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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생난리 통에도 의로움만은 지켜내자>의 줄거리 :
어떤 생난리 통에서도 내 목숨 가족 재산 명예 지위 이익 자존심 체면 등을 지키려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직 의로움 단 하나만 지켜내야 합니다. 하나님 마음에 드는 일인 의로움만 지켜내면 아무리 지독하게 모든 조건과 상황과 환경이 쫄딱 망해 없어지는 무서운 생난리를 겪어도 열 번 백번 하나님은 당신의 계획을 따라 내 인생을 다시 시작하십니다.
생난리 통에도 의로움만은 지켜내자
(창세기 7:1~24)
1.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이 세대에서 네가 내 앞에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2. 너는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수 둘씩을 네게로 데려오며
3. 공중의 새도 암수 일곱씩을 데려와 그 씨를 온 지면에 유전하게 하라
4. 지금부터 칠 일이면 내가 사십 주야를 땅에 비를 내려 내가 지은 모든 생물을 지면에서 쓸어버리리라
5. 노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그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문들이 열려 사십 일 동안이나 비가 쏟아집니다. 비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강력한 물 폭탄이 지구를 덮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대로 모든 사람을 비롯한 모든 생물이 죽게 됩니다. 이렇게 너무나 무서운 심판의 장면이 묘사되어 있는 7장 전체를 중심으로 ‘생난리 통에도 의로움만은 지켜내자’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불이 나면 사람들은 제일 소중한 것을 먼저 떠올릴 것이고 여유가 있다면 그것을 꺼내려고 할 것입니다. 여러분이라면 그 생난리 통에서 무엇을 지켜내기 위하여 나서겠습니까? 우리는 어떠한 생난리 통에도 의로움만은 지켜내야 됩니다. 온 세상은 하나님께서 결정하신 대로 물 폭탄으로 덮여버립니다. 모든 사람, 모든 짐승, 모든 생물이 다 물에 빠져 죽는 그야말로 글로벌 재난의 생난리가 벌어지게 됩니다.
대홍수는 노아의 나이 600세 되던 해 2월 17일에 시작합니다. 홍수가 시작된 뒤로 물이 다 걷히고 땅이 말라 방주에서 나올 때까지 걸린 기간이 370일입니다. 그 사이에 온 지구의 모든 생물이 멸절됩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기억해야 하는 것은 이렇듯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물 폭탄으로 쓸어버리실 때 노아 이외의 사람들과 그들의 재산만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노아의 집과 밭도 없어졌고, 가족들의 일터도 없어졌습니다. 노아가 600년을 살며 일궈왔던 삶의 터전도 깡그리 없어진 것입니다.
여기서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지구 전체가 사십 일 동안 물 폭탄을 맞아서 지구에서 제일 높은 에베레스트 산꼭대기까지 물이 차서 모든 생물이 죽어버렸습니다. 노아와 그의 가족 여덟 사람은 이러한 생난리 통에서 370일을 방주 안에 있었습니다. 그동안 노아와 그 가족들은 짧지 않은 기간에 방주 안에서 무엇을 했을까요? 어떤 화가가 그림을 그린다고 상상해 봅니다. 지구 전체가 물로 덮였습니다. 중력 때문에 물이 바깥으로 떨어지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볼 때는 남아메리카 쪽은 완전히 반대쪽이니까 물이 다 떨어질 것 같아도 바닷물이 고여있는 것처럼 온 지구가 물에 둘러싸였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방주가 하나 떠 있습니다. 이러한 전 지구적인 멸망의 어마어마한 생난리 통에 노아와 그 가족들은 무엇을 했는지에 대해서 본문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본문 1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이 세대에서 네가 내 앞에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노아의 의로움을 보셨다는 것은 쉽게 말해 노아가 하나님 마음에 들었다는 것입니다. 진리이신 하나님이 의롭다고 하신 것은 곧 노아가 하나님의 기준에 부합하는 인물이었음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너와 네 온 집’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노아의 아내나 세 아들과 세 며느리 또한 다른 사람들처럼 육신이 된 자들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에게 믿음을 받고, 남편에게 믿음을 받아서 그랬는지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모습을 보였던 것이라 여겨집니다. 