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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악함의 신동과 천재들 틈에 낀 바보>의 줄거리 :
인류는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무려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인정하신 신동들이고 천재들입니다. 악함에 대해 신동이자 천재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어린아이들은 굳이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악함에는 탁월한 소질을 띠게 됩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모두가 하나님의 생각 안에는 없는 일을 스스로 생각하고 계획하는 시체 전문가들이 됩니다. 이 점에서는 누구도 상대적으로 열등한 사람이 없습니다. 이 천재들 틈에 섞인 바보들이 바로 교인입니다.
악함의 신동과 천재들 틈에 낀 바보
(창세기 8:20~22)
20. 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더니
21.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
22.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제목을 풀어 보자면 바보가 있는데 그 바보는 악함의 신동과 천재들에 둘러싸여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악함의 신동과 천재들에게 둘러싸인 틈바구니에서 살고 있는 바보들이 되어야만 합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누구든지 ‘나는 신동이고 천재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으면 무조건 정답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에는 참 마음 아픈 구절이 등장합니다. 21절에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노아 홍수 물 폭탄 심판에서 노아와 가족들이 구원받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마음이 구원받음으로 인해 즐겁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물 폭탄으로 이웃은 물론이고 지구의 모든 생명체가 멸절되는 상황을 경험하면서 살아남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들은 왜 하나님이 모든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를 물 폭탄으로 휩쓸어버리셨는지에 대한 이유도 알고 있습니다. 물 폭탄 심판에 대한 충격이 뼛속까지 스며들었기에, 하나님이 심판하실 정도로 싫어하시는 일이 무엇인가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아는 노아의 세 아들로부터 인류는 새롭게 시작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물 폭탄으로 심판을 내리기 이전의 인류의 모습이 다시 재현될 것을 알고 계십니다. 노아의 세 아들로부터 새롭게 시작된 인류도 물 폭탄 심판으로 멸절시켰던 인류의 상태로 복귀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시는 물로 멸절시키지 않겠다고 9장에서 무지개 언약을 주십니다.
노아는 의롭고 완전하며 하나님과 동행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노아의 세 아들로부터 인류가 새롭게 시작하는데 하나님은 그 후손들이 생각하고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을 확신하고 계십니다.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라고 하십니다. 사람은 태어나서 누구에게 배워서 악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갓난아기의 고사리 같은 손을 보면 너무 예쁩니다. 아기들은 냄새까지도 예쁩니다. 그런데 그렇게 예쁜 아기들이 누구한테 배우지 않아도 탁월한 소질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악함의 신동으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내고, 성인이 된 후에는 악함의 천재들로 살아갑니다.
가정파괴범의 아들딸과 대법원의 판사의 아들딸은 악함의 신동과 천재로서 똑같습니다. 가정파괴범의 아들딸이 부모에게 보고 배운 대로 똑같이 가정을 파괴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판사의 아들딸은 아버지의 명예를 늘 의식하며 자라서 법을 잘 지키며 사회에서 모범적으로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똑같이 물 폭탄 심판으로 멸절시키고 하나님의 영이 함께할 수 없는 까마귀파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환경이 극단적으로 다른 상황에서도 그 악함은 70~80세 어른 못지않은 악함을 드러내게 됩니다. 배우지 않고도 모든 인간은 악함의 신동이고 천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악함의 신동이자 천재가 되게 해주는 소질은 바로 죄입니다. 죄가 무엇인지는 너무 간단합니다. 눈으로 보는 것, 귀로 듣는 것, 입으로 맛보는 것, 코로 냄새 맡는 것, 피부로 느끼는 오감을 통해 쇄도해 들어오는 세상을 마음에 담습니다. 이것이 바로 빗나감으로써의 죄입니다.
