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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3

녹취문: 거부되느라 화냄, 거부하느라 화냄_태승철 (창 4:1~15)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4.05.04|조회수109 목록 댓글 1

 

www.everyday01.com -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거부되느라 화냄, 거부하느라 화냄>의 줄거리 :

죄와 타락에 빠진 인간이 맺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내용은 죽어버리고 형식만 남았습니다. 하나님을 스스로 있는 자라는 의미의 여호와라고 부름이 형식적인 관계의 최소한의 조건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자기 죄인 됨을 고스란히 유지하는 인간의 특징이 두 가지로 드러납니다. 화냄입니다. 성을 내고 분노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죄악 된 상태 그대로의 자기가 타자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화를 내고, 또한 죄악 된 자기 기준에 타자가 마음에 안 든다고 화를 냅니다. 이 화 때문에 일어난 일이 바로 인류 최초의 살인입니다.

 

 

거부되느라 화냄, 거부하느라 화냄

 

(창세기 4:1~15)

 

1.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2.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5.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8.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죄와 타락으로 인하여 에덴에서 추방되고 저주가 임한 상태에서 인류가 시작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염두에 둬야 할 점은 본문이 역사학이나 인류학의 관점으로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아담과 하와의 장남이었던 가인은 동생 아벨을 죽인 후, 하나님의 벌을 받아 땅에서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고 하십니다. 이 장면에서 가인이 하나님께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죽이면 어떻게 하느냐는 질문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질문을 ‘하와가 가인을 낳은 것이 처음인데 다른 사람이 대체 어디서 나왔다는 것이냐?’라며 모순이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합니다. 성경을 이렇게 보는 것은 굉장히 무식한 태도라 할 수 있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성경은 역사학이나 인류학의 관점에서 기록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죄와 타락이 지배하는 환경 가운데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어떤 내용으로 시작될 수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죄와 타락에 빠진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실질적으로 죽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좋아하여 밀착하고자 하는 마음은 끝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 삶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실 때가 없고, 생각하지 않으시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본래 사람은 모든 현장과 모든 때에 하나님의 생각을 호흡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이것이 실제 하나님과의 관계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죄와 타락에 의해 죽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가인이 태어납니다. 1절을 보면 하와가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라고 합니다. 이것은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에 의해서 만물이 있게 되었다는 이론은 인정해야 하나님과의 관계가 지속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바로 여호와로 부름에는 바로 이러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타락한 인류는 하나님과의 실질적인 관계의 내용은 죽고 형식적인 관계만 남았습니다. 이 형식적인 관계라도 그나마 유지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전제 조건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있게 하시는 스스로 있는 자로서 창조주이심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함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과 관계하며 살아갈 때의 특징이 가인과 아벨의 사건으로부터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그것이 바로 화를 내는 것입니다. 화를 내는 것은 인간의 죄악 된 마음의 기본 바탕입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여러 가지 감정의 형태가 존재합니다. 슬픔, 좌절, 두려움뿐만 아니라 죄악 된 인간의 마음에도 기쁨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든 감정의 기본 바탕은 화입니다.

사람이 화를 내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자기가 부동(不動)의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과 밀착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것 중에서 좋다고 여기는 것과 밀착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얻기 위해 삽니다. 인격을 가졌으니 언어 체계가 발동하는데 그것은 사탄에게서 배운 언어 체계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사탄의 언어 체계로 판단하고 생각하는데 죄악 된 자기 자신을 부동의 기준으로 붙잡습니다. 이 내용을 자세히 풀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 외의 다른 것과 밀착한 마음은 인격 전체가 더러워집니다. 그리고 그 더러워진 인격으로 사탄의 언어 체계를 사용합니다. 사탄의 언어 체계가 만들어 준 자기를 부동의 기준으로 삼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과 다른 사람은 모두 타자(他者)입니다. 자기가 부동의 기준이 된 상태에서는 타자가 자기를 받아들이지 못함에 대해 화를 냅니다.

