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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까마귀파와 비둘기파>의 줄거리 :
물 폭탄의 대홍수 심판이 끝나고 노아의 가족이 방주에서 나오는 과정을 보여주는 본문입니다. 그런데 온 세상을 뒤덮었던 물이 줄어드는 과정에서 노아는 까마귀와 비둘기를 방주 밖으로 보냅니다. 이 사건에 깊은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타락 전에 선악과나무가 에덴에서의 삶이 어떠해야 함을 결정지었듯이, 타락 후 새롭게 시작하는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알려주시려는 조치였습니다. 까마귀파의 삶을 금하시고 비둘기파의 삶을 명하신 것입니다.
까마귀파와 비둘기파
(창세기 8:1~19)
1.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가축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바람을 땅 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줄어들었고
2. 깊음의 샘과 하늘의 창문이 닫히고 하늘에서 비가 그치매
3. 물이 땅에서 물러가고 점점 물러가서 백오십 일 후에 줄어들고
4. 일곱째 달 곧 그 달 열이렛날에 방주가 아라랏 산에 머물렀으며
5. 물이 점점 줄어들어 열째 달 곧 그 달 초하룻날에 산들의 봉우리가 보였더라
6. 사십 일을 지나서 노아가 그 방주에 낸 창문을 열고
7. 까마귀를 내놓으매 까마귀가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날아 왕래하였더라
8. 그가 또 비둘기를 내놓아 지면에서 물이 줄어들었는지를 알고자 하매
9. 온 지면에 물이 있으므로 비둘기가 발 붙일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와 그에게로 오는지라 그가 손을 내밀어 방주 안 자기에게로 받아들이고
10. 또 칠 일을 기다려 다시 비둘기를 방주에서 내놓으매
11. 저녁때에 비둘기가 그에게로 돌아왔는데 그 입에 감람나무 새 잎사귀가 있는지라 이에 노아가 땅에 물이 줄어든 줄을 알았으며
12. 또 칠 일을 기다려 비둘기를 내놓으매 다시는 그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더라
제목의 의미를 좀 더 구체화해 보자면 ‘까마귀파의 삶과 비둘기파의 삶’이 되겠습니다. 보통 이러한 표현을 쓸 때는 매파, 비둘기파로 나눕니다. 매파는 강경노선을 고수하는 정치인들을 가리킵니다. 비둘기파는 비둘기가 평화를 상징하듯이 온건파 입장의 정치인들을 가리킵니다. 다만 본문에서 등장한 비둘기는 평화의 상징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노아로부터 새롭게 시작하는 인류를 까마귀파와 비둘기파로 나누십니다.
본문을 보면 노아가 370일 만에 방주에서 나오게 됩니다. 비가 그치고 물이 줄어들면서 아라랏 산에 방주가 걸린 것이 150일째였고, 223일째에는 방주 창문으로 물에 잠겼던 산봉우리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노아는 263일째에 창문을 열고 까마귀를 내보냈는데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어서 비둘기를 보냈는데 비둘기는 돌아왔습니다. 여기서 비둘기가 발붙일 곳을 찾지 못하고 돌아왔다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이로부터 까마귀는 발붙일 곳을 찾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일주일 후에 노아는 다시 비둘기를 보냅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비둘기가 감람나무 새 잎사귀를 입에 물고 돌아왔습니다. 이제 나무가 보일 정도로 수위가 내려간 것입니다. 그리고 또 일주일 뒤에 다시 보냈더니 이제 비둘기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비둘기도 발붙일 곳을 찾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볼 때 노아가 수면이 얼마나 낮아졌는가를 알아보기 위해서 까마귀와 비둘기를 내보냈으리라 생각합니다. 상식적인 선에서는 그럴 것입니다. 11절을 보면 “저녁때에 비둘기가 그에게로 돌아왔는데 그 입에 감람나무 새 잎사귀가 있는지라 이에 노아가 땅에 물이 줄어든 줄을 알았으며”라는 말씀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보면 노아가 언제쯤 방주에서 나갈 것인가를 알아보기 위하여 까마귀와 비둘기를 내보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보다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노아는 방주에서 나갈 시점을 스스로 결정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읽지 않은 15~17절을 보면 “하나님이 노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 너는 네 아내와 네 아들들과 네 며느리들과 함께 방주에서 나오고 / 너와 함께한 모든 혈육 있는 생물 곧 새와 가축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 이끌어내라…”라고 하셨습니다. 결국 노아를 이끌어내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이 어련히 알아서 방주에서 나오라고 명령하실 것이 분명합니다. 애초에 방주에 들어가라고 명령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방주에서 나올 것을 명하실 것도 분명했습니다. 그렇다면 노아는 단순히 방주 바깥의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까마귀와 비둘기를 내보냈던 것은 아닙니다. 지금은 비가 쏟아지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노아가 정 알고 싶었다면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보면 그만입니다. 