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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3

녹취문: 실시간 동행 대신 천 년의 기다림_태승철 (창 5:1~32)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4.05.09|조회수102 목록 댓글 0

 

www.everyday01.com -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실시간 동행 대신 천 년의 기다림>의 줄거리 :

아담과 셋과 에노스로 이어져 노아까지 도달하는 족보가 나옵니다. 특이한 것은 사람들의 평균 수명이 912세입니다. 이 중에 에녹 한 사람만 365세에 살아서 승천합니다. 이러한 천 년에 가까운 수명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에녹을 기준으로 바라보면 하나님의 안타까운 기다림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천 년의 인간 수명은 장수의 복이 아니라 타락한 인간을 바라보시던 하나님의 길고 긴 기다림의 마음을 표현합니다.

 

 

실시간 동행 대신 천 년의 기다림

 

(창세기 5:1~32)

 

1.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2.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3.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4.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5.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21.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22.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3.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25. 므두셀라는 백팔십칠 세에 라멕을 낳았고

26. 라멕을 낳은 후 칠백팔십이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27. 그는 구백육십구 세를 살고 죽었더라

28. 라멕은 백팔십이 세에 아들을 낳고

29. 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30. 라멕은 노아를 낳은 후 오백구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31. 그는 칠백칠십칠 세를 살고 죽었더라

32. 노아는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

 

 

 

앞에서 우리는 가인의 후예들을 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아담과 셋과 에노스를 통해 노아까지 이어지는 족보가 소개됩니다. 1~5절까지는 아담의 계보가 나옵니다. 하나님의 모양대로 사람을 지으셨고, 이어서 타락했으며, 타락한 아담은 또 자기의 형상대로 셋이라는 아들을 낳았으며, 셋은 에노스를 낳았다는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모양대로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 담겨있는 의미를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삼위일체 되심에 참여시키기 위하여,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공통점을 넣어주신 것이 바로 언어능력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과 같은 언어적 인격체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이 언어적 인격체의 조건은 하나님과 마음이 밀착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생각을 호흡할 수 있는 언어적 인격입니다. 그러나 아담은 그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타락했습니다. 본문에는 그렇게 타락한 아담이 자기의 모양대로 셋을 낳았다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이는 곧 아담의 타락한 상태가 아들 셋에게로 전가되었음을 뜻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인류는 죄 속에서 두 부류로 나뉨을 살펴보았습니다. 첫 번째 부류는 가인의 후예로서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분리 독립한 자들입니다. 이들은 삶의 모든 것을 스스로 판단하며 좋다고 여기는 것을 있게 하려는 자들입니다. 두 번째 부류는 죄와 타락이 들어온 상태에서 가죽옷 신분 의식을 가지고,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과 쌍을 이루는 본래의 사람을 회복하려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파트너십을 이루고 한 쌍을 이룰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은,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자이신 여호와이시며, 나는 있게 된 자임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로 인해서 스스로 모든 것을 있게 하려는 경향을 띠게 됩니다. 이러한 죄악 된 경향을 내 인격과 분리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에 가죽옷 신분 의식이 없으면 스스로 있는 자이신 여호와 하나님과 한 쌍을 이룰 수 없습니다.

