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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3

녹취문: 복이 1도 없는데 괜찮은 게 진짜 복_태승철 (창 12:1~9)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4.06.03|조회수93 목록 댓글 0

 

www.everyday01.com -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복이 1도 없는데 괜찮은 게 진짜 복>의 줄거리 :

마음속에서 영광의 하나님을 보면 팔자(?)가 바뀝니다. 그런데 좋게 바뀌는 대신 너무 박복하게 바뀝니다. 삶을 위한 안정된 환경이 만들어지지 않고, 마음은 벧엘과 아이 사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놓이게 되고, 점점 인간 세상의 중심부에서 밀려나서 변두리로 옮겨가게 됩니다. 이런 것들이 하나님이 내 마음속에서 영광을 받게 된 상황에 대해 치러야 할 대가들입니다. 그런데도 이런 팔자를 하나님은 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복이 1도 없는데 괜찮은 게 진짜 복

 

(창세기 12:1~9)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5.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6. 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때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7.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8.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9.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

 

 

복이 하나도 없는데 아무렇지 않습니다. 이것이 진짜 복입니다. 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2절에서는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라고 엄청난 약속을 해주십니다. 여기서 “너는 복이 될지라”라는 말씀을 바꿔 말하면 아브라함이 복의 정의(定義)가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해 ‘복이 뭐지? 무엇을 복이라고 하지?’라는 질문에 대해 ‘아브라함을 봐라. 아브라함의 삶의 모습이 곧 복이다.’라고 대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3절에서는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살려보자면 ‘아브라함아, 너는 복의 정의이다. 너의 삶의 모습을 보면서 좋아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릴 것이지만, 너의 삶의 모습을 보면서 싫어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리겠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복을 받을 자격은 복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복의 정의인 아브라함처럼 사는 것을 좋게 여긴다면 당연히 복을 받을 것입니다. 반대로 복의 정의인 아브라함처럼 사는 것을 싫게 여긴다면 복을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의 정의 자체인 아브라함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친화적인지 적대적인지를 문제시하십니다. 일반적으로 복에 대해서 적대적인 태도를 보일 사람은 없다고 여겨집니다. 그런데 진짜 복이 무엇인지에 대해 모르기에 복에 대한 태도가 갈라집니다. 진짜 복이 있다면 가짜 복도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가짜 복을 좋아하는 반면, 진짜 복에 대해서는 적대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복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란 아브라함으로 정의되는 진짜 복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자손이란 아브라함으로 정의된 복을 사모하고 좋아하는 자들입니다. 다시 말해 축복이란 친화적이라는 뜻입니다. 잘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복의 정의인 아브라함과 친화적이면 그 자체가 복 받을 기준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받은 복이 대체 어떤 것이기에 사람들이 그 복을 적대시한다는 것일까요? 먼저 일반적으로 복으로 여기는 것들이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사람들은 건강, 부요함, 높아짐, 형통 등을 복이라고 여깁니다. 세상에 이것을 싫어하거나 적대시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으로 정의되는 복에 대해서는 적대시한다는 것입니다. 복을 발로 찬다는 말이 있듯이 그야말로 발로 차버리고 싶어 합니다. 우리는 그 이유를 아브라함의 삶의 내용을 통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드러난 첫 번째 복의 측면은 이 세상 삶에 안정된 조건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2절에서 “너는 복이 될지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아브라함을 복의 정의로 규정하시며 ‘너는 복 자체다’라고 말씀하신 셈입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일들을 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납니다. 아브라함은 지금으로부터 약 사천 년 전의 인물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이천 년 전입니다. 당시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은 안정적인 삶의 기반이었습니다. 이러한 삶을 떠나야 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앞으로 너의 삶에 아무런 안정적 조건이 없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100세에 아내 사라를 통해 이삭을 얻고, 그 이삭을 다시 모리아 산에서 번제로 드리는 장구한 역사가 진행되는 동안에 한 뼘만큼의 땅도 얻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자면 하나님이 공수표를 남발하신 것 같다고 여겨집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도 남편 곁에서 가나안 땅에 대한 약속을 받았지만 끝내 가나안 땅을 자기 땅으로 밟아보지 못한 채 죽습니다. 그렇기에 아브라함은 사라의 묘지로 쓰고자 가나안 땅의 막벨라 동굴을 돈 주고 삽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서 얻은 첫 번째 땅이 아내 사라를 묻는 매장지였던 것입니다.