두 번째로 화를 내는 이유는 첫 번째와는 입장이 반대입니다. 타자가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더러운 기준을 가지고 있는 마음 상태에서 타자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습니다. 제목에서 ‘거부되느라 화냄, 거부하느라 화냄’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화를 내는 두 가지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타자에게 거부되느라 화를 내고, 스스로 거부하느라 화를 냅니다.

앞서 우리는 가죽옷을 입음이 죽음을 입는 것이라고 살펴보았습니다. 가죽의 주인인 짐승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고백함이 가죽옷을 입는 것의 의미였습니다. 이 가죽옷의 의미가 본문에서도 발견됩니다. 죄악 된 상태에서 하나님이든 사람이든 타자와 진심으로 관계하기 위해서는, 우선 더럽고 오염된 자기 자신을 거부하고 죽일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가 거부된다고 화를 내거나, 자기 마음에 안 든다고 거부하느라고 화를 낸다면 관계는 시작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화를 내려는 자신을 거부하고, 죄악으로 찌든 자신을 죽여야만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러한 자신을 그대로 유지하려 합니다.

여러분이 다른 사람 때문에 화가 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결국 그 사람이 마음에 안 들기 때문에 화가 납니다. 그런데 문제시해야 하는 것은 타자가 아닌 바로 나 자신입니다. 나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이 하나님과 밀착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것을 좋아하며 밀착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언어 체계가 나의 언어 체계가 될 수 없습니다. 사탄의 언어 체계를 받아들여서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언어 체계를 받아들이지 않고, 마음이 이 세상 피조물과 밀착해 있는 상태는 더러움입니다. 그 더러운 상태에서 타자와의 관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화를 냅니다.

화가 나는 것은 그 사람이 아무리 못나고, 악하고, 더럽고, 추해도 그것이 화를 낼 이유는 되지 않습니다. 우선적 문제는 나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거부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혹은 하는 일이 잘 안돼서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란 결국 주권자 하나님이 내 생각을 인정 해주시지 않음에 대해 화를 내는 것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음을 두고 화를 냅니다. 그렇게 화를 내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우선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나는 똥보다 더 더러운 인간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밀착해야 하는 인간이 이 세상 피조물과 밀착하게 되었습니다. 이로부터 하나님의 거룩하심만큼 더러워지게 된 것입니다.

마음에 붙는 대상은 다양할 수 있습니다. 마음에 자녀를 붙입니다. 마음에 배우자를 붙입니다. 마음에 돈을 붙입니다. 마음에 건강을 붙입니다. 그러나 자녀도 배우자도 돈도 건강도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럴 때 내가 밀착해야 하는 하나님의 좋으심과 거룩하심만큼 나는 더러워지는 것입니다. 마음에 자녀를 붙인 부모의 마음은 똥보다 더 더러운 상태입니다. 그리고 그 더러움 속에서 나오는 생각과 기준으로 자녀를 대하고, 그 생각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또한 그런 나를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화를 내고, 그런 나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화를 냅니다. 그야말로 엉망진창입니다.

교회가 기독교 종교가 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화내지 않아도 될 신을 만들어 냈습니다. 하나님을 여호와로 부르고, 예수님의 이름도 부르지만 실상은 죄악 된 나를 고스란히 받아들일 수 있는 신을 만들어 냈습니다. 정말로 믿음이 있다면 무조건 날마다 죽는 것을 일로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실제 하나님과 내용적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죄악 된 나는 죽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본문 7절을 보면 화를 내는 가인에게 하나님께서는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죄인이 행할 수 있는 선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죄악 된 자기, 똥보다 더 더러운 자기를 죽이는 것뿐입니다. 그것만이 죄인이 할 수 있는 선행입니다. 마음속에서는 하나님이 아닌 피조물과 밀착해 있고, 사탄의 언어 체계를 사용하고 있으면서 겉으로 구제하고 봉사하고 충성했다고 해서 선행은 아닙니다. 하나님과 밀착되지 않은 근원적인 죄악 됨을 보전하는 상태에서 하는 모든 구제와 충성과 봉사는 선행이 아닙니다. 자기의 죄악 됨을 가리려는 교활함입니다. 죄악 된 자의 선행은 ‘죄악 된 나는 죽어야 한다.’라고 고백하며 실제로 죽는 길을 찾는 것뿐입니다.

