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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진짜 이익엔 절대 양보 없는 아브람>의 줄거리 :
자기와 조카 롯의 가축이 많아져서 일꾼들 사이에 목초지 확보를 위한 갈등이 벌어지자 아브람은 조카에게 분가할 것을 제안합니다. 그리고 조카 롯에게 정착할 땅에 대한 선택권을 양보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양보의 미덕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아브람이 자기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 얼마나 지독할 정도로 철저한 사람인가를 보여줍니다. 아브람은 진짜 이익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다 양보하고 버리고 포기할 정도로 지독한 이익 추구의 사람이었습니다.
진짜 이익엔 절대 양보 없는 아브람
(창세기 13:1~9)
1. 아브람이 애굽에서 그와 그의 아내와 모든 소유와 롯과 함께 네게브로 올라가니
2. 아브람에게 가축과 은과 금이 풍부하였더라
3. 그가 네게브에서부터 길을 떠나 벧엘에 이르며 벧엘과 아이 사이 곧 전에 장막 쳤던 곳에 이르니
4. 그가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5. 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6. 그 땅이 그들이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니라
7.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주하였는지라
8.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9.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우리가 읽은 본문 마지막 구절에서 아브라함은 조카 롯에게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은 흔히 아브라함이 양보의 미덕을 보여주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완전한 오해입니다. 아브라함은 양보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조카 롯을 분가시키려 할 때, 롯에게 선택권을 주면서까지 자기 이익을 지키는 지독한 사람입니다. 이러한 본문은 양보의 미덕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바보처럼 멍청하게 진짜 이익을 놓치면서 살지 말라는 내용입니다. 조카 롯과 분가하는 상황에서 아브라함은 ‘내가 삼촌이고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약속 받은 사람이다. 그러니 내가 먼저 땅을 선택하겠다.’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는 이렇게 자기 이익을 챙기는 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그런데 본문은 이러한 멍청한 짓을 하면서 진짜 이익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절대로 양보의 미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창세기 25장까지 계속됩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에 대한 이야기에는 관전 포인트가 있습니다. 이 관전 포인트를 놓치면 믿음의 조상으로 불리는 아브라함을 완전히 오해하게 되고, 믿음이 무엇인지도 알 수 없게 됩니다. 아브라함 이야기에서 우리가 관심을 두고 주의를 집중해야 할 부분은 예수님의 말씀에서 잘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8장 56절에서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창세기 12장 1절의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라는 말씀과 연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들었을 때 아브라함은 예수님의 때를 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이 성령의 감동을 통해 예수님 안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이 광경을 사도행전 7장 2절에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라고 표현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예수님의 때를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리다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이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자, 스데반 집사님이 묘사한 대로 하늘에 계신 영광의 하나님만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만이 유일한 존재감의 대상이자 좋음의 대상으로 마음에 환하게 보이는 상태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로부터 아브라함은 언제나 이 상태를 지키고자 했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에게서 나타난 모든 행동의 이유입니다.
아브라함은 어떤 삶의 문제와 마주할 때라도 자기에게 가장 큰 이익이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그 이익이란 바로 지금 마음에서 영광의 하나님만이 환하게 보이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인생에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영광의 하나님만이 보이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진짜 이익이라고 여겼습니다. 아브라함은 문제가 환하게 영광을 받는 바람에 하나님을 놓치면 그 문제가 아무리 잘 해결되더라도 손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아브라함과 우리의 차이가 드러납니다. 마음에서 하나님만이 환하게 보이는 상태가 우리 인생의 모든 순간에 챙겨야 하는 진짜 이익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사실을 뼈저리게 실감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목숨을 걸고 그 이익을 지켰습니다.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라도 불사하고 다 버릴 수 있는 준비가 된 얌체 덩어리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1절을 보면 “아브람이 애굽에서 그와 그의 아내와 모든 소유와 롯과 함께 네게브로 올라가니 / 아브람에게 가축과 은과 금이 풍부하였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묘사는 바로 직전까지의 아브라함에 대한 묘사와 사뭇 다릅니다. 아브라함은 75년간 일궈왔던 삶의 모든 터전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가나안으로 떠났습니다. 아내 사라와 조카 롯 그리고 먹고 살기 위해 필요한 가축들을 데리고 삶의 터전을 떠났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불원천리하고 도착한 가나안 땅에는 이미 가나안 일곱 족속들이 있었고, 더군다나 주권자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 전체를 기근으로 덮으셨습니다. 결국 아브라함은 정착할 곳을 찾지 못한 채 계속 남방으로 옮겨야 했고, 애굽 땅으로 들어간 후에는 아내 사라를 바로에게 바치는 상황까지 이르게 됩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은 유랑민으로서 정착할 곳을 찾지 못한 채 기근을 겪고, 애굽에 갔다가 아내를 뺏길 뻔한 후에 다시 네게브 사막을 지나서 가나안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처지의 아브라함에 대해 “가축과 은과 금이 풍부하였더라”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도착해서 애굽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동안에 가축과 은과 금이 풍부해질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아브라함은 기근으로 고통받는 가나안 땅에서 가축을 불렸던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풍요로운 애굽으로 들어가서 잘 살았던 것도 아닙니다. 가자마자 아내를 빼앗기는 사건이 터졌고 아내를 되찾고는 곧바로 다시 떠나야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틈에 가축이 많아지고 은과 금이 풍부해졌다는 것일까요?
