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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가죽옷 신분 의식, 식고기 신분 의식>의 줄거리 :
하나님께서 육식을 허용하시는 듯한 말씀을 하십니다. "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그러나 식생활에 관한 말씀이 아닙니다. 의로움에 관한 것입니다. 노아와 그 가족들에게 의로움이 끊기는 틈새를 틀어 막으면서 사는 삶의 방식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죽음을 입은 신분 의식에서 죽음을 먹는 신분 의식으로 자아의식이 바뀌기를 바라셔서 육식을 언급하신 것입니다.
가죽옷 신분 의식, 식고기 신분 의식
(창세기 9:1~7)
1.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2.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물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리니 이것들은 너희의 손에 붙였음이니라
3. 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4.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째 먹지 말 것이니라
5. 내가 반드시 너희의 피 곧 너희의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6.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
7.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가득하여 그중에서 번성하라 하셨더라
본문은 가죽옷 신분 의식에서 식고기 신분 의식으로 죽은 자의 의식을 한층 더 강화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죽음을 입음에서 죽음을 먹음으로 신분 의식이 죽음 쪽으로 더 깊이 강화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노아의 우선적인 관심은 삶에서 어떻게 의로움과 완전함과 동행을 이어 나갈 것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또한 그의 아들들도 의로움과 완전함과 동행이라는 모토에 맞는 삶을 살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이러한 노아는 종교 생활을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사는 일상에 대한 것입니다. 의로움에 구멍이 생기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 노아의 과제이고 사명이며 자발적인 열망이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께서 의롭고 완전하고 동행하는 삶을 못 살아서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할 수 없음으로 육체가 되어버린 사람들을 어떻게 멸절시키셨는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삶의 가장 우선적인 관심사는 의로움과 완전함과 동행일 수밖에 없습니다. 홍수 이전에도 그렇게 살았지만 홍수를 겪고 나서 더욱 더 경각심을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 가족들을 보실 때도 가장 우선적인 관심사는 의로움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노아의 삶을 책임지실 복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노아는 자기 삶에 관심하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이어 나갈 수 있느냐에 대해 고민했고 그러기 위해서 의로움을 지키고자 했습니다. 이것이 노아의 최우선 관심사였습니다. 한편 하나님도 노아가 이 세상 것으로 만족하려 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대로 좋은 것을 따라가지 않으며, 오직 하나님만으로 만족하고, 하나님만을 소원하는 완전함을 이루게 되면 동행하실 것입니다. 노아가 직접 손대서 할 일이 아니라면 하나님이 주권적인 생각과 계획으로 노아의 주변과 환경을 이끌어가시고자 하십니다.
관계의 상대자인 하나님과 노아의 최우선적 관심사는 같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사는 노아가 의로움을 지켜나가는 것이고, 노아의 관심사도 스스로 있는 자 하나님 앞에서 의로움을 지켜나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심사 안에서 본문을 봐야만 내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도 사람도 언어적 인격입니다. 그 마음에서 가장 우선적인 관심사와 가장 우선적인 가치가 있으면 그것과 연관된 말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육식을 허용하시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육식을 하되 피째 먹지 말 것을 말씀하시고, 이어서 살인의 문제와 사람의 피를 흘리는 자는 반드시 보복할 것이라는 취지의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가 이 모든 말씀을 이해할 때 홍수 심판으로 온 인류가 멸절되고 새롭게 삶이 시작되는 단계임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이 단계에서 가장 중요하게 언급되고 있는 것이 번제였습니다. 번제를 통해서 이 세상에 대해서 내가 죽고,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듯이 내 마음이 하나님께로 올라가서 하나님만 소망해야 된다는 것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이제 번제를 통해 이루어진 죽은 자의 의식은 삶 속에서 유지되어야 합니다. 적어도 다음 번제를 드릴 때까지는 유지되어야 합니다. 바로 이 관심사에서 본문의 내용이 기록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주제는 육식의 허락이 아니라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식(死食)을 허락하신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고기를 먹는 것이 아니라 짐승의 죽음을 먹으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죽음을 먹는다는 의식이 있어야 의로움이 유지될 수 있고 하나님만으로 만족하고 하나님만을 좋아하는 완전함이 생깁니다. 그럴 때 이 땅의 삶은 오직 하나님의 기운으로만 사는 동행이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번제를 드려서 내 의식이 온전히 하나님만을 바라는 완전함에 이를 정도로 이 세상에 대해 죽음이 이루어졌다면, 이제 그 번제를 통해 주어진 상황을 삶의 현장에서 유지해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해당합니다. 아침에 십자가 복음 방송을 전하고 듣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의식은 이 세상에 대한 죽음으로 무장되고,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이 열리게 됩니다. 그런데 가정에서 가족들과 대화하고, 직장에 나가 일하는 동안 어느덧 죽은 자의 자아의식은 잊힙니다. 이것은 노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에 노아는 번제를 통해서 이룬 하나님과의 관계의 모습을 삶의 현장에서 어떻게 유지해 나갈 것인가를 중요하게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
