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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2

녹취문: 목구멍이 포도청인 두아디라 교회_태승철 (계 2:18~29)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3.12.11|조회수97 목록 댓글 0

 

www.everyday01.com -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목구멍이 포도청인 두아디라 교회>의 줄거리 :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말은 먹는 입이 가장 무섭다는 뜻으로, '먹고 살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하게 된다'라는 의미입니다. 이 속담은 실제 삶에서 가장 우선적인 관심거리가 무엇인가? 라는 점을 질문하게 합니다. 두아디라 교회의 잘못은 이렇게 하나님보다 더 우선한 관심거리를 붙잡고 신앙을 그것에 억지로 맞추는 정당화의 오류를 범한 것입니다.

 

 

목구멍이 포도청인 두아디라 교회

 

(요한계시록 2:18~29)

 

18.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시되

19.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20.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21.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자기의 음행을 회개하고자 하지 아니하는도다

22.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에 던지고

23.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24.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은 없노라

25.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26.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27. 그가 철장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28.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

29.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포도청은 지금의 경찰서와 같은 곳이었기에 일반 백성이 포도청에 불려가는 것은 무서운 마음이 드는 장소였습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함은 먹고사는 일이 포도청보다도 더 무섭기에 못 할 짓이 없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속담에서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내가 실제 삶을 살아갈 때 가장 우선적이고 절대적인 관심사가 무엇인가를 묻게 합니다.

여러분에게 질문해 봅니다. 살아가는 동안 마음에서 하나님 자신보다 더 우선하는 관심거리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존재감을 잊어버릴 정도로 내 마음을 지배하는 절대적이고 우선적인 관심거리는 무엇입니까? 어쨌든 사람은 삶의 현장에서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살다 보면 어쩔 수 없다고 느끼며 하나님 자신을 제쳐두고라도 붙잡아야 할 것 같은 관심거리들이 끊임없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정말로 예수님을 믿는다면 이러한 관심거리들이 등장할 때 그것을 용납하거나 정당화해서는 안 됩니다. ‘살려면 어쩔 수 없다. 입에 풀칠하려면 어쩔 수 없다.’라는 자기 정당화나 변명이 신앙 안으로 들어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란 하나님 한 분만을 유일한 관심거리로 삼는 일이 직업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을 믿는다면 직업이 바뀌어야 합니다. 이제까지 해오던 모든 세상적인 의미의 직장은 하나님을 관심하는 본업을 실행하는 현장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직장에 나가 직업 활동을 한다는 것의 의미 또한 믿지 않는 사람들과 같을 수 없습니다.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직장이란 하나님을 더 많이 벌기 위한 행동의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대기업 무역상사에 취직한 직원이라고 해보겠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직장에서도 하나님을 많이 버는 것이 일입니다. 이러한 상태는 다른 사람들과는 소원의 내용이 다릅니다. 다른 직원들은 승진하고 월급을 많이 받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나는 하나님에 대한 소원 때문에 다른 직원들과 같은 소원이 생기지 않습니다. 승진을 하든 못하든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으로 배부르고 싶을 뿐입니다. 남들이 승진을 원하는 만큼 하나님을 원해서 승진에 대한 소원이 없어집니다.

이것은 비단 직장에서만 적용되는 일이 아닙니다. 세상에 대해 갖게 되는 모든 바람이 하나님을 향할 때 세상에 대한 바람은 없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버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온전히 벌면 세상에 대한 어떠한 바람도 생기지 않는 상태가 됩니다. 가정이든 직장이든 우리의 본업은 하나님 자신을 많이 벌어 하나님 부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본업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선이해를 가지고 예수님께서 두아디라 교회에 주신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8절을 보면 두아디라 교회와 관련하여 예수님의 모습을 묘사하기를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시되”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묘사에는 앞서 살펴보았던 버가모 교회와 관련된 내용과 유사점과 차이점이 있습니다.