세상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있음을 전혀 의식하지 않은 채 자기 눈에 보이는 좋은 것들을 마음에 밀착시키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얻기 위하여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움직이는 고깃덩어리로 살았습니다. 적어도 노아의 가족들은 이러한 상태는 아니었기에 하나님께서 이들을 살려두셨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로움’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노아와 그의 가족은 방주에 들여보내셔서 살리시고 나머지는 다 죽이십니다. 노아가 이렇게 의로울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노아는 스스로 의로울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노아와 그의 가족들 또한 죄와 저주에 통째로 찌들었던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이들을 대신하여 반드시 다른 생명체가 죽어야만 의로움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제사의 의미입니다. 제사는 구약과 신약을 일관되게 관통하는 주제입니다.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볼 때도 인류의 역사가 어린양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을 어린양으로 표현한 이유는 날마다 드리는 상번제가 어린양을 드리는 제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제사로 보면서 예수님을 어린양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이처럼 제사는 요한계시록의 마지막까지를 관통하는 하나의 일관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타락한 이후에 역사에서 처음 일어난 일은 하나님께서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사건입니다. 그 가죽옷을 입히신 사건에는 내가 다른 생명체의 죽음을 입고 있다는 자아의식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나는 죽음을 입은 자다. 내 신분은 죽은 자다.’라는 생각을 갖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이러한 신분 의식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제사가 필요했습니다. 인간이 타락하고 나서 하나님이 가죽옷을 입히신 사건에 이어서 일어난 것이 가인과 아벨의 제사 사건입니다. 아벨의 제사는 제사의 성격을 규정합니다. 그래서 제사에는 죽음이 필요합니다. 그 죽음은 나의 죽음입니다. 이처럼 제사는 제물과 나를 동일시함에 의미가 있습니다. 아벨은 양의 첫 새끼를 기름과 함께 드렸습니다. 이처럼 죽음을 일으키는 것이 제사의 의미입니다. 양의 죽음과 자신을 동일시한 아벨의 제사는 다른 종교에서처럼 신에게 뇌물을 바치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이로부터 의로움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의로움은 옳음입니다. 옳음이란 잘못된 것을 잘못이라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나는 죄와 타락이 유전되어서 태어난 존재입니다. 이러한 내가 스스로 있는 자이신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을 제쳐놓고, 눈에 보이는 것들에서 좋음을 찾고 스스로 생각하고 추진함을 통해 그것을 얻고자 합니다. 이러한 나를 통째로 잘못된 것으로 여기며 ‘이런 나는 죽어야 한다. 이런 나는 사람이 아니다. 이대로 살면 고깃덩어리가 될 수 밖에 없다.’라고 인정하며 제사를 드립니다. 이렇게 제사로 드려지는 짐승의 죽음을 나의 죽음과 동일시할 때 하나님의 마음에 들어 하시는 의로움이 발생하고 유지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전제를 가지고 본문을 살펴봅니다. 본문을 보시면 의아한 느낌이 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2~3절을 보면 “너는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수 둘씩을 네게로 데려오며 / 공중의 새도 암수 일곱씩을 데려와 그 씨를 온 지면에 유전하게 하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앞서 6장 19~20절에서는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수 한 쌍씩 방주로 이끌어 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하게 하되 / 새가 그 종류대로, 가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각기 둘씩 네게로 나아오리니 그 생명을 보존하게 하라”라고 하십니다. 왜 하나님은 다른 말씀을 하고 계신 것일까요? 그리고 동물을 다시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으로 나누십니다.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에 대한 구별은 모세가 나중에 율법서를 기록하면서 레위기 등에서 등장합니다. 