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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3

녹취문: 내 삶은 쌍무지개 뜨는 언덕 돼야 한다_태승철 (창 9:8~17)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4.05.25|조회수120 목록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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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내 삶은 쌍무지개 뜨는 언덕 돼야 한다>의 줄거리 :

하나님이 구름 속에서 보시는 무지개를 우리도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무지개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무지개만 보시기 때문입니다. 무지개는 인간에게서 하나님이 보이게 비치시는 현상입니다. 우리 삶은 쌍무지개 뜨는 언덕이 되어야 합니다.

 

 

내 삶은 쌍무지개 뜨는 언덕 돼야 한다

 

(창세기 9:8~17)

 

8.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한 아들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9. 내가 내 언약을 너희와 너희 후손과

10. 너희와 함께 한 모든 생물 곧 너희와 함께 한 새와 가축과 땅의 모든 생물에게 세우리니 방주에서 나온 모든 것 곧 땅의 모든 짐승에게니라

11.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멸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12.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나와 너희와 및 너희와 함께 하는 모든 생물 사이에 대대로 영원히 세우는 언약의 증거는 이것이니라

13.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와 세상 사이의 언약의 증거니라

14. 내가 구름으로 땅을 덮을 때에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나면

15. 내가 나와 너희와 및 육체를 가진 모든 생물 사이의 내 언약을 기억하리니 다시는 물이 모든 육체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할지라

16.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있으리니 내가 보고 나 하나님과 모든 육체를 가진 땅의 모든 생물 사이의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

17. 하나님이 노아에게 또 이르시되 내가 나와 땅에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세운 언약의 증거가 이것이라 하셨더라

 

 

본문에는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 가족에게 무지개 언약을 주시는 장면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제목에서 말씀드린 대로 내 삶이 쌍무지개가 뜨는 언덕이 돼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노아 홍수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바라보실 때 더 이상 인간을 바라보지 않기로 결정하십니다. 무지개 언약은 더 이상 관계 맺을 상대자로 인간을 바라보시지 않고 오직 무지개만을 바라보신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 ‘앞으로는 무지개가 나의 상대자가 될 것이다. 이제 더는 내 상대자가 될 수 없는 육체가 되어버린 인간들로 가득 찬 세상을 노아 홍수 때처럼 물로 멸절시킬 필요가 없게 되었다.’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내려다보실 때 그전에는 상대해야 될 인간을 찾으셨습니다. 창조주가 인간을 만드신 본래의 목적은 당신과 일대일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상대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러한 기준을 가지고 세상을 내려다보시면 상대할 수 있는 인간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또 다시 물 폭탄의 홍수 심판을 하실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이 세상을 내려다보실 때 더 이상 일대일로 관계할 수 있는 상대자 찾기를 멈추시고 대신에 무지개를 보기로 하십니다. 무지개를 보심으로써 하나님의 상대자가 될 수 없을 만큼 육체가 되어버린 인류를 멸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무지개 언약을 표면적으로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노아 홍수 때처럼 인간이 부패하고 타락한 모습을 보이더라도, 무지개를 보실 때마다 멸망시키려는 마음을 꾹 참으시겠다는 약속이라고 이해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이해는 본문 말씀에 대해 크게 오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류를 내려다보시면서 멸망시켜야 마땅하고 멸망시킬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아시는 가운데 무지개가 뜨면 ‘아, 내가 더는 물로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약속을 했지.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멸망시키지는 않겠다. 육체가 되어버린 인간 세상은 물로 쓸어버려야 마땅하지만 무지개가 보이니 참으마.’라고 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보시는 무지개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몰랐지만, 우리는 무지개가 어떤 과학적인 원리에 의해 만들어지는지 알고 있습니다. 무지개는 공중에 떠 있는 물방울이 빛을 받아 굴절되고 반사되고 분산되는 현상입니다. 이러한 무지개의 중요한 특징은 보이지 않던 빛을 보게 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우리는 빛이 비치는 사물을 볼 뿐 빛 자체를 볼 수는 없습니다. 전깃불을 켜면 전구에서 나온 빛이 사물을 비추는 것을 보는 것이지 전구에서 나오는 전깃불 자체를 볼 수는 없습니다. 태양이라는 발광체를 보지만 빛 자체는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빛이 물방울을 만나게 되면 본래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것이 무지개 언약에서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부분입니다.