앞서 본 16절에서 버가모 교회에 주신 말씀을 떠올려 봅니다.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라고 하였습니다. ‘입에서 나오는 검’은 오류와 잘못과 곡해를 진리로부터 도려내어 분리시킨다는 뜻이 있습니다. 여기서 날 선 검이 도려내는 대상은 고의가 아닌, 몰라서 빠진 잘못된 상태입니다. 한편 본문에는 예수님의 눈이 불꽃 같다는 묘사가 등장합니다. 이것은 잘못을 의도적으로 정당화하고 자기 자신을 속이고 남도 속이는 상황을 예수님께서 보고 계심을 의미합니다. ‘날 선 검’은 잘못 그 자체를 향하지만 ‘불꽃 같은 눈’은 잘못을 정당화하는 인격을 향합니다. 날 선 검보다 무서운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어서 ‘예수님의 발이 빛난 주석과 같다’고 했습니다. 앞선 1장 15절에서도 예수님의 모습을 “그의 발은 풀무 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라고 묘사한 바 있습니다. 주석은 당시에 가장 단단한 물질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발이 빛난 주석 같다’는 것은 우리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과 연합할 때 하나님 이외의 모든 다른 관심거리들은 예수님의 발에 밟혀 깨뜨려져서 없어지는 효과가 나타남을 의미합니다.

각 교회들과 연관되어 묘사되는 예수님의 초상화는 내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의 예수님과 연합했을 때 나타나는 효과를 제시해 주시는 그림입니다. 쉽게 말해 ‘예수님과 연합했을 때 예수님은 내게 어떤 분이신가? 예수님과 연합하면 내게 어떤 효과가 나타나는가?’를 보여주십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 같다’라고 묘사되신 예수님께서 두아디라 교회에 대해 책망하시는 의미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본문 말씀을 이해하기에 앞서 우리는 두아디라 교회가 처해있던 시대적 상황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유럽 최초의 교회는 빌립보 교회였습니다. 이 빌립보 교회의 시작에서 자기 집을 모임의 장소로 제공한 사람이 자주 장사 루디아입니다. 그리고 루디아는 바로 두아디라 출신이었습니다.

루디아가 자주 장사였다는 사실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두아디라는 상공업이 발달한 도시였습니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염색 공업으로 유명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두아디라는 다른 도시와 마찬가지로 우상숭배가 만연해 있었고 이와 관련된 의식 속에서 행음과 우상의 제물을 먹는 문제 등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두아디라만의 특징적인 부분이 하나 있습니다. 상공업과 염색 공업이 발달함에 따라 다양한 동업조합이 존재했다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은 이러한 배경을 염두에 둘 때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19절을 보면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사업’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에르가(ἔργα)는 ‘행위’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네 사업’이란 뒤에 따라오는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포함하는 전체적 행위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에 대한 말씀에도 동일한 표현이 사용되었습니다. 이러한 행위가 나타난 두아디라 교회는 바람직한 일을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바람직한 교회의 분위기를 깨뜨리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20절을 보면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마땅한 덕목이 전체적으로 잘 이루어지던 바람직한 분위기 속에서 거짓 여선지자 이세벨이 등장하였고, 이세벨의 교훈을 따르는 교인들이 점차 늘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세벨과 관련해서 행음과 우상의 제물을 먹음이 문제시되고 있습니다. 언뜻 보면 이러한 문제는 버가모 교회와 동일해 보입니다. 버가모 교회는 니골라당의 교훈을 좇아서 행음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었고, 두아디라 교회는 거짓 여선지자 이세벨의 말을 듣고 행음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어떤 차이가 있다는 것일까요? 바로 여기에서 두아디라 지역의 배경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두아디라는 상공업 도시로서 특히 염색 공업이 발달해 있었고 이와 관련된 동업조합들이 존재했습니다.

버가모 교인들이 니골라당의 교훈을 따라 행음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었던 것은, 세상친화적인 인간의 죄적본능에 자극을 받아 일어난 잘못이었습니다. 니골라당은 육체에 기반을 둔 죄적 본능을 활성화시킴으로써 교인들로 하여금 육체로 접하는 일들에서 만족과 기쁨을 추구하도록 만들었던 것입니다. 한편 이세벨의 경우는 결과적으로 똑같이 행음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한 것은 동일하지만 그 내부 사정이 다릅니다. 동업조합의 활동과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었습니다. 각 분야의 다양한 동업조합은 친목을 도모하기 위한 명분으로 모임을 가졌습니다. 그 모임을 위해서는 음식이 필요했고 우상에게 바쳐졌던 제물들이 올라왔습니다. 또한 우상의 제물을 먹고 난 뒤에는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는 의미의 행음이 이루어졌습니다.