까마귀파의 기준으로 보고, 눈으로 보는 대로 좋은 것을 따라가는 육체가 되어버린 사람들의 기준으로 보자면 아브라함의 삶은 조금도 안정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노아의 홍수를 기점으로 하나님께서 무지개만을 바라보시기로 약속하셨을 때 무지개이신 예수님 밖에서 사는 사람들의 기준에서 보자면 아브라함은 가장 중요한 삶의 안정적 조건을 박탈당한 사람입니다.

한편 6절을 보면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도착했을 때의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때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라고 했습니다. 그 땅을 지난다는 말은 가나안 경계에 들어서서 가나안 땅을 지나갔다는 의미입니다. 그때 가나안 땅에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던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내용이 구태여 기록된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왔을 때는 이미 그 땅에는 임자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히브리인이라고 불리는데 히브리는 ‘강을 건너서 떠도는 자’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지만 정작 유랑민 아브라함의 소유로 삼을 수 있는 땅은 없었습니다. 그 땅에는 이미 거주민이 있어서 아브라함에게는 자기 땅으로 삼을만한 곳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상태의 아브라함에게 또 약속을 주십니다. 7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말씀을 보면 마치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성질을 돋우시는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의 입장에서는 땅을 자손에게 주시는 것은 급한 일이 아닙니다. 자손에게 주실 땅이라면 일단 아브라함과 아내 사라와 조카 롯이 거할 수 있도록 지금 주셔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7절 하반절을 보면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라고 했습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아브라함이 여호와께 뿔이 날만 했다고 생각이 듭니다. 아브라함은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이역만리 가나안 땅으로 왔지만 그 땅에는 이미 거주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밖에서 굴러들어 온 돌이 박힌 돌을 쳐내야만 하는 상황입니다. 아브라함은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만 믿고 불원천리 머나먼 길을 왔고 장막이라도 짓고 살 땅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어떤 땅을 가지라는 이야기를 하시는 대신에 또 자손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리라는 약속을 하십니다. 그렇기에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대해 뿔이 나는 자기를 죽이기 위해 제단을 쌓은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아브라함은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는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안정된 모든 조건을 다 버리고 머나먼 가나안 땅으로 가야 했습니다. 비옥한 땅이 텅텅 비어있다면 좋았겠지만, 도착한 가나안 땅에는 이미 거주민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굴러온 돌이었고 자기 소유로 삼을 땅이 없기에 하나님께 화가 났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화가 나는 자신을 죽이는 의미를 담아 제단을 쌓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어떤 분들은 이 장면을 후손들에게 이 땅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고맙기 때문에 그 고마움에 대한 응답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앞서 제단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미즈베아흐(מִזְבֵּחַ)는 ‘짐승을 잡아 죽인다.’라는 뜻의 동사 자바흐(זָבַח)에서 나온 단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짐승을 잡아 죽이는 이유는 자기를 죽이기 위해서입니다. 아브라함은 번제의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듯이 마음이 이 땅을 등지기 위해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럴 수 없다면 땅 한 뼘도 갖지 못한 상태에서 약속만을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아브라함의 삶을 통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복이 무엇인지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너는 복이 될지라”라고 하십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너는 복의 정의가 되어라. 너의 삶의 모습이 복이다.’라고 말씀하신 셈입니다. 그렇게 복의 정의가 된 아브라함은 안정적인 삶의 환경을 얻지 못했습니다. 할 수 있는 일은 제단에서 자기를 죽이는 것뿐이었습니다.

