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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죽음 입고 불 칼을 넘어 다시 에덴으로>의 줄거리 :
죄와 타락에 빠진 아담과 하와를 에덴에서 쫓아내시고 에덴을 불 칼로 두르시어 에덴으로의 재진입을 원천 봉쇄하십니다. 이제 인간의 과제는 어떻게 이 잃어버린 에덴 안으로 재진입하느냐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은 못 말리실 분이십니다. 기껏 에덴에서 추방하시면서 아예 다시 에덴으로 재진입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으십니다. 가죽옷을 입히셨다는 구절에 그런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죽음 입고 불 칼을 넘어 다시 에덴으로
(창세기 3:20~24)
20. 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
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22.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23.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본문은 아담과 하와가 에덴에서 추방되는 실낙원(失樂園)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죽음을 입고 불 칼을 넘어 다시 에덴으로 진입하자’라는 뜻의 제목으로 말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에덴에서 추방하시며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십니다. 그리고 에덴동산 동쪽은 천사들이 지키게 하시고, 에덴에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로 접근하는 길을 차단하십니다. 이러한 결과가 나타나게 된 이유가 22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인간이 하나님과는 전혀 다른 언어 체계를 가지고, 스스로 삶에 대해 판단하고 생각하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본래 하나님만이 주체적으로 생각하십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서 살면 됩니다. 그런데 타락 이후에 하나님은 하나님대로 생각을 갖고 계시고, 나는 나대로 언어 체계를 가지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내 삶에 대한 생각을 갖고 계십니다. 한편 나는 하나님과는 전혀 다른 언어 체계를 가진 채 스스로 삶에 대해 생각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곳의 기운이 빠져나갈 수 없습니다. 이러한 결과는 당연합니다. 생각하시는 하나님께서 내 삶을 이끌어 가시는 주권자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미 생각을 해두셨는데 내가 생각을 더한다는 것은, 마치 글자가 인쇄된 종이 위에 또 다른 내용을 인쇄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한 상태에서는 글자끼리 뒤섞여 내용을 식별할 수 없게 됩니다. 내 삶이 혼란스러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내 삶을 이끌어 가시는 주권자 하나님이 생각을 하시는데, 내가 전혀 다른 언어 체계를 가지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인쇄된 종이 위에 또 인쇄를 하려고 하니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고 답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이 내 생각 때문에 다 가려져서 알려질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죄와 타락에 휘감긴 인간은 사탄의 언어 체계를 가지고 스스로 생각하면서 삶의 주체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도 타락 전과 변함없는 성향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마음이 비어있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좋은 것을 붙잡고 추구하여 채우려는 성향입니다. 이러한 상황이 22절의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라는 하나님의 우려를 통해 표현되고 있습니다.
타락 이전에 사람의 본업이란 생명나무 열매를 따 먹는 것이었습니다. 선악과를 따 먹기 전에는 하나님의 언어 체계를 가지고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들이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하여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생명나무 열매를 따 먹는 본업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가 23절에 이어집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이제 땅을 갈아서 육체의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본업이 된 것입니다. 타락 전에는 생명나무 열매를 따 먹는 것이 본업이었지만, 타락 이후에는 육체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땅을 갈아 밥을 사 먹는 것이 본업이 되었습니다.
생명나무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이와 관련하여 요한계시록 22장에서 생명수가 흐르는 강에 대해 말씀을 드릴 때 생명에 대한 언급을 하였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생명’이란 하나님의 속성을 내 것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스스로 있음과 하나님의 유일한 좋으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있음을 내 안에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좋으심을 내 안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생명입니다. 더 엄격하게 말하자면 하나님의 유일한 있음과 유일한 좋음을 내 안에 받아들일 때 그것은 내 안에서 생명이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유일한 있음과 유일한 좋음인 하나님을 내 인격 안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존재감은 곧 하나님 있음의 무게입니다. 하나님 있음의 무게감을 제일 먼저 마음에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유일한 있음이라는 속성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유일한 좋음인 하나님을 받아들임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 채움을 위하여 하나님만을 소망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만을 소망함으로써 하나님만이 유일한 좋음임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생명의 의미입니다.
이로부터 생명나무 열매를 따 먹으며 사는 삶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선악과를 따 먹지 않은 상태는 스스로 언어 체계를 갖지 않은 상태입니다. 내가 판단하고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생각과 판단을 받아들이며 삽니다. 이렇게 살 때 내가 주체적으로 하는 일이란 생명나무의 열매를 따 먹는 것입니다.
