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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2

녹취문: 일상적인 의식 안에 새 하늘 새 땅 담기_태승철 (계 22:1~5)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4.03.21|조회수39 목록 댓글 0

 

www.everyday01.com -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일상적인 의식 안에 새 하늘 새 땅 담기>의 줄거리 :

새 하늘과 새 땅을 계시하여 주시는 이유는 미래를 단순히 보여주시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 미래를 지금 일상의 삶을 사는 의식 안에 담으라고 보여주신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마음의 의식 안에 담으면 지금 당장 하나님과 어린 양 보좌로부터 생명수의 강이 내 삶으로 흐르기 시작합니다. 열두 달 내내 과일들이 맺히고 모든 관계가 치유되는 일이 벌어집니다. 에덴을 살게 됩니다.

 

일상적인 의식 안에 새 하늘 새 땅 담기

 

(요한계시록 22:1~5)

 

1.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3.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4.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

5.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본문은 계시록의 마지막 장으로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 성에 대한 묘사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일상적인 삶의 현장에서 집, 가족, 직장, 시장, 일가친척, 친구, 이런저런 세상일, 앞날에 관한 것 등을 의식 안에 담고 살았습니다. ‘일상적인 의식 안에 새 하늘 새 땅 담기’라는 제목은 이제부터 새 하늘과 새 땅을 의식 안에 담고 살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지만 사실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 마음의 환경이 되어야만 합니다. 지난 십자가 온라인 교회 모임에서 이와 같은 내용을 함께 나눈 바 있습니다.

이와 연관하여 본문에서 묘사되고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우리 몸이 죽고 나서 예수님의 재림이 임하고, 백 보좌 심판이 있고 난 뒤에 신령한 몸을 입고 부활합니다.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서 모든 성도가 어우러지는 새 예루살렘 성으로 상징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다만 계시록 마지막 장에서 새 하늘과 새 땅과 새 예루살렘 성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는 이유는, 단순히 우리 육체가 죽은 다음에 백 보좌 심판을 거쳐 살게 될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여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은 에덴동산을 염두에 두고 보게 된 계시를 묘사한 것입니다. 우리가 앞으로 신령한 몸을 입고 살게 될 천국은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묘사되는 새로운 삶의 터전입니다. 이러한 계시가 사실임을 확인하고, 이 땅에서 일상을 사는 우리의 의식 안에 담으라는 의도입니다. 베드로후서 3장 12~13절에는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는 시점은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는 동안입니다. 다시 말해 일상적인 의식 안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통해 새 하늘과 새 땅과 새 예루살렘 성을 지금 연결하며 살 수 있습니다. 내 의식 속에 삶의 터전이 될 천국을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합니다. 흔히 천국을 말할 때는 하나님 아버지가 계신 곳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그 천국은 내가 살아야 될 삶의 터전이기도 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는 이렇게 내가 의식 안에 이러한 새 하늘과 새 땅을 담고 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에 대한 대답입니다.

 

본문의 내용을 요약해 봅니다.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이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길 가운데로 흐릅니다. 강 좌우에는 생명나무가 있어서 열두 가지 열매를 달마다 맺습니다. 그 열매 맺는 나무의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해 있습니다. 하나님의 빛이 계속 비치고 사람들의 이마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단순히 신령한 몸을 입고 살게 될 새 하늘과 새 땅의 모습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오해입니다. 우리는 마음이 육체에 묶여 있는 상태를 전제로 하고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계시를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육체와 마음이 묶여있는 상태에서 육체적 환경이나 이유 때문에 겪는 괴로움이 없는 곳이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말씀드렸듯이 이미 살고 있는 동안에 우리의 마음은 육체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은 육체의 환경과 달리 에덴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의 핵심 성분은 기쁨입니다. 그런데 마음과 육체를 묶어서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핵심에서 벗어난 이해를 합니다. 앞에서 본 21장 4절을 보면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사는 자는 육체로 살면서 어떠한 일을 당하든지 울 일이 없으리라는 것입니다. 마음이 육체와 붙은 상태는 마음이 육체로 만나는 물리적 환경에 종속되고 매여 있는 상태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생각하며 에덴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몸이 살아있는 동안에 새 하늘과 새 땅을 살아야 합니다. 본문의 말씀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우리 의식 안에 담을 때 일어나는 일을 묘사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고 있는 동안에, 새 하늘과 새 땅에 있는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생명수의 강이 흘러 내려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백 보좌 심판이 끝난 후에 신령한 몸을 입고 살게 될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묘사라면, 저는 그러한 새 하늘과 새 땅엔 가고 싶지 않습니다.