이러한 율법이 없던 노아 시절에 어떻게 정결과 부정의 기준을 잡았는가에 대해서는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노아가 하나님과 소통하는 관계였다는 점을 염두에 둘 때 하나님께 듣고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을 나눴으리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왜 6장에서는 암수 한 쌍씩을 방주에 끌어들이라고 하셨으면서도 본문 2~3절에서는 “너는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수 둘씩을 네게로 데려오며 / 공중의 새도 암수 일곱씩을 데려와 그 씨를 온 지면에 유전하게 하라”라고 말씀하셨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 어떤 학자들은 이 부분에 대해 다른 사람이 기록한 것을 붙인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더 의아한 부분은 또 있습니다. 이어서 8~9절을 보면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과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은 / 하나님이 노아에게 명하신 대로 암수 둘씩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으며”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2절에서는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수 둘씩 데려오라고 하셨는데 8~9절에서는 또 암수 둘씩만 방주에 들어간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15~16절을 보면 “무릇 생명의 기운이 있는 육체가 둘씩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으니 / 들어간 것들은 모든 것의 암수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암수를 방주에 들어가게 하신 이유는 번식을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왜 정결한 짐승과 공중의 새를 암수 일곱씩 데려오라는 말씀이 나오게 된 것일까요? 이와 관련하여 노아가 방주에서 나온 뒤에 한 일을 생각해 봅니다. 노아는 방주에서 나온 후에 제사를 드립니다. 8장 20절을 보면 “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더니”라고 합니다. 정결한 짐승과 공중의 새를 암수 일곱씩 데려오라고 하신 것은 바로 이 제사와 연관이 있습니다. 앞서 6장에서 짐승을 암수 한 쌍씩 방주로 이끌어 들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번식을 위한 종자를 남기라는 의미이고, 본문에서 정결한 짐승과 새를 암수 일곱씩 방주에 들이라고 하신 것은 제사의 용도로 쓰기 위한 것입니다.
방주 안에서 370일을 머무르는 동안에도 노아와 그 가족들은 여전히 스스로 있는 자이신 여호와 하나님 앞에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한 하나님 앞에 있는 자로서 날마다 잠에서 의식이 깨어나 해야 할 일은 첫 번째로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라야 하루를 지내는 동안에 여호와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있는 자의 마음에 들어야 모든 시간 또한 스스로 있는 자가 계획하시고 뜻한 대로 물결 따라 흘러가듯이 진행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내가 통째로 죄에 찌들어서 하나님 마음에 들 수 없는 타락한 존재라는 점입니다. 죄악 된 내가 하나님 마음에 들기 위해서는 짐승의 죽음을 나의 죽음과 동일시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방주에서 370일 지내는 동안에 노아와 그 가족들에게는 여호와 하나님 마음에 들어야 하는 상황이 날마다 반복됩니다. 축구장보다 더 큰 방주 안에서 여덟 명이 해야 하는 일은 제사를 지내는 것입니다.
노아는 방주에서 나온 뒤에 불로 태워 드리는 번제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방주 안에 있을 때는 불로 태우는 번제를 드릴 수는 없었습니다. 아벨의 제사를 보면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드렸습니다. 기름을 얻기 위해서는 양을 죽여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불로 태워드렸다는 번제의 언급은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사건에서도 제사의 의미는 반드시 태워야만 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번제는 다 태워 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가죽도 남지 않기 때문입니다. 노아가 방주에서 드린 제사는 번제가 아닙니다. 노아는 짐승의 죽음을 입으로써 죄와 저주에 찌든 자기의 죽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스스로 있는 분이신 여호와 하나님 마음에 드는 의로움을 370일 동안 계속해서 유지해 나갔습니다.