죄와 타락은 내가 스스로 인격에서 떼었다 붙였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언어적 인격이 죄화(罪化)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곧 하나님과는 별도의 언어 체계를 가지고 있으면서, 스스로 눈에 보이는 것들 중에 좋고 나쁨을 판단하고, 스스로 생각하며, 스스로 부족하다고 여기는 것을 있게 하려는 경향을 띠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사람들이 보통 생각하는 인간 존재의 특징입니다. 이러한 자기를 죽은 자로 인정해야만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과 한 쌍을 이루어서 배우자도 대하고, 부모도 대하고, 자녀도 대하고, 회사에 나가서 일도 하고, 시장도 보고 살림도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한 쌍을 이루려면, 나는 있게 된 자이며 나를 있게 하신 분은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있게 하려는 경향에 찌든 내 인격에 대해서는 늘 죽은 자라는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본문에서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의 계보가 나열됩니다. 그런데 결국 이들조차도 다음에 볼 6장에서 하나님께서 대홍수로 쓸어버리셔야만 할 정도로 자기 속에 있는 죄의 힘을 이기지 못해 정복되고 먹혀버리고 맙니다. 이러한 족보에서 우리가 눈여겨볼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살아서 승천한 에녹을 제외하고 나머지 사람들의 평균 수명을 보면 912세로 좀 과장해서 천 년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천 년에 가까운 인간의 수명은 노아 홍수를 기점으로 확연하게 줄어듭니다. 아브라함은 175세, 이삭은 180세, 야곱은 147세, 요셉은 110세를 살았습니다. 시편 90편 10절을 보면 모세의 글이 기록되어 있는데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의 수명이 이렇게 줄어든 이유에 대해 어떤 학자들은 대홍수가 일어나기 이전에는 지구의 환경과 생태계가 인간이 천 년 가까운 세월을 살 수 있을 정도로 우호적이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다지 신뢰할 만한 해석은 아닙니다. 여기서 천 년에 가까운 인간의 수명이 의미하는 영적인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4장에서 가인의 족보가 언급될 때는 딱히 수명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가인의 족보에서는 수명과 관련하여 특별한 메시지를 담을 내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곧 셋의 계열에서 특별한 메시지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365세를 살다가 승천한 에녹과 비교를 해봅니다. 에녹의 수명은 당시 천 년에 가까운 세월을 살았던 사람들의 삼분의 일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였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의 수명이 평균 수명의 삼분의 일 정도밖에 안 되지만 죽지 않고 세상을 떠났다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한편 에녹의 아들 므두셀라는 969세로 언급된 모든 인물 중에 가장 장수합니다. 이러한 대조는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관계보다, 가장 짧은 생애와 가장 긴 생애를 대조해서 보여줍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 사람들의 수명을 설교 화하고 말씀 화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말씀하고자 하신 걸까요?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하는 말씀의 의미부터 생각해 봅니다. 스스로 있는 자 앞에서 있게 된 자로서의 올바른 태도는 스스로 생각하는 자신을 죽이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하나님과의 동행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에녹은 죄와 타락의 상태에서 가죽옷 신분 의식을 생활화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구절에 근거하자면 에녹은 자기의 죽음을 생활화하였다는 점에서 십자가 생활화의 원조 격입니다. 죄악 된 자기를 죽이는 일을 생활화하지 않고는, 스스로 있는 자이신 여호와 하나님과의 실질적인 동행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죄의 기질은 내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여 부족하게 여기는 것을 있게 하려는 경향을 띱니다. 그러한 상태에서는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과 한 쌍을 이루어 살 수는 없습니다. 나 자신을 죽은 자로 여겨야만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과 한 쌍을 이루어 동행할 수 있습니다. 이로부터 에녹을 십자가 생활화의 원조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에녹을 기준으로 평균 수명 천 년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이 구절을 읽고 해석할 때도 언어 체계의 문제가 깊이 관여합니다. 대부분 이 말씀을 해석할 때 선입견이 있습니다. 천 년을 사는 것이 좋다는 전제를 하고 말씀을 해석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쳐주는 내용은 전혀 다릅니다. 예수님은 부활 이후에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곧바로 세상을 떠나 승천하셨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나그네 인생관을 가졌고, 스데반 집사님은 순교했으며,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 8절에서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라고 말했고, 빌립보서 1장 23절에서는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고 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생각할 때 천 년 가까운 세월을 살았다는 것을 은근히 좋다고 여기며 본문을 대하는 것은 정상이 아닙니다.

에녹이 365세밖에 못 살고 이 땅을 떠난 이유는 하나님과 동행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좋은 일이라면 이 세상에서 오래 사는 장수는 과연 복일까요? 하나님과 동행하기에 복을 받아서 장수한다면 에녹은 이천 년 정도는 살았어야 했을 것입니다. 이로부터 우리의 생각과 기준이 참 모순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천국의 좋음을 믿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 중에서 이 세상보다 천국이 좋은 곳임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동시에 이 세상에서 오래 사는 것을 복이라고 여기는 모순적인 경향을 보입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것은 하나님이 에녹을 세상에 놔둘 수 없을 정도로 너무너무 예뻐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기에 에녹을 당대의 사람들보다 훨씬 빨리 데려가셨습니다. 천국이 좋다는 것을 이론적으로 믿는다면, 천국에서 멀리 떨어진 이 세상에서 오래 사는 것을 복으로 믿을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모순된 확신과 신념은 언어 체계의 문제로부터 발생합니다.

