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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3

녹취문: 창조의 공터를 침범하지 말라_태승철 (창 1:1~2)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4.04.11|조회수156 목록 댓글 0

 

www.everyday01.com -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창조의 공터를 침범하지 말라>의 줄거리 :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정말 장엄한 선언과 함께 성경은 시작합니다. 이 두 구절에서 의미하는 바가 성경 66권 전체를 꿰뚫고 있습니다. 이 장엄한 선언 속에 담긴 의미가 지금 내게는 어떻게 살아서 적용되는 지를 봅니다.

 

창조의 공터를 침범하지 말라

 

(창세기 1:1~2)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오늘은 말씀으로 드리는 오늘의 번제 시즌3의 첫 번째 설교입니다. 한 가지 광고 말씀을 드리자면 십자가 복음 방송의 홈페이지가 완전히 갱신되었습니다. 특히 동서남북 교회의 진영과 관계해서 신청을 홈페이지에서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현재 동서남북 교회들의 현황도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무쪼록 새로 만들어진 십자가 복음 방송의 홈페이지를 다양하게 이용하셔서 유익을 누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본문은 참 장엄한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1~2절을 보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라고 하셨습니다. 마음을 가다듬고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소름이 끼치는 느낌이 듭니다. 창조의 공터란 조물주이신 하나님 아버지가 창조 작업을 하시는 현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공터에서 창조 작업을 하시고, 그 만드신 피조물들로 채워 가신다는 의미에서 ‘창조의 공터’라고 말을 만든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이 창조의 공터를 채우시는 것입니다. 2절에서 언급된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곳이 바로 창조의 공터입니다. 이 창조의 공터는 우리가 절대로 침범해서는 안 되는 곳입니다.

창세기 1장에 나오는 태초의 창조 이야기는 창조의 과정을 이론적으로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쉽게 말해 창조 과정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들에게 창조주 하나님의 엄연한 계심을 알리고, 그 창조주 하나님의 계심의 사실을 선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엄연한 사실을 사람들에게 변명하려 하지 않습니다. 단지 선언하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설득하거나 동의를 구하지 않고 온 세상에 알릴 뿐입니다.

