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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노아와 예수님의 수치만 내 몫이다>의 줄거리 :
포도주에 취한 노아가 하체를 드러내고 잠든 모습에 대해 세 아들이 상반된 두 가지 태도를 보입니다. 그리고 이 단 한 번의 태도로 인해 이들의 자손 대대로 받게 될 복과 저주가 결정 되고 맙니다. 정작 술에 취해 수치스러움을 드러낸 당사자는 노아인데 노아 자신에 대한 자신의 자책과 하나님의 질책과 나무람은 흔적조차 없습니다. 이 노아의 부끄러움에 대한 아들들의 태도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노아와 예수님의 수치만 내 몫이다
(창세기 9:18~29)
18.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며 함은 가나안의 아버지라
19. 노아의 이 세 아들로부터 사람들이 온 땅에 퍼지니라
20. 노아가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21.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22.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의 두 형제에게 알리매
23. 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24. 노아가 술이 깨어 그의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25. 이에 이르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하고
26. 또 이르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27.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28. 홍수 후에 노아가 삼백오십 년을 살았고
29. 그의 나이가 구백오십 세가 되어 죽었더라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우리가 노아와 예수님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수치뿐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좋다면 예수님을 믿어서 얻은 것을 자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 이 수치를 자랑할 수 없다면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본문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기에 앞서 제목에서 언급한 수치의 의미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고 가장 먼저 보인 반응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여기서 벗었음은 단순히 알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담은 좋고 나쁨을 판단할 수 있게 되자, 좋다고 여기는 것이 하나도 없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벗은 것입니다. 죄에 빠진 인간은 벗었음을 가장 두려워합니다. 이 세상에서 좋다고 여기는 것들이 없거나 적은 상태를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아담에게 하나님이 다가오셨다는 것은 곧 하나님이 좋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을 좋음으로 가지려면 스스로 좋다고 여기는 것은 하나도 가질 수 없게 됩니다. 아담은 이것을 알았기에 두려워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이해를 바탕에 두고 본문을 봅니다. 타락하기 이전에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는 금지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도 선악과와 같은 의미에서 금지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세상의 자랑거리와 이 세상의 가치들을 소원하는 것입니다. 건강, 돈, 가족의 형통, 사업의 성공, 승진 등을 소원합니다. 그리고 결혼을 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아름답고 성실한 배우자를 만나기를 소원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예수님을 믿는다면 바랄 수 없는 금지 품목들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금지 품목들이 없는 상태를 벌거벗음으로 여겨서 수치스럽게 생각합니다.
본문에는 노아가 포도주를 마시고 하체를 드러낸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중동 지방의 포도주는 우리가 생각하는 주류가 아니라 음료의 개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때도 포도주를 마셨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어쨌든 많이 마시면 취하게 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노아는 그야말로 취하여 벌거벗은 채로 장막 안에서 잠이 들었습니다. 때마침 함이 장막에 들어갔다가 아버지가 취해서 하체를 드러낸 것을 보고는 기절초풍하고 나와서 셈과 야벳에게 알립니다. 이에 셈과 야벳은 자기들의 겉옷을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습니다. 당시의 상황을 생각해 보자면 노아가 취해서 겉옷과 속에 입는 통으로 짠 옷까지도 벗어 던진 채로 잠이 들었을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겉옷이란 평생 한 벌로 이불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이러한 본문은 많이 오해됩니다. 앞서 6장 9절에서는 노아를 소개하며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라고 하였습니다. 의로움과 완전함과 동행함은 노아의 인격 상태와 스스로 있는 자이신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특징짓는 표현입니다. 이러한 이해를 놓고 보면 본문의 노아의 행동은 다소 의문스럽습니다. 의롭고 완전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가 포도주에 취해서 하체를 다 드러내는 안이한 태도를 보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늘 깨어서 하나님과 관계할 것을 거듭거듭 말씀하셨던 것을 생각해 보자면 그런 기준에서 볼 때 노아는 큰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그렇게 읽으면 안 됩니다. 