우리는 종교 안에서 배운 교리대로 천국이 좋다는 것을 믿는다고 말은 합니다. 그런데 여전히 죽는 것을 두려워하기에 믿는 것이 아닙니다. 구백 살이 넘게 산 사람들을 보면서 백 살만 살아도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러한 모순이 생기는 이유는 말씀을 늘 들어도 내 언어가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언어 체계 안에서는 이론적으로 천국이 세상보다 좋다고 믿으면서도 지금 당장 죽는 것이 제일 두렵습니다. 지금 당장 천국에 가고 싶은 마음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나를 직시하고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발전할 수 있는 방향도 보입니다. 내게 이러한 모순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고 그냥 넘어간다면 달라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계신 천국이 정말로 좋은 곳이라면 지금이라도 그 천국에 가는 것이 제일 큰 복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 기록된 천 년 가까운 장수는 복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주권자 하나님께서 당대의 사람들에게 천 년 가까운 수명을 허락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여기에 본문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담겨있습니다. 이제부터 그것을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29절을 보면 라멕이 노아를 낳고 한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수고로움 끝에 먹고 살 수 있는 우리를 하나님이 노아를 태어나게 하셔서 위로해 주셨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노아라는 이름은 누아크(נוּחַ)라는 동사에서 나왔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람, 영이라는 뜻의 루아크가 아니라 누아크입니다. 누아크는 ‘한숨을 돌리다, 휴식하다’라는 뜻으로써 노아는 안식, 위로, 휴식이라는 뜻의 이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등장한 라멕은 앞서 살펴본 가인의 후손이었던 폭군 라멕과는 동명이인입니다. 이러한 라멕이 노아를 낳고 더 바빠졌으면 바빠졌지 안식하고 휴식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 구절은 라멕의 입을 통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노래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노아의 출생을 통해 하나님이 위로를 받으셨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대체 어떤 상황이었기에 하나님은 위로를 받으셨을까요?

우리는 다음 시간에 노아의 홍수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만 6장 5~7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라는 말씀이 등장합니다. 이 하나님의 마음과 본문에 기록된 하나님과 실시간으로 동행한 에녹의 삶은 대조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천 년 가까운 수명을 허락하셨지만, 에녹은 이들의 삼분의 일 정도인 365세에 데려가십니다. 당대의 사람들에게 천 년에 가까운 수명을 허락하심은 하나님의 기다리심을 의미합니다. 본문 말씀은 바로 이 하나님의 기다리심을 우리에게 메시지로 전해줍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지금도 그 마음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언제쯤이면 나와 실시간으로 호흡을 맞추어 동행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겠느냐?’라는 심정으로 기다리십니다. 그러던 중 에녹이 태어나 하나님과 동행을 척척 해나갔고, 하나님은 이러한 상황을 견디지 못할 정도로 좋아하셔서 에녹이 죽기도 전에 데려가십니다. ‘너는 이 죄악 된 땅에서 죄악 된 사람들과 한시도 머물 수 없는 존재다. 너는 나에게 와야 한다.’라고 여기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이라도 이 땅을 떠나서 아버지가 계시고, 예수님이 계시고, 성령님이 계신 그곳으로 가고 싶으십니까?

 

어느 날 외출해서 집사람과 국밥 한 그릇을 사 먹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이었습니다. 자동차로 20~30분 시골길을 천천히 달리는데 마음에 갑자기 하나님과 예수님이 그렇게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운전을 하면서 느닷없이 ‘아, 하나님과 예수님이 정말 보고 싶다.’라고 했더니 집사람이 놀랐는지 다른 이야기를 하다가 멈추고 집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아버지가 보고 싶지 않습니까? 천국에 가서 예수님을 보고 싶지 않습니까?