이처럼 창세기 1장은 창조주 하나님의 계심의 사실을 선포하십니다. 이것은 먼 산을 바라보듯이 창조주를 구경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피조물로써 창조주와 더불어 관계하라는 요청이 들어있습니다. 그렇다면 피조물인 인간이 피조의 세계 속에 사는 동안에 창조주 하나님과 어떻게 관계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그 대답을 1~2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피조물이 창조주를 관계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식을 소개합니다. 그것은 바로 창조의 공터를 침범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1~2절을 이해하기 위해 세밀하게 들여다보면 우리의 의식과 신경을 가장 크게 자극하는 요소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2절에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본격적으로 창조 작업에 돌입하시지 않았는데 이미 땅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9절에 “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라는 말씀대로 우리가 아는 땅은 창조의 과정 중에 만들어졌습니다. 궁창과 바다와 해와 달도 마찬가지로 이제부터 만들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빛이 있으라”라는 말씀으로부터 시작되는 창조 작업 첫 단계 이전에 이미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라는 구절이 등장하는 것은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이 구절을 이해하지 못하기에 다음부터 이어지는 성경 구절들은 아무리 읽어도 창조주 하나님을 어떻게 관계하는지를 알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창조가 이루어지기도 전에 언급된 땅이란 무엇일까요? 이 땅은 사도신경 첫머리에 등장하는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에 등장하는 천지(天地)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땅으로 언급된 것은 하나님이 앞으로 피조의 세계를 창조하시면 피조물들이 있게 될 장소입니다. 주님이 주기도문에서 하나님이 계시는 곳에 대해 “하늘에 계시는 우리 아버지”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하늘은 해와 달이 떠 있는 하늘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계시는 곳을 하늘로 표현한다면, 피조물들이 있는 곳을 땅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 2절에서 언급된 땅의 정체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면 오해가 빚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본문 2절에 언급된 땅을 창조 이전의 태곳적에 이미 원시적인 재료가 있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그 재료로 세상과 피조물들을 만드셨다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창조에서 완전히 잘못된 이해입니다. 땅은 하나님이 만드실 피조물들이 있게 될 창조의 공터입니다. 그런데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말씀을 보면 ‘어쨌든 창조 이전에 어떤 장소가 있었다는 것인가?’라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의문이 생길 수 있기에 우리는 이 과정을 깊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상태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혼돈은 질서나 체계 혹은 뚜렷한 윤곽이나 모양이나 형체가 만들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공허는 어떤 가치 있는 결과나 열매가 없어서 채움이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마지막으로 흑암이 깊음 위에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도저히 멈추어 있을 수 없는 상태입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의 상태를 쉽게 풀어보자면 무엇도 제대로 있을 수 없고, 성립할 수 없고, 어떤 것도 좋을 수 없고,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신 아들 독생자와 성령님과 더불어 천사들과 함께 보좌가 놓여있는 하늘에 계십니다. 하나님의 생각 속에는 피조물의 세계가 아직 없다는 생각조차 없으셨습니다. 없다는 생각은 하나님이 피조물을 만드셔야겠다고 생각하셨을 때 비로소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이때 비로소 없다는 개념이 생겨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치 목이 마른 사람이 콜라를 생각하고 냉장고 문을 엽니다. 그런데 콜라가 없으면 비로소 ‘콜라가 없네.’라고 합니다. 그런데 평소에 콜라를 전혀 마시지 않는 사람은 목이 말라도 콜라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사람은 냉장고 문을 열었을 때 콜라가 없어도 없다는 느낌을 갖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삼위일체 가운데 천사들과 함께 거하실 때는 피조물이 없다는 생각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자발적으로 피조물을 창조하시겠다고 마음을 먹으셨습니다. 이로부터 하나님 마음에는 피조물에 대한 생각이 생겨났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피조물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이 상태에서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마음속에 피조물에 대한 생각이 있는데 아직 나타나지 않은 상태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피조물을 만들면 어디에 둘 것인가?’라고 생각하시며 피조물이 있을 곳을 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속에 피조물에 대한 생각이 없으셨을 때는 아예 피조물이 있을 장소에 대한 생각도 가질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피조물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셨고, 이제 만드실 피조물이 있을 장소에 대한 생각도 필요해진 것입니다.