이세벨은 구약의 배경을 담고 있습니다. 이세벨은 시돈의 공주로 북 왕국 이스라엘의 왕 아합에게 시집와서 왕비가 됩니다. 이때 이세벨은 친정에서 섬기던 우상이었던 바알와 아세라를 가져와 북 왕국 이스라엘에 퍼뜨립니다. 당시 바알과 아세라는 풍요와 다산을 관장한다고 여겨지던 신이었습니다. 이세벨이 왕비로서 내걸었던 국가적 목표는 한 마디로 ‘잘 살아보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자 되기를 원하고, 부흥하여 번영하기를 원한다면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라는 것입니다. 이세벨은 이것을 국가적 모토로 내세웠습니다. 이세벨이 두아디라 교회에서 활동했던 것에도 이와 같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두아디라 지역의 동업조합에 참여하던 교인들은 반드시 행음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을 꺼려하여 동업조합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동종계열의 사업을 해나갈 때 조합원 권리에 제약이 걸리게 되고 재정적 불이익을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이 상공업자들이 많았던 두아디라 교인들에게는 큰 고민이었습니다. 그런데 거짓 여선지자 이세벨이 교회 안에 들어와서 이 갈등을 해소해 줍니다. 종교적 이유로 신전에 가서 우상의 제물을 먹거나 행음을 한다면 하나님을 배신하는 것이지만, 동업조합은 애초에 종교적 동기를 가진 모임이 아니며 사업의 연장선에서 일어나는 일이기에 하나님을 배신하는 일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고민하던 두아디라 교인들에게는 이것이 탁월한 해결책으로 여겨졌습니다. 동업조합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재정적으로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 시대에도 어렵지 않게 적용해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대기업에서 상무 직책을 갖고 계신 안수집사님이 있다고 해보겠습니다. 요새는 드문 일이겠지만 예전만 해도 회사에 술상무라 불리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술상무는 술과 여자로 바이어들을 접대하는 사람입니다. 이 안수집사님이 그러한 접대 업무를 맡게 되었다면 이분은 업무상 두아디라 교인들과 같은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상 두아디라 지역의 문화는 단순한 접대 문화를 넘어서 훨씬 더 강압적이고 무거운 부담감을 주었을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거짓 여선지자 이세벨이 나타나 해결책을 제시했고 많은 교인들이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두아디라 교회의 상황을 버가모 교회의 상황과 비교해 봅니다. 버가모 교회에서는 니골라당이 육체에 기반을 둔 죄적 본능을 자극했습니다. 육체를 갖고 있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만족과 기쁨을 추구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니골라는 구약에서 선민들을 타락시켰던 발람과 같은 뜻을 갖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발람은 ‘백성을 삼킨다.’는 뜻을 가진 이름입니다. 백성들이 자기 속에 있는 죄악의 본성에 의해서 삼킴을 당했다는 의미입니다. 니골라는 ‘백성을 이긴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한편 이세벨에 의한 두아디라 교회의 타락상은 보다 적극적입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어쩔 수 없어서 하는 일로 죄악을 무마하고, 직업 활동의 연장선에서 행음과 우상의 제물을 먹을 수밖에 없다고 정당화를 할 수 있도록 바탕을 깔아주었던 것입니다.