문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땅의 삶을 허락하신 의도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의도를 알고 맞춰서 준비를 해야 합니다. 에녹처럼 하나님이 언제라도 이 세상의 삶을 끝내실 수 있을 정도로 하나님과 실시간으로 동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천국에서 합격점을 줄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 앞에서 모든 것이 있게 된 자로서 살아가는 자세입니다. 그럴 때 우리 아버지이신 여호와 하나님과 진정으로 한 쌍을 이루게 됩니다.

누구를 만나든지, 무엇을 하든지 여호와 하나님과 한 쌍을 이루어야 합니다. 심지어 내 몸을 바라볼 때도 여호와 하나님과 한 쌍을 이루어야 합니다. 내 몸이 건강하든 건강하지 않든, 외모가 밉든 예쁘든, 키가 크든 작든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한 쌍이 되는 관계를 이룰 수 있기 위해 마음에서 내 몸 자체를 퇴출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한 쌍을 이룬 후에 비로소 내 몸과 관계하고 바라보는 관점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나가서 살 때 하나님과 실시간으로 동행하게 됩니다.

본문의 전후 맥락을 살펴보면 참새 한 마리 떨어지는 것조차 주장하시는 주권자 하나님께서, 이 사람들에게 천 년 가까이 살게 하신 이유는 명확합니다. 이것은 이론과 교리로 여호와가 스스로 있는 자이시고, 여호와 하나님과 한 쌍을 이루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우리에게도 해당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과 실시간으로 동행하던 에녹에게는 이천 년의 수명을 상으로 주시는 대신에, 평균 수명의 삼분의 일밖에 안 되는 365세를 살게 하시고는 이 세상을 떠나 데리고 가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노아의 대홍수 사건 이후에 인류의 수명은 현저하게 줄어듭니다. 하나님은 다시는 홍수로 사람을 진멸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하셨고, 천 년에 가까운 긴 수명 대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의 예표가 구약의 선민들에게는 제사 제도입니다. 제사 제도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뜻하는 바는 천 년이 걸리지 않고, 칠팔십만 살아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때문에 얼마든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천 년을 기다리신 이유는 그렇게 길고 긴 기간을 허락하심으로써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는 자가 되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을 호흡할 수 있는 자가 되리라는 기다림을 갖고 계셨습니다. 그러다 대홍수 이후에는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으실 것을 말씀하시면서, 만들어 놓으신 사건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아주 짧은 기간에 하나님이 데려가시지 못해 안달하실 정도로 하나님 마음에 드는 자들이 될 수 있게끔 조처를 해놓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은 ‘어떻게 건강하게 장수할 수 있느냐?’라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생활화함으로써 하나님과 실시간으로 동행하는 자가 될 것인가?’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에녹에 대해서 하나님이 가지셨던 마음처럼 우리도 제2의 에녹이 되기를 바랄 수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이 데려가시지 못해서 안달하시는 사람이 되기를 우리 생애의 목적으로 삼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사는 동안 무엇을 이루느냐 못 이루느냐는 하나님의 안중에도 없습니다. 천 년의 수명을 허락하셨던 하나님께서는 대홍수 이후에 사람의 수명을 칠팔십까지 줄이십니다. 더 일찍 돌아가시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렇게 짧아진 인생 속에서 우리가 세상에서 무엇인가 대단한 일을 하기를 기다리고 계시지는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대단한 일은 없습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듯이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조차도 하나님 주권의 소모품으로 이용하시면서 인간의 기준으로 대단하게 여겨지는 일을 하실 뿐입니다.

