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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3

녹취문: 스스로 있는 자 없는 인간 역사의 특징_태승철 (창 4:16~26)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4.05.06|조회수156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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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스스로 있는 자 없는 역사의 특징>의 줄거리 :

세상에서 가장 쉽고 그러나 치명적인 분리 독립이 스스로 있는 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갈라져 나옵니다. 본문은 이렇게 분리 독립한 인간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역사는 세 가지 특성을 가집니다. 첫째 자기 기준성이 극단적으로 강화됩니다. 둘째 유리, 방황, 요동의 바탕 위에 안정을 추구합니다. 셋째 어찌해도 없어지지 않는 부족함과 결핍을 찾아내고 해결하려 합니다.

 

 

스스로 있는 자 없는 인간 역사의 특징

 

(창세기 4:16~26)

 

16.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17.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18. 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19.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20.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21.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22.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25.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26.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꼭 눈여겨 봐야 할 부분은 16절의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라고 하는 구절과, 26절의 “…그때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라는 부분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에 특별히 주목해야 본문이 우리에게 전달하는 메시지가 분명해집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은 ‘스스로 있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본문에는 스스로 있는 자 없이 인류의 문명이 시작되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삶과 역사는 어떤 특징을 갖고 있을까요? 이것은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 나에게 직접적으로 연결이 됩니다.

 

먼저 질문을 하나 해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스스로 있는 자이신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 말할 수 있습니까? 이것을 여러분의 입으로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입이 열리지 않는다면 신앙은 반쪽으로 끝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있는 자이신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이란 내 마음이 하나님과 밀착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실제 삶의 현장에서 여러분의 마음이 하나님과 밀착한다는 것은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일까요? 여러분 스스로 하나님과 밀착하였는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우리는 앞서 가죽옷이 뜻하는 바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우리에게 가죽옷이란 내가 이 세상에 대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자라는 신분 의식을 갖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아의식을 바탕으로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을 제일 먼저 의식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밀착한 상태입니다. 이러한 상태를 일단 확인하고 삶의 현장으로 나가면,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은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에 의해서 있게 된 것들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우리는 매일 삶을 출발하기 전에 몸으로 사는 삶에 대해 십자가에서 죽은 자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죽은 자로서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마주하고 있다는 의식을 가질 때 하나님을 부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마주합니다. 나의 유일한 있음이며, 나의 유일한 좋음인 하나님 아버지! 아버지의 존재감과 아버지의 좋으심을 소망함으로 나의 마음이 가득 채워지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확인하는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다음에 세상으로 나가면 눈에 보이는 모든 상황은 하나님에 의해서 있게 된 것입니다. 시편 23편 1절의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말이 체감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밀착한 상태에서는 주어진 상황이 어떠하든지 상관없습니다. 세상 사람들 눈에는 좋게 보이든 나쁘게 보이든, 전부 하나님이 있게 하셔서 있게 된 사건이고, 있게 된 사람이고, 있게 된 문제입니다. 따라서 그 사람과 그 사건과 그 문제에 대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생각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제 그 하나님의 생각을 물으며 말하고 행동합니다. 이처럼 우리 마음이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과 밀착하기만 하면 삶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한편 이렇게 하나님과 밀착하는 삶을 살던 사람이, 스스로 있는 자이신 여호와 하나님과 분리 독립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인류의 타락은 그러한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가장 쉬운 독립이자 가장 치명적인 독립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 중에는 다양한 사건과 사람과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을 내 마음에 제일 먼저 담으면 하나님과 분리됩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 중에서 무엇인가를 제일 먼저 마음에 담으면 곧바로 마음이 밀착합니다. 그 상태에서 하나의 독립체가 형성되면서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과는 완전히 분리됩니다.