굳이 까마귀를 내보내고 비둘기를 내보낼 필요는 없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13~14절을 보면 “육백일 년 첫째 달 곧 그 달 초하룻날에 땅 위에서 물이 걷힌지라 노아가 방주 뚜껑을 제치고 본즉 지면에서 물이 걷혔더니 / 둘째 달 스무이렛날에 땅이 말랐더라”라고 합니다. 노아는 방주 뚜껑을 제치고 스스로 지면의 상태를 확인하고도 당장 방주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57일이 지난 후에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 나옵니다. 이처럼 노아가 까마귀와 비둘기를 방주 바깥으로 내보낸 것은 땅의 상황이 궁금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노아는 의로운 자이고, 완전한 자이며, 하나님과 동행한 자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동행하던 노아가 방주에서 나갈 날짜를 스스로 정하기 위하여 까마귀와 비둘기를 내보내진 않았을 것입니다. 13~14절에 기록된 대로 노아는 자기 눈으로 땅이 마른 것을 확인하고도 나오지 않고, 하나님께서 나가라고 하신 말씀을 듣고 57일째에 나왔습니다. 까마귀와 비둘기를 보낸 것도 하나님의 명령을 따른 일이었지 방주 밖으로 나갈만한 상황을 알아보기 위함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노아에게 까마귀와 비둘기를 내보내라고 하셨을까요? 이 까마귀와 비둘기의 이야기는 에덴동산의 선악과나무와 의미가 비슷합니다. 1절을 보면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가축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바람을 땅 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줄어들었고”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언제나 삶의 터전을 미리 제공해 주십니다. 에덴동산에서도 삶의 터전을 제공해 주셨고, 인류를 멸하신 직후에 새롭게 삶을 시작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노아와 그 가족과 모든 짐승들이 살기 위한 삶의 터전을 제공해 주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렇게 삶의 터전을 제공해 주실 때 꼭 규칙을 하나씩 마련하십니다. 에덴의 삶에서는 선악과를 따 먹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사람이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살지 않고 언제나 하나님과 호흡하며 하나님의 생각과 판단을 받아서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결국 선악과를 따 먹었고 이로부터 인류는 고깃덩어리로까지 변했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들이는 대신 자기 눈에 보이는 대로 좋다고 여기는 것을 따라 삶을 이끌어 갔습니다. 그 결과 인류는 대홍수에 의해 멸절당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노아로부터 시작되는 새로운 인류에게 새로운 터전을 허락하시기 전에 규칙을 하나 세우십니다. 그것이 바로 까마귀와 비둘기를 내보내신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까마귀파의 삶이 있고, 비둘기파의 삶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바라시는 삶은 바로 비둘기파의 모습입니다.
새롭게 시작되는 인류의 역사에서 까마귀파와 비둘기파의 삶은 어떻게 구분될 수 있을까요? 까마귀는 발붙일 곳을 찾아 돌아오지 않았지만 비둘기는 발붙일 곳을 찾지 못해 돌아옵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두 삶의 차이점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직 물이 창일한 상태였지만 까마귀는 발붙일 곳을 찾았습니다. 이는 곧 까마귀가 물 위에 떠다니는 시체 위에 앉을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시체란 동물의 시체일 수도 있고, 식물도 생명이 있다는 점에서 그 잔해를 시체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까마귀를 내보내던 시점에서는 아직 감람나무 새 잎사귀도 없을 정도로 물이 창일한 상태였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물 위에 떠다니고 있는 것은 결국 시체뿐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까마귀가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은 까마귀가 시체를 먹을 수 있었기에 돌아올 필요가 없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까마귀로서는 오히려 반가운 상황이었습니다. 오랫동안 방주에 갇혀있다가 제 세상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비둘기는 나갔다가 다시 돌아옵니다. 비둘기는 시체를 먹는 짐승이 아니었기에 도저히 발붙여서 먹고 살 수 있는 자리를 찾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내보냈을 때는 감람나무 새 잎사귀를 물고 돌아왔고, 마지막에 내보냈을 때 비로소 발붙일 곳을 찾아서 떠났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하나님이 노아와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시청각 교육과도 같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나무를 제시하셨던 것과 같습니다. 이제 새롭게 시작되는 삶에서는 절대로 까마귀파의 삶을 살아서는 안 되며, 비둘기파의 삶을 살라는 것을 가르쳐주고 계신 것입니다.