내가 생각하는 판단의 기준을 가지고 성경을 대하면 안 됩니다. 내가 생각하는 판단 기준이란 여전히 까마귀파에 속한 사탄의 언어체계에서 비롯된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동서남북 교회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제가 동서남북 교회를 하게 된 취지를 반복해서 말씀드립니다. 성경을 읽을 때 제일 중요한 것은 문자로 표현되는 내용의 취지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창세기를 볼 때는 하나님은 어떤 취지에서 성령의 감동을 통해 모세로 하여금 이러한 내용을 기록하게 하셨는가를 염두에 둘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고 이렇게 기록하게 하신 취지를 붙잡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의 취지를 붙잡지 못하고 우리가 갖고 있는 언어체계의 판단 기준과 가치관을 가지고 해석한다면 오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은 노아와 그 가족들이 방주에서 나와 새롭게 인류를 시작하는 장면입니다. 이러한 단계에서 하나님의 첫 번째 관심사는 의로움을 지키고 하나님만을 소망하는 완전함의 단계에 이르러 실제 생활 속에서 동행이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 처음으로 한 일도 번제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연기가 올라가듯이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야 하고, 스스로 판단하는 사탄의 언어체계는 태워 죽여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번제를 통해 이룬 의로움과 완전함은 어떻게 유지될 수 있는지가 고기를 먹는 문제를 통해 언급되었습니다. 식생활이 사람의 생활 전반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기에 고기를 먹으면서도 그냥 먹는 것이 아니라 나의 죽음을 먹는다고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육식을 허락하신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예표하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피를 마시고 살을 먹는 것으로 연결이 됩니다. 그러지 않고는 의로움과 완전함은 지켜질 수 없고 동행도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또한 육식을 허락하신 후에는 무지개 언약을 주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보시기에 나는 하나님과 관계할 수 없는 물에 빠져 죽어야 하는 존재이기에, 이제 하나님은 나를 대신하여 무지개를 보시기로 하십니다. 무지개는 눈에 보이지 않던 빛을 일곱 빛깔로 보게 해줍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영이시고 빛이신 하나님은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무지개처럼 보이게 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은 무지개이신 예수님만을 보시기로 하신 것입니다. 이는 곧 나도 무지개이신 예수님을 볼 수 있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과 내 시선이 마주치고 관계가 가능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무지개만을 보고 계시기 때문에 인류가 까마귀파에 속해서 사탄의 언어체계를 가지고 살아도 다시는 물 폭탄으로 멸하시지 않으십니다. 대신 하나님께서는 오직 무지개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과만 관계를 하십니다.
이와 관련하여 오늘 본문은 무지개이신 예수님을 바라본다는 것이 실제로 어떤 것인지를 가르쳐주십니다. 의롭고 완전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가 하체를 드러냈습니다. 그런데 의롭고 완전하며 동행함의 오리지날은 예수님이십니다. 노아가 하체를 드러낸 사건은 예수님이 하체를 드러내실 사건을 예표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를 취하게 하심을 통해 일부러 하체를 드러내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본문에 대한 올바른 이해이자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하는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고자 하는 내용을 따라 상황을 만들어 가십니다. 그 상황을 통해 우리에게 설교를 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이해에 도달할 수 없다면 본문은 그저 이상하게 느껴집니다. 취해서 하체를 드러낸 잘못은 노아에게 있습니다. 원인 제공은 본인이 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노아는 함이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놀라서 형과 동생에게 알린 것을 가지고, 함의 자손인 가나안에게 대대로 저주가 임할 것을 선언합니다. 반대로 셈과 야벳은 자기들의 옷을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다고 대대로 축복을 선언합니다.
모세가 므리바에서 바위를 두 번 쳤을 때 하나님이 질책하시고 심지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술에 취해 하체를 드러낸 노아에 대해서는 ‘왜 이렇게 안이해졌느냐? 네가 살만한가 보구나. 정신 줄을 놓았느냐?’라고 야단을 치지도 않으십니다.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노아의 삶을 통하여 오늘 이 시간 우리가 말씀을 들을 것을 알고 계셨기에 설교를 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이제 함과 셈과 야벳의 태도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본문에서는 함의 아들 가나안만 언급합니다. 셈과 야벳의 자손들은 언급되지 않습니다. 창세기는 모세가 기록하였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가나안이 뜻하는 바는 선민을 대적하는 위치에 서는 자들입니다. 선민 됨의 특징에 정반대되는 자들, 함께 살 수 없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족속을 물리치고서야 복지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선민의 특징과 가나안의 특징은 완전히 대조적이기에 가나안을 일부러 언급한 것입니다.