온 지구가 물 폭탄에 잠겨서 다 죽어가고 있는 생난리 통에, 노아와 그 가족은 방주 안에서 오직 스스로 있는 자이신 여호와 앞에서, 여호와 하나님 마음에 들기 위해 신경을 썼습니다. 의로움만을 유지해 나간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정결한 짐승과 새는 따로 암수 일곱 씩 데려오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노아 시대에 얼마나 많은 짐승이 정결하거나 부정하게 여겨졌을지를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노아는 370일 동안 날마다 스스로 있는 자이신 여호와 앞에서 의로운 자로 하루의 삶을 시작하기 위하여 제사를 드리게 됩니다. 그러한 상황이었기에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정결한 짐승과 새는 일곱 씩 데려오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이 세대에서 네가 내 앞에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라고 하십니다. 이제 방주에 들어간 노아와 그 가족은 하나님 앞에서 의로움을 유지해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온 세상이 홍수로 망해가는 가운데 노아도 사람이었기에 두려웠을 것입니다. 바깥에서는 물 폭탄이 터지는 것처럼 비가 퍼붓는 소리가 들리고 파도와 풍랑 소리가 들립니다. 한편으로는 홍수가 끝난 뒤에는 삶의 터전이 없는 상황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분명히 무섭고 두렵고 겁이 났을 것입니다. 노아와 그 가족들은 그럴 때마다 스스로 있는 자이신 여호와를 바라보며 자기 삶에 대해 불안해하고 걱정하는 자신들을 죽이는 제사를 드리며 의로움을 유지해 나갑니다. 어떻게 하든지 스스로 있는 자이신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삶을 책임지려는 나를 부인하고 죽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마음에 들기 위하여 방주 안에서 날마다 한 일은 제사의 생활화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에도 적용됩니다. 우리가 지금 십자가 생활화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 의롭다 여김을 받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나를 동일시하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이 노아에게서처럼 ‘너 내 마음에 든다. 내 앞에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스스로 있는 자인 내가 너의 삶을 계획하고 이끌 것이다. 너는 물결 따라가듯이 따라오면 된다.’라고 말씀하시는 상황이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의롭다 칭함을 얻어야 하나님과의 동행은 가능합니다. 우리는 교리적으로는 의롭다 함을 얻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나는 칭의를 받은 자다.’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고깃덩어리의 삶을 살아 갑니다. 눈이 보는 대로 스스로 좋음과 나쁨을 판단합니다. 이처럼 스스로 좋음을 추구하고 나쁨을 거부하며 살아가는 것이 고깃덩어리입니다. 6장 2절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눈으로 아름다움을 보고 그대로 움직이는 것이 바로 육신이 된 것이고 고깃덩어리가 된 증거입니다. 우리는 의롭다 칭함을 받았다고 생각하면서도 고깃덩어리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대홍수를 연상시키는 생난리 통은 벌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 난리 통의 순간에 내 목숨, 가족의 안전, 재산, 명예, 지위, 이익, 자존심, 체면 등 지킬 것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원하는 대로 지켜내도 실제로 전혀 도움이 안 됩니다.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은 난리를 통과하면서 치른 값비싼 비용에 비해서 얻게 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재산을 지켜냈습니다. 목숨을 지켰습니다. 가족을 지켜냈습니다. 적어도 자존심은 지키고 체면은 살렸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이러한 모든 것들이 내가 당하는 난리의 비용이 되지 못합니다. 이러한 비용을 치르고서 얻게 될 것이라고 하기에는 가성비가 제로입니다.
본문에 대홍수가 난 상황에서 지구 위의 모든 것은 사라집니다. 정확히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쓸어버리신 것입니다. 내 삶의 환경에도 난리가 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속한 것들 중에 내 환경 가운데 있던 것들이 사라지고 없어질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방주에 들어간 노아처럼 속수무책으로 그대로 없어지게 놔두는 것입니다. 내 삶에서 난리가 나고 문제가 생기면 없어질 것 같아서 무서움과 두려움이 생기는 모든 것들을 손이 묶이고 대책이 없기에 그대로 다 없어지게 놔둘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없애실 만큼 다 없애시면 됩니다. 노아는 600년 간 살아온 집도 잃고, 하던 일도 다 잃었습니다. 노아가 500세에 아들 셋을 낳았으니 이 아들들도 하다못해 90세에서 100세는 되었을 것입니다. 그동안 이루었던 모든 일이 대홍수로 다 없어지게 되자, 이들은 다 없어지게 놔둔 채 오직 의로움 하나만을 지켜냅니다.