 

본문에는 유명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가인과 아벨은 둘 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는 받으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이유를 오해합니다. 아벨이 정성을 담아 제사를 드렸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정말로 가인의 정성이 없었기에 하나님이 제사를 받지 않으셨던 것일까요? 이러한 해석은 난센스입니다.

분명히 앞에서 가죽옷이 등장했습니다. 가죽옷을 지어 입히심에는 짐승의 죽음을 입는다는 의식을 가지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마음이 하나님과 밀착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언어 체계에서 나오는 생각을 호흡하는 대신에 사탄의 언어 체계를 가지고 스스로 생각하게 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날마다 자기를 죽이는 제사를 드리는 것이 선행입니다. 하나님이 제일 좋아하시는 것이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 제사는 죽음을 입는 가죽옷의 의미가 기준이 되어야만 합니다.

이로부터 하나님이 가인의 제사를 받아들이시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가인의 제사는 곡식이나 열매나 채소를 비롯한 농산물로 이루어졌습니다. 가인은 이 제물에 자기의 죽음을 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죄악 된 자기가 갖고 있는 생각과 소원하는 것을 그대로 유지했습니다. 모든 것을 있게 하시는 능력이 있는 여호와 하나님께 내 생각대로 이루어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나왔던 것입니다. 가인은 이 제사에 무척 정성을 기울였을 것입니다. 제사에 정성이 없어서 하나님이 받지 않으셨다는 이야기는 정말 바보 같은 소리입니다. 사람들이 소원하는 일에 대해 얼마나 정성을 기울이는지 우리 삶에서 잘 드러납니다. 영화 한 편을 찍어도 돼지머리를 놓고 돼지 입에 돈을 물려가면서 정성을 들입니다. 죄악 된 자들이 죄악 된 생각 속에서 나온 자기 소원을 위해서 얼마나 정성을 들이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아벨의 제사에는 이런 식의 정성은 오히려 없었습니다. 제사에 필요한 것은 정성이 아니라 가죽옷이 뜻하는 죽음입니다. 4절을 보면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라고 하였습니다. 아벨이 양의 첫 새끼를 잡아서 그 기름을 드렸다는 것은 양을 죽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죽였다는 것 자체가 자기 죽음의 의미는 아닙니다. 모든 종교에서 제사를 드릴 때 짐승을 죽여서 바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짐승을 잡아 죽이는 것은 신에 대한 뇌물이고 선물일 뿐입니다. 죄악 된 나의 생각 속에서 발생하는 소원을 들어달라는 마음으로 바치는 뇌물이고 선물입니다.

아벨은 양의 첫 새끼를 죽여서 뇌물로 드렸던 것이 아닙니다. 아벨은 양의 첫 새끼를 죽이며 가죽옷의 의미를 되새겼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내 마음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 대신에 보이는 것들과 밀착했습니다. 그것을 이루고 싶어서 사탄의 언어 체계를 따라 스스로 생각하며 소원했습니다. 양을 죽이며 이러한 나를 죽입니다. 나의 죽음을 담아서 이 양을 드립니다.’라는 마음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선물로 드리겠다는 의도가 아닙니다. 가죽옷의 의미와 일치하는 제사였기에 아벨의 제사를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이 가인의 제사를 받으시지 않았던 이유는 채소는 싫어하시고 고기를 좋아하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농산물을 가지고도 얼마든지 자기의 죽음을 담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제사법을 보면 곡식을 곱게 갈아서 가루로 만듭니다. 포도 같은 열매는 틀에 넣어서 즙으로 만듭니다. 이러한 과정은 어떤 식이든지 땅에서 나는 농산물을 통해서 자기 죽음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제사의 방식이나 제물의 종류가 아닌 죽음을 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서 죽음을 인정하는 의도가 들어있는지 보십니다.