그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한 하나님을 찾는 모든 행위는 종교가 됩니다. 그리고 실제 살아계신 하나님, 예수님의 아버지이신 하나님, 나의 아버지이신 하나님,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절대로 만날 수 없습니다. 신학자든, 목사든, 장로든, 권사든 눈에 보이는 것들을 마음에 제일 먼저 담는다면 하나님을 절대로 만날 수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자의 의식을 가지고 제일 먼저 하나님을 의식하는 상태가 아니라면, 하나님의 존재감을 느끼고 하나님만을 소망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아무리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고, 십자가 생활화를 하려고 해도 불가능합니다. 십자가 생활화는 하나님 이외에 눈에 보이는 것들을 마음에 담고 밀착한 상태를 죽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6절을 보면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라고 하였습니다. 가인이 스스로 있는 자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면서 인류의 역사가 시작됨을 보여줍니다. 에덴 동쪽의 놋 땅은 에덴동산의 대척점입니다. 이것은 결국 에덴과의 거리가 가장 먼 상태입니다. 에덴은 ‘기쁨’이라는 뜻입니다. 한편 놋 땅은 ‘유리하다, 방황하다, 요동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놋 땅은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을 제일 먼저 의식하여 밀착하지 않은 마음 상태를 잘 보여줍니다.

마음이 하나님과의 밀착함이 끊어진 상태에서 밀착하는 대상은 피조물입니다. 피조물의 운명은 끊임없는 변수가 등장함으로써 유리하고, 방황하며, 요동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사업에 마음을 붙이게 되었다면 사업 자체가 변수 위에 세워진 것입니다. 그렇기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내 생각대로 잘 된다고 해도 여전히 마음은 채워지지 않습니다.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과 분리 독립하여 살게 된 것 자체가 에덴과 반대인 유리하고, 방황하며, 요동하는 놋의 상황입니다. 삶의 기본 판이 유리하고, 방황하며, 요동하므로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없습니다.

이어서 17절을 보면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이제 가인이 놋 땅에 거주하면서 첫 번째 한 일은 성을 쌓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의 이름을 아들의 이름을 붙여서 에녹이라 합니다. 에녹의 뜻은 ‘바치다, 헌신하다, 가르치다’라는 의미의 동사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예를 들어 솔로몬 왕이 성전을 건축하고 봉헌할 때 하누카(חנוכה)라는 동사가 사용되었는데, 에녹이라는 이름도 여기서 파생되었습니다. 잠언에서 나오는 ‘가르침’이라는 단어 또한 같은 동사에서 나온 명사이고 사전을 찾아보면 ‘시작하다’라는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이로부터 우리는 에녹이라는 이름에 ‘바치다, 헌신하다, 가르치다, 시작하다’라고 하는 다양한 의미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인가에 자기를 던져서 시작한다는 뜻입니다. 참고로 가인의 아들 에녹은 이후에 나오는 아담의 7대손 에녹과는 동명이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분리 독립한 자의 특징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평강은 마음에 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한 자에게는 평강 대신에 유리하고, 방황하며, 요동하게 됩니다. 하나님과 밀착이 다시 회복되기 전까지는 유리하고, 방황하며, 요동하는 상태는 극복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가인은 성을 쌓았습니다. 따라서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과 분리된 사람의 특징이 나타납니다. 매일 지진이 일어나듯이 요동치는 놋 땅에 성을 쌓아서 안정을 추구하려 합니다.

세상은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그중에서 자기 삶의 조건이 안정적이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정작 안정을 찾는 곳이 요동치는 놋 땅입니다. 그래서 보험을 비롯한 다양한 안전장치를 두고자 합니다. 안정을 꾀하려는 인간의 노력은 가장 보편적인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 자체는 요동치는 현장 위에 안정을 추구하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안정을 눈에 보이는 환경에서 찾으려고 하면 그 누구도 진정한 안정을 찾을 수는 없습니다.

 

제가 지금 이렇게 말씀을 드리는 것은 결코 어려운 말이 아닙니다. 성경에 나온 이야기를 그대로 하고 있기에 여러분의 입으로 옮겨야 합니다. 놋은 ‘유리하다, 방황하다, 요동하다’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인은 그 땅에 성을 쌓고 요동하는 판 위에서 안정을 추구하고자 했습니다. 이것이 스스로 있는 자가 없는 역사의 첫 번째 특징입니다. 눈에 보이는 환경이 안정되기를 바라는 모든 상태는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분리 독립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마음이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과 밀착하여 호흡을 맞춘다면 눈에 보이는 상황에서 안정을 찾으려 하지 않습니다.

만약 여러분 마음속에 보험에 대한 신뢰, 연금과 저축에 대한 신뢰, 매년 건강검진에서 이상이 없다는 신뢰, 앞가림을 잘하는 자녀를 신뢰하고 계십니까? 삶에 불안한 요소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러한 자신을 반드시 십자가에서 죽은 자로 여기시기를 바랍니다. 가죽옷을 입힌 신분 의식을 회복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이 의지하고 있는 모든 안정된 조건은 하루아침에 사라질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정말로 하나님의 예정하신 선민이라면 더욱 그렇게 됩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유리하고, 방황하며, 요동하는 현장 위에 홀로 서게 될 것입니다.

