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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마라나타!’ 말로만 아닌 실제 준비>의 줄거리 :
‘마라나타!’라는 말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아람어입니다. 재림 예수님에 대한 열망을 표현합니다. 속히 오시겠다고 하신 말씀은, 우리가 사는 동안 재림하실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 말고는 다른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음을 뜻한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교인은 재림 예수님을 맞을 준비만 평생 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준비할까요?
‘마라나타!’ 말로만 아닌 실제 준비
(요한계시록 22:16~21)
16.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 하시더라
17.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18.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19.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20.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21.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십여 년에 걸쳐 창세기 1장 1절부터 말씀을 나누기 시작했던 오늘의 번제 시즌2의 마지막 방송입니다. 긴 기간 동안 말씀을 전할 수 있도록 모든 여건을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며, 함께 해주신 하나님의 아들들인 성도들에게도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살펴볼 본문은 성경 66권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제목에서 말씀드린 ‘마라나타’란 20절에 기록된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는 뜻입니다. 말로만 마라나타를 외칠 것이 아니라 실제 준비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마라나타’라는 표현은 찬송을 인도할 때나 말씀을 전할 때에 수식어처럼 쓰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가정이나 직장이나 혹은 시장에서 삶을 살 때 실제 드러나야 하는 마음 상태입니다. 중요한 것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는 말에 해당하는 마음 상태를 가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속히 오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던 대로 ‘속히’란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태도를 촉구하시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재림하실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것 외에 일체 다른 데 신경 쓸 겨를이 없는 삶을 살라는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오늘 본문에 의거하여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는 뜻의 마라나타를 말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정말 오실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 준비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우리가 알고 있는 신앙적 지식에 기반을 둔 내용이 아니라 본문에 의거한 내용입니다. 교인이란 평생 다시 오실 예수님 맞을 준비를 하며 살아야 되는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 본문은 교인들이 실질적으로 어떻게 오실 예수님 맞을 준비를 하며 살아야 되는지를 가르쳐줍니다. 16절을 보면 예수님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 하시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 맞을 준비함이란 바로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며 광명한 새벽별이신 예수님과 연합하는 것입니다. 다만 이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이어서 17절을 보면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 크기의 공백의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로부터 목마름이 발생합니다. 이 목마름은 오직 하늘 보좌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수 강에서 해결해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를 생명수 강가로 초청하시는 분은 성령과 신부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신부란 바로 교회를 가리킵니다.
우리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며 광명한 새벽 별이신 예수님과 연합하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늘 보좌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수 강에서 목마름을 해결하는 사람들끼리 어우러짐으로 교회를 드러내게 됩니다. 우리는 지금도 교회를 살고 있고 교회를 대표합니다. 그러나 어우러짐이 없다면 교회가 이 세상에 드러날 수 없습니다. 나 홀로 직장에서 가정에서 광명한 새벽 별이신 예수님과 연합하여 생명수 강에서 목마름을 해결하는 사람들 전체가 교회이지만, 그것만으로는 교회의 있음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우러짐이 필요하기에 성령과 신부는 교인 하나하나가 목마름을 해결하고 있는 생명수 강으로 다른 사람들을 초청하게 됩니다.