본래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만 담아야 됩니다. 그런데 육체의 오감을 통하여 접하는 세상을 담습니다. 이제 이 죄의 상태를 어떻게 처리하느냐가 문제가 됩니다. 마음에 담기는 대상은 다양할 수 있습니다. 자녀를 담을 수도 있고, 배우자를 담을 수도 있고, 일을 담을 수도 있고, 몸을 담을 수도 있습니다. 마음에 담음이란 의식하고 생각하고 염려하면서 마음이 밀착된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빗나감을 그대로 둡니다. 자녀를 담고, 배우자를 담고, 문제를 담는 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어떨 때는 원수를 담습니다. 내 기준에 어긋나는 사람을 담습니다. 이렇게 마음에 하나님 이외의 대상을 담은 상태에서 움직이면 안 됩니다. 그런데 생각이 움직이고, 입을 움직여 말을 하고, 몸으로 행동합니다. 분명히 세상이 담겼는데도 그것을 문제시하지 않으며 생각하고 말하고 계획하고 뜻합니다.
사람을 악함의 신동이자 천재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지금 내 마음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분이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창조주로서 참새 한 마리 떨어지는 것까지 주관하신다는 것을 압니다. 적어도 그러한 교리를 인정하는 사람의 마음에서 가장 가까이 계신 하나님은 떨쳐버리고, 하나님보다 더 멀리 있는 몸을 통해 세상 것을 받아들입니다. 하나님을 떨쳐버리는 것은 인간이 부정적인 방향으로 보일 수 있는 능력 중에 가장 크고 탁월한 능력입니다.
어떤 부자가 십억을 기부했습니다. 그렇게 큰돈을 자기에게서 떨어뜨린다니 참 대단하게 보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보통 사람이 생각도 하지 못하는 대단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대단한 능력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런데 그 어떤 대단한 능력도 내 마음에 가장 가까이 계시며, 나를 지으신 창조주를 투척할 수 있는 능력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쯤이야’라고 하는 생각으로 살아갑니다. 이러한 모습이 나타나는 이유는 죄와 악함의 신동이고 천재들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라는 말씀에는 바로 이러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누구한테 배워서 악한 것이 아닙니다. 악함에 대해서는 타고난 신동들입니다.
악함은 간단하지만 어마어마한 능력입니다. 지금도 내 마음에 닿고 있는 창조주의 손길을 떨쳐내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담은 채로 생각하고 말하고 움직이며 살아갑니다. 종교의 문제점 또한 여기에 있습니다. 종교는 하나님이 아닌 세상 것을 마음에 담는 것을 묵인합니다. 세상 것이란 내 몸부터 시작해서 몸으로 관계하는 모든 것들을 포함합니다. 사람, 사물, 사건, 환경, 문제, 과제가 모두 세상 것입니다. 그것들을 마음에 담고 있는 채로 하나님을 찾는 것이 종교입니다. 마음에 세상 것을 담고 있다면 입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도 신앙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에 대해 결국 포기를 선언하십니다. 인간은 달라질 수 없다고 여기십니다. 노아와 그 아들들은 하나님이 물 폭탄 심판으로 인간을 어떻게 멸절시키셨는지를 보았습니다. 그런데도 그 죄의 기질은 없어지지 않고 자손들에게로 계속 이어져 내려갑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아시고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인간은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개조시킬 수 없습니다. 죄 때문에 모두가 멸절하는 물 폭탄의 대홍수를 보고도 그 속에서 죄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이로부터 필요한 것이 번제입니다. 본문 20절에는 성경 최초로 번제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더니”라고 하였습니다. 번제(燔祭)란 불로 태워 하나도 남김없이 완전히 재로 만드는 것입니다.
심판 이전에는 죽음이 요구되었습니다. 성경은 이 죽음의 의미를 가죽옷 신분 의식이나 아벨의 제사에서 보여주었습니다. 스스로 있는 자이신 여호와를 부르는 사람들이라면 자기 스스로 삶을 책임지려는 까마귀 유전자의 삶을 ‘죽음을 입는다’는 비유를 통해서 가르쳐주셨습니다. 한편 번제는 죽음을 입어야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신 상태에서도 죄를 이길 수 없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조차도 까마귀파의 유전자를 드러내며 살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실 수 없어서 고깃덩어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죽음을 강화하고 강조하는 것이 번제의 의미입니다. 죽이는 정도가 아니라 깡그리 태워 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나에 대해 갖는 의식입니다.