무지개는 눈에 보이지 않는 빛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현상입니다. 흔히 일곱 빛깔 무지개는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있는 모든 색의 완벽한 조합입니다. 그렇기에 요한계시록 4장 2~3절을 보면 하나님의 보좌를 무지개로 묘사합니다. “내가 곧 성령에 감동되었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라고 합니다. 사도 요한은 성령의 감동을 통해 빛이신 하나님의 모습을 봅니다. 그 빛이신 분이 당신의 모습을 무지개 빛깔로 드러내십니다.

이로부터 하나님께서 구름 속의 무지개를 왜 약속의 상징으로 삼으셨는지에 대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내려다보시면서 육체가 되어버린 인간들의 세상을 당연히 물로 쓸어버려야 마땅하다고 여기십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더는 인간들을 보시지 않고 무지개를 보십니다. 무지개를 보시는 동안에는 인류를 물로 쓸어버리지 않겠다는 말씀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무지개는 보이지 않는 빛이 보이는 현상입니다. 이러한 무지개는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상황을 비유적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소재입니다. 예수님은 태초에 계신 영원하신 말씀이며,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당신 자신도 하나님이십니다. 변화산에서 예수님이 흰 빛의 발광체와 같은 모습으로 변하셨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와 일체 되심을 중단하신 적이 없습니다. 변화산 사건은 하나님 아버지가 예수님 속에 들어오셔서 빛을 뿜어내고 계신 상태를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아버지의 빛을 발광체처럼 발산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로부터 몸을 입고 이 땅에서 사시는 예수님의 모든 생각과 의지와 감정과 말과 행동에서 하나님이 보이게 되고 하나님을 비춥니다. 마치 보이지 않던 빛이 물보라에 닿으면서 무지개로 나타나 보이듯이 예수님을 통해 보이지 않던 빛이신 하나님이 보이게 되었습니다. 옛날 사람들이 빛의 굴절이나 반사나 분산에 대해서는 몰랐을지라도, 비가 온 후에 햇빛이 비치면 무지개가 뜬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무지개가 뜻하는 바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빛이 물보라를 만나 일곱 빛깔 무지개로 나타나듯이, 보이지 않는 빛이신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무지개 빛깔로 비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의미의 무지개를 보시면서 인간을 상대자로 지으신 창조주의 의도를 만족시키며, 더 이상 이 세상을 물로 심판하여 없애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이와 관련하여 요한복음 14장을 보면 예수님과 빌립의 대화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8~9절을 보면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이라는 말씀이 중요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빛이시라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보면 빛이신 아버지가 드러나 보인다는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무지개는 보이지 않는 빛이 보이도록 드러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을 통해서 눈에 보이도록 비추십니다. 예수님이라는 한 사람이 무지개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무지개라는 자연현상을 보실 때마다 세상을 멸하시지 않겠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평소에는 빛이 보이지 않다가 물보라를 만나면 일곱 빛깔 무지개로 자기의 있음을 드러내듯이, 그동안 눈에 보이지 않던 하나님이 이 땅에서 인간의 몸을 입고 움직이는 사람을 통하여 무지개처럼 비추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무지개 언약은 바로 이러한 예수님을 비유적 상징적으로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빌립에게 육신을 입으신 예수님을 본 것이 하나님을 본 것과 같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의 모든 생각과 느낌과 의지와 말과 행동, 표정과 몸짓까지 이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루에 몇 번 생각을 하시고, 몇 번 의지를 가지시고, 몇 번 말씀하시고, 몇 번 행동하셨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무지개의 물방울과 같습니다. 예수님이라는 물방울을 통해서 아버지를 비추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을 보았다면 창조주 하나님을 본 것과 똑같다는 말입니다. 무지개를 보았다면 빛을 본 것이고, 안 것이고, 느낀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수한 생각의 물방울, 의지의 물방울, 느낌과 감정의 물방울, 말과 행동의 물방울을 통해서 하나님의 빛이 굴절, 반사, 분산되게 하십니다. 그렇게 해서 빛이신 하나님이 무지개로 보이듯이 우리 눈에 보이게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무지개가 하나님의 모습을 드러내시는 예수님을 가리킨다는 해석에 대해 ‘비약이 심한 것은 아닌가?’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구름 속에 무지개가 뜬 것을 보시고 인류를 멸망시키지 않으실까요? 하나님이 인류를 멸망시키시지 않는 이유는 단순히 무지개가 떴기 때문이 아닙니다. 멸망시켜야 할 인류 대신에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 때문에 하나님은 인류를 멸망시키지 않고 계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무지개에 비유하신 이유는 무지개가 예수님의 특성을 잘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안 보이는 하나님을 보이게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내려다보실 때 생각과 의지와 감정을 갖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무지개처럼 비추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런데 사람은 육체가 되었습니다. 6장의 족보에서 언급된 것처럼 하나님은 육체에 속한 사람들을 보시며 천 년의 세월을 기다리셨습니다. 육체에 속하여 까마귀파에 속한 사람을 내려다보시면서 ‘이 사람이 언제 나와 일대일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상대자의 모습이 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홍수 이후에는 더 이상 사람을 그렇게 보시지 않습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생각과 의지와 감정과 말씀과 행동을 비추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 사람을 보면 하나님을 본 것과 똑같은 상태가 되는 무지개 같은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 무지개 같은 사람은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앞으로 오실 예수님을 바라보시면서 이 세상을 멸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류를 대표해서 요단강에서 물세례를 받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인류를 대표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물로 멸절을 당해야 마땅한 인류의 죄악 된 모습 때문에 죽으신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세례를 받으러 나오는 예수님을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인류를 위한 죽음이기에 예수님의 죽음 속에는 나의 죽음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을 날마다 받아 먹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6장 53절에서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인류를 멸절시키지 않는 이유는 첫 번째로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날마다 받아 먹으면서 살기 때문이고, 두 번째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먹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는 더 이상 그들을 상대자로 보시지 않고 예수님을 바라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보이지 않는 당신의 모습이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을 통해 온전히 비추어지는 모습을 미리 내다보시면서 세상을 멸절시키지 않는다는 무지개 언약을 하신 것입니다.