말씀드린 대로 교회란 광명한 새벽 별이신 예수님과 연합하여 생명수 강에서 목마름을 해결하는 사람들 전체입니다. 다만 각자가 예수님과 연합하여 목마름을 해결하고 있다면 교회는 드러날 수 없습니다. 교회가 드러나야 하는 이유는 이 세상 사람들을 생명수 강가로 초청해야 되고, 광명한 새벽 별이신 예수님께로 초청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오늘 저녁 십자가 온라인 교회 모임에서는 시즌1, 시즌2, 시즌3의 성격 규정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이것은 제가 시즌1은 이러한 성격으로 하겠다. 혹은 시즌2는 이러한 성격으로 하겠다고 생각해서 이루어진 일이 아닙니다. 저는 그때그때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시즌3을 앞두고 보니 시즌1과 시즌2의 말씀의 성격이 뚜렷이 구분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로부터 시즌3의 성격과 정체성 또한 뚜렷이 드러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저녁 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십자가 생활화를 하는 동안 갖게 되는 재림 예수님에 대한 열망과 십자가 예수님에 대한 사랑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재림 예수님에 대한 열망은, 신령한 몸을 입고 함께 연합할 예수님에 대한 그리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 예수님에 대한 사랑은, 이 세상을 사는 동안 내 마음이 연합해야 할 예수님에 대한 애착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곧 영입니다. 재림 예수님에 대한 소망은 영인 마음이 육체라는 옷을 벗은 후에 신령한 옷을 입고 예수님과 함께 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가끔 집에 반가운 손님이 와서 자고 가는 일이 있습니다. 그럴 때 아침에 ‘밤새 잘 주무셨습니까?’라고 묻고, 손님은 ‘아주 편하게 잘 잤습니다.’라는 대화를 하게 됩니다. 그런 것처럼 재림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소망이 이와 같습니다. 한 지붕 아래에서 나도 신령한 몸을 입고, 예수님도 하나님의 모습을 드러내시면서 보좌의 아버지를 중심으로 함께 연합하여 사는 때를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한편 이 세상에서 갖는 십자가 예수님에 대한 애착은, 마음으로 예수님과 연합하기를 바라는 마음가짐입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할 때 내가 예수님과 관련하여 무엇을 그리워하는지가 분명해야 합니다. 지금도 십자가 예수님을 날마다 바라보기 위해 애쓰며 살고 있는데, 지금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과 재림 예수님을 바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이 다른가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이 지상에 있는 교회와 새 하늘과 새 땅에 있는 새 예루살렘 성의 차이를 아는 것과도 연관됩니다. 교회란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마음이 십자가 예수님과 연합한 자들의 어우러짐입니다. 다시 말해 마음으로 십자가 예수님과 연합한 자들이 땅에서 어우러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 예루살렘 성은 신령한 몸을 입게 된 모든 성도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어우러짐입니다. 교회와 새 예루살렘 성도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땅에서 새 예루살렘 성의 어우러짐에 참여할 자로 산다는 것과, 이 땅에서 예수님의 재림을 사모하며 산다는 것이 무엇을 뜻할까요? 그것은 바로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며 광명한 새벽 별이신 예수님과 연합하여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재림 예수님을 준비하는 이유는 예수님을 사모하기 때문입니다. 변화산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모습으로 변모하신 것처럼, 내가 신령한 모습으로 변하여 하나님과 예수님과 천국이라는 한 지붕 아래서 살게 될 날을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에게 이보다 더 좋은 일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세상에서 무슨 일이 있더라도 우리가 신령한 몸을 입고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과 더불어 천국이라는 한 지붕 아래에서 같이 사는 것을 소망하기를 한시도 중단할 수는 없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십자가 예수님과 연합함은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신 예수님과의 연합이고, 광명한 새벽 별이신 예수님과의 연합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라는 말씀은 마태복음 1장 1절의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라는 말씀을 떠오르게 합니다. 이 말씀대로 다윗은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다윗의 뿌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뿌리라고 번역된 헬라어 원문을 보면 그루터기에서 새 가지가 돋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다윗이 그루터기라면 예수님은 다윗이라는 그루터기에서 나온 새 가지로서의 자손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육체적 혈통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인간으로서 아브라함과 다윗과 예수님으로 이어지는 계보는 특별한 유전적 특성을 갖고 있습니다. 이 세 분이 세상을 살던 모습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우리와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아브라함과 다윗과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이 오감을 통해 세상을 접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우리와는 다르게 그분들의 마음에서는 눈으로 볼 수 없고, 손으로 만질 수 없는 하나님이 늘 영광을 받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셨다는 것은, 마음이라는 무대에서 하나님이 언제나 조명을 받고 계셨다는 것이고, 마음에서 가장 환하게 보이는 상태를 유지하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생애를 보면 보통 사람들에게서 가장 강력하게 조명을 받고 환하게 보일만한 대상들을, 마음에서 버리고 죽이는 일을 일생의 업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조상 아브라함의 믿음의 내용이며 하나님과의 관계였습니다. 