나의 말과 행동은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가기 때문에 내가 주체가 되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의 판단과 생각을 따라서 말하고 행동할 때 내게 일어나는 일은 생명나무 열매를 계속 따 먹는 것입니다. 하나님 있음의 존재감을 느끼고, 하나님의 유일한 좋음을 소망 안으로 받아들이면서 하나님과 교제하므로 마음이 채워집니다. 이로부터 기쁨이 생깁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동산의 이름이 기쁨이라는 뜻의 에덴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타락하였고 생명나무 열매를 따 먹는 일을 본업으로 삼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육체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돈 벌어서 끼니를 해결하기 위한 양식거리를 사는 것이 본업이 되고 말았습니다.
22절에서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라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는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에덴을 지키게 하십니다. 사람이 아무리 타락해도 마음의 공백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 공백을 채워야 한다는 원리는 타락한 중에도 계속 작동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은 좋다고 느껴지는 무엇인가를 추구하고 가짐으로써 마음을 채우려고 합니다. 만족한 상태가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갖고 있는 인격적 구조입니다. 타락한 사람들은 하나님과 끊어지고, 하나님과 다른 사탄의 언어 체계를 가지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을 받아들이며 기뻐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것들 중에서 기쁨 거리를 찾음으로써 그것들을 가짐으로 만족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참 만족과 기쁨은 에덴에서 생명나무 열매를 따 먹어야만 느낄 수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비어있기 때문에 기쁘고 만족하기 위하여 움직일 때는 반드시 에덴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라는 말씀은 사람의 마음이 비어있기 때문에 만족과 기쁨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입니다. 진정한 만족과 기쁨은 에덴에만 있기에 에덴을 향해서 다가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에덴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불 칼로 막으셨습니다.
이러한 말씀은 시간과 공간 안에서 역사적으로 이러한 사건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고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차원의 실제 상황을 우리에게 알려주시기 위한 비유적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말씀은 허구가 아닙니다. 없는 이야기를 지어서 하는 것이 아니며 신화도 아닙니다. 이것은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영적인 실제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영적인 실제 상황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인간의 언어를 통해 알려주십니다.
진정한 만족과 기쁨을 상징하는 생명나무가 있는 에덴을 불 칼로 두르신 실제 상황은 지금 우리 삶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이 연애를 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기쁘기만 했는데 서로 밀고 당기기를 하는 동안 속이 타기 시작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상대방이 내가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통해 기쁘고 만족하기를 원하지만 그렇게 해주지 않기에 속이 탑니다. 부모는 자식을 낳아 기르면서 자식을 통해서 만족을 얻으려고 합니다. 눈에 보이는 자식과 관계함을 통하여 기쁨이 생기기를 바랍니다. 기쁨을 향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기에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자식과 함께 만족과 기쁨의 자리까지 가고 싶지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부모의 마음에는 자식 때문에 불이 납니다. 속이 타들어 갑니다.
본문은 바로 이러한 일이 생기는 이유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너는 지금 눈에 보이는 자식을 사랑함으로써 너도 의식하지 않지만 만족하고 기뻐지는 상태까지 가고자 한다. 네가 만족하고 기뻐하는 상태로 가고자 하는 이유는 내가 너를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네가 자식과 함께 만족과 기쁨의 자리로 가려고 하면 반드시 네 속은 지글지글 불에 탈 것이다. 진정한 만족과 기쁨은 에덴에만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만족과 기쁨의 자리에 도달하려는 모든 사람은 에덴을 향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런데 왜 만족과 기쁨을 향하는 사람들의 속이 탈까? 속이 부글부글 끓을까? 왜 속이 새카맣게 탄다는 얘기를 할 수밖에 없을까? 네가 만족과 기쁨의 자리까지 가려면 에덴을 향할 수밖에 없는데 내가 에덴에 불 칼을 두었다. 너희가 만족과 기쁨을 향해 가면 너희의 마음은 반드시 불 칼과 부딪힐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 마음이 만족하기를 바라고 기쁨의 자리에 도달하기를 원할 뿐인데 속이 타서 새카만 숯덩이가 되는 이유는 불 칼을 두었기 때문이다.’라고 비밀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말씀드렸듯이 우리 인격의 구조는 채움이 있는 곳에 도달하고자 합니다. 만족함이 있는 자리에 가고자 합니다. 만족함이 있는 자리에서 기쁨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무엇인가를 사랑해서 내 마음을 채우면 기쁨이 발생합니다. 기쁨을 추구하지 않아도 채움을 추구합니다. 무엇인가로 채울 것인가를 결정해서 그것을 좋아하고 소망하고 열망하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채워지면 기쁨이 발생합니다.