 

그래도 무지개가 하나님의 모습을 드러내시는 예수님을 가리킨다는 것이 비약으로 느껴진다면 또 다른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5장 39절에서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염두에 두자면 예수님이 생각하시고, 뜻하시고, 말씀하시고, 행동하신 인격적 현상 전체가 빛이신 하나님이 드러나 보이게 하신 무지개로 표현되는 것이 전혀 이상할 게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실제로 세상을 멸절시키지 않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멸절시키지 않는 이유가 무지개를 보기 때문이라면 그 무지개는 누구를 가리키는 것이냐?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렇다면 왜 무지개가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는 빌립에게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보는 예수님은 그대로 하나님이십니다. 참 의미가 깊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 만물을 바라보면서 삽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 만물과 만인 가운데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은 만물을 있게 하신 하나님을 비추고 있습니다. 예수님 주변에는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나 막달라 마리아, 대제사장, 바리새인, 유대인들도 있었으며, 풍랑이나 오병이어의 기적의 현장 같은 환경도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있게 하신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서 나타나고 계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은 무지개와 같습니다. 빛이시고 조물주이신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움직이시는 모습이 예수님을 통해 무지개와 같이 나타난 것입니다. 홍수 이후로 하나님이 이 세상을 내려다보실 때는 더는 고깃덩어리가 된 사람들을 바라보지 않으십니다. 그 대신 무지개처럼 하나님의 모습이 드러나는 예수님을 보시면서 이 세상을 멸하지 않기로 하신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14절을 보면 “내가 구름으로 땅을 덮을 때에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나면”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구름으로 땅을 덮는다는 말씀은 인류가 멸절 당하기에 합당한 상태임을 가르쳐줍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세상에는 홍수 때와 같이 하나님이 상대하실 수 있는 인간다운 인간이 없습니다. 노아 이전은 물론이고 노아로부터 시작된 현 인류의 상태도 멸망에 합당한 상태입니다. 하나님께서 구름으로 땅을 덮으신 후에 물 폭탄으로 깨끗이 멸절시켜도 전혀 아깝지 않은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구름으로 땅으로 덮을 때 인간으로 오시게 될 예수님을 보시기로 하셨습니다.