창세기는 마음의 조명을 받을만한 모든 대상을 버리는 것이 아브라함의 일생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은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 옛날에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이란 안전하게 살 수 있는 터전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왕들조차도 탐내어 빼앗고자 하는 아름다운 아내 사라를 버렸습니다. 또한 아브라함은 새로운 삶의 터전을 버렸고, 심지어 자손에 대한 축복의 약속까지도 버렸으며, 가나안 복지에 대한 약속까지도 버렸습니다. 아브라함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된 창세기 12~25장까지 반복되어 강조되는 핵심은 아브라함은 한 번도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을 바라본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축복을 약속하신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마음에서 약속된 미래의 축복이 환하게 보였던 것이 아니라 미래를 약속해 주신 하나님만 환하게 보였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입니다. 이 점을 놓친다면 아브라함을 끊임없이 오해하게 됩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을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의 일등 되심이 다윗에게 와서는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이루어집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빛이 사라지거나 막히거나 가려지지 않고 유지되는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지고 치열한 삶의 현장을 산 다윗의 삶이 모든 사람에게서 이루어지게 하시려고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라는 말씀에는 이러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어서 예수님을 광명한 새벽 별이라고 했습니다. 가로등 하나 없던 그 시절에 새벽은 가장 어두운 때였습니다. 그 짙은 어둠 속에서 새벽 별은 더욱 영롱하게 비칩니다. 수많은 별들도 있지만 예수님께서 하필이면 광명한 새벽 별로 언급되신 이유는 새벽은 여명과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여명이 시작되기 전 가장 어둠이 짙을 때가 새벽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광명하더라도 새벽 별은 태양이 뜨고 나면 흔적도 없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이 말씀이 예수님을 가리키기에는 너무 부족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광명한 새벽 별이라는 예수님의 별칭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선이해가 필요합니다. 이것은 이 땅과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천국을 같이 생각해서 나온 표현입니다. 천국은 우리가 신령한 몸을 입고 살게 될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지금 천국이라 부르는 그곳은 육체의 몸을 입고 있는 동안에는 아직 내가 살 땅이 아닙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영광의 빛으로 가득한 곳입니다. 반면에 이 땅은 예수님이 오셨어도 여전히 어둠이 깔려있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이 땅 전체를 밝히는 태양이 아닙니다. 이 땅은 여전히 어둠 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둠이 가장 짙은 해뜨기 직전의 광명한 새벽 별 같은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이 세상은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어둠의 세상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어둠의 세상에서 광명한 새벽 별이십니다. 앞서 아브라함과 다윗과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몸을 입은 인간이었지만, 마음속에서 하나님이 조명을 받아 일등으로 환하게 보이는 상태였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있는 자가 아니기에 무언가의 존재감을 느껴야 하고, 마음이 비어있기에 무언가를 열망해서 채워야 합니다. 하나님이 환하게 보인다면 하나님으로 채우고자 하게 됩니다. 존재감을 느낄 때도 하나님이 일등으로 환하게 보이기에 하나님의 있음만을 느끼게 됩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은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브라함과 다윗과 같은 상황을 실현시켜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이 광명한 새벽 별이신 이유에 대해서는 먼저 어둠 속에 있는 상태가 무엇인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어둠 속에 있을 때와 광명한 새벽 별을 따라 빛으로 가득한 광명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예를 들어 돈 문제나 건강 문제가 생겼다면 내 마음에서 돈 문제나 건강 문제가 환하게 보일 것입니다. 그것이 어둠 속에 있는 상태입니다. 마음속에 자녀가 환하게 보이면 보일수록 그 삶 전체는 어둠 속에 파묻히게 된 것입니다. 이 세상 것들이 환하게 보일수록 어둠입니다. 환하게 보이는 데 어둠 속에 있다는 것이 참 역설적이고 모순적입니다. 이 세상 것들이 영광을 받고 환하게 보여서 그것만 신경 쓰고 생각하는 것이 어둠의 상태입니다. 그 상태에서 우리가 바라봐야 될 광명한 새벽 별은 바로 십자가의 예수님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이 세상에서 어떤 문제나 대상을 보고 있는지 점검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마음이 세상의 문제나 대상들을 보고 있다면 어둠 속에 있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말과 행동은 전부 어둠에 찌든 말과 행동이 나오게 됩니다. 빛에서 발산되는 말과 행동이 아닙니다. 세상이 환히 보이는 어둠이라는 역설적 상황 속에서 우리가 바라봐야 될 광명한 새벽 별은 십자가 예수님입니다. 십자가 예수님을 보자마자 세상 것을 환히 보던 상태는 꺼져 버립니다. 십자가 예수님을 바라볼 때 세상 것을 바라보지 않게 됩니다.