가인이 죄악 된 인간임을 자각하고 있다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제물에 정성을 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똥 묻은 손으로 제물을 정성스럽게 손질하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똥보다 더 더러운 내가 죽어야 함을 인정하면서 ‘내가 하나님 앞에서 죽습니다.’라는 고백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심은 가인을 받아들이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아담과 하와의 후손으로서 죄인 된 존재입니다. 죄인으로서 제일 먼저 배운 사탄의 언어는 ‘스스로 판단하고 생각해도 죽지 않는다. 오히려 눈이 밝아져서 좋은 것과 나쁜 것을 판단할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이는 곧 ‘하나님 대신 눈에 보이는 것들을 마음에 담고 밀착하여, 그것을 이루기 위해 내가 주는 언어를 통해 너에게 좋고 나쁨을 판단하며 살면 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몸은 멀쩡히 살아있지만 마음이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들과 밀착하고자 하는 상태, 스스로 내 삶을 생각하려는 상태가 죽었음을 고백할 수 있어야, 사탄의 언어 체계를 거부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는 시작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는다, 십자가를 생활화한다, 예수님의 죽음을 짊어지고 다닌다’고 했습니다.

본문에는 처음으로 ‘죄’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죄로 번역된 히브리어 하타트(חַטָּאת)는 헬라어 하마르티아(ἁμαρτία)에 해당하는 표현으로써 표적에서 빗나감을 의미합니다. 4절을 보면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죄인이 드러내는 첫 번째 반응으로써의 화를 내는 것입니다. 가인은 하나님이 자신을 받아들여 주시지 않았음에 대해 화를 냅니다. 사탄의 언어 체계를 가지고 마음은 하나님이 아닌 눈에 보이는 것들과 밀착하여 똥보다 더 더러운 상태입니다. 이러한 더러운 상태에서 나오는 생각과 소원을 하나님이 이루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한 나를 하나님이 거부했다고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합니다.

너무나 더러운 나를 받아달라고 계속 주장하는 것이 죄인의 특징입니다. 하나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받아들여지기를 원합니다. 더럽고 추악한 내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화를 냅니다. 이것이 죄악 된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기본 바탕에는 화가 있습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은 7절에서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죄인이 죄를 다스릴 수 있는 방법은 죄에 찌든 자기를 죽이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십자가 생활화는 죄를 다스리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대신에 보이는 것들과 자꾸 달라붙는 죄를 다스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을 생각하고, 고민하고, 이루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죄는 다스려야지 먹히면 안 됩니다. 죄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가죽옷을 입어야만 합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내 마음이 육체를 벗어버리고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으로 옷 입어야만 합니다. 이것을 골로새서 2장 11절에서는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할례를 통하여 마음에서 육체를 베어버리고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을 입습니다. 그리고 부활 예수님과 승천 예수님을 입고 하늘로 올라가야만 합니다. 이것이 죄를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럴 수 없다면 자꾸만 화를 낼 수밖에 없습니다.

 

가인이 선을 행하지 않은 결과 동생 아벨을 죽입니다. 죄인이 행할 수 있는 선이란 죄인인 자신을 죽이는 것이고, 자기를 죽임이란 곧 죄를 다스리는 것입니다. 죄를 다스리지 않으면 화가 치밀어오릅니다. 가인은 하나님이 받아들여 주시지 않음에 대해 화가 나서, 자기 마음에 안 드는 동생을 죽입니다. 죄악 된 인간은 자기의 죄악 된 존재를 거부하여 죽음을 통해 죄를 다스려야 합니다. 그러나 죄를 다스리는 대신 더럽고 악한 자신을 기준으로 세웠고 이로부터 살인이 일어납니다.