 

이어서 아브라함에게 드러난 두 번째 복의 측면은 이 세상에 대해서는 폐허로 놔두고 벧엘을 향하여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8절을 보면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라고 했습니다.

앞서 복의 정의가 된 아브라함에게 첫 번째로 일어난 일은 안정된 삶의 조건이 박탈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안정된 삶은 주시지도 않으면서 ‘내가 너를 선택했다. 내가 너의 후손들을 선택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약속을 주실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주로서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 가정에 안정된 조건 하나를 허락하시지 않으십니다. 그저 약속만 하실 뿐입니다. 이에 아브라함에게 두 번째로 일어난 일은 벧엘과 아이 사이에 장막을 치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복의 정의를 따라 말하자면 첫 번째는 이 세상의 안정된 삶의 조건이 깡그리 없어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벧엘과 아이 사이에 장막을 치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떤 의미에서 복의 정의라는 것일까요? 벧엘은 창세기 28장을 살펴볼 때 또 나오겠습니다만 야곱이 형 에서를 속여 장자의 축복을 받고 도망을 가다가 머물렀던 루스 들판입니다. 본래 루스 들판이었던 곳에 야곱이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의 벧엘이라는 이름을 붙였던 것입니다. 모세가 창세기를 기록할 때 아브라함 시대에 없었던 벧엘이라는 이름을 사용한 이유는 그 이름에 상징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성령의 감동을 통해 당시의 아브라함의 마음 상태를 벧엘과 아이의 상징성을 동원하여 묘사하고 있습니다.

다시 8절을 보면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라고 했습니다.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이고 아이는 ‘폐허’라는 뜻입니다. 아이는 나중에 여호수아가 요단강을 건너서 첫 번째로 전쟁을 치른 곳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집과 폐허 사이에 장막을 치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아브라함이 폐허를 등지고 하나님의 집을 향해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말씀드렸듯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불원천리하고 이역만리 가나안 땅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가나안에는 거주민들이 있었고 아브라함은 땅을 얻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왔음에도 땅 한 뼘도 얻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한 아브라함이 벧엘과 아이 사이에 장막을 치고 그곳에서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삶의 안정된 조건이 없습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려면 하나님의 집을 향해야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집이라는 벧엘을 향하기 위해서는 폐허라는 뜻의 아이는 등져야만 합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그 마음에서 안정된 조건이 없어서 위급해 보이는 삶의 현장을 폐허로 놔두고 등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 삶을 폐허처럼 놔둔 것입니다.

폐허는 마음이 가지 않고, 손이 가지 않는 곳이므로 머물 수 없는 장소입니다. 벧엘과 아이 사이에 장막을 치고 아브라함이 벧엘을 향하기 위해서는 아이를 등져야만 합니다. 아브라함은 삶의 안정된 조건을 구축해야 될 상황에서 삶의 문제를 폐허로 차치해 버립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집 벧엘을 향하여 여호와의 이름을 부릅니다. 스스로 있는 자이신 여호와께서 내가 등 돌리고 폐허처럼 놔둔 삶의 상황에 대해서 있게 하실 계획을 따르기를 바란 것입니다. 마음에서 삶이 폐허가 될 때 스스로 있는 자이신 여호와께서 삶의 문제를 책임지신다는 것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의 정의인 아브라함을 들여다볼 때 드러나는 복의 두 번째 내용입니다.

삶에 대해서는 폐허처럼 손대지 않고 등질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전혀 마음을 쓰지 않고 손대지 않으면 폐허가 됩니다.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아브라함처럼 벧엘에 계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서입니다. 삶의 안정된 환경을 부르고 찾는 것이 아닙니다. 삶의 안정된 환경을 향하고 하나님을 동원해서라도 안정된 환경을 구축하려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보느라 삶을 폐허로 놔두는 것이 믿음입니다.