까마귀파의 삶이란 시체 위에 앉아서 시체를 먹고 시체를 만지는 삶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동물의 시체든 식물의 잔해든 생명이 있었다는 점에서는 같은 시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시체는 더 이상 하나님의 경륜,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생각이 미치지 않는 대상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주권적인 생각과 계획이 끊어진 상태의 대상이 시체인 것입니다.
까마귀는 시체 위에 앉았습니다. 까마귀파가 되어서 삶을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자 주권자이시며 나의 아버지이십니다. 까마귀파의 삶이란 이러한 하나님의 생각 속에서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일을 스스로 생각하며 사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스스로 생각해서 열심히 그 일을 위해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일이 창조주이시며 주권자로서 자발적으로 나를 바라보시며 생각을 갖고 계신 하나님의 계획 속에 없는 일이라면 그것이 바로 시체입니다.
이처럼 까마귀파의 삶이란 하나님의 생각이 전혀 없는 일을 스스로 만들어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고깃덩어리가 될 때 나타난 특징은 자기 눈에 보이는 대로 좋은 것을 찾아 그대로 행동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생각 속에는 없던 일입니다. 이것이 시체를 만지고, 시체 위에 앉아서, 시체를 뜯어 먹는 까마귀파의 삶이기에, 새롭게 시작되는 삶에서는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인류는 결국 비둘기파의 삶이 아니라 까마귀파의 삶을 살고 맙니다.
한편 이와 대비되는 비둘기파의 삶이란 어떤 것일까요? 비둘기파는 죽어도 시체에 앉지 못한다는 사실이 적용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생각 속에 없는 일은 스스로 만들지 않습니다. 시체 위에 앉아서 시체를 뜯어 먹고, 시체를 호흡하고, 시체를 부둥켜안고 사는 까마귀파의 삶을 살 수 없는 자들입니다. 비둘기가 시체를 뜯어먹지 않듯이 비둘기파의 사람은 시체의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본문은 성경을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열쇠를 제공해 줍니다.
마태복음 3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6절을 보면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라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하셨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은 비둘기의 모습으로만 묘사되지 않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기록한 사도행전 2장 3절을 보면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는 성령의 임하심이 불의 혀로 묘사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불의 혀란 언어를 상징합니다.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오직 예수님을 증언하는 목적 하나를 가지고 이 세상을 살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의 인격은 언어적 특징이 있습니다. 언어로써 생각하고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생각이 없는 행위는 행위가 아닌 몸짓입니다. 몸짓은 모든 짐승들도 다 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몸짓은 인격적 몸짓이기에 행위라고 합니다. 이처럼 사람의 행위에는 언어적 특징의 생각이 들어가 있습니다. 성령이 불의 혀처럼 임하셨다는 것은 우리 입으로 말할 뿐만 아니라 몸으로 움직이며 사는 것 전체가, 예수님이 하나님의 독생자이며 진리라는 사실을 증언하는 삶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이유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중심의 언어, 하나님의 중심의 언어를 익히기 위하여 동서남북 교회를 진행하고 있는 중입니다. 각자가 자기 안에 들어있는 하나님을 드러냅니다. 또한 상대방으로부터 하나님이 드러날 때 그것으로 내 안에 계신 하나님에 대한 실감을 강화해 나가는 것입니다.