말씀드렸듯이 본문의 내용은 몸이 살아있을 때 새 하늘과 새 땅을 사는 사람에게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백 보좌 심판이 끝나면 실제로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서 신령한 몸을 입고 살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의식에 새 하늘과 새 땅을 담으면 지금 살아있는 동안 생명수 강은 길 한가운데로 흐르게 됩니다. 생명나무는 열두 달 동안 계속 열매를 맺을 것이고, 그 잎사귀는 만국을 치료하게 됩니다.

여기서 만국을 치료한다는 부분이 쉽게 이해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2절을 보면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라고 했습니다. 신령한 몸을 입고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 산다면 만국을 치료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천국에 들어가서 천사들과 같이 신령한 몸을 입고 살 때, 혹시 감기라도 걸리면 생명나무 잎사귀를 따서 꼭꼭 씹어 먹으라는 것일까요? 여기서 만국이란 사람을 가리킵니다. 한 사람이 육체로 맺는 수많은 관계들을 만국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땅에 존재하고 있는 국가들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육체가 있기 때문에 이루어진 관계를 나라로 이해한다면 그 나라들이 치료를 받는다는 말씀의 의미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는 곧 관계에 대한 치료입니다. 생명수 강이 흐르고 강 좌우에는 많은 생명나무가 있습니다. 에덴동산에는 생명나무가 한 그루 있었는데 본문에는 생명나무가 많습니다. 그 생명나무에서는 열두 가지 열매를 맺고, 그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합니다. 이러한 묘사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동안에 새 하늘과 새 땅을 의식 안에 담고 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세상 사람들은 가정을 의식 안에 담습니다. 직장을 의식 안에 담습니다. 이런저런 세상일들을 의식 안에 담고 삽니다. 그러나 우리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의식 안에 담게 되면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생명수 강이 흐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생명수 강 좌우로 흐르는 생명나무에 열두 가지 열매가 맺히고, 그 잎사귀들이 만국을 치료한다는 것은 나의 몸 때문에 생긴 수없이 많은 관계들의 나라가 치료를 받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와 거의 비슷한 내용이 앞서 본 7장 13~17절에서도 언급되었습니다. 13절을 보면 “장로 중 하나가 응답하여 나에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냐”라고 하였고 이에 대한 대답이 이어집니다. 14~17절에 “…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않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도 상하지 아니하리니 /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앞서 21장 4절의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라고 하였습니다.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시는 일은 육체로 사는 동안에 의미가 있습니다. 변화산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모습으로 변모하셨을 때 베드로는 황홀경에 빠져서 세상일을 깡그리 잊어버린 채 그곳에서 초막을 짓고 살자는 이야기를 합니다. 베드로에게는 꿈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나라를 독립시키고 왕이 되시면 자기는 장관 자리에 오를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을 잊어버립니다. 가족이고 뭐고 다 잊어버리고 그 자리에서 살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들어갈 천국에서의 삶 또한 하나님의 모습으로 변모하신 예수님을 보며 베드로와 같은 반응을 보일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의 천국에 들어가서, 새 예루살렘 성으로 상징되는 모든 성도가 어우러지는 삶을 사는 동안 세상일은 까맣게 잊힐 것입니다. 따라서 천국에서 하나님이 눈물을 닦아주신다는 이야기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이야기하면서 눈물을 닦아주시고 곡하는 일이 없으리라는 말씀이 등장한 것은 사는 동안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의식 안에 담으면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울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 신령한 몸을 입고 들어가서도 눈물을 닦아야 한다면 천국에서도 울만한 일들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라는 이야기가 됩니다.