살인이 일어난 후에 가인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땅에서 유리하는 자가 되어 하나님께 두려움을 호소합니다. 다른 사람이 자기를 죽일 수도 있음에 대해 두려워한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은 다른 사람이 가인을 죽이지 못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죽음의 의미를 구분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은 죄인 된 자신을 죽이는 제사를 드리지 못한 결과입니다. 죄인 된 자기를 보전하고 주장하고 유지하려고 할 때 드러나는 화가 원인입니다. 이 화는 하나님께 거부될 때 나타나고, 아벨을 거부함으로 나타납니다. 자기의 죄악 됨을 보전하면서 다른 사람이 마음에 안 든다고 화를 내는 것은 살인입니다.

나는 똥보다 더 더럽고 악합니다. 그러한 나의 기준에 안 맞는다고 싫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마음에 안 들어서 화가 난다면 그 자체로 살인입니다. 그 사람을 내 앞에 있게 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그 사람의 있음을 내 마음에서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에서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을 죽일 때, 그를 있게 하신 하나님도 내 마음에서 죽이게 됩니다. 이처럼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화를 내는 것은, 내 마음에서 사람을 죽이는 살인(殺人)이며 동시에 하나님을 죽이는 살신(殺神)으로 무서운 일입니다.

그런데 가인은 다른 사람이 죽이는 것을 두려워하자 하나님은 누구도 가인을 죽일 수 없도록 표를 주십니다. 이 표는 하나님의 주권을 상징합니다. 모든 인간은 죄악 된 자신을 보전하려는 특성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오늘도 여러분이 죄를 다스리지 않고 누군가 마음에 들지 않아 화를 낸다면 그 자체로 마음에서 살인을 하는 것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살인을 반복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금 지구 위에서 80억이 살아갑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마음의 살인을 행했다고 해서 몸까지 죽이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으로 막으십니다.

그렇다면 아벨은 왜 죽게 하신 것일까요? 가인은 아벨이 없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때 이미 마음에서 살인을 한 것입니다. 아벨을 죽인 사건의 초점은 마음의 살인에 있습니다. 그리고 가인은 실제로 아벨의 몸을 죽였습니다. 그것은 아벨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으로 정하신 마지막 날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주권으로 정하신 아벨의 죽는 날이 그날이 아니었다면, 가인이 아무리 마음에서 살인을 했을지라도 절대로 몸까지 죽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으로 정하신 죽음의 타이밍이 그때이기 때문에 아벨이 죽은 것입니다. 가인은 자기의 악함을 드러낸 것이고, 하나님은 아벨에 대해서 갖고 계신 계획을 가인의 악함을 통해 이루신 것입니다.

가인은 동생이 마음에 안 들어서 죽였듯이, 사람들이 유리방황하는 자신을 보고 마음에 안 들어서 죽일 수 있음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일이기에 사람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가인이 저지른 것과 같은 마음의 살인은 계속해서 일어날 것이지만, 몸을 죽이는 일은 하나님의 주권에 있습니다. 만약 죽임을 당한다면 그 사람이 죽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죽음의 때가 이른 것입니다. 그의 악함을 통해 하나님이 갖고 계신 죽음의 계획을 이루시는 것이지 그의 뜻대로 죽이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표를 주셨다는 말씀에 담긴 의미입니다.

 

