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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3

녹취문: 고기를 입은 사람, 은혜를 입은 사람_태승철 (창 6:1~8)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4.05.11|조회수100 목록 댓글 0

 

www.everyday01.com -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고기를 입은 사람, 은혜를 입은 사람>의 줄거리 :

인간인데 고기를 입은 사람이 있고 반면에 인간인데 은혜를 입은 사람이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당신을 여호와로 부르기를 원하십니다. 이 자체가 은혜입니다. 창조주이신 당신을 피조물인 인간에게 상대자로 내어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은혜를 저버리는 자가 있고 이 은혜를 제대로 입는 자가 있습니다. 이 은혜를 저버리면 인간은 고깃덩어리가 되고 입으면 은혜 덩어리가 됩니다.

 

 

고기를 입은 사람, 은혜를 입은 사람

 

(창세기 6:1~8)

 

1.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2.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3.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4. 당시에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

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6.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7.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8.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하나님께서 드디어 대홍수로 모든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지면에서 쓸어버리시겠다고 결심을 하시는 장면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제목이 뜻하는 대로 우리 마음이 고기를 입은 사람이 있고 은혜를 입은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고기를 입은 사람들 뿐인 세상에 은혜를 입은 한 사람 노아를 제외하고는 대홍수로 쓸어버리시려는 결심을 하십니다. 스스로 있는 자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람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기대와 포부와 계획을 접으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세상을 쓸어버리시기로 결심을 하신 근본적인 이유는 사람이 육신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3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는 말씀은 단순히 수명이 백이십 년이 되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백이십 년 뒤에는 홍수로 쓸어버리시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쓸어버리시겠다고 작정하시는 순간에도 백이십 년이라는 유예기간을 또 주셨습니다. 그동안 스스로 있는 자이신 여호와 하나님과 마음이 밀착해서 한 쌍을 이루는 자들이 혹시 생길까 싶은 마지막 기대를 하셨던 것입니다.

또 6절을 보면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라고 하셨습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께서 마음 아파하셨다는 뜻입니다. 이 부분을 하나님께서 후회하셨다고 해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1,000미터 달리기 종목에 참가한 선수가 간발의 차로 금메달을 놓치고 은메달에 머물게 됩니다. 이 선수는 한탄하지만 그 종목에 출전한 것을 후회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한탄 또한 마찬가지로 사람 창조하셨음을 후회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실 때 사람과 더불어 함께 지내는 상황을 꿈꾸셨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하나님과 함께 지내기 위해서는 인간의 역할이 필요한 여백이 있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바대로 자발적으로 그 여백을 채울 수 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 각자가 하나님과 한 쌍을 이루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서로 좋아서 죽을 지경이 되는 모습을 바라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는 하나님을 너무너무 좋아합니다.’라고 고백하고, 하나님도 그렇게 느끼시기를 원해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럴 수 있는 모든 조건을 다 제공하셨습니다. 심지어 죄와 타락이 임했어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가죽옷 신분 의식을 통해 스스로 있는 자이신 여호와 하나님과 밀착하여 한 쌍을 이룰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 중에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 족보를 이루면서 이어져 나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에게 평균 912살이라고 하는 천 년에 가까운 수명을 주셨습니다. 이 오랜 기간을 허락하시면서 하나님은 기다리셨습니다. 하나님의 기다리심이 어떠한 것이었는지 우리는 에녹을 통해 잘 알 수 있었습니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에녹에게 주어진 수명을 복이라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언어 체계 속에서는 건강이나 장수를 복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세상의 언어 체계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볼 때는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은 평균 수명보다 두세 배는 더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은 에녹을 다른 사람 삼분의 일정도 수명에서 데려가십니다.