앞서 말씀드렸듯이 아브라함은 절대로 진짜 이익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 집과 하나님 중에 하나님을 선택합니다. 가나안 땅과 하나님 중에 하나님을 선택합니다. 아내 사라와 하나님 중에 하나님을 선택합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은 지독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일단 마음에서 하나님이 환하게 보이는 상태를 잃어버리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기에 영광의 하나님을 보고 있는 것이 진짜 이익임을 깨닫고 난 뒤로부터는 자기 이익을 챙기기 위해 모조리 버렸습니다.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 집을 마음에서 버렸습니다. 약속의 땅으로 주신 가나안도 마음에서 버렸고, 아내 사라까지도 마음에서 버렸습니다.
본문에서는 이렇게 버리는 과정을 다시 이야기합니다. 3~4절을 보면 “그가 네게브에서부터 길을 떠나 벧엘에 이르며 벧엘과 아이 사이 곧 전에 장막 쳤던 곳에 이르니 / 그가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벧엘과 아이 사이에 장막을 치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던 사건의 의미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애굽에서 나온 이후에 그 자리에 다시 돌아와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제단은 짐승을 잡아 죽인다는 뜻입니다. 이는 곧 자기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고 아이는 ‘폐허’라는 뜻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아브라함은 벧엘과 아이 사이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서는 벧엘을 향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아브라함이 자기 삶을 폐허로 놔두고 하나님을 선택했음을 의미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이 세상은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도, 가나안 땅도, 아내 사라조차도 등 돌릴 폐허였습니다. 하나님을 놓치는 것이 진짜 이익을 놓치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등 돌려 세상을 돌아본다면 세상이 환하게 보일 것입니다. 더는 하나님이 환하게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환하게 보는 상태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마음에서 세상을 죽이고 폐허로 놔두었던 것입니다. 다 버리고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폐허로 놔둔 세상에 대해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초강대국 애굽의 왕인 바로의 침실에까지 들어가셔서 사라를 꺼내오셨고, 정착지도 없는 유랑민 아브라함이 방치했던 삶의 영역에서도 가축과 은과 금을 풍성하게 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애정 때문에 부부관계가 유지된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아내가 남편을 더 좋아하거나, 남편이 아내를 더 좋아해서 부부관계가 유지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혹은 자녀 때문에 부부관계가 유지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헤어질 수 없어서 마지못해 부부관계가 유지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과 사라의 경우를 보면 100% 하나님의 의지에 의해서 부부관계가 유지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를 마음에서 버렸습니다. 하나님이 환히 보이는 진짜 이익을 놓치지 않으려고 마음에서 사라를 폐허처럼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폐허처럼 버린 사라를 하나님께서는 애굽 왕 바로의 침실에서 꺼내오십니다. 그렇게 하여 아브라함과 사라의 부부관계를 100% 하나님의 의지로만 이끌어 가십니다. 또한 아브라함은 가축과 은과 금으로 대표되는 삶의 모든 문제를 폐허로 돌렸습니다. 하나님을 환하게 보는 이익을 놓치지 않으려고 삶의 조건들을 폐허로 돌렸던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100% 당신의 의지로 아브라함의 상황을 가축과 은과 금을 풍부하도록 만들어 가십니다. 이것은 단순히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폐허로 돌린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이 계획하신 대로 원하시는 것을 이루어 가실 뿐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도 아니며, 아브라함을 통해 이루어 가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오직 마음에서 영광의 하나님을 환하게 보는 상태를 상실하지 않으려고 했을 뿐입니다. 