제가 신학생 시절에 결혼을 해서 연예인 교회에 교육전도사로 있었습니다. 교회 광고란에 연예인들의 동향이 포함되었습니다. 저는 연예인들 이름을 보아도 교인일 뿐 누가 누군지를 알 수 없었습니다. 주변 분들도 제가 연예인에 대해 전혀 모른다는 것을 아시고는 ‘전도사님은 집에 TV가 없어요?’라고 묻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랬습니다. 저는 그때 집에 TV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 마음속에 TV를 두지 않았을 때는 실제로 TV가 없는 상황에서도 ‘우리 집에는 TV가 없다.’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결국 안 되겠다 싶어서 TV를 사려고 했는데, 마침 지인이 안 쓰는 TV가 있다고 해서 그것을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TV를 놓으려고 하니 조그마한 신혼 단칸방에 자리부터 마련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과정 또한 이러한 모습을 닮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피조물을 생각하지 않으셨을 때는 피조물이 없다는 생각도 하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피조물을 만드셔야겠다는 생각을 하셨습니다. 아직 피조물은 하나님의 생각에만 있을 뿐 실제로 존재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런데 이제 피조물이 거할 장소가 필요했습니다. 그 장소가 바로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2절을 보면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영으로 표현된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루아크(רוּח)로써 바람이라는 뜻입니다. 수면 위에 바람이 움직이듯이 하나님의 영이 움직이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운행한다고 번역된 원문의 뜻은 암탉이 알을 품고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헬리콥터가 움직이지 않고 하늘에 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피조물들에 대해 생각을 갖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생각의 알을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깊음 위에 생기게 하고자 하셨습니다. 본문 2절은 바로 이러한 과정을 그림을 그리듯이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알이 부화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피조물에 대한 생각을 갖고 계십니다. 3절 이하에서 나오는 모든 피조물들에 대한 언급은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생각의 형태로 알로 품어져 있던 것들입니다. 그것들은 하나님이 입으로 말씀하실 때마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라는 하나님의 창조의 공터에서, 알이 부화하듯이 피조물들이 생겨나며 채워지게 되었고 천지는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하나님은 피조물들이 있어야 할 장소를 왜 하필이면 혼돈하고 공허하며 새카만 어둠이 바닥이 없는 깊음 위에 정하셨을까요? 어떤 형체도 성립할 수 없고, 어떤 채움을 이룰 수 있는 결실이 없고, 가만히 떠 있을 수 없고, 견고하게 있음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을, 왜 피조물이 있을 처소로 정하셨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에는 분명한 창조주 하나님의 의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뜻으로 지속하여 있게 하시지 않는 한 어떤 피조물도 도저히 스스로 있을 수 없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은 스스로 잘 있을 수 있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은 한시도 빠짐없이 있게 하시려는 의도와 뜻을 보내셔야만 피조물은 존재할 수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의도가 끊어지면 그 어떤 피조물도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상태를 극복하고 스스로 있을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상태를 창조주 하나님과 어떻게 관계할 것인지의 문제로 가져와 봅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보시면서 생각을 멈추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생각되고 있지만 아직 내 삶 속에서 실제로 나타나지 않은 일들이 있습니다. 나를 보시는 하나님이 계속 생각하고 계십니다. 한순간도 생각하시지 않는 때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태승철의 삶에서 오늘은 이런 일을 이루어 가야겠다.’라고 생각하신다면 그 생각은 아직 이루어진 일은 아닙니다. 그 생각이 이루어질 장소가 바로 혼돈과 공허와 흑암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에서 태승철은 절대로 스스로 무엇인가를 이룰 수 없게 하시기 위하여, 혼돈과 공허와 흑암 위에 태승철의 미래를 얹어놓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하는 일입니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 위에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나의 삶을 얹어놓으셨습니다. 그러면 혼돈과 공허와 흑암 위에서 하나님의 생각을 품으신 성령이 바람처럼 운행하고 계십니다. 알을 품고 있듯이 하나님의 생각을 품고 계시다가 알이 부화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생각이 혼돈을 물리치고, 공허를 물리치고, 흑암의 깊음을 물리치고 실제로 하나씩 하나씩 생겨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내게서 일어나야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내가 일으킬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내 힘으로는 혼돈과 공허와 흑암을 물리치고 하나님이 나를 보시며 생각하시는 내용 중에서 어떤 일도 일어나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향해 생각하고 계시기 때문에 언제나 생겨나는 일이 있습니다. 내 삶 속에서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일이 이루어져야 할 창조의 공터가 생겨납니다. 그 창조의 공터는 혼돈과 공허와 흑암으로 이루어진 상태이기 때문에 내가 침범해서는 안 되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공터에서 나의 삶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혼돈을 이길 수 없고, 아무리 노력해도 공허를 이길 수 없고, 아무리 애를 써도 깊음을 무릅쓰고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내 삶의 기본 상태가 되는 이유는 하나님이 나를 보시며 이루시고 싶은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는 말씀 뒤에 이어지는 2절은 하나님이 창조하시기 위하여 피조물들을 생각하셨을 때, 그 피조물이 있을 장소로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곳으로 정하셨다는 내용입니다. 창조의 공터인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그 상태 위에는, 하나님의 생각을 담고 계신 성령이 암탉이 알을 품듯이 하나님의 생각을 품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입을 열어 말씀하실 때마다 그 생각이 실제로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을 1~2절은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과 어떤 직접적인 연관성을 가지는지에 대해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한 사람이 돈 문제에 부딪쳤습니다. 돈은 살아가는 동안 계속 신경 쓸 수밖에 없는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피조물인 내가 이 세상에서 돈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돈과 관계해서 내 평생에 대해 갖고 계신 생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속에 나와 돈에 대한 생각이 있으시고, 그 생각이 펼쳐질 공간이 필요합니다. 그곳이 바로 혼돈과 공허와 흑암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창조주 하나님이 내 삶에 필요한 돈 문제에 대해 생각이 있으시고, 그 생각을 이루시기 위한 장소로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라는 상황을 정해놓으셨다는 것을 모릅니다. 그렇기에 내가 직접 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뛰어 들어갑니다. 그런데 내가 뛰어든 곳은 단순히 삶의 현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를 이루시고자 하는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라는 창조의 공터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평생 마음에 기쁨이나 감사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돈 문제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갖고 계신 돈에 대한 생각이 실제로 이루어질 장소는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라는 창조의 공터입니다. 이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라는 기운을 물리치고 질서를 잡고 조화를 이루고 결실을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생각하신 대로만 창조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이 혼돈과 공허와 흑암에 뛰어든다면 하나님의 생각은 무시됩니다. 스스로 돈 문제에 대해 형체를 만들려고 합니다. 질서와 체계를 잡으려고 합니다. 결실을 얻으려고 합니다. 든든히 존재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뛰어든 장소는 하나님 창조의 공터이기에 어떤 것도 용납이 되지 않습니다. 돈 문제와 관련하여 내 삶에서 하나님이 생각하시지 않는 순간과 영역은 조금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생각하셨는데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들이 이루어지는 장소는 혼돈과 공허와 흑암입니다. 창세기 1장 2절의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어떻게 창조주와 관계할 것인가에 대해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피조물인 내 삶에 대해서 생각하시지 않는 순간이나 영역이나 관심거리는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생각을 이루시는 장소가 혼돈과 공허와 흑암임을 선언하셨습니다.