내가 가져야 하는 의식은 ‘나는 아버지다 어머니다, 나는 남편이다 아내다, 나는 목사다, 나는 대한민국 사람이다.’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신분 의식을 갖는 것은 이미 마음에 상대방들이 담겨 있다는 뜻입니다. 남편이라고 의식한다는 것은 마음에 아내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여러분 스스로를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여러 가지 신분 의식이 있지만 하나도 남김없이 죽이고 깡그리 태워서 재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번제에 담긴 의미입니다.
물 폭탄 대홍수의 심판을 통과해도 육체의 오감으로 포착하는 대상을 마음에 담는 죄악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갖고 싶은 것을 마음에 담습니다. 그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합니다. 못마땅한 사람을 마음에 담은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까마귀의 삶을 삽니다. 짐승 하나를 죽인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물 폭탄 심판을 통과해도 죄악이 없어지지 않기에 깡그리 태워서 재로 만드는 번제가 요구되는 것입니다.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 처음 한 일은 여호와께 제단을 쌓았습니다. 여기서 제단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미즈베아흐(מִזְבֵּחַ)는 ‘짐승을 잡아 죽인다.’라는 뜻의 동사 자바흐(זָבַח)에서 나온 단어입니다. 제가 신학교 시절에 히브리어 시험을 볼 때 단어를 외우기 위해 자바흐를 발음이 비슷한 ‘잡아 죽인다.’로 연상했던 기억이 납니다. 노아는 스스로 있는 자이신 여호와께 짐승을 잡아 죽이는 제단을 쌓았습니다. 짐승을 잡아 죽이는 목적은 스스로 있는 자 앞에서 스스로 살려고 하는 나를 죽인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흔히 ‘무슨 무슨 제단을 쌓는다.’라는 말을 합니다. 안수받아 병 고침을 받는다는 모습을 보며 그런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행위는 제단을 쌓는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제단을 쌓는 것은 유일하게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 앞에서 있게 된 자로서 감히 스스로 살려고 했던 까마귀파에 속한 나를 잡아 죽인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노아는 이러한 의미에서 제단을 쌓았습니다.
이 제단은 번제를 염두에 둔 것입니다. 세상 것을 담은 인간은 하나님과 분리 독립체가 됩니다. 마음에 돈 문제를 담았다면 이제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독립체가 된 것입니다. 이로부터 하나님이라는 신을 끌어들일 것이냐 말 것이냐를 스스로 결정하는 종교인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일단 마음에 하나님 대신 육체의 오감을 통해 만나는 세상 것들을 받아들였다면 인격 전체는 통째로 더러워진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의 인간은 바뀔 수 없습니다. 끊임없이 오감으로 만나는 것들을 받아들이려는 기질 때문에 뭘 어떻게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교황도, 총회장도, 당회장도, 은퇴 목사도, 원로 목사도, 담임 목사도, 장로도 그 누구도 물 폭탄을 통과해도 없어지지 않는 죄의 기질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제일 우스운 말이 ‘아니, 목사가 어떻게 그럴 수 있어?’라고 하는 것입니다. 총회장이든 교황이든 마찬가지입니다. 목사가 무엇이기에, 총회장이 무엇이기에, 교황이 무엇이기에 기대를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물 폭탄으로 인류가 멸절하는 심판을 통과하고 나서도 없어지지 않았던 것이 죄입니다. 오히려 ‘아니 어떻게 목사가 그럴 수 있어?’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죄가 무엇인지 아느냐’라고 반문하고 싶습니다. 사람들은 인격적으로 훌륭한 목사님이나 신부님 혹은 스님을 따르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웃기는 소리입니다. 어린아이 장난 같은 말입니다. 인격적으로 윤리적으로 훌륭하다고 여겨져도 죄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물 폭탄 심판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아예 인간에 대해 포기하십니다. ‘인간은 변화될 수 없다, 인간은 고칠 수 없다, 수정해서 쓸 수 없다, 통째로 태워 죽여야만 한다.’라고 여기신 것입니다. 이 번제가 십자가 어린양으로 이어집니다.