어느 인간도 하나님과 무관할 수는 없습니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었지만 근본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세종대왕을 소모품으로 사용하셔서 한글을 만들게 하신 것입니다. 아직도 여러분 마음에 존경하는 위인이 있고 영웅이 있다면 하나님 중심의 언어 체계를 갖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의 죽음이 중심에 있는 언어 체계를 가졌다면 어떻게 한글을 세종대왕이 만들었다고 봅니까? 하나님이 세종대왕을 통해서 한글을 만들게 하셨고, 하나님이 이순신 장군을 통해서 왜군을 물리치게 하셨고, 하나님이 칭기즈칸을 통해서 몽골을 대제국으로 만들기도 하셨으며, 하나님이 스티브 잡스를 통해서 스마트폰을 만들어 대중화시킨 것입니다. 그렇게 볼 수 있어야 하나님 중심의 언어 체계를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 삶의 목적은 한 가지입니다. 아프고, 가난하고, 일이 안 되고, 가족 관계가 문제일지라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삶의 목적은 십자가 예수님을 나의 유일한 자아의식의 바탕으로 삼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죽었다.’라는 마음가짐을 생활화함으로써 스스로 있게 하려는 죄의 경향에 찌든 인격을 죽은 것으로 인정하고,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과 밀착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과 호흡을 맞춰 동행하는 삶이 됩니다. 이것을 위해 우리는 새로운 언어 체계의 인격이 되기 위하여 몸부림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 외에는 우리가 살아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성경은 본문을 통해 천 년의 수명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쯤이면 나와 실시간으로 동행할 수 있는 인격들이 될 것인가?’라고 생각하시며 천 년을 기다리셨지만, 그렇게 되지 못함에 대해 한탄하시며 결국 물로 쓸어버리시는 대홍수 심판을 내리십니다.

다음 시간에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만 인간은 고깃덩어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인간에 대해 이야기할 때 영과 혼과 육을 이야기합니다. 영이 있고 혼의 작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는 고깃덩어리입니다. 영과 혼이 모두 고깃덩어리로 육체화(肉體化)된 것이고, 종속화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상태를 더 이상 인간으로 보시지 않습니다.

본문 2절을 보면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존재입니다. 타락하여 영과 혼이 육에 종속된 자들을 더는 사람이라 부를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에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담고 밀착하여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들이 채워지면 좋겠다고 생각한다면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영혼 자체가 고깃덩어리가 되어버린 것이고 고깃덩어리에 종속된 것입니다.

본문에 기록된 족보는 단순히 옛날이야기가 아닙니다. 천 년을 두고 기다리신 하나님은 이제 사람의 수명을 칠팔십으로 현저하게 줄이셨습니다. 그보다 더 적게 사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리고 독생자를 보내셔서 십자가에 죽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수명을 단축하신 이유는 간단합니다. 천 년을 사는 것보다 십자가 예수님을 붙잡고 십 년을 사는 것이 훨씬 더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천 년이 아닌 칠팔십을 십자가 예수님과 더불어 사는 것을 천만다행으로 여겨야 할 것입니다. 천 년의 수명 대신에 짧게 허락하시고 더 확실한 길을 열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저에게 구백 살을 살라고 하신다면 이보다 더 큰 저주는 없을 것입니다.

인생은 짧으면 짧을수록 좋습니다. 단 여기는 조건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온전한 연합을 이루어야 합니다. 이제 관점을 바꾸시기를 바랍니다. 가치 체계를 바꾸시기를 바랍니다. 부리나케 십자가 예수님과 연합하여 십자가 죽음을 중심으로 한 언어 체계를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를 중심으로 한 언어 체계란 ‘나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죽었으므로 세상에는 내가 관여할 가치가 아무것도 없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중심의 언어 체계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이 내가 마음을 밀착해야 할 유일한 가치이다.’라는 것입니다. 이 언어 체계를 빨리 구축해서 다만 몇 년을 더 살더라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나를 하루빨리 껴안고 싶으셔서 못 견뎌 하실 정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노아의 이름의 뜻은 안식, 위로, 휴식이었습니다. 이 세상을 바라보시며 안타까워하시는 하나님께 안식이 되고, 위로가 되고, 휴식을 드리는 자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모두 에녹처럼 하나님의 마음을 사랑으로 달궈내게 하시며, 노아의 이름처럼 하루빨리 하나님께 안식과 위로와 휴식이 될 수 있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자발적으로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 앞에서 가죽옷 신분 의식을 생활화하기 위하여 주님의 십자가를 놓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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