따라서 계시록 21장과 22장에 나오는 내용들을 신령한 몸을 입고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갔을 때의 일로 해석한다면 오해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오해가 생기는 이유는 본문을 보는 우리의 마음이 육체와 분리된 상태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들어가서 천국을 맛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몸이 살아있는 동안에도 마음은 얼마든지 에덴을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을 경험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말씀을 오해하는 것입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는 말씀을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 현장에 적용해 봅니다. 육체가 만나는 물리적인 환경과 조건을 보지 말고 그 마음 상태를 보겠습니다. 눈물을 닦아주신다고 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돌에 맞아 죽어가는 상황에서 눈물을 흘렸을까요? 상황 자체로만 보면 몸은 고통스럽고 마음도 억울하여 마땅히 눈물이 나올 상황입니다. 그러나 스데반 집사님은 육체가 돌에 맞아 죽는 상황에서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습니다. 또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않다고 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얼굴에서는 오히려 광채가 났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의식 속에서 육체가 죽는 것을 사망이라고 의식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영원한 천국이 열리고 하나님을 보고 있는 가운데 의식 안에서는 ‘이제 내가 죽는구나!’라고 느끼지 않았습니다. 사망이 없어진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히브리서 2장 15~16절을 보면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육체의 죽음을 무서워하는 이유는 마음이 육체에 매여서 종노릇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새 하늘과 새 땅을 의식 안에 담음이란 이 세상이라는 차원에서 공간의 문을 열고 나가 천국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육체의 죽음이란 신령한 새 옷을 입기 위해 기존의 옷을 벗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육체의 죽음을 두려움으로 받아들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 하늘과 새 땅을 일상의 의식 속에 담고 살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시장에서 장을 볼 때도 의식 속에는 새 하늘과 새 땅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가정에서 가족들과 대면할 때 새 하늘과 새 땅이 의식 속에 담겨 있어야 합니다. 직장에서 일할 때도 새 하늘과 새 땅이 의식 속에 담겨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보좌와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생명수 강물이 흘러나오고, 좌우에는 생명나무가 있고 그 생명나무에서는 달마다 열두 과실이 맺히며, 그 잎사귀는 만국을 치료하고, 하나님의 빛 가운데 거하며, 내 이마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기록됩니다. 하나님께서 ‘너는 내 것이다.’라는 소유권이 계속 주장되는 상황에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원수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돌아가셨습니다. 곡하는 것이 없고 고통이 없고 그야말로 육체가 돌에 맞아 죽는 데도 마음은 에덴을 살았던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 때 하늘이 열렸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스데반 집사님에게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베드로후서 3장 13절에서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간절히 소망하면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일상의 의식 속에 새 하늘과 새 땅을 담고 살기에 울 일이 없고, 곡하고 애통할 일이 없으며, 아픔도 없습니다. 또 사도 바울은 이것을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에서 “항상 기뻐하라 / 쉬지 말고 기도하라 /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라고 하였습니다. 본문과 상통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어떻게 항상 기뻐할 수 있고, 쉬지 않고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었을까요? 새 하늘과 새 땅을 의식 속에 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위하여 우리에게는 그리스도 연쇄 과정이 주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이 세상에 대해 죽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을 따라 올라가서 도달하는 곳이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신령한 몸을 입고 예수님과 더불어 아버지를 모시고 성도와 더불어 영원히 살 터전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천국을 일상의 의식 속에 담고 계산하고 고려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그럴 때 생명수의 강은 흘러내립니다.