사람은 통째로 태워 죽여야만 하는 존재입니다. 그것도 오늘 한번 죽인다고 끝이 아닙니다. 나를 잡아 죽이는 것이 삶의 출발점이 돼야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세상을 담은 채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까마귀파로 살게 됩니다. 하나님 생각이 없는 대상이 시체입니다. 시체는 하나님이 더 이상 주권적으로 생각을 가지고 끌고 가실 일이 없는 대상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생각에 없는 일을 내가 생각한다는 것은 시체 전문가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제단을 쌓고 짐승을 죽여 깡그리 태우는 번제를 통해서 내가 죽고 태워진다는 생각 없이 삶을 출발한다면 어김없이 마음에 세상이 담깁니다. 세상을 담은 채로 까마귀의 유전자를 드러내면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번제를 통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효과가 무엇이냐? 번제로 번역된 히브리어 올라(עֹלָה)는 ‘올라간다.’라는 뜻의 동사 알라(עלה)에서 파생된 명사입니다. 희생 제물을 불에 태울 때 짐승의 몸은 타서 재가 되고 연기가 납니다. 그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을 염두에 둔 단어가 번제인 것입니다. 번제의 목적은 태워 죽임과 동시에 올라감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승천, 보좌까지 올라가심의 의미와 일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반드시 기억되어야 함에도 기독교 종교에서는 이것을 잘라버립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이 나와는 상관이 없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번제를 드려서 짐승을 태워 죽이고 재로 만드는 것은, 세상 것을 마음에 담은 내가 통째로 죽고 재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연기가 올라간다는 것은 이 세상 것을 아무것도 담지 않게 된 마음은 연기가 올라가듯 하늘로 올라가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곧 육체에 종속되어 세상 것을 마음에 담던 내가 죽었다면, 이제 육체로부터 자유로워진 백지 같은 마음이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듯 하늘로 올라간다는 것입니다.
21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짐승의 바비큐 냄새를 좋아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향기를 받으셨다는 것은 노아와 가족들의 제사가 제단과 번제의 의미를 충족시켰음을 의미합니다. 제단은 ‘짐승을 잡아 죽인다.’라는 뜻에서 나온 말이고, 번제는 ‘올라간다.’라는 뜻에서 나왔습니다. 노아와 가족들은 짐승을 잡아 태우며 연기가 올라갈 때 그것을 보면서 ‘여호와 하나님, 육체에 종속되어 세상을 담았던 나의 마음은 죽었습니다. 이제 연기가 올라가듯 아무것도 담지 않은 마음이 아버지께로 올라가오니 내 마음을 받아주시옵소서.’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이 내용이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라는 말씀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라는 말씀이 이어집니다. 인간은 어려서부터 마음에서 계획하고 생각하고 뜻하는 바가 악하기 때문에 오감으로 보이는 대로 마음에 담은 상태를 전혀 문제시하지 않습니다.
마음에 자녀를 담고 돈 문제를 담았다면 창조주 하나님을 마음에서 떨쳐버린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겠다고 마음에 일을 담았다면 창조주 하나님을 마음에서 떨쳐버린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하나님쯤은 쉽게 떨쳐버리는 신동이고 악함의 천재들입니다. 요새 천재라는 말을 다양하게 사용하는 것을 봅니다. 외모가 출중한 배우를 얼굴 천재라고 부릅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사람은 누구나 매사에 하나님을 버리는 천재입니다. 매사에 하나님을 버린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주권적 손길이 닿지 않는 순간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주권적 손길의 주체이신 하나님을 계속 버리는 악함의 천재들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을 포기하십니다. 그리고 오직 번제의 길 하나만을 허락하십니다. 하나님이 인간과 실제로 만나서 관계할 수 있는 유일한 길로써 번제를 제시하십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광야로 나갔을 때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삶을 시작했을 때도 성전과 번제가 있었고 율법이 있었습니다. 율법은 마음에 세상 것을 담는 것이 죄악임을 가르쳐줍니다. 그리고 마음에 세상 것을 담고 있는 한 절대로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을 지킬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줍니다. 이러한 죄의 상태를 깨달은 후에 하나님과 관계를 맺기 위해 필요한 것이 상번제였습니다.