자기가 생각하는 진짜 이익, 최고의 이익을 위해서는 철저하게 계산적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면서까지 자기 이익을 지켜나갔던 것입니다. 진짜 이익 앞에서 우리는 바보 멍텅구리입니다. 하나님이 내 마음에서 환하게 보이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매 순간 추구해야 할 진짜 이익이고 최고의 이익이라는 사실을 자꾸 잊어버립니다. 그렇기에 아브라함처럼 세상에서 몸으로 사는 삶이 100% 하나님의 의지에 의해서 이끌려지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께는 자발적인 의지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후손의 번성을 약속하시고,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주시기로 약속하신 것은 전부 하나님의 의지에 의한 일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구했던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삶을 폐허로 놔두었을 뿐입니다. 그 대신 보이지 않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을 마음에서 환하게 보는 이익의 상태를 유지하고자 합니다. 본문은 이러한 아브라함의 삶에서 100% 하나님의 뜻과 계획만이 드러나고 실현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100% 하나님의 의지에 의한 부부관계, 100% 하나님의 의지에 의한 부모자식관계, 100% 하나님의 의지에 의한 형제자매관계, 100% 하나님의 의지에 의한 삶의 순간들을 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러한 삶을 살지 못하는 이유는 아브라함처럼 진짜 이익을 지켜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진짜 이익을 지켜내지 못하기에 100% 하나님의 의지에 의한 삶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여우같이 지혜로웠다면 우리는 바보 같고 멍청합니다. 아브라함은 진짜 이익이 무엇인지 알고, 그 이익을 지켜나가기 위해서 주도면밀하게 모든 것을 다 버리면서까지 진짜 이익을 지켜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진짜 이익이 무엇인지 모른 채 살아왔고 지키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유랑민 아브라함에게 어떻게 가축과 은과 금이 풍성해질 수가 있습니까? 그런데 이러한 일이 아브라함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을 따라나섰던 조카 롯에게도 일어납니다. 그 결과 가축들이 너무 많아 가축을 돌보는 일꾼들이 생기고 다툼이 벌어질 지경이 되었습니다. 가축은 많은데 목초지는 한정되어 있었기에 서로 땅을 선점하려고 싸우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아브라함이 진짜 이익을 위해 어떻게 하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분가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꺼낸 것은 아브라함입니다. 결국 조카 롯을 잘라내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같이 있다가는 목초지 때문에 종들 사이에서 갈등과 싸움은 빚어질 것이 분명합니다. 이 싸움에서 조카 롯이 마음에 걸리면 속상하고 이로부터 아브라함과 조카 롯 사이에서 문제가 발생할 것을 예견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아브라함이 문제시했던 것은 이러한 일들이 하나님을 환히 바라보는 일에 결정적으로 방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조카 롯에게 헤어지자는 제안을 먼저 합니다. 아브라함은 매정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마음에서 환하게 보이는 자기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길고 긴 고생길을 함께 했던 조카도 사정없이 내칩니다. 아브라함이 아내까지 마음에서 버린 자였음을 염두에 두자면 조카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7절을 보면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주하였는지라”라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과 롯의 목자들이 다툰 이야기가 나오며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이 함께 있었다고 언급되고 있습니다. 12장에서 살펴보았듯이 아브라함은 이미 가나안 땅을 선점한 자들에 의해 정착지를 찾지 못한 채 점점 남방으로 옮겨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어떻게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가축을 키우고 있었던 것일까요?