한편 예수님에게 비둘기 같은 성령이 임하심은 예수님이 단 한 순간도 시체를 접촉하지 않으셨음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시체란 단순히 생물의 주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창조주이자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생각 속에 있는 말과 일이 아니라면 단 하나도 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비둘기파의 원조로서의 삶을 사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은 요한복음 5장 30절에서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라고 말씀하셨던 바와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 9절에서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시며 주기도문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이 마음에 걸려서 다른 식으로 기도를 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는 말씀 때문에 무엇인가를 스스로 생각하려고 하다가도 마음에 걸려서 할 수 없습니다. 전화 한 통화, 문자 한 통을 하려고 해도 늘 마음에서 이 말씀에 의해 제동이 걸립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이 시키지 않으면 못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제가 설교 중에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는 주님의 말씀을 백 번, 천 번 반복해서 말씀드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의외로 십자가 복음 방송을 듣고 십자가 생활화를 한다는 분들 중에서도 이 말씀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경우는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가끔 강릉에 찾아오시는 분들과 대화하다 보면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는 말씀을 염두에 두고 있는 분이 없는 것 같다는 이상함을 느끼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8장 28절에서는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스스로 하지 않으신 예수님을 믿습니다.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말하시며 공생애를 사신 예수님을 믿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뿐만 아니라 기독교인이라는 사람들이 도대체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고 하셨는데 우리는 모든 것을 스스로 하며 살아갑니다. 심지어 스스로 결정한 일을 위해서 하나님에게 시키기까지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생각 속에 있는 일만을 하는 비둘기파의 삶이 아니라 시체를 뜯어 먹는 까마귀파의 삶입니다.
예수님의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는 말씀은 우리 가슴에 박혀야만 됩니다. 내가 무엇인가를 생각하려 하고, 무엇인가로 근심하거나 염려하고, 그래서 이렇게 저렇게 행동하려고 한다면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는 주님의 말씀이 가슴에 박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까마귀파의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까마귀파의 삶을 살면서 하나님을 찬양한다면 까악, 까악하는 까마귀의 울음소리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들이 관계하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생각 속에 없는 것을 스스로 생각해서 만들어 냈기 때문이고 내 삶에 대해서 걱정하고 염려합니다. 여러분이 동서남북 교회에서 만난 사람들에 대해 ‘이 사람은 이렇고 저 사람은 저렇다’라는 생각을 가지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 안에 없는 것이라면 동서남북 교회에서 만나고 나서도 까마귀파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동료 교인에 대해 갖는 생각이 하나님 안에도 있는 것인지 확실합니까? 하나님 안에 없는 생각을 혼자 하는 것은 시체를 만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 사람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생각 속에 있지도 않은 시체를 먹고 주무르는 까마귀파의 삶을 살고 있는 중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돈을 벌고 싶어서 과일 가게를 열었습니다. 그런데 그 과일 가게가 하나님 생각 속에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과일 가게를 하는 모든 시간은 부패의 온상입니다. 부패가 생기는 이유는 생명이 끊어짐으로 시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을 허락하시며 선악과나무를 금지하셨습니다. 한편 부패와 포악이 홍수를 이루고 있는 고깃덩어리들이 사는 세상을 물 폭탄 심판으로 쓸어버리신 후에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말씀하십니다. 선악과나무 열매로 특징지어지는 에덴동산의 삶과는 다르게 까마귀파와 비둘기파의 삶으로 결정되는 삶을 보여주십니다. 다만 타락한 이후였기에 노아와 그의 가족들 또한 기본적으로 눈에 보이는 대로 마음이 따라 움직이는 죄악의 성향을 유전적으로 타고 난 자들이었습니다. 이제 문제는 내 속에서 활성화되고 있는 죄를 따라 눈에 보이는 대로 좋은 것을 생각하고 판단하고 추구하는 까마귀파의 삶을 스스로 금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만 예수님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는 비둘기파의 삶을 위한 준비가 가능합니다. 다음 시간에 살펴보겠습니다만 이러한 이유에서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서 제일 먼저 한 일은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날마다 새로운 삶을 제공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제공하시는 삶을 날마다 새롭게 사는 방법은 까마귀파의 삶에 대해 죽는 것입니다. 어제까지 문제가 많았습니다. 그 문제를 마음에 안고 잠을 잤습니다. 그런데 깨어나서도 그 문제가 여전히 있는 상태로 살아갑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마음에 들어온 문제에 대해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어야 합니다. 그러면 내 마음은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서 백지상태가 됩니다. 태초에 아담의 상태입니다. 마음이 이 세상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 들어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예수님 바깥으로 나오면 세상을 담을 수밖에 없습니다. 반대로 내 마음이 십자가에서 죽고 예수님과 연합할 때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 있게 됩니다. 내 마음은 백지상태가 되어서 갓난 어른이 됩니다. 갓난 어른의 상태에서는 염려할 일이 없습니다. 어제까지 산적한 문제에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문제를 마음으로 끌어안고 살아가면 문제의 환경이 내 삶의 터전이 됩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어서 내 마음을 백지로 만들어 갓난 어른이 되면 하나님이 복안(腹案)을 갖고 생각하시는 삶이 주어집니다. 이제부터는 문제의식을 느낄 필요가 없이 하나님과 동행하기만 하면 됩니다. 십자가 복음의 효과가 이것을 가능하게 해줍니다.