마음이 세상의 안전장치를 의지하려는 것이 보인다면 반드시 당장 십자가에서 죽고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과 밀착해야만 합니다. 세상의 모든 안전장치를 마음 안으로 끌어들이지 말고 밖에 두고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가져야 하는 자아의식은 ‘나는 은행에 돈이 많다, 나는 보험이 있다, 나는 연금이 나온다, 나는 배우자가 유능하다, 나는 몸이 건강하다.’라고 하는 안전장치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에 이러한 세상의 안전장치를 두고 있다면 하나님과의 관계는 죽음입니다. 그러한 상태를 반드시 십자가에서 죽이고 하나님과 나와의 바깥으로 내몰고, 그것들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시키시는 대로 반응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스스로 있는 자가 없는 역사의 두 번째 특징은 라멕의 자손들에게서 잘 드러납니다. 19~22절을 보면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라고 하였습니다. 야발은 목축업의 조상이 되었고, 유발은 음악가의 조상이 되었고, 두발가인은 금속을 다루는 기술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본문은 인류의 문명을 세 가지로 총망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유리하고, 방황하며, 요동하는 삶의 판 위에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가인은 이러한 삶의 판에 성을 구축하여 안정을 추구하였습니다. 이것이 스스로 있는 자이신 여호와 없이 사는 자의 첫 번째 특징입니다. 그리고 라멕의 자손들이 인류의 문명을 이룹니다. 이러한 인류 문명의 특징 또한 하나님과의 밀착이 끝난 상태에 기인합니다. 사람의 마음이 세상 것을 받아들여 밀착할 때 여호와 하나님과는 분리 독립하게 됩니다. 이로부터 하나님의 생각을 호흡하는 대신에 사탄의 언어 체계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으므로 스스로 생각하는 주체가 됩니다. 하나님과 분리되어서 더는 하나님의 언어 체계를 받아들일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사탄의 언어 체계를 받아들일 때 제일 먼저 나타나는 것은 부족함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과 밀착된 상태에서는 부족함을 느낄 수 없습니다. 삶의 모든 일들은 내가 밀착하고 있는 하나님에 의해서 있게 된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부족함을 못 느끼는 상태에서는 변화가 없는 것 아니냐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가 시켜서 온 세상을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발성에 의해 창조하셨습니다. 따라서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과 마음이 밀착한다면 모든 일을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으로 보고 감사합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창조적인 생각이 나오면서 변화가 생길 수 있습니다. 반대로 사탄의 언어 체계를 갖게 된 인간은 유리하고, 방황하며, 요동하는 특징을 가진 인생 판 위에서 안정을 추구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안정은 이루어지지 않기에 사람들은 그 이유를 반드시 부족함에서 찾고자 합니다. 그 부족함을 찾음으로부터 결정하고, 추구하고, 행동하게 됩니다. 그 결과가 목축업, 음악, 기술문명 등으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음이 하나님과 붙어있다면 목축업도 발달하지 않고, 음악이나 기술도 발달할 수 없을까요? 아닙니다. 그것이 인류의 삶에 필요한 것이기에 하나님의 생각을 호흡하면서 발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스스로 있는 자 없는 역사의 특징은 가룟 유다가 자기의 악함을 드러내면서 예수님을 팔았던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가룟 유다의 악함이 드러나는 상황을 주권적으로 이용하셔서 인류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타락한 인류는 사탄의 언어 체계를 가지고 요동치는 삶의 판에서 환경적인 안정을 찾는 동안 여러 가지 부족함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부족함을 사탄의 언어 체계를 가지고 메우려고 움직이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주권적으로 이용하셔서 이 세상에 필요한 것들을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타락한 사람은 하나님의 소모품입니다. 본래 사람은 하나님과 호흡하면서 하나님의 아들들로서 이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존재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사탄의 언어 체계를 갖고 하나님과 분리되자 가룟 유다가 하나님의 주권적 계획 안에서 예수님을 팔았듯이 자기 악함을 드러냅니다. 자기 생각대로 무엇인가를 만들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필요하신 것들에 대해 가룟 유다처럼 이들의 악함을 소모품으로 삼아 인류의 문명을 이루어 나가게 하십니다.