삶에서 먹는 문제는 가장 중요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먹는 것과 연관해서 의로움을 지킬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가장 기본적인 먹는 문제에서 의로움을 지킬 수 없다면, 삶에서는 의로움에 구멍이 뻥뻥 뚫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 구멍을 통해서 세상은 쇄도해 들어올 것입니다. 노아보다 열 배는 더 의로운 사람이 있다고 할지라도 의로움에 구멍이 났을 때 그곳으로 세상이 밀고 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번제를 통해 이룬 의로움과 완전함과 동행의 충분한 조건을 삶의 현장에서 실제로 유지해 나갈 것인가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본문은 바로 이러한 관심사에서 고기를 먹는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3~4절은 학자들 간에 이견이 많은 부분입니다. “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째 먹지 말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앞서 창세기 1장 29~30절에서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라는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부분은 표현상으로는 채식을 언급하신다고 여겨집니다. 육식을 금하시는 내용은 없으나 육식을 하라고 언급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모세는 먹거리에 대해 1장에서는 명약관화하게 채소와 식물이 사람에게든 짐승에게든 공통적인 먹거리가 되리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홍수 심판 다음에는 왜 별도로 육식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했을까요? 모세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불러 주시는 대로 창세기를 기록한 것입니다. 처음부터 고기를 먹으라는 말씀을 주셨으면 이해하기 편했을 텐데 왜 이런 기록 형태를 취하게 된 것일까요? 이러한 모습은 앞서 방주에 동물을 들일 때 암수 한 쌍씩을 말씀하신 이후에 다시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들이라고 하신 것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앞뒤가 일치하지 않는 듯한 상황이 언급된 것에는, 성경을 읽는 우리 스스로를 점검하기 위한 의도가 들어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실 때 가지시는 최우선의 관심은 노아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가져야 했던 최우선의 관심과 일치합니다. 우리 또한 이 관심을 가져야 본문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 관심이 없다면 눈으로 봐도 알 수 없고, 읽어도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나의 관심은 나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관심과 같아야 합니다. 본문은 노아가 그 당시에 실제로 가졌던 그 관심을 지금 성경을 읽는 나도 가졌는지 묻고 있는 셈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노아를 보실 때의 관심, 노아가 하나님을 볼 때의 관심에 대해서는 다 잊어버리고 육식을 허락하신 것이 앞서 언급된 채식에 대한 언급과 모순되는 것 아니냐고 묻는 것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처음부터 허락되었으나 홍수 전에는 신체에 채식이 더 잘 맞았기에 육식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으셨다. 홍수 후에 연약해진 신체를 위해 육식이 허락되었다.’라는 식으로 이야기합니다. 루터 같은 신학자들조차도 이러한 견해를 보였습니다. 또 어떤 학자들은 ‘홍수 전에도 육식은 명시적으로 허락되지 않았을 뿐 묵인되었다. 그러다가 홍수 이후에 명시적으로 허락되었다.’라고 말합니다. 그 외에도 ‘홍수 전에도 육식은 허락되었지만, 이 부분에서 그 내용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신 것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홍수 전에는 금지되었다가 홍수 후에 땅이 황폐해져서 식물이 부족하게 되자 허용하셨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주장에 대해 맞다 틀렸다고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일단 맞고 틀림은 뒤로하고 본문이 왜 기록되었는지에 대해 차분히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기를 먹되 피째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고, 살인하지 말 것이며 만약 그렇게 한다면 반드시 보복이 가해지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말씀을 하시는 하나님과 듣는 자 노아의 최우선의 관심사이자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염두에 둘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또한 이러한 가치를 가질 수 없다면 본문은 그저 고기를 먹으라는 내용이고, 성경 곳곳에서 등장하는 피째 먹지 말라는 이야기의 반복이 되어버립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의 최우선 관심사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현재 자기의 처지에 관심을 둡니다. 그렇기에 성경을 잘못 해석할 때가 많습니다. 본문은 단순히 육식을 허락하시는 내용이 아닙니다.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홍수 이전에도 육식은 있었습니다. 아벨은 양치는 자였습니다. 