문제를 끌어안은 마음은 잠을 자고 일어나도 달라질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십자가에서 죽고 갓난 어른의 상태로 백지상태에서 삶을 만나면 하나님이 동행할 준비를 다 해놓으시고 삶을 제공하십니다. 나는 오늘 갓난 어른으로서 어젯밤과는 다른 새로운 터전의 에덴의 삶을 제공받게 됩니다. 에덴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기 전에 하나님의 뜻과 생각을 따라 살던 것과 같습니다. 노아가 새롭게 허락된 삶에서 해야 하는 일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에서 죄악 된 나를 죽이고 백지상태가 되어서 갓난 어른이 되면 하나님의 복안이 있습니다. 물로 멸하신 세상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생각이 있듯이 하나님의 생각대로 따라가면 문제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 삶에 문제가 많은 이유는 마음으로 끌어안기 때문입니다.
돈이 문제인 이유는 마음으로 돈을 끌어안기 때문입니다. 건강이 문제라면 마음으로 건강을 끌어안기 때문입니다. 건강을 끌어안은 나는 십자가에서 죽어 백지가 되어야 합니다. 건강이 안 좋은 삶의 터전에서 나는 하나님이 시키시는 대로 따라가면 됩니다. 몸이 안 좋은 상태를 계속 마음으로 끌어안고 있다면 나는 계속 병든 상태에서 까마귀파의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는 비둘기파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시체 위에 앉아서, 시체를 만지고, 시체를 뜯어먹고, 시체에 둘러싸인 부패의 온상으로써의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오늘도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서 세상에 대해 백지가 됩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갓난 어른이 되는 것입니다. 백지가 된 마음으로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만을 좋아합니다. 이것이 완전함입니다. 이 완전함이 이루어지면 그다음부터 떠오르는 모든 생각은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비둘기파의 삶이 시작되고 동행의 삶이 시작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좋아하는 것이 세상의 조건 때문이어서는 안 됩니다. 정말로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상관 없고, 이 세상 것을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상태를 늘 확인할 수 있어야 됩니다. 완전함에 이르기 위해서 계속 십자가를 붙잡고 하나님 아버지만을 소망하는 삶을 전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과의 동행은 시작되고 비둘기파의 삶은 이루어집니다.
생각하십니까? 판단하십니까? 계획하십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생각 속에 있는 것들입니까? 그렇다면 십자가의 죽음을 거쳐 백지가 된 마음으로 하나님만을 강렬하게 소망하는 상태가 전제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죽는 의로움과 하나님만을 소망하는 완전함이 없는데도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계획하고 있다면 까마귀파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생각에 없는 일을 스스로 생각하는 중에 여러분은 마음으로 시체 위에 앉아서, 시체를 만지고, 시체를 뜯어먹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한 상태에서는 계속해서 썩은 부패함 속에서 사는 까마귀파의 인생으로 지속될 것입니다.
아무쪼록 십자가를 철저하게 붙잡고 의로움을 지속하고 지켜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의로움을 바탕으로 하나님만을 소망하고, 유일한 좋음이신 하나님께 마음을 밀착시키는 완전함이 이루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완전함은 눈에 보이는 어떠한 상황에도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를 계속해서 붙잡을 때만 완전함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비둘기파의 원조인 예수님을 본받아 오늘도 비둘기파의 삶을 이루어 가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노아를 통하여 보여주신 하나님의 가르치심과 의도를 따라 오로지 비둘기파의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기 위해 본능적으로 까마귀파로 기울어지는 나 자신을 오늘도 십자가에서 죽이고 또 죽임으로, 기필코 주님과 같이 온전한 비둘기파의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