선악과를 따 먹지 않고 하나님과 호흡하는 상태에서는 하나님으로 계속 채워지기에 기쁨이 발생합니다. 이것이 이루어지는 곳이기에 동산의 이름을 기쁨이라는 뜻의 에덴이라고 붙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타락한 후에도 속이 비어있어서 무엇인가로 채우려 하는데 사탄의 언어 체계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제 눈에 보이는 것들 중에서 마음을 채우려고 합니다. 그 채움을 위한 움직임은 에덴을 향해 가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에덴에서만 하나님으로 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채우겠다는 마음이 계속 불에 탑니다. 우리는 채움을 위한 만족을 향해 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인격의 구조는 기쁨이 나타나는 자리까지 가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기만 하면 불 칼에 부딪힙니다. 눈에 보이는 것 중에서 만족과 기쁨을 얻으려고 하는 모든 대상으로부터 불 칼에 부딪혀서 속이 새카맣게 타들어 갑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정말 사람 바보이십니다. ‘딸 바보, 아들 바보’라는 말이 있듯이 하나님은 사람 바보이십니다. 더 정확히는 나에 대해 바보이십니다. 21절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라고 하였습니다. 그 뒤에 따라오는 구절을 보면 에덴에서 쫓아내시고,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셨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에덴에서 쫓아내실 것을 예상하시고 마음이 급해서 미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십니다. 순서대로 하자면 에덴에서 쫓아내신 다음에 가죽옷을 지어 입히셔야 맞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쫓아내실 것을 결정하시고 먼저 가죽옷을 지어 입히십니다.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이유는 인간은 가죽옷을 입은 상태에서만 에덴에 재진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죽옷이란 짐승을 죽임으로써 생기는 가죽으로 만든 옷입니다. 앞서 우리는 아담이 벗었음을 두려워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피하여 숨는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그 두려움의 핵심은 수치심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 중에서 좋다고 여기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중에서 좋다고 여기는 가치가 내게 없을 때 수치심을 느낍니다. 마치 욥이 재산 잃고, 자식 잃고, 건강 잃고, 친구 잃고, 사회적 명성과 지위도 잃고, 아내까지 잃고 나서 벌거벗었다고 말했던 것과 같습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하나님이 가죽옷을 입혔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가치를 주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기서 가죽옷이란 아담과 하와에게 새로운 신분을 부여하셨음을 의미합니다.
새로운 신분은 하나님이 부여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이 신분을 자기의 신분으로 받아들임의 문제는 또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바라보실 때, 가죽옷을 입힌 상태의 신분으로 인간을 대하기로 결정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은 죄를 짓고 타락하여 저주 속에 던져졌습니다. 이렇게 죄와 타락으로 인해 저주에 던져진 인간을 하나님이 그래도 관계하시려면 가죽옷을 입은 신분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짐승이 죽어야만 가죽이 나옵니다. 가죽옷을 입었다는 것은 어떤 생명체의 죽음을 입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옷이란 신분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죽음이란 하나님이 타락한 인간에게 부여하신 신분입니다.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과 다시 관계하기 위해서는 죽음의 신분을 가져야만 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나는 죽은 자다.’라는 신분 의식을 가질 수 있어야 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생각과는 별도로 사탄의 언어 체계를 가지고 내 삶을 생각하는 나는 죽었다’라는 신분 의식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사건을 기록한 21절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구약 성경의 모든 제사의 정신을 규정하는 구절입니다. 가죽옷은 다른 생명체의 죽음을 입는 것입니다. 죽음을 입었다는 것은 아담과 하와 스스로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타락했다. 이렇게 타락한 나는 죽은 자다.’라는 신분 의식을 가져야 했음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가죽옷의 신분 의식이란 사탄의 언어 체계를 사용할 수밖에 없게 된 내가 죽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만 하나님과의 관계는 지속될 수 있음을 가르쳐주십니다.