창세기 1장 1~2절의 의미를 풀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모든 피조물인 인간들이여! 피조물인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첫 번째 과제는 창조주와 관계하는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가장 기본적으로 알아야 하는 것이 있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내 삶에서 이루실 것들을 생각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이 생각하신 것들이 이루어질 창조의 공터를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속성으로 정하셨다.’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러므로 피조물로써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삶의 어떤 부분에 대해서도 스스로 혼돈을 극복하고, 질서를 잡고, 조화를 이루고, 형체를 이루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스스로 결과를 내고 열매를 맺어서 채워지려고 해서는 안 될 것이며, 스스로 든든히 있음을 추구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삶은 오직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속성을 갖고 있는 하나님 창조의 공터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갖고 계신 생각을 실제로 이루실 수 있도록 창조의 공터를 침범하지 말고 하나님께 고스란히 내어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은 창세기 1장 1~2절에서부터 강력하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선언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는 에덴과 인간의 타락에 대해 살펴볼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창세기 1장 1~2절 자체가 타락한 인간들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입니다. 타락한 인간들이 정신을 차리고 창조주 하나님과 관계하려 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기본 패턴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생각하시지 않는 피조물은 없습니다. 내 삶의 모든 시간 중에 창조주 하나님이 나를 바라보시며 생각하시지 않고, 계획하시지 않고, 의도하시지 않는 날은 없습니다. 본문은 바로 이러한 사실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내 삶을 하루하루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의도하시고 계신 창조주 하나님과 어떻게 호흡을 맞출 것이냐가 문제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이 나에 대해 갖고 계신 생각이 이루어져야 할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라는 창조의 공터를 염두에 두지 않습니다. 스스로 자기 삶을 세우려고 하고, 결실로 채우려고 하고, 든든한 평강의 자리로 가려고 합니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을 무릅쓰려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인생에서 혼돈이 사라지고, 공허가 사라지고, 흑암의 깊음이 사라져 버린 삶을 좀처럼 발견하기 힘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내 삶이 혼돈과 공허와 흑암으로 받쳐지고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혼돈과 공허와 흑암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겁 없이 달려들며 살아갑니다. 이것이 타락의 상태입니다.