이때도 예수님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십니다. 그리고 인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내려가셔야 합니다. 예수님은 눈에 보이는 인간의 모습으로 사실 때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의 생각과 의지와 감정, 뜻과 계획과 말과 행동을 다 드러내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은 그야말로 움직이는 무지개였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앞으로 나타나실 예수님을 내다보면서 믿음 생활을 했다면, 우리는 나타나신 예수님을 기억 속에서 떠올리며 믿음 생활을 해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시게 될 예수님이 보이지 않는 당신을 비추는 무지개로 사실 것을 내다보시며 세상을 멸망시키지 않기로 결정하십니다.

 

하나님은 오직 무지개만 보십니다. 요한계시록 4장 2~3절에서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렀다고 했습니다. 직접적으로 보좌에 앉으신 분이 누구이며 어떠하시다는 말은 하지 않습니다. 다만 보석으로 묘사하고 있을 뿐입니다. 보좌가 무지개로 둘렀다는 것은 빛이신 하나님이 눈에 보이게 드러남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바로 그러한 분이십니다. 빌립이 하나님을 보여달라고 했을 때 예수님은 이미 하나님을 보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도 빌립 같은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33년을 사시는 동안 사람들은 예수님을 통해 천국 보좌의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빛이 물보라를 만났을 때 무지개로 모습을 드러내듯이, 빛이신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하여 무지개로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이 세상 인간 중에서 바라보시는 유일한 인간이시며 무지개이십니다. 믿음이란 이 무지개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연합은 나도 예수님처럼 무지개가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인류를 보실 때 무지개만 보십니다. 당신과 관계할 상대자를 무지개로 보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지개는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노아나 아브라함같이 예수님이 오시기 전 시대의 사람들도 하나님의 상대자가 되기 위해서는 성령을 통해 무지개이신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야 하고 연합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상대자가 되기 위해서는 전부 무지개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무지개이신 예수님과 연합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눈길을 끄는 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통하여 무지개가 됨으로써 쌍무지개가 이루어져야 됩니다. 하나님은 무지개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십니다. 나도 무지개이신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무지개이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시선이 오는 곳이고, 내 시선이 닿는 곳입니다. 내 마음의 시선이 닿는 예수님 안에서 나는 하나님을 만납니다. 하나님을 만나기에 내가 몸으로 사는 삶의 영역에도 하나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와 계획과 말과 행동이 그대로 비추어져 나타납니다. 예수님과 똑같은 무지개가 되면 하나님께서 바라보시며 상대하실 수 있는 인격체로 인정하십니다. 이것이 무지개이신 예수님 안에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이며, 우리가 무지개가 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시선을 받을 수 없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의로움의 문제를 붙잡고 있습니다. 결국 나의 죽음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식생활에서조차도 의로움을 끊임없이 이어 나가기 위해서는 가죽옷의 신분 의식을 넘어 고기를 먹음으로 죽음을 먹는 자의 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가 먹어야 할 죽음은 결국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양식이 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죽지 않은 것은 양식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산낙지를 먹어도 소화되어 영양분이 되기 위해서는 죽어야만 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양식을 위함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먹음으로써 내 안에서 예수님의 죽음의 기운이 돌게 해야만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예수님이라는 무지개만을 바라보시기 때문입니다. 나를 통하여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의 시야에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있음이 없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먹는 내가 사람들 앞에서 살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있음이 움직이는 것이어야 됩니다.