우리는 이 사건에서 하나님의 기다리심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천 년이라는 수명을 통해 기대하셨던 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오래 산다는 것은 하나도 이득이 될 것이 없습니다. 이 땅에 태어난 것이 감사한 이유는 하나님과 호흡을 맞추고 조율할 수 있는 인격이 될 수 있는 기간이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대단한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해 ‘이 세상에 태어났으면 한 가지 괄목할 만한 일을 하고 가야 한다.’라는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과 동행함으로써 하나님과 짝꿍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입니다. 에녹을 데려가신 사건은 이것을 알게 하시는 대목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천 년에 가까운 수명을 허락하시며 기다리셨음에도, 사람은 결국 하나님의 기대를 아랑곳하지 않고 완전히 육신이 되었습니다. 다시 3절을 보면 이에 대해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사람과 함께 할 수 없다는 말씀은, 더 이상 사람과 실랑이를 하시지 않겠다는 결심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인격성을 생각할 때 하나님의 생각이 외출 나오신 영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생각을 호흡한다는 것은 결국 성령을 호흡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완전히 하나님을 등지고 육신이 되었고, 하나님은 더 이상 사람이 하나님의 영을 호흡하기를 기다리시지 않겠다고 결심하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각자에게 천 년씩을 기다리셨던 하나님의 마음 아픔을 느껴야 합니다. 그 마음이 이제는 한탄과 슬픔으로 바뀌면서 결국 사람을 쓸어버리시기로 작정하십니다.

 

하나님의 영이 사람과 함께 할 수 없게 된 이유는 하나님이 그렇게 결정하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결정하실 수밖에 없게끔 사람들이 변했습니다. 3절에서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은 영과 혼과 육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신학적으로 다툼이 많습니다. 인간을 영과 혼과 육이라는 삼분법으로 볼 것이냐, 영혼과 육이라는 이분법으로 볼 것이냐 하는 것으로 말이 많습니다. 성경의 용례를 보면 오해의 여지가 있습니다. 영이라고 번역된 단어가 다른 곳에서는 혼으로 번역되기도 하고, 심지어 영혼으로 번역되는 단어가 다른 곳에서는 육체로 번역된 곳도 있습니다. 이러한 오해의 여지가 있기에 우리는 단어 자체의 의미보다도 맥락을 잘 파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영과 혼과 육을 따질 때 적절한 방법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영이 무엇이냐, 혼이 무엇이냐, 육이 무엇이냐에 대한 개념을 단어에서 찾을 수 없게 만들어졌습니다. 다시 말해 성경에 나오는 단어의 용례만 봐서는 이분법이 맞느냐 삼분법이 맞느냐를 결정할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은 영이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어야 합니다. 태초의 안식에서 보면 영이신 하나님과 일대일로 마주하고 상대합니다. 그 사이에는 아무것도 끼어있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러한 영이신 하나님과 일대일로 밀착하여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부분이 바로 우리의 영입니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의 삼위일체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4장 20절에서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라고 일체 되심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영에는 하나님을 받아들이기 위한 공백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공백 때문에 채움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채움이 필요한 공백의 영을 마음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부터 출발하여 정리하면 영과 혼과 육의 개념을 분명히 할 수 있습니다.

영은 하나님을 받아들여 채움이 일어날 수 있는 공백을 가지고 있습니다. 채움의 문제는 만족과 기쁨으로 드러납니다. 이러한 특징으로부터 우리는 공백을 가진 영을 마음이라고 합니다. 쉽게 말해 마음이 채워졌기 때문에 만족한다고 할 때 그 채워짐이 이루어지는 곳이 바로 영입니다. 한편 육체에 대해서는 쉽습니다. 만질 수 있는 살덩어리가 육체입니다. 그 속에는 각종 장기가 들어있습니다. 그렇다면 문제가 되는 혼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혼이란 영과 육체처럼 인간을 구성하는 실체의 요소는 아닙니다. 혼이란 영과 육체가 연결될 때 나타나는 현상이고 작용입니다. 따라서 영이 떠나게 되면 육체는 그대로 있지만 혼적 작용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장례를 치를 때 염을 하기 전에 돌아가신 분의 시신을 보면 어제 만났던 그대로입니다. 그런데 영이 떠났기에 더는 혼의 작용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생각하고, 감정을 느끼고, 의지를 갖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혼이란 영과 육이 만날 때 나타나는 현상이고 작용입니다. 영도 실체이고 육도 실체이지만 혼은 실체가 아닙니다.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고 없는 것이 아니라 현상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드라이아이스를 물속에 집어넣으면 이산화탄소가 하얀 연기처럼 나오는 현상과도 같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육체와 영의 만남을 통하여 나타나는 현상의 작용이 혼입니다. 생각하고, 감정이 생기고, 의지가 작동하는 혼의 작용은 영과 육체의 만남을 통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영과 혼과 육의 구분을 통해 육신이 되었다는 말씀의 의미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본래대로라면 공백을 가진 마음의 흡입력은 하나님을 향해서만 작동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마음이라고도 할 수 있는 영 사이에 아무것도 끼어있지 않을 때, 작용하는 혼에는 하나님이 갖고 계신 생각들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혼이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함을 통해 육체를 움직이면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을 영, 혼, 육으로 구분해서 이야기할 때 영이신 하나님이 지배하시는 모습입니다.