목축도 음악도 기술도 하나님의 계획 중에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타락한 인류는 이것들에 대해 부족함을 느끼며 하나님과 무관하게 사탄의 언어 체계 안에서 만들어 가게 됩니다. 인간이 완전히 소모품이 된 것입니다. 인류 역사 속에서 나타난 모든 위인과 영웅들은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과 분리 독립한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인류 역사에 위대한 족적을 남겼다고 판단되지만 하나님이 사용하신 소모품에 불과합니다.

 

이처럼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과 분리 독립한 자들의 첫 번째 특징은 요동치는 판 위에 안정을 구축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부족한 것들이 눈에 보입니다. 이로부터 두 번째 특징으로 부족한 것들을 채우려는 노력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결국 하나님의 절대 주권 안에서 소모품으로 사용될 뿐입니다. 하나님이 생각하실 때 필요한 것들을 만들어 내는 역사의 소모품으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결국 인류 문명이란 하나님이 소모품들을 이용하셔서 만들어 내신 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스마트폰으로 동서남북 교회의 모습을 보면 기가 막힙니다. 캐나다 토론토에 계신 분이 한국에 계신 분들과 실시간으로 만남을 이룹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이루어질 수 있는지 놀랍습니다. 이 스마트폰을 대중화시킨 사람은 애플의 스티브 잡스로 알려져 있습니다. 스티브 잡스는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일본의 선(禪) 사상을 좋아하였다고 합니다. 스스로 있는 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 독립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는 참새 한 마리의 생명도 주관하십니다. 스티브 잡스의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스마트폰도 하나님께서 스티브 잡스의 삶을 소모품으로 이용하셔서 필요한 대로 만들어 내신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만들어진 것들이 인간의 죄악으로 인해 끊임없이 남용되고 악용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역기능과 순기능이 함께 존재하는 상황도 하나님의 주권 바깥에서 일어나는 경우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지만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 의해서 일어났다면 그들은 소모품 인생을 산 것입니다. 인류 문명은 이러한 역사에 의해 이끌려져 왔다고 특징지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모르는 사람도 하나님의 주권을 벗어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가룟 유다가 자기의 악행을 드러내는 것조차 주권적으로 이용하셔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의 악함을 고려한 상태에서 이끌어가시는 하나님의 주권 밖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한 번 사는 인생, 어차피 살아야 할 인생이라면 소모품으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과의 분리 독립은 가장 쉽지만 가장 치명적인 사건입니다. 한편 하나님과의 밀착도 가장 쉬운 일입니다. 누구와도 쉽게 밀착할 수 없지만 하나님과는 쉽게 밀착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세상에 대한 죽음을 고백하며 의식으로 부활 승천을 따라갈 수 있으면 됩니다. 하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예수님을 생각하면 내 마음이 의식할 수 있는 대상은 하나님뿐입니다. 이 상태를 유지하면 됩니다. 배우자와 마음이 밀착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자녀와 마음이 밀착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연인끼리 마음이 밀착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밀착은 제일 쉽습니다. 이것 하나를 하지 못해서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소모품으로 살아간다면 이보다 불행한 일은 없습니다.

 

스스로 있는 자가 없는 역사의 세 번째 특징은 자기 기준성의 강화입니다. 이것은 앞서 살펴보았던 가인의 화냄과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가 읽지 않은 23~24절을 보면 라멕이 자긍심에 가득 찬 노래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이 구절은 ‘검의 노래’라는 별칭으로 불립니다. 성경에 나오는 노래 중에 가장 오래된 노래입니다.