상번제는 ‘날마다 드리는 오늘의 번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번제는 나를 통째로 불에 태워 죽이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날마다 번제단에서 어린양이 통째로 타서 재가 되어 연기가 올라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연기를 염두에 두며 재가 되는 어린양이 나이며, 연기는 타락 이전의 아담처럼 나의 마음이 세상 것을 담지 않은 백지상태가 되는 것임을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상번제를 통해 ‘하늘에 계신 여호와 하나님, 내 마음을 받아주시옵소서.’라는 마음가짐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출애굽기 29장을 보면 상번제에 대한 말씀이 나오는데 43절을 보면 “내가 거기서 이스라엘 자손을 만나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상번제가 드려지는 곳에서 너희를 만나리라고 하십니다. 이 상번제는 십자가에서의 예수님의 죽음이 확고하게 예견되고 있습니다.
사람은 오감을 통해 접하는 세상 것을 마음에 담음으로써, 자기를 지으시고 지금도 자기에게 손길을 뻗고 계시는 창조주요 주권자 하나님을 쉽게 투척해 버립니다. 악함의 신동이고 천재들입니다. 하나님은 이제 이러한 사람을 물로 멸하시지 않기로 결정하십니다. 오직 번제라는 단 하나의 통로를 통해 사람과 만나기로 하십니다. 제단을 뜻하는 미즈베아흐는 ‘짐승을 잡아 죽인다.’라는 뜻에서 나온 단어입니다. 자기를 잡아 죽이고 통째로 불에 태워서 재를 만들고,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듯 아무것도 담지 않은 백지의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자들과 관계를 맺기로 결정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제 인류 전체를 내려다보시며 당신과 관계를 맺게 될 사람이 나타날 것을 기대하시는 일을 접으십니다. 그 대신 번제단을 통하여 세상을 담은 마음을 백지로 만들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좋아하여 하늘로 올라오는 자들과 인격적인 만남을 하시기로 결정하신 것입니다. 물 폭탄의 대홍수를 통과하고도 인간들에게서는 악함의 천재성이 없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악함이 없어지지 않았다는 증거는 결국 바벨탑 사건으로 이어집니다.
세상에서 제일 무식한 사람은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어? 판사가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대통령이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총회장이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신부님이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목사가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장로가 어떻게 그럴 수 있어?’라고 말합니다. 우리 속에는 죄악의 신동이자 천재로서의 기질이 들어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천재성을 십자가 번제를 통하여 잡아 죽이는 자들이어야 합니다. 세상 것을 담고 독립하여 스스로 까마귀와 같은 삶을 사는 죄악의 천재성을 부인하고, 세상에 대해서 스스로 바보가 되기를 자처하는 자들입니다. 여러분은 다 바보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아는 바보들입니다. 영적 사실들을 깨닫고 있는 바보들입니다. 그러나 까마귀파에 속한 사람들은 진리에 무지한 천재들입니다.
나를 진리에 무지한 천재로 살아가도록 이끄는 죄악을 오늘도 주님의 십자가 번제로 깡그리 태워서 죽이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번제의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듯이 세상을 담지 않은 백지 같은 마음을 먼저 하나님께 드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럼으로써 하나님과 밀착한 상태에서 의로움과 완전함이 이루어지고, 세상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생각을 주시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바보들이 되어서 오늘 하루도 살아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 없으면 생각 한 조각 할 수 없는 바보들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버지를 등지고 진리이신 주님을 등진 천재들로 사는 삶이 이제는 티조차 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번제단에서 나를 잡아 죽이고, 태워서 재로 만드는 십자가 생활화의 달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세상에 대해서는 천하의 바보들이 되어서 하나님이 한 생각 한 생각 떨어뜨려 주시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들로서 비둘기파의 삶을 이어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