12장에서 아브라함이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던 이유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정착할 수 있다는 확신을 주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본문에서 아브라함이 가축을 기르고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 자리에 정착할 확신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언제나 하나님을 환하게 보는 가운데 떠오르는 지시대로 행했습니다. 애굽에 내려갔던 것도 하나님의 지시대로 한 결과였습니다. 그렇게 내려간 애굽에서 하나님께서 아내를 지켜주시겠다는 말씀은 따로 하신 적이 없었기에, 아브라함의 생각에는 이 땅에서 잃어버릴 수도 있는 아내가 환하게 보이려고 하니까 아예 아내를 마음에서 버립니다. 애굽에 내려가면 아내를 탐하여 아브라함을 죽일 상황이 벌어질 것이 예상되었기에 미리 아내를 누이라고 하면서 다니자고 마음에서 떼어낸 것입니다. 하나님이 애굽으로 가라고 하셔서 내려가려고 하는데 아내 사라는 어떻게 하시겠다는 다른 지시가 없었습니다. 당시의 시대 상황이 반영하는 대로 그 상황을 받아들여서 아내를 빼앗기 위해 자기를 죽일 수 있는 상황을 예견하면서 아예 마음에서 아내를 빼낸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100% 당신의 의지로 아브라함과 사라의 부부관계를 유지해 주십니다. 아브라함이 대장부처럼 ‘내가 당신을 어떻게든 지켜내겠소. 아무 염려하지 마시오.’라고 나섰던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마음에서 사라를 환하게 보면서 지키려는 마음을 가졌다면 진짜 이익인 하나님이 환하게 보이는 상태는 잃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은 매사에 하나님을 환하게 보며 하나님의 지시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가축과 은과 금이 늘어난 상황에서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환하게 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가나안에서 머무르라는 지시가 있었기에 그곳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이 있었음에도 가축을 치면서 머물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종들의 분쟁을 통해서 롯과 불화가 생길 가능성이 생기자 먼저 분가를 제안하며 땅을 선택할 권한을 줍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에서 최우선 조건은 하나님을 환하게 볼 수 있는 상황이 유지되는 것뿐입니다. 그렇기에 종들의 분쟁에 말려들어 마음에서 하나님을 환하게 볼 수 없게 되는 것을 피하고자 롯에게 분가를 제안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영광의 하나님을 보고 있는 상황에서는 자기가 살아야 될 땅을 선택하는 것은 관심거리나 문제 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자기 이익과는 관계 없는 일로 여겼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진짜 정착할 땅이자 진짜 기업은 하나님 자신뿐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환하게 볼 수 없는 것이야말로 진짜 정착지를 잃어버리는 것이고, 자기 마음 둘 곳을 잃어버리는 것이며, 진짜 기업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본문은 양보의 미덕을 가르쳐주는 내용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조카 롯은 오랜 세월 고락을 함께한 가족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조카라도 하나님을 마음에서 환하게 보는 일에 방해가 된다면 가차 없이 잘라냅니다. 본문은 바로 이것을 가르쳐줍니다.
아브라함은 자기에게 더 유익한 일이 무엇인가를 결정함에 있어서 조금도 손해를 보지 않겠다는 뜻을 반영하면서 잘라냅니다. 이 장면을 사탄의 언어 체계에서는 조카 롯에게 이익을 양보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땅을 먼저 선택하라고 한 것이 이익을 양보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사탄의 언어 체계에서 보면 내가 살아갈 땅이 이익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비둘기파 사람들의 하나님 중심의 언어 체계에서는 땅은 이익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이익이기 때문입니다. 비둘기파의 사람들은 마음에서 하나님이 보이지 않게 되고 하나님을 잃는 것을 가장 큰 손해라고 생각합니다.
지구상의 80억 인구가 하나님을 믿든 믿지 않든 하나님이 계신 것은 사실입니다. 그들의 마음에서 하나님이 암흑 속에 묻혀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잃어버린 상태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이 조카 롯에게 땅의 선택권을 준 것은 마음에서 하나님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다른 것을 환하게 보는 상태를 죽어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이라는 진짜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라도 하겠다는 것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이러한 본문은 양보의 미덕을 가르쳐주는 내용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세상에서는 이해관계가 얽힌 사람에게 칼자루를 넘기는 것은 어리석은 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게는 그렇게 해서라도 지켜야 될 진짜 이익이 있습니다. 영광의 하나님을 보는 상태의 사람이 어떻게 사는지를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필요하다면 이 세상 것을 다 포기해서라도 하나님이 환히 보이는 진짜 이익의 상태를 반드시 지키고자 합니다.