여러분에게 배우자나 자녀가 있다면 마음에서 폐허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 대신 아브라함이 벧엘을 향한 것 같이 천국에 계신 하나님을 향하고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건강이나 사업에 문제가 있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건강을 폐허로 돌리고, 사업을 폐허로 돌리고 등져야 합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을 향해서 아버지라고 부르시기를 바랍니다. 아브라함이 제단을 쌓은 것은 번제의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듯이 여호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면서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벧엘과 아이 사이에 장막을 치는 것이 진짜 복의 두 번째 측면입니다.

이 세상은 마음에서 폐허로 돌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가족이든 일이든 미래든 과거든 폐허로 돌립니다. 우리는 미래에 대해 기대하는 만큼 과거에 매여 집착할 때도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을 손대지 않는 폐허로 돌리고 벧엘에 계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이 계신 곳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번제의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듯이 우리는 십자가 번제를 통하여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야 합니다. 이것이 복입니다.

 

복의 정의가 된 아브라함에게 드러난 세 번째 복의 측면은 세상의 변방으로 밀려남입니다. 9절을 보면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고향이었던 하란은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이 발원하는 상류 지역으로 가나안 땅의 북동쪽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란에서 점점 남방으로 옮겨가서 가나안 땅에 들어갔지만 이미 거주민들이 있어서 땅을 차지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아브라함은 점점 남방으로 밀려 내려가기 시작합니다. 가나안 남쪽에는 네게브 사막이 있습니다. 사막은 사람이 살 수 있는 땅이 아닙니다. 네게브 사막을 경계로 북쪽으로만 사람이 살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사막이 있는 곳까지 밀려 내려오게 되었다는 것은 사람이 사는 중심부로부터 점점 변두리로 밀려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서울 한복판에 살던 사람의 사업이 망했습니다. ‘부자는 망해도 삼 년은 간다.’라는 말이 있듯이 재산을 처분해서 분당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결국 분당에서도 버틸 수 없어서 수지로 내려갑니다. 수지에서도 버틸 수 없어서 강릉으로 왔다고 해보겠습니다. 저도 수지에 살다 강릉으로 왔기에 하는 이야기입니다. 강릉은 바닷가이기에 더는 멀리 갈 곳도 없습니다.

이 세상은 까마귀파가 만들어 놓은 곳입니다. 이 세상 좋음의 가치관이라는 하나의 의미 체계를 갖고 있는 언어를 씁니다. 하나님께서 바벨탑 사건을 통해 소통을 막으셨기에 다양한 언어가 생겼지만, 여전히 그 언어가 포함하고 있는 의미 체계와 가치 체계는 같습니다. 아무리 문화권이 달라도 돈 싫어하는 사람이 없고, 건강과 장수를 싫어하는 사람이 없고, 형통을 싫어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세계 어느 나라의 부모든 자녀가 하버드 대학에 입학한다면 싫어할 사람은 없습니다. 이처럼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다르고, 이질적임에도 불구하고 좋아하는 가치는 똑같습니다. 아브라함이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다는 것은 이러한 세상으로부터 변방으로 밀려남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모습이 복의 세 번째 특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너는 복이 될지라”라고 말씀하시며 아브라함을 복의 정의로 삼으셨습니다. ‘복이 무엇인지는 너를 보면 알리라.’라고 말씀하신 셈입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에게서는 세 가지 복의 측면이 드러납니다. 첫 번째는 이 세상 삶의 안정된 조건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이 세상에 대해서는 폐허로 놔두고 하나님의 집 벧엘을 향하여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면서 마음이 하나님께로 가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이 세상의 중심으로부터 밀려나서 점점 변방으로 쫓겨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척 역설적인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으로 정의되는 참 복의 첫 번째 측면은 이 세상에서 안정된 삶의 조건이 없어도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복의 측면은 이 세상을 폐허처럼 놔두고 아버지만을 추구해도 삶에는 아무 문제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추구하고 하나님만을 소망합니다. 자나 깨나 하나님, 밥 먹을 때도 하나님, 길을 갈 때도 하나님, 앉아있을 때도 하나님을 찾습니다. 하나님을 찾으려면 예수님 안에 들어가야 됩니다. 예수님 안에서 찾을 수 있는 하나님만을 부르고 나머지에 대해서는 등집니다. 세상을 등진다는 것은 게을러도 된다는 것이나 이 세상일을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근면함과 부지런함이 하나님을 향해야 되고 마음에서 이 세상을 폐허로 내버려 둘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렇지도 않고 괜찮다는 것이 참 복의 두 번째 측면입니다.

