상 있음에 앞서서 계시된 하나님을 얼마나 강력하고 크게 실감하느냐, 세상 좋음 앞에서 하나님의 좋음을 얼마나 강력하게 실감하느냐,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삶에 대해서 하나님이 이끌어 가시는 주권을 얼마나 인정하느냐가 문제입니다. 이것에 따라 내 말과 행동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것을 보시겠다고 하십니다.
행위책에 기록된 내용이란 하나님께서 구술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내가 점선으로 그려놨으니 따라오라.’라고 알려주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직면하면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을 크게 실감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직장인이 사장님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직장인이 마음에서 사장님의 있음보다 하나님의 있음을 더 강력하게 실감하고 있습니다. 그럴 때 이제부터 사장님에 대해서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은 행위책에 기록된 대로 하게 됩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봅니다. 돈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때 돈 문제의 있음보다 하나님의 있음을 더 크게 실감하는 사람이라면, 돈 문제를 맞이해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행위책에 기록된 대로 나오게 됩니다. 그런데 돈 문제든, 원수를 만났든, 건강 문제든, 과제든, 성과든, 승진이든 어떤 것이라도 그것들의 있음과 좋음의 실감이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의 실감보다 크다면, 아무리 입으로 하나님께 간구하고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고 기도해도, 행위책에 나오는 점선에서 다 벗어나는 말과 행동을 하게 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 바울은 생명책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어도 고린도전서 9장 27절에서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하나님께 버림당하는 상황을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선택하시고 예정하심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님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예정하셨기에 구원이 확실하다는 생각을 했다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한다는 말을 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나는 하나님이 선택하시고 예정하셨다. 나는 어떻게 하든지 천국에 들어가는 구원을 얻게 된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예정하신 사람이 아닙니다. 예정하신 사람의 특징은 ‘세상 것들 앞에서 하나님 실감을 지켜내지 못한다면 나는 죽는다.’라는 생각을 합니다. 이러한 생각을 갖고 치열하게 매일매일 싸우는 자들이 예정하신 사람입니다. 예정하셨다고 확신하며 오늘 무슨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하는지 아무런 관심이 없다면, 그것은 정말로 예정하신 사람의 모습이라 할 수 없습니다. 입술로 ‘나는 예수님을 주로 고백한다. 하나님이 내 아버지이시고 창조주이심을 믿는다. 나는 천국 갈 거야’라고 말할지라도 이것은 예정하신 사람의 모습이 아닙니다.
정말로 예정하신 사람이라면 언제나 ‘내가 이렇게 살아도 되나? 돈 문제가 벌어졌다고 아버지 하나님의 살아계심에 대해 전혀 실감하지 못하는 상태가 유지되어도 괜찮은가? 그래서는 안 된다. 돈에 대해서는 무조건 죽고 보자.’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러한 심정으로 죽기 살기로 싸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당장 돈 문제가 생겼는데 돈 문제의 실감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지금 무슨 일을 해야 되는데 일에 대한 실감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절로 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러다가 천국에 못 들어가는 것은 아닐까? 히브리서의 말씀대로 내가 이러다가 영원히 큰 구원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것은 아닐까? 사도 바울의 말씀대로 믿음에서 파선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라는 두려움을 가지고 싸우는 자가 예정하신 사람입니다. 예정하심을 이론적으로 믿기만 하는 것은 영적인 양아치 상태입니다. 세상에 취하여 세상을 실감하는 대로 말을 내뱉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예정하신 사람일 수는 없습니다. 정말로 예정하신 사람이라면 늘 두려움과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 갑니다. 구원을 이루어감이란 하나님 실감과 천국 실감을 세상 실감 앞에서 지켜내고 유지해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싸워야 합니다. 히브리서 2장 1절을 보면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라고 하였습니다. 또 4장 1절을 보면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예정하심을 확신하는 사람들은 이런 말씀을 어디에 팔아먹었는지 언급도 하지 않습니다. 그저 무조건 예수님을 주로 고백했으니 천국에 간다고 여깁니다.