바라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상 것을 바라보지 않고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 것을 보는 중에 세상 것 너머로 십자가를 바라볼 수는 없습니다. 마음으로는 세상 것을 바라보면서 손에는 십자가를 쥐고 효과가 있기를 바라는 것은 십자가 사건에 대한 잘못된 이해입니다. 마음에서 세상을 바라보지 않고자 할 때 두려움이 생깁니다. 두렵기 때문에 믿지 못합니다. 그러나 내가 보지 않는다고 해서 세상일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주권적으로 떠맡으십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세상 바라보는 것을 멈추지 못합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예수님의 재림은 준비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준비되지 않는다면 신령한 몸을 입고 예수님과 연합할 수도 없습니다.
16절을 보면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 계시의 중심인 어린 양이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며 광명한 새벽 별이라는 말씀이 이어집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려면 하나님의 영광이 늘 유지되는 마음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렇게 유지되기 위해서는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서 광명한 세계로 들어가야만 합니다. 그러려면 마음이 이 땅에 있으면서 세상 것을 환히 보는 어둠의 상태에 있지 말고 광명한 새벽 별인 십자가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광명한 새벽 별이신 예수님을 제외한 다른 모든 것들은 어둠에 묻혀버릴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깜깜한 새벽에 광명한 새벽 별이 떠 있으면 다른 것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별만 보이는 것과 같습니다.
바로 이렇게 이 세상 것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오직 광명한 새벽 별이신 십자가 예수님만 보일 때, 예수님은 나를 인도하셔서 하늘로 올라가십니다. 이로부터 아브라함과 다윗에게서처럼 하나님만이 내 마음에서 영광을 받으시는 상태가 유지됩니다. 이 상태가 바로 재림하실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 이야기가 아닌 본문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는 말씀에 담겨 있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예수님이 다시 오시기를 바란다면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며 광명한 새벽 별이신 예수님과 연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아브라함과 다윗에게서처럼 하나님이 내 마음에서 일등으로 조명을 받으셔야 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광명한 새벽 별이 깜깜한 하늘에 떠 있는 것과 같이, 이 세상에서 환히 보이던 모든 것들이 꺼져서 깜깜함 속에 묻혀버리고, 오직 십자가 예수님만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생명수 강이 흐르게 됩니다.