사람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영이신 하나님을 유일한 상대자로 받아들이고 밀착해야 하는 공백을 가진 마음인 영이, 육체의 눈을 통하여 접하는 것들을 좋다고 여겨 밀착할 대상으로 삼고 채우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혼도 육체가 봐서 좋다고 여기는 것들을 얻고자 작용합니다. 영이신 하나님을 모셔 들일 수 있는 영과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들여서 작동해야 할 혼이 육체의 오감에 노예가 된 상태입니다. 이것이 영인 사람이 고기를 입게 된 상태입니다. 고기 화 된 상태, 육체 화 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본문의 말씀에서 사람이 육신이 되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육신이 된 사람은 하나님이 보실 때 더 이상 창조 때 구상하신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죄와 타락에 빠진 사람에게 가죽옷 신분 의식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육체가 된 상태를 죽은 자로 여기라는 것입니다. 오감에 포착되는 대상에 영인 마음이 가서 달라붙은 상태에서는 ‘어떻게 그것을 얻을까?’라는 생각과 감정과 의지라는 혼의 작용이 발생합니다. 가죽옷 신분 의식이란 이러한 상태를 죽은 자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는 곧 오감이 무엇인가를 포착할지라도 그것이 마음에 달라붙는 상태에서 삶을 출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직 마음은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과 관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하나님의 바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끝내 하나님의 요청을 등지고 거부합니다.