우리는 앞서 어린 양 생명책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어린 양을 통해 얻게 되는 생명이란 어떤 것일까요? 우리의 생활 현장에서 생명을 얻었다는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방법은, 이 세상 것의 있음보다 하나님의 있음을 더 큰 존재감으로 실감하는지를 확인해 보는 것입니다. 또한 세상 사람 모두가 세상의 가치를 바라는 틈바구니에서, 오직 하나님 부자 되기만을 소망하는 상태인지를 확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구원을 얻은 것이고 생명을 얻은 구체적인 상황입니다. 이 상황을 도외시한다면 복음과 관련된 모든 이야기는 거짓말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습니다. 다만 믿음의 증거로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다면 반드시 행위라는 증거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크고 흰 보좌의 심판이 뜻하는 바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11절을 보면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은 다 없어지고 크고 흰 보좌가 등장합니다. 세상이 없어진다는 것은 시간과 공간의 세계가 사라졌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동안 시간과 공간의 세계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보좌가 드러나게 됩니다. 이것은 북반구에 사는 사람이든 남반구에 사는 사람이든 누구에게나 동시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지구는 물론이거니와 시간과 공간 자체가 없어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보좌가 크다는 것은 사람들이 느끼는 존재감의 관점입니다. 하나님의 보좌를 보면서 이보다 더 큰 신분과 자리가 없음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보좌가 희다는 것은 곧 마음속에 가지고 싶어서 소망해야 될 유일한 대상이 하나님이심을 의미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소망하는 대로 마음은 더럽혀지기 때문입니다.
있음의 관점에서 가장 큰 존재감의 대상이 하나님이었음이 크다는 표현으로 드러났습니다. 또한 소망의 관점에서 유일한 소망의 대상이 하나님이었음이 희다는 표현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세상이 오간 데 없이 사라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보이지 않지만 엄연히 계십니다. 불못에 던져질 자들은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을 완전히 등지고 다 사라져버린 이 세상의 있음과 좋음만을 실감하며 살았다는 것을 깨달을 것입니다.
믿음이란 없어질 세상에 가려져 계신 하나님의 크고 흰 보좌를 보는 마음 상태입니다. 큰 보좌를 본다는 것은 당장은 눈에 보이지만 없어져 버릴 세상보다, 하나님의 존재감을 강하게 실감하는 것입니다. 또한 흰 보좌를 본다는 것은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 하나님을 더 좋아해서 마음에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럴 때 크고 흰 보좌에 부합하는 말과 행동을 하게 됩니다.
심판 때에 불못에 던져질 모든 자들은 자기의 죄악을 수긍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이 없어지고 하나님이 보이면 그동안 무시하던 하나님이 이렇게 큰 분이었음에 놀랄 것입니다. 그런데 그 큰 하나님을 한 번도 실감한 적이 없고, 그 실감 속에서 말하고 행동해 본 적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불못에 들어가는 심판을 수긍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쉽게 말해 ‘나 같은 바보 멍청이는 불못에 들어가야 마땅하다.’라고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입술로만 믿는다고 했던 사람들 또한 통탄하고 후회할 것입니다. 입술로만 불렀던 하나님이 이렇게 크고 좋은 분이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체감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까지 없어져 버릴 세상 것들에 대해서만 존재감을 느끼며 벌벌 떨었고, 그것들을 갖지 못해 안달복달하며 살았던 것을 후회하며 불못에 들어갈 것을 수긍할 것입니다. 심지어 입술로는 예수님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을 전혀 실감하지 못했음에 대해 더욱 후회할 것입니다. 실감하지 못한 이유는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고, 믿음이 없어도 종교로부터 ‘당신은 믿는 사람이다.’라고 계속해서 속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믿음이 없습니다. 오직 돈 문제, 건강 문제, 자녀 문제를 생각합니다. 성공과 번영을 향하여 바벨론 음녀의 음기에 취해 내달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믿음의 증거가 하나도 나타나지 않는 삶입니다. 세상에 가려져 있을 뿐이지 진짜 크고, 진짜 좋으신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에 대해서는 실감하고 싸우며 지켜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이 세상에서 성공과 번영으로 축복해준다는 이야기만 합니다. 예배당에 열심히 나오고, 헌금 잘하면 세상에 찌든 마음으로 기도할지라도 잘 믿는 것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렇기에 세상에서 성공하고 번영하면 믿음의 보상을 받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기독교 종교의 기만행위를 언제까지 두고 보시지 않습니다. 주권자 하나님께서 생각이 없지 않으시며 이미 다 알고 계십니다. 그렇기에 이러한 모습이 지속되는 것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안타깝고 속상합니다. 이렇게밖에 못하는 상황이 통탄스럽고 아쉽습니다. 우리라도 정신을 차려야 하겠습니다.