아벨이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제사를 드릴 때 나머지 고기를 버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가인의 자손 중에 라멕이라는 돼먹지 못한 자가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야발과 유발과 두발가인입니다. 그중에서 야발은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내용을 보면 타락 전이나 타락 후에 육식에 대한 이야기가 새삼스럽게 보태진 적이 없습니다. 아벨도 양을 치고 야발도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홍수 심판 전에 사람들이 육식을 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육식을 자연스러운 일로 여겨서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식물이 사람과 모든 짐승의 먹이가 되리라는 창세기 1장의 말씀은 어떻게 봐야 할까요? 육식동물도 초식동물을 잡아 먹어야 산다는 점에서 사람이고 짐승이고 풀이 없다면 번성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번성하라고 축복을 하신 후에 채소와 식물을 이야기하신 것은 생명을 위해 가장 근본이 되는 공통적 먹거리를 이야기해 주신 것입니다. 사실 사람의 육식에 관해서는 아벨이 양치는 자였고 야발이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다는 내용으로부터 홍수 전부터 육식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홍수 심판이 끝나고 노아는 번제를 드리면서 의로움과 완전함과 동행의 삶을 위해 마음을 조율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육식을 새삼스럽게 허락하시는 듯이 말씀하시는 데에는 하나님과 노아의 공통적 관심사가 작용하고 있습니다. 노아는 홍수 심판을 통과한 자로서 가장 큰 관심은 의로움이었습니다. 의로움에 구멍이 생긴다면 완전함도 없고 동행도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노아로부터 새롭게 시작되는 인류가 의로움을 지켜나가며 완전함을 이루고 동행할 수 있기를 바라시는 마음을 갖고 계셨습니다. 이 관심사에서 이제까지 문제가 되거나 논쟁이 될 필요가 없었던 고기 먹는 문제가 갑자기 등장합니다.
말씀드린 대로 삶에서 의로움을 지켜나가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식생활의 문제에서도 의로움을 지켜나갈 수 있는 길을 열어야 합니다. 번제로 이 세상을 끌어안고 있는 내가 통째로 죽고, 연기가 올라가듯이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진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고, 하나님만을 소망하는 완전함에 이른 상태에서 동행의 단계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번제를 통해 내게 이루어진 하나님과의 관계의 모습과 양상이 그대로 유지될 수 있어야 합니다. ‘식생활 문제에서 어떻게 이 세상에 대한 나의 죽음을 지켜나감으로써 의로움에 구멍이 나지 않도록 이어지게 할 것인가?’라고 하는 것이 노아와 하나님의 최우선적인 관심사로 전제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고기를 먹을 때 네 관심사를 유지해라, 그 관심사에서 고기 먹는 것을 연결을 시키라’라고 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노아야, 너는 어떻게 해야 스스로 있는 자인 여호와 앞에서 의로움을 이어 나갈 것인가를 걱정하고 있구나. 그 의로움을 번제를 드림으로써만 지켜내기가 어렵다고 고민하고 있지? 그런데 식생활이 삶의 부분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면 그 식생활 중에서 고기를 먹는 일이 있을 것 아니냐? 그 고기를 먹을 때 너의 죽음을 먹는다고 생각해서 의로움에 구멍이 나지 않도록 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가장 우선적인 관심사가 의로움이기 때문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아벨은 양치는 자였습니다. 그 의로운 아벨이 양을 쳤다는 것은, 이미 육식을 하고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양털과 가죽만을 얻기 위해 양을 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육식은 홍수 전에도 일상적으로 늘 해오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다시 육식을 언급하신 이유는 바로 동물의 죽음을 먹는 것을 의로움과 연결하라는 의도로써, 삶에서 의로움에 구멍이 생기지 않기 위해 구멍이 생길만한 모든 영역을 메꾸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본문의 취지는 어떤 방식을 동원해서라도 의로움이 이어지게 하라는 것입니다. 앞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에덴에서 내보내시며 가죽옷 신분 의식을 갖게 하셨음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노아에 이르러서는 가죽옷 신분 의식에서 식고기 신분 의식으로 바뀌게 됩니다. 죽음을 입는 가죽옷 신분 의식을 넘어서, 죽음을 먹는 신분 의식으로 바꿔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곧 눈에 보이는 이 세상에 대해서는 더욱더 죽은 자의 의식을 갖출 수 있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죽은 자의 의식이 없으면 눈에 좋게 보이는 세상 것들을 마음에 담고 밀착하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의로움은 끝나고 완전함도 동행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세상에 대해 죽은 자의 의식을 어떻게든 강화해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 것을 좋아함이 죽어버리는 그 상황이 견고해지고 철저해져야만 합니다. 노아도 그러한 생각으로 발버둥을 치고 있습니다. 육식에 대한 이야기는 노아의 발버둥에 하나님께서 장단을 맞춰주신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네가 고기를 먹을 때 너의 죽음을 먹는다고 생각해라.’라고 말씀하신 셈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님께서도 요한복음 6장에서 54~55절에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본문의 육식에 대한 말씀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이러한 본문은 단순히 육식의 문제를 언급하는 내용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노아의 관심은 육식 그 자체에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의로움을 지켜나갈 것인가가 관심의 대상이었습니다.