라멕의 노래에는 가인에게서 드러났던 자기 기준성이 잘 드러납니다. 타락한 사람은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 외에 눈에 보이는 것들을 마음에 받아들여서 밀착하게 됩니다. 마음이 오염되고 더러워진 것입니다. 라멕은 이렇게 더러운 상태를 기준으로 붙잡는 자기 기준성이 극단적으로 강화됩니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라고 하였습니다. ‘누가 가인의 뺨을 한 대 쳤다면 일곱 대를 맞을 각오를 해야겠지만, 내 뺨을 친다면 칠십칠 대를 맞을 각오를 해야 할 것이다. 나는 가인보다 열한 배는 더 잘난 사람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자기 기준성이 확고함을 넘어 극단적으로 치닫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3절에서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라는 부분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게 상처를 준 사람에게 똑같은 상처를 주는 것이 아니라 아예 죽여버립니다. 예를 들어 소년이 자전거를 타다가 내 차를 건드립니다. 그러자 화를 참지 못하고 쫓아가서 아이를 죽여버리는 끔찍한 범죄를 저지릅니다. 그런데 라멕은 자신이 바로 이렇게 잔악한 사람임을 드러내며 노래합니다. 이로부터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사람의 특징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마음에 밀착시키면서 자기 기준성을 강화합니다. 사람을 만날 때 자기 기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것을 참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기 기준성이 강한 자들이 왕이 되고, 장군이 되고, 귀족이 됩니다. 이런 자들을 지도자로 삼아 인류 역사는 진행되어 왔습니다.

가인은 성을 쌓았고 라멕의 자손들은 인류 문명의 조상들이 되어 목축업자로서, 예술가로서, 기술문명의 선구자로서 활약합니다. 안정된 삶과 탁월한 아들들을 두어서 라멕의 자존감은 가인의 열한 배나 됩니다. 그런데 그것이 잔악함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인류 역사에 전쟁이 끊이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개인적 관계에서도 타인에 대한 불만과 원망이 있고 갈등이 생기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부부 간에도 다툼이 그치지 않는 이유는 자기 기준성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하나님과 밀착해서 보면 아무리 못난 배우자라도 하나님에 의해서 있게 된 자임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마음이 하나님과 밀착한 상태에서 평강을 누리기 때문에, 배우자가 잘한다고 해서 안정을 느끼지 않고, 배우자가 못한다고 해서 불안해하거나 요동치지 않습니다. 마음은 하나님과 밀착해서 천국의 안정됨을 느끼고 평강을 누립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자기 기준성을 강화하는데 여념이 없습니다. 자녀들은 부모에게 바라는 것이 많고, 부모는 자녀에게 바라는 것이 많습니다. 사람을 만날 때 자기 기준성으로 대합니다. 회사에 나가면 사장님의 말을 듣지만, 속에는 언제나 불만이 가득합니다. ‘저게 무슨 사장이라고, 저 따위가 무슨 부장이라고.’라는 생각이 끊이지 않으니 그 마음이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권력만 주어지면 다 죽이고 싶다.’라는 생각이 든다면 이미 마음에서는 다 죽인지가 오래입니다. 그러나 날마다 죽어야 하는 것은 사장님을 담고 있는 나입니다. 부장님을 담고 있는 나입니다. 원망하고 있는 나입니다. 나를 죽일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자기 기준성에 의해 마음에 안 든다고 날마다 남들 죽이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한 삶에는 평강이 없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다행스럽게도 이런 세 가지 특징을 드러내고 있는 사람들 외에, 스스로 있는 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부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25~26절을 보면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죽은 아벨을 대신하여 셋을 주십니다. 그리고 셋의 계열에서 스스로 있는 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 나타납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은 내가 하나님과 개별적으로 관계할 때 부르는 이름입니다. 스스로 있는 자이신 여호와 하나님과 개별적으로 관계한다는 것은, 스스로 있는 자 없이 자기가 스스로 사는 삶을 문제시합니다. ‘스스로 있는 자이신 여호와 앞에서 내가 스스로 살면 안 된다.’라고 느끼는 자들이 이 세상에서 하나의 무리를 이룰 수 있고 군중을 이룰 수 있게 됩니다.

지금 십자가 복음 방송을 듣는 여러분은 바로 이러한 셋의 후손들입니다.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 아버지를 여호와로 부르고 있는 자들입니다. 우리에게서는 스스로 있는 자 없이 사는 삶의 특징, 역사의 특징이 하나도 나타나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과 밀착해야 합니다. 오늘도 십자가를 붙잡고 눈에 보이는 세상에 대해 죽은 자의 의식을 가지고, 마음은 제일 먼저 하나님을 의식하는 상태를 유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럼으로써 여러분 눈앞에 펼쳐지는 모든 것들이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에 의해서 있게 된 것들임을 받아들이며 하나님과 호흡하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과 분리 독립하여 사는 인류 역사의 특징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이 세 가지 특징이 우리의 여생 동안 절대 나타나지 않도록 오늘도 십자가를 향하여 우리의 시선이 고정되게 해주시고, 하나님과의 밀착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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