함은 하체를 드러낸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기절초풍하여 밖으로 뛰쳐나갑니다.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모습을 한 아버지가 자기와 관계가 없기를 바랐습니다. 멀리 도망갑니다. 반면 셈과 야벳은 하체를 드러낸 아버지와 자기들이 분리될 수 없는 관계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수치스러움을 곧 자기의 수치스러움으로 받아들여서 아버지께 다가갑니다. 뒷걸음으로 다가갔다는 것은 셈과 야벳이 아버지에 대한 존경을 버리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수치스러운 모습을 보이는 아버지를 자기들의 겉옷으로 덮었습니다.
함은 수치스러운 아버지는 가까이할 수 없어서 멀리 떠나야 하는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셈과 야벳은 아버지가 아무리 수치스러워도 존경하고 가까이 가야 될 대상이었습니다. 셈과 야벳이 아버지에게 덮어준 겉옷이란 신분 의식을 상징합니다. 군인들이 퇴역할 때 옷 벗었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셈과 야벳이 자기들의 겉옷을 아버지께 덮어드렸다는 것은 아버지의 부끄러운 모습을 곧 자기들의 모습으로 여겼다는 것이고 아버지와 분리될 수 없음을 인정한 것입니다.
이 사건에서 부끄러운 아버지를 중심으로 멀리할 것이냐 가까이할 것이냐의 두 가지 태도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무지개이신 예수님을 바라본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인지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지개만을 바라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시선이 나에게 닿기 위해서는 나도 무지개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무지개이신 예수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삶에서 어떤 모습을 보이는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예수님은 의로움과 완전함과 동행함의 오리지널입니다. 그리고 노아는 예수님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의로우시고, 완전하시고, 하나님과 100% 호흡을 맞추며 동행하심으로써 하체를 드러내시고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바라봐야 되는 무지개는 기적을 일으키시는 예수님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벌거벗겨진 채로 매달리신 예수님입니다.
아담에게 있어서 벌거벗음은 수치심과 부끄러움을 안겨주었습니다. 본문은 그 벌거벗음에 대해 그대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 16절에서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라고 합니다. 복음이 어떤 면에서 부끄러움과 연관이 있다는 것일까요? 로마 시대나 지금이나 까마귀파의 사람들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이유는 까마귀파에 속한 사람들이 가장 멀리하고 싶어 하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도 십자가에 못 박히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상태는 이 세상 안에 있는 가치나 자랑거리들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이 곧 타락한 아담이 두려워했던 벌거벗음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정한 가치와 자랑거리가 하나도 없는 것을 사람들 앞에서 벌거벗겨진 것과 같다고 여긴 것입니다. 반대로 세상 사람들이 좋다고 여기는 가치들을 주렁주렁 달고 있으면 그것이 자랑거리가 됩니다.
노아가 하체를 드러낸 부끄러움은 곧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힐 때 하체를 드러내는 부끄러움을 예표로 하는 것입니다. 노아와 예수님의 부끄러움에 대한 태도가 선민과 가나안 족속의 특징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생활화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존경하고 사랑했던 막달라 마리아의 심정으로 다가가서 마음으로 예수님을 껴안고 덮어드리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예수님을 껴안는다는 것은 좋음이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만 채워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세상의 좋음은 하나도 없는 벌거벗어 부끄러운 상태입니다. 노아의 하체가 드러난 것처럼 예수님도 하체가 드러나서 완전히 벗은 상태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붙잡는다는 것은 좋음을 필요로 하는 내 마음이 세상의 자랑거리가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노아와 예수님의 하체가 드러나는 부끄러움을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좋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최고의 좋음으로 받아들이면 내 마음은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질 수 없습니다. 까마귀파에 속한 세상 사람들이 볼 때 내 마음은 완전히 벌거벗겨진 상태와도 같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잘 산다고는 못해도 주어진 것들이 웬만큼 있는데 벌거벗었다고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여러분에게 주어진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의 삶의 환경이나 조건은 하나님께서 가지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주권적으로 이루시려는 것들을 위해서 조성해 두신 재료들일 뿐입니다. 절대로 여러분 마음의 몫으로 가져야 될 소유로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여러분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통해 이루시려는 뜻을 위한 재료들이 그렇게 형성되어 있을 뿐입니다.