다만 그중에서 노아는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8절을 보면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영이신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공백으로 지음 받은 영이 육신이라는 고기를 입은 상태가 되었음을 뜻합니다. 반면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다’라는 표현은 ‘여호와의 눈에 은혜를 입었다’라는 뜻으로써 ‘여호와 하나님이 노아를 보실 때 너무너무 예뻐서 사랑의 하트가 뚝뚝 떨어지는 시선으로 바라보셨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은혜를 입었다’는 말은 하나님이 노아의 상태를 보시면서 너무너무 마음에 들어 하셨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왜 이것을 ‘은혜를 입었다’라고 번역했을까요? 상황적으로는 하나님이 노아의 매력에 빠지신 상황인데 성경은 이러한 상황을 노아가 은혜를 입은 것으로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눈에서 하트가 나왔으면 노아의 매력이 철철 넘친 것입니다.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다는 표현을 하나님이 노아에게 은혜를 베푸셨다는 식으로 생각한다면 노아만 은혜를 받은 것처럼 들립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다른 사람에게는 은혜를 베풀지 않으시고 결국 고기를 입은 사람이 되게 하셨느냐는 의문이 생깁니다. 노아에게서처럼 은혜를 베푸실 수 있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는 말씀을 보자면 표현 자체가 노아만 은혜를 입은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고 있는 상황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은혜를 허락하셨습니다.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신 것보다 더 큰 은혜는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인 마음은 속이 비어있기 때문에 무엇인가로 채워야만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채움의 대상으로 당신 자신을 내주신 것입니다. 마음이 하나님과 밀착한다면 삶도 하나님께서 살아주시리라는 은혜를 제공하셨습니다. 그런데 당신 자신을 통째로 내주시면서 나와 한 쌍이 되기를 바라신 은혜를 모든 사람이 거절했습니다. 오직 노아만이 제공된 은혜를 입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제공한 은혜를 입은 노아를 예쁘게 보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아이고 예뻐라!’라고 하시면서 눈에서 하트가 뚝뚝 떨어지는 시선으로 바라보셨던 것입니다. 반면 은혜를 베푸신 것은 똑같았으나 노아 이외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싶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를 받고 싶다며 은혜를 구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입니다. 이미 베풀어진 은혜를 입을 생각을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구하기만 하는 것은 이미 베풀어진 은혜는 버렸다는 뜻이 됩니다. 그리고 기껏 구하는 은혜란 눈에 보이는 것들 중에 좋다고 여기는 것들에 마음이 밀착합니다. 육신이 된 상태에서 눈에 보이는 것들 중에 좋다고 여기는 것을 많이 주시는 것이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교리적으로는 십자가의 죄 사함이 은혜라고 알고 있으면서, 실제로 하나님의 은혜를 실감할 수 있는 대목에서는 전부 세상 것에서 찾습니다. 육체의 오감으로 느낄 수 있는 환경에서 무엇인가가 자기 생각대로 좋게 바뀌는 것을 은혜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으시는 고깃덩어리의 상태입니다. 하나님이 쓸어버리시기에 마땅한 대상으로 보십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가지라고 내주신 은혜는 발로 차서 내동댕이치고는 다른 은혜를 달라고 하니 은혜를 주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버리시면서 하시는 일은 원하는 대로 세상 것이 잘되게 하십니다. 버리신 것인데 은혜를 받았다고 착각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에는 하나님이 사람을 쓸어버리시기로 작정하신 직접적인 동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너무나 기가 막히고 상식 밖입니다. 2절을 보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스스로 있는 자이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을 첫 번째 대상으로 삼았기에 하나님의 아들들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육체적으로 첫 번째 대상으로 삼는 대상은 부모님입니다. 부모님을 첫 번째 관계의 대상으로 삼는 자들이 자녀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스스로 있는 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첫 번째 대상으로 관계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아내로 삼았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흔히 아름다운 여인과 결혼하는 것이 뭐가 그렇게 큰 잘못이냐고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러한 모습을 더는 사람이 아닌 것으로 보십니다. 하나님이 제공한 은혜를 입은 것이 아니라, 고기를 입은 것으로 보셨고 쓸어버려야 할 고깃덩어리로 보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무엇을 싫어하시는지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마음이 밀착한 상태에서는 눈앞에 보이는 대상들에 대해 하나님이 갖고 계시는 생각을 호흡하며 말하고 행동합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러한 모습을 기대하신 것입니다. 그럴 때 노아처럼 하나님의 눈에서 하트가 뚝뚝 떨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들의 모습을 보니 눈앞에 보이는 여자를 보면서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떠났습니다. 이제 그 여자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이 어떠한가에 대해서는 상관이 없습니다. 내가 그 여자에 대해서 ‘이 여자를 아내로 삼아야겠다.’라고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문제는 이러한 모습이 스스로 있는 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부르는 자들에게서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애초에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자들이었다면 그러한 모습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에게서 이러한 모습이 나타났기에 하나님은 더 이상 기대할 바가 없어진 것입니다. 천 년을 기다리시며 한 사람, 한 사람을 보셨는데 그렇게 기다려도 하나님과 밀착하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고기를 입은 상태의 대표적인 경우를 아름다운 여자를 보고, 마음이 밀착하고, 스스로 생각하고, 그 여자를 아내로 삼는 모습을 통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모습을 보시고 더 이상 육체의 눈에 종속되어 고기를 입고 영이 육화(肉化) 되어버린 인간들과는 함께하실 수 없음을 결심하십니다. 이것은 사람이 아니라고 보시고 쓸어버리기로 하십니다.