문제는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그러한 마음가짐을 갖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마음과 육체가 밀착되어 있는 상태를 전제로 말씀을 이해하고자 합니다. 육체가 만나는 환경에 마음과 의식이 매여 있는 상태에서 말씀을 보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러한 모든 말씀들이 말도 안 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신령한 몸을 입고 천국에 들어갔다면 치료가 필요하지 않으며, 눈물을 닦을 일 자체가 일어날 수도 없으며, 아프지 않으리라는 이야기가 나올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이해하는 이유는 사는 동안에 육체와 마음이 붙어 있을 수밖에 없음을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죽은 다음에야 육체와 마음이 붙어서 살 때의 고통이 없어지리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우리는 살면서 얼마든지 마음과 몸의 분리를 이룰 수 있습니다. 십자가 예수님과 연합하여 예수님의 몸을 내 몸으로 입게 되면 마음은 내 몸과 분리됩니다. 이처럼 살아있는 동안에도 마음이 얼마든지 에덴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기에, 본문을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서 살 때 일어나는 일로 오해하는 것입니다. 천국에서도 아플 일이 있고 눈물 흘릴 일이 있어서 하나님이 닦아주시는 곳이라면 무엇 하러 천국을 갈까요? 차라리 세상에서 오래 사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처음부터 이와 관련된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4장 14절을 보면 수가성 여인과의 대화 속에서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수가성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고 생수의 강을 경험하였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면서 예수님과 연합을 이루자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생명수의 강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봅니다. 생명이란 하나님의 속성이 내 안에 들어와 있는 상태입니다. 객관적으로 나와 분리된 상태에서도 하나님은 속성들을 갖고 계십니다. 그 속성이 내 안에 들어오게 되면 그것이 바로 생명입니다. 내 안에 들어온 하나님의 속성이 곧 생명입니다.

하나님의 속성 중의 하나는 유일한 있음입니다. 이 세상 어떤 것도 스스로 있게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유일한 있음이 존재감의 형태로 내 안에 들어오게 됩니다. 또 하나님의 속성은 유일한 좋음입니다. 그 유일한 좋음은 소망의 형태로 내 안에 들어오게 됩니다. 또 하나님의 속성은 이 세상을 향한 유일한 주체성입니다. 그 유일한 주체성은 내가 이 세상에서 무엇을 만나든지 내 주체성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주체성을 인정함으로써 내 안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이때 내게 생명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생명은 곧 내 안에 들어온 하나님의 속성이라는 점을 염두에 둘 때 생명수의 강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생명수의 강은 그 물을 마실 때 하나님의 속성을 내 안에 갖게 됩니다. 이 땅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내 의식 안에 담는 것은 어린 양과 연합함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어린 양과 연합하여 마음이 날마다 하늘로 갈 때 천국은 내 생활권 안에 들어옵니다. 그럴 때 하늘 보좌로부터 생명수 강이 흘러 들어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있음이 내 안에 들어와 있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좋음이 내 안에 들어와 있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주체성이 내 안에 들어와 있는 생명 있는 사람이 됩니다.

이는 곧 나의 삶이 생명나무가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생명나무에서 벌어지는 일은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들이 주렁주렁 열매 맺혀가는 것입니다. 내가 계획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미래를 염두에 두고 계획을 짤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적이고 자발적으로 계획하신 일들이 내가 뭘 하고 안 하고 상관없이 내 삶이라는 영역 안에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잎사귀가 만국을 치료한다고 했습니다. 만국은 내 몸으로 맺는 관계들을 포함하는 영역 전체를 말합니다. 만국의 치료는 곧 관계의 치료입니다. 우리가 마셔야 하는 생명수 강은 결국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통해 주어집니다.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통해 내 마음이 올라가야 되고,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주체성이 내려오는 강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땅을 살고 있는 동안에 늘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으로 충만해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주체성이 나를 장갑 삼으십니다. 이로부터 나무에 달린 잎사귀의 숫자처럼 다채로운 말과 행동이 나타납니다. 내가 몸으로 만나는 모든 관계에서 하는 말과 행동이 생명수 강가의 좌우에 있는 생명나무의 잎사귀들입니다. 그 잎사귀들이 만국을 치료한다는 것은 관계의 치료입니다.

우리에게는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형제, 이웃, 내가 싫어하는 사람, 나를 싫어하는 사람, 내가 좋아하는 사람, 나를 좋아하는 사람을 비롯하여 다양한 관계가 존재합니다. 이 모든 관계는 생명수 강가의 생명나무의 잎사귀가 아니면 치료될 수 없습니다. 나도 그를 좋아하고, 그도 나를 좋아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관계가 좋은 것 같아도 병들어 썩어 문드러지는 관계입니다.