사람의 마음은 비어있기 때문에 좋다고 여겨지는 대상을 붙잡고 소망하고 열망하고 추구함으로써 마음을 채우게 됩니다. 그러자면 모든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에덴을 향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아시고 에덴에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셨습니다. 예를 들어 눈에 보이는 돈을 좋다고 여기고, 건강이 좋다고 여겨서 그것을 추구하여 만족하려고 하면 에덴을 향하게 됩니다. 그런데 에덴에 가고자 해도 불 칼이 가로 막기 때문에 갈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안타까움이 생깁니다. 굳이 말을 만들어 보자면 안 이루어져서 마음이 타들어 가는 것이 안타까움입니다.
그런데 불 칼이 있어도 마음은 반드시 채워져야만 합니다. 여기서 가죽옷을 입었다는 것은 사탄의 언어 체계를 가지고, 눈에 보이는 것들 중에서 좋은 것을 선택하여 채우려는 내가 죽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죽은 자의 신분 의식을 가지면 불 칼이 지키는 에덴을 통과할 수 있습니다. 죽었기에 불 칼이 태울 건더기가 없습니다.
제가 예전에 이 본문에 대해 ‘맞불 지르기’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산에 큰 불이 나면 바람의 방향에 맞춰 일정 구역을 미리 태워버리는 진화 방법이 있습니다. 미리 태워버리면 불길이 오더라도 더는 태울 것이 없어서 꺼져버립니다. 가죽옷의 의미가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사탄의 언어 체계를 가지고 눈에 보이는 것 중에 돈이 좋다, 건강이 좋다, 자녀의 형통이 좋다, 명품이 좋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마음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 속이 탑니다.
가죽옷을 입었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돈, 건강, 자녀의 형통, 승진, 명품, 인기 같은 세상의 가치들에 대해 내가 죽었다는 의미입니다. 이 상태에서 여전히 마음은 비어있습니다. 비어있는 마음은 채움을 통해 만족을 얻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가죽옷을 입었다는 것은 ‘나는 마음 채움을 위해 이 세상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찾지 않는 죽은 자입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이미 죽었기에 불 칼을 지나가도 탈 것이 없습니다.
불 칼은 사탄의 언어 체계를 가지고 눈에 보이는 것 중에서 좋은 것을 결정하고 추구하는 삶을 태우기 위한 것입니다. 불 칼에 닿는 한 절대로 생명나무에 접근할 수 없고, 절대로 만족과 기쁨은 없습니다. 그런데 사탄은 안 되면 되게 하라며 유혹합니다. 이에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 중에서 반드시 만족을 얻어야 한다고 기를 쓰고 추구합니다. 마음이 불 칼에 닿아서 타면 탈 수록 더 갖겠다고 기를 쓰는 것입니다. 이루고야 말겠다고 기를 씁니다. 그러나 이것은 정말로 바보 같은 짓입니다.
하나님은 죄와 타락에 빠진 인간을 버리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에 대해 바보이신 하나님은 길을 열어 두셨습니다. 인간이 유일하게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생명나무는 불 칼에 막혔습니다. 하나님 있음의 속성, 좋음의 속성, 이 세상을 향한 주체성의 속성을 마음 안으로 받아들여야만 도달할 수 있는 만족과 기쁨의 상태를 막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봉쇄를 뚫고 들어갈 수 있는 길을 만드셨습니다. 죽음을 옷 입는 것입니다. 죽은 자라는 의식을 가지라는 의미입니다. 사탄의 언어 체계로 눈에 보이는 것들 중에서 좋은 것을 결정하고 추구하는 나는 죽었다고 스스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불 칼에 타지 않고 에덴으로 들어갈 수 있고, 다시 생명나무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것을 모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야만 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어 입히신 가죽옷입니다. 구약 성경에는 제사가 이것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이어질 4장을 보면 아벨과 가인의 제사가 나옵니다. 이 제사에서부터 가죽옷을 입히신 하나님의 의도가 드러납니다.