세 번째 복의 측면은 이 세상의 중심부로부터 밀려나 변두리 인간이 되더라도 마음에는 기쁨과 감사와 행복이 넘쳐납니다. 세상 사람들은 안정을 찾기 위해 발버둥을 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폐허로 놔두고, 이 세상에서의 삶에 손을 대어 가꾸고자 정신이 없습니다. 이러한 까마귀파 사람들은 세상의 좋음이라는 가치관으로 만들어 놓은 인간 세상 중심부로 들어가지 못해서 안달합니다. 대한민국 인구가 오천만도 안 되는데 수도권에만 이천만이 몰려 있습니다. 중심부로 가지 못해 발버둥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을 통해 보여 주는 복의 정의로부터 멀리멀리 떨어진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어떻게 이러한 복의 정의가 될 수 있었을까요? 사도행전 7장을 보면 스데반 집사님의 설교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2~3절을 보면 “스데반이 이르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 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에게 영광의 하나님이 보였다고 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있음의 존재감을 느끼고 좋음을 추구합니다. 영광의 하나님이 보였다는 것은 하나님만이 존재감의 대상이고, 하나님만이 좋음의 대상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광(榮光)은 말대로 영화로운 광채의 조명이 비치는 상태입니다. 내 마음에서 하나님만 조명을 받으시는 상태가 될 때 아브라함의 복의 내용이 드러납니다. 이 땅에서 누리는 안정된 삶의 조건에 대한 욕구가 마음에서 사라집니다. 삶이 안정되든 그렇지 못하든 상관이 없습니다.

내 마음의 무대에서 하나님이 일등으로 조명을 받으실 때 이제 이 세상을 폐허로 놔두고 하나님만 향하게 됩니다. 세상일이 마음에서 완전히 폐허가 될 정도로 손을 떼는 것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이것은 게을러도 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찬란하게 비치는 하나님을 향하여 온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마음에서 일등을 하시면 사람들 사이에서 중심에 서려는 마음이 들지 않습니다. 사람들 중심에 있다는 것은 내가 영광된 자리에 오르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마음에서 일등을 하시면 그러한 마음은 눈곱만큼도 생기지 않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이 내 마음에서 일등 되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나는 하나님만이 일등 되시는 상태를 유지하면서 이 세상은 내 마음에서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세상의 중심부에 들어갈 필요가 전혀 없는 마음가짐을 갖게 됩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세상에서 안정됨, 세상에서의 번영, 세상의 중심부에 서려는 마음이 없습니다. 그런데 괜찮습니다. 오히려 좋습니다. 세상일을 폐허로 버려두고 세상의 중심부에서 밀려나 변두리가 되는 것이 마음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 위해서는 필요한 일임을 알게 됩니다. 세상 사람 모두가 복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버리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우리의 믿음의 조상이자 복의 정의입니다. 복의 정의인 아브라함에게서 나타난 복의 세 가지 측면을 사모하시기를 바랍니다. 내 마음이 주님의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죽고 하늘에 계신 영광의 하나님만이 보이는 상태가 유지될 때 이러한 세 가지 측면이 나타납니다. 영광의 하나님이 보이고, 하나님만이 존재감의 대상으로 느껴지고, 하나님만이 좋음을 위한 욕구의 대상이 될 때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세 가지 측면의 복의 양상은 우리에게도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이 모습은 세상의 관점에서는 복이 아닙니다. 세상의 복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괜찮습니다. 그렇기에 진짜 복이라는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의 복을 기준으로 보자면 우리는 별 볼 일 없습니다. 그러나 너무 괜찮다는 생각이 들 만큼 아브라함이 영광의 하나님을 보았듯이 우리도 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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