이 타락의 상태에서 1~2절의 말씀의 요구를 따라 창조주 하나님과 호흡을 맞추기 위해서는,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라는 하나님의 생각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창조의 공터를 침범하면 안 됩니다. 나의 타락한 죄성은 묶이고 죽고 제어되어야만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죄 속에서 끊임없이 혼돈과 공허와 흑암 속으로 뛰어들어 생길 수 없는 것을 생기게 하려고 시도하게 됩니다. 세워질 수 없는 것을 세우고자 하고, 지속될 수 없는 것을 지속하려고 합니다. 열매 맺을 수 없는 것을 열매 맺고자 합니다. 그러면 불가능하고 불필요하고 백해무익한 삶을 이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타락한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과 호흡을 맞춰 살게 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셨습니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속성을 가진 창조의 공터에서는 하나님만이 세우실 수 있고, 하나님만이 열매 맺으실 수 있고, 하나님만이 있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창조의 공터라는 현장에서 성령이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 마음대로 활동하실 수 있게 하시려고, 죄와 저주에 찌들어 겁 없이 창조의 공터에 뛰어들어 자기 인생을 세우겠다고 하는 모든 잘못된 인간 됨을 죽이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받아들여야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받아들임으로써 하나님의 생각이 이루어져야 할 창조의 공터인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깊음 위로 뛰어드는 일은 중단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나의 창조주 되시는 아버지! 당신이 나를 향하여 갖고 계시는 그 생각과 계획을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혀 매달려 있는 동안에 이 세상에서 암탉이 알을 부화하듯이 그렇게 부화시켜 가시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기도의 의미가 창세기 1장 1~2절 속에 담겨 있습니다.

 

이제 시즌3을 시작합니다. 창세기 1장 1~2절 말씀에 담긴 ‘창조의 공터를 확보하라, 창조의 공터를 침범하지 말라’는 의미를 살펴보았습니다. 이제까지 우리는 겁 없이, 주제넘게, 무엇인지도 모른 채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곳에 뛰어들어 살았습니다. 한순간이라도 내 인생을 스스로 세워보겠다고 몸부림치는 어리석음은 십자가에서 중단해야만 합니다. 이 이야기는 계시록 마지막까지 관통하고 꿰뚫고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성경 구절에서 주님의 십자가를 발견하여,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의 공터를 우리의 삶에서 확보하여 내어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돈이 없습니까? 건강이 좋지 않습니까? 자녀가 문제입니까? 가족 간에 이런저런 불화가 있습니까? 그러나 더 이상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깊음 속으로 들어가 스스로 삶을 세우려 해서는 안 됩니다. 생각조차 해서는 안 됩니다. 독생자를 희생시키시기까지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하늘 아버지의 생각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그 생각이 이루어지기 위한 창조의 공터를 타락한 죄와 저주가 이끄는 대로 침범해 들어가는 잘못을 범하지 않도록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시즌3이 끝날 때까지는 13~14년이 걸릴 것입니다. 긴 시간 동안 매일매일 가정에 있든지 직장에 있든지 하나님의 생각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라는 창조의 공터를 보존해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창조의 공터에 뛰어 들어가는 일이 다시는 없도록 시즌3이 진행되는 동안 결의하고 다짐하며 새기며 확인하면서 함께 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예정하신 하나님의 아들들이여! 창조주 하나님께 창조의 공터를 확보해 드리며 관계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여! 파이팅 하십시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무슨 걱정을 하며 살겠습니까. 하나님의 생각이 없는 시간이나 부분이 없음을 믿습니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창조의 공터에 뛰어들지 않게 하시며, 아버지께 고스란히 보전해 드리기 위하여 십자가만을 붙잡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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