인간은 두 종류가 있습니다. 20절을 보면 “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산 자의 어미’란 육체를 입고 이 땅에서 살게 될 모든 사람의 어미라는 뜻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후손인 인류는 두 종류로 나누어집니다. 사탄의 언어 체계를 가지고 눈에 보이는 것들 중에서 좋은 것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저주의 상황을 그대로 밀고 나가는 자, 이 저주 상황에서 ‘나는 죽은 자다.’라고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신분 의식을 받아들이는 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이유는 가죽옷을 입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입는 것입니다. 내가 십자가에서 죽었음이란 눈에 보이는 것 중에서 마음 채움을 위해 어떤 것도 찾지 않고 추구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반대로 죄와 타락이 온 인류를 덮친 상황에서 살았다는 것은, 사탄의 언어 체계를 가지고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육체의 오감에 의해 좌우되는 것입니다. 19절의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라는 말씀은 이렇게 마음이 육체에 좌우되는 상황을 가리킵니다.
인간이 타락함으로써 영혼의 가치는 고깃덩어리인 육체에 종속되고 말았습니다. 영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흙의 가치만 남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두 가지 인간의 부류 중에 ‘사탄의 언어 체계를 가지고 눈에 보이는 것 중에 좋은 것을 정하고, 그것으로 마음을 채우기 위하여 움직이는 자로 살 것인가? 반대로 사탄의 언어 체계에 정복되어 오감에 포착되는 것을 추구하는 나는 죽었다는 신분 의식을 가질 것인가?’를 선택해야 합니다.
십자가 예수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탄의 언어 체계를 갖고 있는 나의 죽음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오직 나의 죽음을 십자가에서 이루어 주신 것입니다. 그 죽음을 받아들여 십자가에서 죽은 자로 고백할 때 가죽옷을 입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나를 대신한 것이기에 나의 죽음입니다.
내가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고백하면 내 마음은 예수님의 죽음을 가죽옷으로 입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을 입습니다. 또한 승천하신 예수님을 입고 하늘로 올라가게 됩니다. 하늘로 올라간 마음은 다시금 하나님을 직면하게 됩니다. 유일한 있음인 하나님, 유일한 좋음인 하나님을 마주 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마음은 하나님을 호흡하게 됩니다. 그럴 때 이 땅에서는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서 말하고 행동하는 에덴이 회복됩니다.
나는 예수님과 함께 이 세상에 대해 죽은 자입니다. 사탄의 언어 체계를 가지고 눈에 보이는 것에 끌려다니고, 세상에 좌우되며 살던 나는 죽은 자입니다. 이렇게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라는 신분 의식을 갖는 것이 가죽옷을 입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죽옷을 입으면 에덴의 불 칼은 무력화됩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하늘로 올라가 보좌에 앉아 계신 하나님을 마주 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생명나무가 상징하는 하나님의 속성을 지속해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감을 느낍니다. 하나님의 좋으심을 계속해서 소망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 삶에서는 하나님의 주체성을 받아들입니다. 하나님의 주체성을 받아들이기에 세상 삶에서 안 될 일이 없습니다. 이것이 마음도 구원받고 육신도 구원받아 에덴으로 재진입해 들어가는 모습입니다.
타락한 나를 에덴에서 추방하실 수밖에 없었던 의로우신 하나님은 동시에 나에 대해 바보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에 추방하시면서 곧바로 에덴에 재진입할 수 있는 길을 만드셨습니다.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는 것은 죽음을 입는 것임을 의미합니다. 사탄의 언어 체계를 갖고 육체의 오감으로 포착되는 것들 중에서 좋음을 추구하려는 나, 스스로 삶의 주체가 되어서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려는 나, 이러한 나는 죽은 자임을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죽은 자의 신분 의식을 가질 때 에덴에 두루 도는 불 칼은 무력화되고 에덴의 재진입이 이루어집니다.
십자가 예수님을 바라보며 가죽옷을 입은 신분 의식을 유지해 나가면 마음이 불 칼에 닿아 지글지글 타들어 가는 안타까움은 사라집니다. 타락하여 쫓겨난 에덴에 재진입하기 위해 십자가 예수님의 죽음은 내가 입을 가죽옷입니다. 이러한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의 죽음을 입으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만족과 기쁨을 찾는 자가 아닙니다. 이러한 죽은 자의 신분 의식을 가지고 오늘을 사는 동안 에덴으로 재진입하는 경험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나 바보이신 하늘 아버지께서는 에덴에서 쫓아내시자마자 다시 들어갈 길을 먼저 생각하셨습니다. 그 아버지의 사랑을 우리가 받아들이고 그 길을 따라 오직 십자가 예수님의 죽음을 보며, 죽은 자의 신분 의식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