우리는 화가 날 때도 있고, 언짢고, 불안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화의 바탕이 천변만화(千變萬化)합니다. 비굴함으로 변할 수도 있고, 좌절감으로 변할 수도 있으며, 두려움으로 변할 수도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후손인 인류는 더럽고 추악한 죄악에 찌들어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더럽고 추악한 자신을 이상하게 죽이려 하지 않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밀착해야 할 마음으로 눈에 보이는 피조물과 밀착하려 합니다. 피조물 중에는 더러운 것이 없습니다. 피조물이 더러운 것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을 등진 마음이 더러운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토록 더러운 자신을 이상하게 그대로 보전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이지 않는 타자에 대해 화를 냅니다. ‘왜 내가 하는 말을 받아들이지 않느냐? 내가 하는 행동을 왜 인정하지 않느냐?’라고 합니다. 동시에 나도 타자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며 화를 내고 마음에서 살인을 합니다. 그런데 마음의 살인은 반드시 살신을 동반합니다. 그 사람을 내 눈앞에 있게 하신 하나님을 마음에서 같이 죽이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땅에서 유리하는 자가 됩니다. 땅에서 유리한다는 것은 천 년, 만 년을 살면서 어떠한 결실도 얻지 못하고 방황하는 자의 마음으로 살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삶이란 결국 사람과의 만남으로 이루어집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보시는 가운데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화를 내고, 그 사람이 내 마음에 들지 않지 않는다고 화를 낸다면 그 관계에서는 어떤 열매도 맺힐 수 없습니다. 아무리 내 마음에 안들고 악해도 하나님에 의해서 있게 된 사람들이고, 내 눈앞에 있게 된 것 자체가 주권자 하나님에 의한 것입니다. 그것을 부인하고 그 사람이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화를 내고, 그 사람이 내 마음에 안 든다고 화를 낸다면 동시에 주권자 하나님을 향하여 화를 내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도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을 향한 화는 결국 그를 있게 하신 하나님에 대한 화입니다. 나를 거부하는 사람에 대한 화든지, 내 마음에 안 드는 사람에 대한 화든지 하나님에 대한 화로 바뀌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화는 결국 우리 마음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죽이는 결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과의 실제 만남을 거부하고 하나님을 부르는 것이 종교입니다. 종교의 하나님은 우상과 똑같아서 마음에서 화를 내든 말든 아무 소리도 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자녀와 밀착한 가운데 하나님 앞에 나와서 엄마가 열심히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열심히 기도하더라도 입에서 열심히 똥을 뱉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기도 많이 했으니, 하나님이 기도를 들어주실 것을 기대하면서 밝은 마음으로 웃으며 나오지만, 이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창세기 1장부터 4장까지 이야기되고 있는 믿음의 기본 중의 기본을 망각한 채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종교 생활을 해왔습니다. 마음에 사업이 붙고, 돈이 붙고, 건강이 붙어 있으면 그것은 더러움입니다. 하나님의 지극히 높으신 거룩하심만큼이나 지극히 더러운 상태입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린다고 합니다. 마음에 나라가 밀착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입으로 계속 똥 기운을 퍼내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한답시고 종교 생활을 해왔던 것입니다. 목사님들도 마음에 밀착한 대상이 하나님이 아니라면 마찬가지입니다. 설교를 통해 똥 기운을 퍼뜨리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좋다고 아멘! 아멘! 하였습니다.

 

창세기 4장에서부터 이러한 이야기가 분명히 제시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마음의 기본 바탕을 반드시 뜯어고쳐야만 합니다. 이제 우리는 동서남북 교회를 시작했습니다. 이 기회를 어설프게 흘려보내서는 절대 안 됩니다. 마음을 다잡고 반드시 뜯어고쳐야만 합니다. 요한계시록에서 계속 말씀하셨던 것과 같이 어린양을 붙잡는 싸움을 반드시 해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죄를 다스리지 못하면 죄에 먹힐 뿐입니다. 죄에 먹힌 마음의 바탕은 화입니다. 거부되어서 화가 나고, 거부하느라 화가 납니다. 이 화를 바탕으로 살면 그 어떤 결실도 없습니다. 사람을 대하여 화를 내는 동안에는 그를 있게 하신 하나님을 내 마음에서 죽이는 것이므로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을 통째로 잃는 것입니다.

마음에 안 든다고 화를 내는 모든 살인은 살신을 동반합니다. 오늘도 죄인으로서 할 수 있는 선행은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주님의 죽음을 옷 입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과의 밀착을 떨어뜨리고 주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과 밀착하며, 하나님만을 호흡할 수 있는 여건 안에서 삶을 시작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마음의 기본 바탕이 되어 있는 화가 항상 기쁨과, 쉬지 않는 기도와, 범사에 감사로 바뀔 수 있기 위하여, 오늘도 십자가에서 내 죽음을 이루신 예수님을 마음이 옷 입고 삶을 시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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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에스더54 | 작성시간 24.07.1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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