스스로 있는 자로서 만물을 있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내 삶에 난리가 나게 하셔서 가져가시고 없어지게 하시는 것들이 있다면 그대로 두시기를 바랍니다. 내게서 다 없어지고 사라지고 멸절되도록 내버려 둔 채, 내가 해야 할 일은 이 난리 통을 주권적으로 이끄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의로움 하나를 지켜내는 것입니다. 이 한 가지만 하면 됩니다.
우리의 삶에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문제 때문에 없어지게 될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럴 때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문제를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내게 일어난 문제는 대홍수와 마찬가지로 아버지께서 주권적으로 일으키심을 염두에 두시기를 바랍니다. 그것들은 아버지께서 홍수로 쓸어가시듯이 다 쓸어가시도록 내버려 두면 됩니다. 본문에서 노아와 그의 가족들은 마음으로라도 속수무책인 상태에서 방주 안에 들어가 있었던 것과 같습니다. 우리도 방주 안에 들어가 있는 상태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문제가 생겨서 없어질지도 모른다고 여겨지는 인간관계, 재산이나 재물, 체면과 위신, 자존심, 내가 바라던 모든 소망을 아버지께서 깡그리 다 가져가시도록 내버려 두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지켜내야 할 것은 바로 의로움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마음에 들어 하실 수 있도록 의로움을 지켜낼 수 있어야 합니다.
의로움을 지키기 위해서는 문제에 대해 염려하고, 없어질까 두려워하고, 스스로 책임지려 하고, 가지고 싶어 하고, 지키고 싶어 하는 나를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죽여야 됩니다. 이런 나는 잘못되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의 홍수 때처럼 내 환경 전체를 쓸어가시더라도, 나는 방주 안에 갇혀 있는 것처럼 속수무책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나는 십자가에 못 박혀서 손을 쓸 수 없고 손을 댈 수도 없다. 그 어떤 것도 나와 무관한 것이다.’라고 생각해야 됩니다. 책임지지 못해 안달하는 나는 근본적으로 고깃덩어리입니다. 이러한 나를 예수님과 함께 죽어야 한다고 인정함으로써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의로움을 유지해 나갈 수 있습니다.
370일 동안 온 지구에 물 폭탄이 덮인 상태에서 방주 안의 노아와 가족들은 의로움을 지켜냅니다. 정결한 짐승과 새를 암수 일곱씩 방주에 들여보내라고 하신 하나님의 의도를 받들어서 짐승을 죽이며 걱정과 근심과 두려움에 휩싸일 때마다 죽은 자로 여깁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스스로 계신 여호와 앞에서 ‘스스로 생을 책임지려는 나는 죽은 자다.’라는 고백을 여덟 명이 함께 해나간 것입니다.
우리가 동서남북 교회에 모이는 것처럼 그 당시의 가부장적인 습관을 따라서 남자는 남자대로 모이고 여자는 여자대로 모였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십자가 때문에 동서남북 교회에 모입니다. 모여서 예수님의 십자가에 담겨있는 창세기의 본문을 기억하고, 창세기에서 동원되는 소재들을 통하여 십자가를 이야기합니다. 그렇게 하여 동서남북으로 모인 네 사람이 삶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아버지 하나님이 보실 때 ‘너 내 마음에 든다’라고 여기실 수 있는 의로움 하나만 지켜나가는 것입니다.