넓게 보면 눈뿐만 아니라 오감으로 포착하는 모든 대상에 우리의 마음은 붙을 수 있습니다. 오감으로 포착하는 대상에 대해 좋고 싫음을 느끼며 반응합니다. 이것이 고기를 입은 사람의 특징입니다. 하나님이 쓸어버리시겠다고 작정하셨던 사람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육체의 오감을 통해 포착하는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과 밀착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만 우리는 죄와 타락 중에 있기 때문에 십자가 예수님 안에서 포착되는 대상인 하나님과 밀착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하나님과 호흡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사람을 눈에서 하트가 떨어지는 시선으로 바라보실 것입니다.

 

한편 본문 4절을 보면 “당시에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대목은 거인족이라는 네피림이 누구냐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제일 명성을 떨치고 있는 존재가 누구입니까? 내가 좋아함으로써 명성을 떨치는 존재가 있을 수 있고, 내가 싫어함으로써 명성을 떨치는 자들이 있습니다. 우리 시대에는 연예인, 정치인, 재벌들과 같은 사람들이 네피림이고 용사이고 명성이 있는 자들입니다. 쉽게 말해 이들은 인류의 0.00001%에 해당하는 탁월함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하나님 앞에서 다 고깃덩어리 이상이 아닙니다. 고기를 입은 자들 그 이상이 아닙니다.

지금 살아있는 사람 중에 여러분이 제일 위대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까? 혹은 과거 역사 속에서 가장 탁월하고 위대했다고 생각해서 존경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다만 그 사람에게서 스스로 있는 자이신 여호와 하나님과 마음이 밀착된 증거를 발견할 수 없다면 그 사람은 고기를 입은 자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을 위대하게 여기는 여러분도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여러분이 탁월하다고 인정해서 존경하는 위인과 영웅과 호걸들은 다 고기를 입은 자들이고, 하나님이 한탄하시며 쓸어버리시기로 작정하신 대상일 뿐입니다.

네피림과 영웅호걸과 명성 있는 자들에 대한 언급은 ‘너희 중에 위대하다고 여기는 자가 있느냐? 그들이 스스로 있는 자이신 여호와 하나님과 마음이 밀착되지 않은 자들이라면 물로 쓸어버려도 아깝지 않은 존재들이다.’라는 뜻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영웅호걸이라 불릴 정도로 탁월한 능력을 갖추게 된 것은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역사를 이끌어 가시기 위해 필요하셔서 주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훌륭한 사람 존경하는 것을 덕스러움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 대한 존경은 고기를 입은 자들에 의한, 고기를 입은 자들에 대한 존경일 뿐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존경함 자체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저항이자 배반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본문의 네피림과 용사와 명성 있는 자들에 대한 언급은 바로 이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사람은 스스로 있는 자이신 여호와 하나님과 마음이 밀착해 한 쌍을 이루고, 여호와의 생각을 호흡하는 혼의 작용이 일어나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러한 작용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아무리 위대해 보일지라도 고기를 입은 자에 불과합니다. 고기를 입은 자에 의한, 고기를 입은 자에 대한 존경은, 하나님에 대한 저항이고 반항이며 역적모의입니다.

 

본문 말씀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가 너무나 큽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 가지셨던 기대는, 사람이 하나님 때문에 죽고 못 사는 모습이고, 하나님으로부터 잠시라도 떨어지는 것을 도저히 견디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모습을 보고 싶어 하셨습니다. 이 간절한 아버지의 바람을 아시기에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십자가에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네피림이나 용사나 명성 있는 자들을 보며 존경하고 부러워하지 말고, 십자가에서 못 박혀 이 세상에서 가장 낮고 천한 쓸모없는 자리에 처하신 예수님의 자리로 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십자가 예수님께로 갈 때만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나의 파트너로 삼는 은혜를 입은 자가 될 수 있습니다. 고기 입은 자로서 십자가를 향하여 죽고, 은혜 입은 자로서 노아처럼 하나님이 보실 때 눈에서 하트가 뚝뚝 떨어지는 사람으로 오늘 하루를 사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 바라보면서 고기를 입은 내가 죽습니다. 은혜를 입은 자가 되어 하늘에서 하나님을 마주하고 있는 내 마음도, 이 땅에서 성령의 장갑이 된 내 몸도, 하나님이 보시며 하트가 뚝뚝 떨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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