아직도 ‘나는 이런 것들을 받았다. 내가 형편 없지만 나보다 더 형편 없는 사람들도 있다.’라는 의식을 갖고서 환경과 조건에 마음을 일치시킨다면 믿음이라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것들에 내 마음이 닿아서 느끼고 누리고 즐기고 소유로 생각하라고 하신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마음이 내 삶의 환경과 문제와 조건과 육체로 맺어진 관계와 가족들의 상황에 닿는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절대로 여러분의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 안에서 벌어진 일 중에서 내 몫이자 내 기업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부끄러움 그 자체인 예수님뿐입니다.
우리는 무지개이신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의 말씀은 그것을 문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 종교를 믿는다는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이며 십자가 사건을 통해 죄 사함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기억하기 위해 십자가를 목에 걸고 다니기도 합니다. 그렇게 하면 무지개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일까요?
내 마음이 하체가 드러난 예수님을 껴안는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는 것들 중에 바라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입니다. 이 세상에서 무엇인가를 바란다면 하체를 드러낸 아버지로부터 멀리 떨어지기를 원하는 함과 같은 태도를 보이는 것입니다. 수치스러운 아버지와 나는 관계 없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함은 의로운 아버지, 완전한 아버지, 동행하는 아버지, 여호와께 칭찬 듣는 아버지, 대홍수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여호와께 인정받는 아버지는 좋아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수치를 드러낸 아버지와는 상관하기 싫어하여 멀리 떠나갑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내가 이 세상에서 무엇인가를 좋아하고, 바라고, 열망하는 마음이 생긴다면 수치스러운 예수님으로부터 둘째 아들 함과 같이 멀리 떨어지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이는 곧 수치스러운 예수님과 나와는 관계가 없다고 간접적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기 전에 선악과가 금지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건강, 출세, 성공, 가족의 형통, 훌륭한 배우자, 승진, 명품 등과 같은 것들이 좋게 느껴지고 그것을 바란다면 함처럼 부끄러움을 드러내신 십자가 예수님으로부터 실제로 멀어지는 것입니다. 은근히 바라든 노골적으로 바라든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결국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정말로 예수님을 믿는다면 세상 것을 좋아해서 바라는 나를 십자가에서 죽은 자로 여겨야 합니다. 그래야만 의로움이 발생합니다. 그러나 기독교 종교인이라는 사람들은 십자가를 제쳐놓고 죄 사함을 받았다고 착각합니다. 이 정도면 의로운 사람이고 천국에 갈 것이라고 여기며 마음껏 세상 것을 바랍니다. 그러면 함과 가나안의 특징을 보이는 것이고 선민과 반대되는 까마귀파에 속한 것입니다.