행위책에 우리의 할 말과 행동이 기록되었다는 말씀을 접할 때 ‘어떻게 내가 그렇게 할 수 있을까?’라는 답답한 마음이 들 것입니다. 그동안 사시면서 돈 때문에 신경 쓰고, 배우자 때문에 신경 쓰고, 건강 때문에 신경 쓰고, 다른 사람 앞에서 체면과 위신 때문에 신경 쓰고, 가족의 성공과 번영을 위해 신경 썼던 것에 대해 십분의 일만이라도 하나님 실감을 지켜내기 위해서 싸워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는 주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성공이자 승리가 있습니다. 그 승리로 우리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 성공으로 우리도 성공할 수 있습니다. 진심으로 내 건강을 걱정했듯이, 진심으로 하나님 실감을 보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진심으로 내 경제적 이득을 따졌듯이, 하나님 실감을 따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해보고 행위책에 기록된 대로 하기가 정말로 어려운지 다시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에서 제일 쉬운 일이 있다면 기차가 레일 위를 달리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에서 제일 쉬운 일이 하나님의 행위책에 기록된 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다른 데 가 있으니 어렵게 느껴질 뿐입니다. 마치 논바닥에 있는 기차가 레일 위를 달리는 것이 어렵다고 말하는 셈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쉽고 재미있는 일이 행위책에 기록된 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 들어가서 세상에 대해 죽으면, 세상 실감은 죽고 하나님 실감은 살아납니다. 그럴 때 말하고 행동하는 것처럼 재미있는 일은 달리 없습니다. 아이들이 글씨본 책에서 점선을 따라 연습하는 것과 같습니다. 처음에는 연필심이 부러질 정도로 힘을 주어서 점선을 따라가지만 익숙해지면 그보다 쉬운 일이 없습니다. 하늘에서 아버지가 내 행위책에 기록해 놓으신 대로 말하고 행동하면 정말 재미있는 삶이 시작됩니다.
오늘도 이를 악물고 싸우기를 바랍니다. 나의 마음이 죄와 저주에 찌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계속해서 이 죄와 저주에 찌든 마음을 공략하고 자극해 올 것입니다. 승리는 어린 양과 얼마나 완전한 결합을 하느냐, 모든 순간에 어린 양을 얼마나 기억해 내느냐가 관건입니다. 아무쪼록 심판대 앞에서 하나님이 내 행위책의 페이지를 넘기실 때마다, 생명책에 기록된 이름이 지워지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뚜렷해지고 짙어지는 삶을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공생애의 천년 왕국의 삶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게 하여 주시옵소서. 십자가 붙잡는 싸움을 통하여 끊임없이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세상 것들이 나를 도발하는 현장에서 하나님 실감을 지켜낼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행위책 페이지마다 하나님 실감으로 꽉꽉 채워질 수 있게 해주시고, 우리의 말과 행동이 행위책의 점선에서 벗어나는 영적 양아치의 행동이 다시는 나타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