아브라함은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자기가 살아야 될 땅에 대해서 선택해야 할 순간에 땅에 대해 등을 돌리고 폐허로 놔둡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만을 바라봅니다. 이것을 위해 조카 롯에게 먼저 땅을 선택하게 합니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이 땅을 먼저 선택하고 남은 땅을 자기가 갖더라도 모든 일이 100%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이루어져 갈 것임을 알았습니다. 다시 말해 롯의 어떤 결정도 하나님의 주권을 넘어설 수 없음을 알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또 하나 오해할 수 있습니다. ‘세상적인 이해관계가 얽힌 사건이 벌어지면 무조건 양보를 해야 한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본문은 양보라는 미덕을 율법으로 가르치는 본문이 됩니다. 그러나 다음 장에서는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아브라함의 외향적 모습이 나타납니다. 조카 롯이 잡혀가자 아브라함은 가신 삼백십팔 명을 거느리고 가서 적들을 다 죽이고 롯을 찾아옵니다. 도대체 아브라함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모습을 보입니다. 말씀드렸듯이 본문은 세상적인 이해관계가 얽혔을 때 양보하라는 미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환히 보이는 진짜 이익의 상태를 지켜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삶의 터전은 세상적인 이익과 관계되었을 때 가장 중요합니다. 그 이해관계의 칼자루를 타인에게 넘겨주는 상황이 될지라도 마음에 하나님이 환하게 보이는 상태만은 반드시 지켜내라는 것이 본문의 메시지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해당합니다. 마음에서 하나님만이 환히 보이는 상태를 지켜내기 위해서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아야만 마음이 예수님과 연합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부활 승천하신 길을 따라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직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하늘로 올라갈 수 없다면 하나님을 직면할 수도 없습니다. 십자가 생활화의 목적은 단순히 이 땅에서 닥치는 모든 상황과 문제 앞에서 나를 죽이는 것에만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연합하여 나를 죽였다면 마음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 반드시 하늘로 올라가야만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환하게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마음에서 하나님만을 환하게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 대해서는 십자가에서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하나님을 환하게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삶에 무슨 문제가 벌어져도 이 상태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심지어 이 세상의 이익에 대해 상황에 따라서 칼자루를 타인에게 넘겨줘야 하는 일이 필요하다면 그렇게 해서라도 마음에서 하나님이 환하게 보이는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방적으로 손해만 입고 살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다음 장에서 아브라함은 지금까지의 모습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렇다고 아브라함이 변한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언제나 마음에서 하나님을 환하게 보기만을 바랐습니다. 중요한 것은 진짜 이익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모든 이해관계의 칼자루를 타인에게 양도하면서까지도 마음에서 하나님이 환하게 보이지 않는 상황을 막고자 했습니다. 우리도 십자가를 놓치고 하나님을 잃는 상황을 막아야 합니다. 마음에서 영광의 하나님을 지켜내면 내 삶은 아무리 양보하고 손해 보는 것 같아도 100% 하나님의 의지에 의해서만 진행되어 갈 것입니다. 이러한 본문이 전하는 메시지의 핵심을 분명히 이해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어떻게 아브라함처럼 살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내 마음에서 환하게 보이는 상태를 어떻게 매 순간 유지해 갈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하나님만이 나의 진짜 이익이 되신다는 사실을 뼛속까지 깊이 깨달을 수 있을까요? 예를 들어 돈 문제가 발생했을 때 돈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진짜 이익일까요? 건강 문제가 발생했을 때 건강을 회복하는 것이 진짜 이익일까요? 자녀 문제가 발생했을 때 자녀가 형통한 것만이 진짜 이익일까요? 무슨 문제가 발생했든지 그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진짜 이익이 아닙니다. 그 문제가 환하게 보임으로써 하나님을 잃어버리는 상황이 벌어지지 않는 것이야말로 이익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문제를 폐허라는 뜻의 아이로 삼아 등 돌릴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죽음으로써 문제를 폐허로 삼아 등 돌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 대신 하나님이 환하게 보이는 상태를 이를 악물고 지켜내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진짜 이익임이 분명한 사실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아브라함은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정도로 지독하게 자기 이익을 지켰습니다. 아브라함은 진짜 이익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라는 진짜 이익을 지키기 위해 마음에서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버리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도 버립니다. 아내 사라조차도 버립니다. 머물러야 할 땅도 버립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환하게 보이는 상태가 진짜 이익임을 알고 목숨 걸고 지키는 아브라함은 얌체 여우 같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아브라함의 삶을 하나님의 일로 삼아 100% 하나님의 뜻과 의지와 계획으로 이루어 가십니다.
이것이 우리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입니다. 진짜 이익을 위해 철옹성같이 양보 없는 태도를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브라함은 진짜 이익 앞에서는 얌체 같고 여우 같고 계산이 빠삭한 사람입니다. 이 아브라함의 이익 추구의 기질을 우리가 가져야 할 것입니다. 이 이익 추구의 실제는 십자가를 통해서만 이루어집니다. 내 마음에서 환하게 보일 수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해 죽고 폐허로 돌려버립니다. 그러면 내가 폐허로 돌려버린 모든 것들은 100% 하나님의 의지에 의해서만 진행될 것이고 나는 내 이익을 놓치지 않고 끊임없이 유지해 나가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아브라함은 진짜 이익인 하나님을 추구함에 있어서는 못할 일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이익 추구의 기질을 우리가 고스란히 물려받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