바리새인들 앞에서 예수님이 움직이신 것은 하나님의 있음이 그들 앞에 보인 것입니다. 보이지 않던 빛이 무지개를 통해 일곱 빛깔 모습을 드러내는 것처럼, 바리새인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던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하여 모습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우리는 무지개이신 예수님을 먹어야 합니다. 내 속에 돈이 있으면 돈이 비추어집니다. 내 속에 자녀가 있으면 자녀가 비추어집니다. 내 속에 승진이 있다면 승진에 대한 갈망이 비추어집니다. 하나님만을 온통 드러내시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 예수님의 죽음을 먹는다는 것은 나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비추는 무지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지개만 보시기에 내가 예수님의 죽음을 먹고 예수님처럼 무지개가 되지 않으면 하나님이 상대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무지개만 보시기로 결정하셨기 때문입니다.

무지개는 육신을 입고 있는 인간 중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있음 그 자체가 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무지개이듯이 우리도 예수님의 죽음을 먹음으로써 무지개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가정에서 아내가 무지개이신 예수님의 죽음을 먹으며 남편과 마주 합니다. 그럴 때 아내는 남편의 시야에 없는 하나님을 드러내는 무지개입니다. 내 마음속에 무지개이신 예수님을 품고 있기에 나도 무지개가 되어서 쌍무지개가 뜨는 셈입니다. 아내의 마음속에 예수님이라는 무지개가 있고, 남편 앞에서는 아내가 무지개가 됩니다. 이것이 의로움이 유지될 때 나타나는 쌍무지개 현상입니다.

 

정리해 봅니다. 하나님은 무지개만 보십니다. 무지개는 눈에 보이지 않는 빛이 자기 모습을 드러내는 현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보실 때 무지개 같은 존재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육체가 된 고깃덩어리들을 보지 않으십니다. 그들은 모두 물로 쓸어버려야 마땅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행히 예수님이라는 무지개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이라는 무지개를 보시는 동안에 세상을 멸절시키지 않으십니다. 이로부터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일체 되시는 무지개이신 예수님을 먹어야 됩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양식으로 먹는다는 것은 나도 예수님처럼 십자가에서 이 세상에 대해 죽었음을 고백하는 것이고 연합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나도 무지개가 됩니다.

저 또한 무지개로써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무지개 삼아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실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세상을 내려다보실 때는 무지개들만 내려다보고 계십니다. 우리 곁에는 고깃덩어리가 된 사람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그 사람들 중에는 무지개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무지개가 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당장 하나님이 보시는 사람은 무지개이신 예수님을 마음에 품고 자기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와 뜻과 계획과 말씀과 행동을 드러내는 무지개가 된 사람입니다.

 

아무쪼록 여러분의 삶은 무지개가 되어야 합니다. 무지개이신 예수님을 보았다면 하나님을 본 것과 똑같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을 먹는다면 세상을 담고 세상을 비추는 고깃덩어리가 아니라 하나님을 비추는 무지개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음에 품고 계시던 그 하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도 예수님과 같은 무지개가 됩니다. 그리고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을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본문은 이처럼 사람들이 나를 볼 때 하나님을 본 것처럼 되어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오리지날 무지개 되심을 보면서, 유대인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제자들까지도 보이지 않는 빛이신 하나님의 나타나심임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비추는 무지개가 될지라도 사람들은 나를 보고 하나님을 보았다고 생각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철저하게 예수님과 연합함으로써 이 세상에서 무지개를 찾으시는 하나님의 눈에 드는 또 하나의 무지개가 되어야만 합니다. 언제나 주님의 십자가를 기억함을 통하여 내 속에 무지개이신 주님을 담고 육체를 입은 내가 무지개가 됨으로써, 언제 어디서나 쌍무지개가 뜨는 삶을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과연 우리가 예수님처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게 비추는 무지개가 될 수 있을까요? 될 수 없습니다. 못합니다. 불가능합니다. 오직 무지개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십자가에서 연합하여 이 세상에 대해 죽고 아버지를 향해 가고 싶은 마음만을 유지할 뿐입니다. 우리는 전쟁을 치루듯이 싸워서 예수님처럼 진정으로 아버지 하나님의 눈에 쏙 드는 이 세상에서 움직이는 무지개들이 됨으로써 우리 삶의 영역 모든 부분들이 쌍무지개 뜨는 언덕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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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에스더54 | 작성시간 24.05.3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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