노아와 그 가족은 더는 혈연 중심의 관계가 아닙니다. 다른 모든 사람이 고깃덩어리로 제거되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노아의 가족 중에서 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육신의 오감으로 느끼는 대로 마음이 밀착하여 추구하는 고깃덩어리였다면 방주에 타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들은 혈연공동체가 아닌 스스로 계신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의로움을 입은 자들의 공동체였습니다. 이들은 370일 동안 이어지는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도 의로움 하나를 지켜냅니다.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 이유는 스스로 인생을 책임지려는 성향 때문입니다. 그리고 의로움 하나를 지킨 상태에서 이 여덟 사람은 스스로 있는 자로서 모든 것을 있게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새로운 세상과 새로운 세계의 삶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지금 내게 주어진 난리가 어떤 것일지라도, 이 난리 통에 내게서 없어질 것이 무엇일까를 바라보며 걱정과 근심과 두려움에 휩싸일 때에라도, 나를 걱정하게 하고 두려워하게 하는 상실의 대상들을 지키려 해서는 안 됩니다. 홍수로 쓸어버리시는 하나님의 손길 아래 맡겨야 됩니다. 하나님이 가셔가실 것이라면 다 가져가시도록 속수무책으로 내어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들에 대해 염려하는 책임감을 가지려는 죄적인 상태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은 자로 여기며 의로움을 지켜나가야 합니다. 그럴 때 스스로 있는 자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열 번, 백 번, 천 번이라도 우리의 삶을 새롭게 시작해 나가십니다.
노아와 그 가족들은 홍수 속에서 370일을 방주에 머무는 동안 암수 일곱 씩 데려오게 하신 의미대로 날마다 제사를 생활화함을 통해 의로움을 지켜냅니다. 성경은 이러한 노아 가족의 모습을 통해 귀가 있는 자들은 들으라고 본문을 기록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결한 짐승과 새를 암수 일곱씩을 데려오게 하신 의미는 분명합니다. 모르면 이상 합니다. 창세기에는 인간이 타락한 순간부터 가죽옷 신분 의식이 대두되었습니다. 그리고 가인과 아벨의 제사 문제가 대두되었습니다. 죽은 아벨을 대신하여 셋과 에노스로 이어지는 계열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부르는 자들이 나타났습니다. 스스로 있는 자이신 여호와 하나님과 짝을 이루며 살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스스로 인생을 책임지려는 죄의 체질을 부인하고 죽이는 역사가 일어나야만 합니다.
노아와 그 가족들은 무려 370일 동안을 방주에 머뭅니다. 그 기간 동안 제사를 드리지 않고는 의로움을 지켜낼 수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 세상에 어떤 인간도 죄와 저주를 피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있는 자이신 여호와요, 우리 아버지이신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도 하나님 마음에 들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떻게 내가 나를 부인하고 죄악에 정복된 나를 죽일 수 있을까요? 그 대답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 제사뿐입니다.
오늘 아침에 눈을 떴습니다. 나는 오늘 무엇을 지켜야 됩니까? 어떤 장소에서 어떤 생난리 통이 벌어지더라도, 내게서 무엇이 사라지거나 무엇이 상실되더라도, 그것들을 지키려 하지 말고 의로움 하나만을 지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너 내 마음에 든다.’라고 말씀하실 만큼 의로움을 지키기 위해서는 십자가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한다면 생난리가 벌어져 무엇이 없어지더라도 하나님은 다시 새롭게 무지개 약속을 통하여 이루실 목적을 향해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작은 영역이든 큰 영역이든 난리를 겪고 계십니까? 그것을 일으키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나의 죄 때문에 일으키시더라도 죄는 계기일 뿐이지 이유가 아닙니다. 나의 죄를 계기로 하나님이 홍수처럼 그 문제를 일으키신 것입니다. 그 문제의 홍수를 통하여 무엇이 없어지든 상관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을 두려워하고 지키려 하지 말고 반드시 하나님이 보고 계심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로움을 지켜내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의로움을 지켜내라고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 아닙니까?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조그마한 변수가 생겨도 마음에는 얼마나 큰 상실감에 대한 두려움이 생기는지 모릅니다. 그럴 때마다 없어질 것으로 걱정되는 것을 지키려는 나 자신을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은 자로 여김으로써 하나님 앞에 의로움 하나만을 지켜낼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