이어서 4절을 보면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째 먹지 말 것이니라”는 말씀이 등장합니다. 양을 잡을 때의 상황을 생각해 봅니다. 번제를 드릴 때는 다 태워서 재가 되기 때문에 고기가 남지 않습니다. 그런데 고기를 먹기 위해서 양을 잡습니다. 양을 잡을 때는 양의 생명을 끊는 겁니다. 이때 양을 잡는 사람은 양의 있음과 없음을 좌우할 수 있는 위치에 선 것 같은 의식을 갖게 됩니다. 다시 말해 ‘내가 짐승을 죽이는 자’라는 의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의식을 막으십니다.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 앞에서 갖는 자아의식이 문제입니다. 내 마음대로 먹고 싶을 때 양을 잡습니다. 그때 양을 죽여야 하는데 피째 먹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피를 보면서 ‘이 양의 있음과 없음의 문제가 내가 좌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셔서 이 양을 죽일 수 있으며, 이 양의 고기를 먹을 수 있게 하셨다.’라고 생각하며 있음과 없음을 좌우하는 존재는 내가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하라는 것입니다.
또한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그 사람의 있음과 없음을 내가 결정하는 행위입니다. 살인이 일어나는 이유는 내 눈앞에 보이는 사람이 마음에 드느냐 마느냐를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살인이란 결국 내가 주체가 된 상태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본문의 말씀은 단순히 살인을 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의로울 것을 요청하고 계신 것입니다.
사람은 스스로 있는 자이신 여호와에 의해서 있게 된 자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생각하는 주체가 되었을 때 판단을 하게 됩니다. 마음에 든다 안 든다를 판단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살인의 시초로 의로움을 끝내버린 상태입니다. 의로움에 구멍이 생겨서 살인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노아의 관심사는 이렇듯 의로움에 구멍이 생기는 것을 막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노아의 관심사를 도와주십니다.
다만 이 장면은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노아는 홍수 심판 전에도 ‘나 같은 죄인은 죽어야 마땅합니다. 오직 스스로 있는 자이신 여호와께서 내 삶을 허락하시고 이끌어 주시옵소서.’라는 마음을 지키기 위해 애썼습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만으로 내 마음이 만족할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라고 완전한 자의 모습을 지켜나갔습니다. 노아는 그러한 관심과 가치관을 가졌기에 하나님과 동행이 가능했고,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고, 하나님의 언어 체계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홍수 심판이 지나갔습니다. 노아는 아들들이나 며느리들과 곧 태어날 손주들을 위해서라도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습니다. 그렇기에 노아의 관심은 오직 하나님 앞에서 의로움을 지켜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노아에게 번제를 드리라고 말씀하셨을 것이고 노아는 그 말씀에 따라 번제를 드렸습니다. 이제 노아는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번제의 마음을 지켜나갑니다. 이제 하나님은 노아에게 고기를 먹는 것에 대해서 ‘고기를 먹을 때마다 너의 죽음을 먹는다고 생각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러한 관점에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곧 나의 죽음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하는 일은 나의 죽음을 먹는 것입니다. 이처럼 본문의 고기를 먹으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우리가 그 죽음을 먹게 될 것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놓치고 ‘육식이 언제 허락됐지? 채식과 육식 중에 어느 게 더 낫지? 타락하기 전에는 채식이 좋았으나, 타락하고 나서 육식을 좋아하게 됐구나. 그러니 육식은 못된 사람들이 먹는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무척 어리석은 일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우리는 하나님의 최우선 관심이 무엇인지를 염두에 둘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관계하는 노아가 이 말씀을 들을 때 갖고 있던 최우선 관심이 무엇인지를 염두에 둘 수 있어야 합니다.