두아디라 교인들은 안 그래도 재정적인 불이익을 당할까 두려워하고 있었고, 동시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우상의 제물을 먹고 행음하는 일에 대한 껄끄러움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고민으로 많은 교인들이 거짓 여선지자 이세벨이 내놓은 해결책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죄악을 정당화하며 행음과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두아디라 교인들의 생각은 다음과 같았을 것입니다. ‘사업을 하지 않거나 장사를 하지 않을 수는 없지 않은가, 당장 동업조합에 가입하지 않으면 수입이 절반으로 줄어들 텐데, 종교적 신념을 지키겠다고 이런 손해를 감수하는 것이 맞는 일인가? 이것은 너무 어려운 요구이며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타협하고 있으며 오히려 이것이 대세이다. 나의 행위는 종교적 신념과는 무관한 일이며 사업상 필요를 위한 일일 뿐이다. 그러므로 나는 직업 활동의 연장선에서 행음과 우상 제물을 먹지만 여전히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섬기는 그리스도인이다.’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식의 자기 정당화는 신앙과 교회를 뿌리째 부식시켜 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갈등을 겪는 관심거리들의 대결상황을 파악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선적인 관심이 되느냐? 아니면 세상의 일들이 절대적 관심거리라서 하나님에 대한 관심을 부차적인 것으로 미루느냐?’라는 갈등이 존재합니다. 이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갖고 있는 관심거리들이 형통하고 부흥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두아디라 교회가 받은 책망과 동일한 상황에 놓여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건강에 큰 관심을 기울입니다. 돈 버는 일에 큰 관심을 기울입니다. 자녀의 형통에 큰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런데 정말로 예수님을 믿는다면 이런 일들이 관심거리로 남아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부모라면 자녀와의 관계에서도 하나님을 유일한 관심으로 삼고 하나님을 벌 수 있어야 합니다. 이는 곧 자녀들을 향해 그동안 쏟았던 모든 소원을 하나님께로 온전히 몰입함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자녀를 향해서는 아무런 소원이 생기지 않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유일한 관심의 대상으로 삼고 하나님을 벌어서 하나님 부자가 되려고 하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건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아버지의 사랑과 주권에 건강을 일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건강을 향해서 가졌던 내 모든 관심을 하나님께 돌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더 많이 가졌으면 좋겠다고 소원할 때 건강에 대해서는 어떠한 소원도 갖지 않게 됩니다. 건강을 온전히 아버지의 주권에 일임할 때 하나님을 벌게 됩니다. 그런데 건강에 대한 관심, 돈 버는 일에 대한 관심, 자녀의 형통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습니다. 이런저런 세상적인 관심을 정당화합니다. 형통하고 번영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합니다.

왜 예수님의 발이 빛난 주석 같다고 묘사되었을까요? 우리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과 연합할 때 마음은 이 세상에 대해 죽습니다. 이는 곧 세상에 대한 모든 관심거리가 예수님의 주석 같은 발에 밟혀서 으깨지고 깨뜨려짐을 의미합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곧 세상에 대한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세상에 대한 관심이 여전히 살아있다면 예수님과 연합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상태에서는 관심거리들에 종사하고 매진하고 몰입하는 것을 정당화하게 됩니다. ‘이 정도 쉼은 있어야 한다. 이 정도 여지는 있어야 한다. 이것은 몸을 입고 세상을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라는 자기 정당화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결코 믿음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 해오던 일들을 해야 되느냐 말아야 되느냐 고민하는 것 자체가 믿음이 아닙니다. 정말로 예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만이 관심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만이 우선적 관심거리임은 못 박아야 하는 절대적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상태를 유지하면서 직장생활도 하고 가정생활도 해나가는 것입니다.

 

26절을 보면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27~28절에서는 “그가 철장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는 말씀이 이어집니다. 그릇은 무엇인가를 담는 도구입니다. 여기서는 관심을 담는 마음을 상징합니다. 만국을 다스린다는 것은 만국의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담아야 되는 질그릇으로 만들어졌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마음이라는 질그릇에 하나님을 유일한 관심거리로 담지 못한 채 다른 관심거리들을 채웁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이외의 대상들을 담은 질그릇을 철지팡이로 깨뜨리시고 부수신다는 의미입니다.