그동안 회사에서 승진에 목말랐다면 어둠의 세상을 살았던 것입니다. 승진에 목말랐던 내가 광명한 새벽 별을 보고, 하나님의 영광이 내 마음에서 사라지지 않는 상태가 유지되고 보니, 더는 승진에 목말라하지 않게 됩니다. 몸은 세상에 살지만 마음은 생명수 강에서 물을 마시기 때문에 세상에 대한 목마름이 없습니다. 승진에 목말라하던 사람이 어느 날 뇌졸중으로 죽었다고 해보겠습니다. 이 사람은 재림 때 깨어나서 예수님을 만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자녀의 형통에 목말라하다 죽었습니다. 재림 때 깨어나더라도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하늘로 올라간 내 마음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있는 가운데 생명수 강에서 물을 마시게 됩니다. 세상에 대한 목마름이 하나도 없는 상태가 되어야 예수님 재림을 준비할 수 있는 자가 됩니다. 세상에 대한 목마름으로 속을 태우다 죽는다면 절대로 신령한 몸을 입고 예수님과 함께할 수는 없습니다. 다른 성도들과 어우러지면서 새 예루살렘 성의 주민이 될 수도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세상에 대한 목마름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목말라하는 세상 것을 환하게 보는 어둠 속에 있는 상태입니다. 그 상황을 빨리 광명한 새벽 별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깜깜함으로 바꿀 수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 예수님만 바라보고 이 세상을 바라보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 문제들은 해결하는 것이 아니고, 해결되리라 믿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한 마음은 결국 세상 문제를 바라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만을 바라보며 세상에 대해 죽어야 합니다. 앞서 20장 4절에서는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세상에 대해 목 베임을 당해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육체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면 꼼짝할 수 없듯이, 우리의 마음도 주님의 십자가에서 꼼짝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내 마음에서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세상에 대해서 죽고 깜깜해지면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목마름이 없어지는 생명수 강물을 먹게 됩니다.
17절을 보면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여전히 세상 것이 환하게 보이는 어둠 속에 있습니다. 그 환하게 보이는 세상 것들에 대한 목마름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생명수 강에서 목을 축이며 해갈하고 있는 교인들이 어우러짐으로써 이 세상에 교회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 세상을 향해 초청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 세상 사람들을 예수님의 십자가 자리로 초청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돈에 목말라하고, 건강과 장수에 목말라하고, 성공과 형통에 목말라하며, 명품에 목말라합니다. 그러나 십자가 자리는 세상의 성공과 번영도 없는 자리이며, 형통도 없는 자리이고, 명품도 없는 자리입니다. 마음이 거지 나사로가 되는 자리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세상 사람들을 초청하는 교회는 뻔뻔하고 과감하게도, 온통 세상 것만을 밝히 보며 목말라 추구하며 달려가고 있는 자들에게 ‘오라! 세상을 향한 너희의 모든 목마름은 하늘에서 오는 생명수 강으로 다 해결될 것이다!’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십자가에는 세상적인 가치가 없습니다. 번영도 없고, 성공도 없고, 형통도 없고, 명품도 없고, 건강과 장수도 없습니다. 마음이 이 세상에 대해 죽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이처럼 이 세상에서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는 모든 가치가 아무것도 없는 자리로 오라고 초청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미쳤다고 볼 수밖에 없고 반응하지 않을 것 같은 이 말씀을 듣는 자들이 있습니다. 지금 세상 속에서 세상을 향해 목말라 추구하고 달려가는 자들 중에 그러한 자들이 있습니다. 교회가 요청하는 십자가는 마음이 돈과 결별하는 자리입니다. 마음이 성공과 결별하는 자리입니다. 마음이 건강과 장수와 결별하는 자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예정하신 사람은 이러한 교회의 요청을 듣습니다.
교회는 이 땅에서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며 광명한 새벽 별이신 예수님과 연합하여 생명수 강에서 모든 목마름을 해결하는 교인들의 어우러짐입니다. 이러한 교회가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세상 사람들을 초청하는 삶을 사는 것이 재림 예수님 맞을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를 담고 있는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는 뜻의 마라나타를 기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모두가 하루 빨리 예수님처럼 신령한 몸을 입고 아버지 모시며 한 지붕 아래에서 아침, 점심, 저녁을 함께하는 삶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또 하나님이 예정하신 우리의 형제들이 모두 정체를 드러내 같이 어우러져 함께 살면 좋겠습니다. 이러한 삶을 예비하기 위하여 필요한 말씀대로 우리가 준행할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