돈이 최우선의 관심인 사람은 무슨 말을 들어도 돈과 연관시켜서 해석을 합니다. 회사에서 승진이 최우선의 관심인 사람은 회사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승진과 연관해서 생각합니다. 승진과 관계있으면 관심을 갖고, 승진과 관계 없으면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본문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짐승을 잡아 먹어도 된다는 말씀이 등장했다고 해서 육식의 문제로 본다면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온 인류가 멸절되는 홍수 심판 뒤에 번제를 처음으로 드리고 나서 하나님과 노아의 대화가 육식을 먹느냐 마느냐에 대한 것일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잘못된 해석에 빠지는 이유는 아직도 하나님의 언어 체계를 갖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언어 체계는 우선적 가치를 중심으로 형성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 가장 우선시하시는 가치가 무엇인지를 염두에 둘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육식에 대한 말씀을 하실 때의 최대의 관심사는 의로움이었습니다. 노아 또한 의로움을 최고로 중요한 일로 여겼습니다. 이 가치의 핵심을 모른 채로 말씀을 보기에 ‘고기를 먹는 것이 좋으냐 나쁘냐, 언제 허락하셨느냐, 채식이 우선이냐.’라고 하는 이야기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사실 모세가 성령의 감동을 통해 창세기를 기록할 때는 이러한 문제는 전혀 고려하지도 않았습니다. 앞에서 채식을 이야기했다가 뒤에서는 육식을 이야기하는 것은 문제가 될 필요도 없는 내용이었습니다. 육식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이유는 애초에 채식이냐 육식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의로움을 지켜나갈 것인가에 대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창세기를 기록할 때는 육식이 이루어지던 시기였습니다. 모세가 쓴 글을 노아가 읽을 것도 아니며, 노아의 아들들이 읽을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바로 우리입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말씀을 주신 것은 우리에게 필요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받으려면 노아처럼 어떻게 해야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어 나갈 수 있을 것인가를 염두에 둘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어 나가기 위해서는 의로움이 끊겨서는 안 되고, 완전함에 이르러야 하고, 동행까지 가야만 됩니다. 이것을 이루는 첫 번째 방법으로 번제가 제시되었습니다. 번제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올바른 태도를 지니게 됩니다. 그런데 삶의 현장에 나가면 곧 번제를 잊고 하나님과의 관계는 깨져버립니다. 이제 삶의 현장에 나가서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지 않기 위한 방법이 제시됩니다. 삶에서 사람에게 가장 크고 기본적인 관심거리는 먹거리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먹거리의 문제에 있어서 의로움을 지켜나가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노아에게 가르쳐주십니다. 고기를 피째 먹지 말고,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말씀은 단순한 하나님의 명령이 아닙니다. ‘어떻게 의로움을 지켜나갈 것인가?’라는 노아의 관심사에 하나님이 발맞춰서 ‘고기를 먹을 때마다 너의 죽음을 먹는다고 생각해서 의로움에 구멍이 나지 않도록 하라.’라고 방법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노아는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아벨은 양치는 자였고, 야발은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이 시점에 와서 ‘홍수 전에는 채식만 허락하셨고 육식은 금하셨다.’ 혹은 ‘육식도 허락하셨지만 다시 갱신을 하셨다.’라는 말들은 전혀 합당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노아의 최우선 관심사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그저 내 입에 들어가는 것이 식물이냐 곡식이냐 고기냐는 차원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해석은 성경을 읽는 사람들의 태도라 할 수 없습니다.
짐승을 잡아 죽일 때 짐승의 생명을 있음에서 없음으로 바꿉니다. 고기를 피째 먹지 말라는 말씀은 있음과 없음을 결정할 수 있는 자가 아님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이 생명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고 내가 지금 짐승을 죽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나와 가족에게 고기를 먹으라고 허락하셨기 때문이다.’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스스로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할 때, 나의 잠재의식 속에서라도 그런 생각이 싹이 나고 자라나면 의로움은 근본적으로 깨어집니다.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말씀에 담겨 있는 의미도 이와 같습니다.
인류가 시작할 때 죄인으로서 하나님과 관계를 했습니다. 우리가 죄인으로서 스스로 있는 자이신 여호와 하나님과 관계할 때 가져야 할 관심은 ‘무엇을 먹을 것인가? 이 세상에서 무엇을 이룰 것인가? 어떻게 많이 벌 것인가?’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이 본문의 취지는 오직 먹을 동안에도 하나님 앞에서 의로움을 중단하지 말라는 뜻임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세끼 밥 먹을 때도, 나가서 활동할 때도, 숨 쉬는 모든 순간에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늘 아버지 마음에 들 수 있는 의로움이 중단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기 위하여 나의 죽음을 이루신 십자가의 주님을 계속해서 먹을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