내 마음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과 함께 죽음으로써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게 되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께서는 내 안에서 이 세상에 대한 모든 관심거리를 죽이십니다. 그리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만이 나의 관심거리가 되게 만드십니다. 우리가 이 일을 하지 않는다면 예수님께서 철지팡이를 드십니다. 하나님 이외의 세상 것들을 관심거리로 담은 질그릇을 깨뜨리시고 부수십니다. 예수님의 발이 빛난 주석 같다는 의미가 이와 같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십자가의 예수님과 연합하여 내 안에서 다른 관심거리들이, 예수님의 빛난 주석 같은 발에 밟혀 깨뜨려지게 만든 사람은 예수님과 같은 권세를 주신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과 같은 권세를 주신다는 것은 나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을 볼 때 질그릇 안에 하나님을 담지 않고 이 세상을 담고 있는 상태를 뚜렷하게 볼 수 있게 됨을 의미합니다. 그 상태가 얼마나 고약하고 부패하고 더럽고 부정적인 상태인가를 알아보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그러한 상태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위치에 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인간은 하나님을 담도록 만들어진 질그릇입니다. 이러한 인간이 하나님 이외의 관심거리를 담을 때 하나님께서 보시는 관점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 이외의 관심거리를 마음에 담고 그것에 종사하는 것 자체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마음 상태가 되는 것이, 철장을 가지고 만국을 다스리시는 권세를 주님과 함께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한편 ‘새벽 별’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주석가들은 새벽별의 의미를 해석함에 있어서 계시록 22장 16절을 언급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별이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내용을 근거로 하여 본문의 새벽별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맥락은 단순히 예수님을 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앞서 등장한 25~26절 말씀을 보면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있는 것’이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이르신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에 대한 증언입니다. 이외에는 교인들이 가질 수 있게 주어진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연쇄 과정에 대한 증언을 가졌다면 이미 예수님을 가진 것입니다. 예수님을 가져서 이기는 사람에게 또 예수님을 준다는 것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여기서 새벽별은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의미를 쉽게 이해하기 위해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동업조합에 가입하지 않은 교인들은 사업의 전망이 불투명해질 것입니다. 미래가 어둠 속에 묻혀버리게 된 상황이라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직장에서 직원들은 누구나 승진이나 월급 인상을 소원합니다. 그래서 일을 열심히 하고 상사에게 잘 보이고자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직장에서도 관심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뿐이고, 소원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 부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에 대한 관심이 직장 활동의 목표가 될 때 직장생활의 앞날이 까마득하다고 느껴질 것이라 예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다릅니다. 여러분이 직장이든 가정이든 처한 환경에서 십자가의 예수님과 함께 죽는다면, 하나님을 제외한 모든 관심거리는 예수님의 빛난 주석 같은 발에 밟혀 깨뜨려져 없어집니다. 그렇게 될 때 어두운 미래가 아니라 빛나는 광명의 아침이 임하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두아디라 교인들이 동업조합에 가입해서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일을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직장에서 동료 직원들과 똑같이 승진을 원하고 보너스를 원하고 월급 인상을 바랄 수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 상사에게 잘 보이고 성과를 올리는 일에 관심을 쏟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 찾아오는 것은 밝은 미래가 아니라 칠흑 같은 어둠입니다. 점점 더 깊은 어둠으로 빠져들고 있음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는 예수님의 철지팡이에 깨뜨려지는 일만 남은 모습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들의 삶은 세상의 관점에서는 어두워 보이고 불투명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정에 있든 직장에 있든 오직 그리스도 연쇄 과정 속 예수님을 의식에서 놓치지 않는 자들은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유일한 관심거리로 붙잡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환한 아침을 예시하는 새벽별을 선물로 받게 됩니다. 우리는 미래가 불투명해질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일의 전망이 어두워질 것에 대해 주춤거릴 필요가 없습니다. 과감하게 삶의 현장에서 모든 관심거리를 예수님의 빛난 주석 같은 발로 밟아서 깨뜨리고 부숴 버려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만을 유일한 관심거리로 붙잡는다면 밝음과 광명의 세계 속에서 거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본문 말씀의 요지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삶에서 절대적으로 여겨지는 우선적 관심거리들이 끊임없이 우리의 마음을 도발합니다. 여기서 변명하거나 정당화하며 그러한 관심거리들을 붙잡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대신 오직 십자가의 예수님만을 기억함으로써 예수님 안에서 아버지 한 분만을 유일한 관심의 대상으로 담는 질그릇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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