관계가 치료되기 위해서는 내가 생명수 강에서 하나님의 속성을 늘 떠 마실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있음을 떠 마십니다. 하나님의 좋음을 떠 마십니다. 하나님의 주체성을 떠 마십니다. 그러고 있는 동안에 내가 의식하든 못하든 내 삶에는 열두 가지의 열매들이 주렁주렁 맺힙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들이 맺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는 수없이 많은 관계들 사이에서 말하고 행동합니다. 그럴 때 나의 말과 행동이 다 잎사귀가 됩니다. 생명수 강에서 하나님의 속성을 떠 마시는 가운데 말하고 행동하면 모든 관계가 치료됩니다.

관계는 상호성을 띕니다. 만약 원수가 있다면 그는 여전히 날 좋아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관계가 치유되면 좋아하게 된다는 것일까요? 이것도 큰 오해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말하는 관계의 치료란 나를 중심으로 봐서는 안 됩니다. 원수가 나에게 감화를 받아서 나를 좋아하게 되는 것이 치료가 아닙니다. 관계가 치료되었고 건전한 것은 하나님의 기준이어야 합니다. 우리 인간들 상호 간의 기준이 아닙니다. 남편과 아내가 ‘우리는 참 사이가 좋은 잉꼬부부야.’라고 생각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기준에서 볼 때 마냥 좋은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좋은 방향으로 관계는 치료되어야 합니다.

원수가 있어서 나를 계속 싫어하더라도 내가 생명수 강가에서 하나님의 있음을 마신다면, 나를 싫어하는 원수의 있음 대신 하나님의 있음을 갖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원수가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갖는 대신 하나님의 좋음을 소망합니다. 그러한 상태에서는 원수에 대해 말하고 행동하는 잎사귀들이 나타납니다. 내가 하나님의 속성을 갖게 되었다면 설령 원수가 스데반 집사님처럼 나를 돌로 쳐서 죽인다고 할지라도 그 관계는 치료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스데반 집사님은 돌로 치는 자들에 대해 좋은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관계의 치료란 인간의 관점에서 상호 인정하는 좋은 사이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철저하게 하나님 기준을 가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를 지독하게 싫어하는 사람에 대하여 그 사람의 존재감을 품거나 좋음을 소망하지 않고 오직 생명수 강가에서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을 마시는 생명 있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말하고 행동하면 설령 그 원수가 여전히 나를 미워하고, 더 미워할지라도 그 관계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잘했다고 칭찬하시는 모습이 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미래에 국한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계시해 주신 이유는, 우리의 모든 일상과 삶의 현장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의식에 담으라는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의식에서 제외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럴 때 본문에서 묘사되고 있고, 21장에서도 묘사되었던 것처럼 육체로 사는 이 세상 안에서도 울 일이 없어집니다. 울 일이 없어진다는 것은 울 일이 생길 수도 있는 가능성이 있는 현장이기 때문에 의미가 있습니다. 천국은 울 일이 생길 가능성이 없는 곳이기에 눈물을 닦아주신다는 말씀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제까지 이 말씀을 몸이 죽어서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는 일로 여겼습니다. 천국에서 울 일이 없는 것은 대수로운 일도 아닐 것입니다. 울 일이 없어지는 것은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의미 있는 일입니다.

본문에서 묘사된 대로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새 하늘과 새 땅을 의식 안에 담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에서 흘러 내려오는 생명수의 강을 떠 마시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연쇄 과정이 우리의 생명수 강줄기가 되어주십니다. 내 마음이 하늘로 올라간 그리스도 연쇄 과정이 강줄기가 되어서, 내 삶을 생명나무로 만들고 강물을 공급합니다. 그 결과 내 삶이라는 생명나무에서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들이 열매로 맺힙니다. 그리고 몸으로 하는 모든 말과 행동들은 나의 몸으로 맺는 관계의 나라를 치료하는 잎사귀들로 작용하게 됩니다. 이러한 에덴을 살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 성은 미래의 일이 아니기에, 오늘도 일상의 의식 속에서 제일 먼저 담고 삶의 현장으로 나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보여주신바 새 하늘과 새 땅, 성도들이 함께 어우러져 사는 새 예루살렘 성이 일상의 의식 속에 담겨지게 하여 주심으로써, 우리의 일상이 명실공히 마음에서 기쁨을 누리는 에덴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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