세상 것을 바라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세상 것을 자꾸 바라게 됩니다. 이것저것 자꾸 갖고 싶습니다. 그러한 나는 그 자리에서 바로 죽어야 됩니다. ‘나는 지금 어떻지?’를 하루에 백번이라도 자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 것을 바랄 수밖에 없기에 십자가를 생활화해야만 합니다. 본문은 노아가 의인이고 완전한 자이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였다고 칭찬을 들었어도 실수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비단 노아 뿐만 아니라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사람은 몸을 입고 사는 동안 죽을 때까지 실수할 수 있습니다. 노아도 실수할 수 있다는 것은 기정사실이기에 새삼스럽게 이야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아버지의 부끄러움에 대해 세 아들이 어떤 태도를 보이느냐가 우리의 마음에서 드러날 수 있습니다. 하체를 드러낸 부끄러움은 곧 세상 자랑거리가 아무것도 없는 상태입니다. 함과 같은 태도를 보여서 이러한 부끄러움으로부터 멀어지려고 하는 자는 선민과 반대되는 특징을 가진 가나안 족속입니다. 선민은 그 수치스러움을 끌어안는 자들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서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라고 합니다. 십자가를 자랑함이란 곧 세상에 대해 아무것도 없는 상태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당신은 돈이 있어야 행복하지만, 나는 돈이 없어도 예수님만 있으면 행복합니다. 당신은 자녀의 형통함을 자랑하지만 나는 자녀와 상관 없이 예수님을 자랑합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예수님을 껴안는다는 것은 이 세상 것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저희 아이가 고등학교 시절의 일입니다. 주말마다 기숙사에 가서 아이를 집으로 데리고 오는데, 기숙사 앞에 차들이 줄줄이 서 있었습니다. 강릉 같은 시골에도 BMW, 벤츠, 마이바흐 같은 고급 차들이 많이 보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10년 된 국산 소형차를 타고 가서 기다리고 있는데, 고등학교 2학년 아들이 반가운 표정으로 다가옵니다. 벤츠에 타는 친구의 부모에게도 저와 엄마를 자랑스럽게 소개합니다. 10년 된 국산 차를 탄 부모를 자랑스럽고 좋게 여깁니다. 그럴 때 부모가 갖는 마음이 어떨까요?
우리는 무지개이신 예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려다보고 계시는데 무지개이신 예수님은 십자가에 매달려 계십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껴안으려면 내 마음에는 이 세상 것은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어야만 합니다. 심지어 내게 이미 주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환경과 조건도 마음에서 떼어내고 아버지가 쓰시려는 재료임을 알고 내 몫이나 기업으로 여길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껴안고 이 세상을 향해 ‘나는 예수님과 십자가에서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이 세상 것은 아무것도 갖지 않겠다. 나는 십자가가 제일 좋다.’라고 자랑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십자가에 못 박은 당신의 아들을 껴안고, 세상 것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십자가를 자랑하는 사도 바울과 같은 마음을 보실 것입니다. 하체를 드러낸 부끄러움을 이 세상에서 사는 나에게 주님이 주실 수 있는 몫이라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이야말로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서 하나님과 함께 살아갈 선민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이 세상 것들에 대한 바람이 생길 때마다 십자가에서 죽어야 합니다. 은근히 바라든 노골적으로 바라든 자문해서 세상 것을 바라고 있음을 알았다면 그것이 그대로 이루어진다면 큰일입니다. 하체를 드러낸 아버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함처럼 십자가에서 떨어져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를 자랑한다는 것은 내 마음은 이 세상 것은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음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주어진 환경과 조건은 전부 하나님이 쓰시는 재료들일 뿐입니다. 내 몫은 부끄러움 덩어리인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뿐입니다. 이것이 무지개이신 예수님을 바라봄입니다. 본문은 바로 이러한 의도에서 기록한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의 수치스러움이 내 몫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좋다고 하는 가치들이 있지만, 세상을 향해서는 예수님의 수치스러움만이 내 몫이 되어야 합니다. 까마귀파들이 볼 때 세상에서 좋은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도 예수님이 있어서 좋다고 자랑하는 것이 수치를 내 몫으로 얻는 것입니다. 세상과 관련해서는 바로 이 수치스러움만 얻을 수 있으면 됩니다. 세상의 가치는 아무것도 마음에 갖지 않고 예수님의 수치만을 내 몫으로 얻고 자랑할 수 없다면,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도 나의 기업이 될 수 없고 나의 몫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수치는 은혜이고 생명입니다. 예수님의 수치가 이 세상을 향한 나의 유일한 자랑거리입니다. 그럴 때 아버지가 내려다보시며 얼마나 예뻐하시는지 독생자와 똑같이 취급하십니다. 예수님이 하체를 드러내시며 십자가에 못 박히신 수치를 내 몫으로 자랑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도 바울처럼 예수님의 수치스러움이 세상을 향한 나의 가장 큰 자랑거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