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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3

녹취문: 당신은 눈 사용법을 알고 있는가?_태승철 (창 13:10~18)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4.06.10|조회수94 목록 댓글 0

 

www.everyday01.com -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자기 눈 사용법도 아직 모르는 인류>의 줄거리 :

인공지능을 상용화하는 시대가 되었어도 아직 인류는 자기 몸에 붙어 있는 눈을 제대로 사용하는 법조차 모른 채 일상을 살고 있다. 선악과를 따먹은 죄의 결과로 나타난 타락의 증상은 제일 먼저 눈에 나타났다. 눈으로 볼 수 있는 기능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한 인간의 삶은 여전히 활발하게 작동 중인 치명적인 죄악의 올가미로부터 결코 빠져나올 수가 없다. 인생을 전면적으로 다시 시작하는 한이 있어도 내 눈을 제대로 사용하는 법부터 알아야만 한다.

 

자기 눈 사용법도 아직 모르는 인류

 

(창세기 13:10~18)

 

10.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11.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지역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12.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주하였고 롯은 그 지역의 도시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13.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

14.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15.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16.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17.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18.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

 

 

인류의 문명은 인공지능을 상용화하는 시대에 이르렀을 정도로 발전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인류는 자기 몸에 붙어 있는 눈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를 모르는 상황입니다. 본문을 보면 눈에 띄는 어절이 두 번 반복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0절을 보면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이라고 하였고, 14절에서는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라고 하셨습니다. 마치 서로 비교라도 하라는 듯이 ‘눈을 들어 바라보다’라는 어절이 병행하고 있습니다. 롯도 눈을 들어 바라보고, 아브라함도 눈을 들어 바라봅니다. 그런데 완전히 다른 바라봄이 나타납니다. 롯은 스스로 눈을 들어 자기가 살 땅을 바라보고, 아브라함은 여호와께서 눈을 들어 바라보라고 하셔서 땅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인류는 롯이 자기 눈을 사용하는 방식대로 따라서 자기 눈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눈을 들어 자기가 살 땅을 바라보는 방식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없습니다. 심지어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눈으로 바라봄에서 인생에 가장 무서워해야 할 일들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5장 28~30절에서 간음의 문제에 대해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눈으로 바라보는 것에서 인생에 일어날 수 있는 가장 무서운 일이 발생한다는 사실을 암시하신 것입니다.

 

오래전 일입니다. 지적장애아들이 다니는 특수학교 선생님들 중에 십자가 가족들이 계십니다. 그분들과 대화하는 중에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아이들 중에 지체가 부자유하여 초등학교 3학년 4학년이 되도록 밥숟가락을 자기 손으로 들고 먹지 못하는 경우가 있답니다. 이 아이들은 반드시 음식을 먹여줘야만 합니다. 우리는 눈을 가려도 밥숟가락을 입에 넣는 것에 불편함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조차 어렵다니 새삼 마음에 충격을 받았고 돌보는 분들이 얼마나 귀한 일을 하시는지에 대해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분들과 대화하는 중에 십자가 생활화가 참 어렵다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특히 생활 현장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기억하며 예수님과 연합하고, 예수님을 따라 올라가서 하나님을 직면하여 마음에서 영광의 하나님을 놓치지 않는 일이 어렵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십자가 생활화나 마음에서 영광의 하나님을 환하게 봄을 유지하는 것이 과연 어려운 일일까요? 그것은 내가 밥숟가락을 들고 입으로 가져가는 것만큼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다만 문제는 우리가 너무나 심각한 영적인 지적장애를 앓고 있다는 것입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일반적으로 지적장애를 질병처럼 앓는다고 하지는 않습니다만, 영적 지적장애라는 상황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억제될 수 있기 때문에 굳이 앓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말대로 십자가 생활화나 하나님 사랑을 생활화하는 것은 손에 든 숟가락으로 밥을 퍼서 입에 넣는 것처럼 자연스럽고 쉬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십자가 생활화의 어려움이 아닙니다. 내가 영적으로 지독한 지적장애를 앓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지금의 상태를 정상으로 전제하고, 지금의 상황을 기준으로 삼아 영적으로 지독한 지적장애를 앓고 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그러면서 다른 상황에 대해 판단하고 생각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말씀드렸듯이 이미 나는 밥숟가락을 입으로 가져갈 수 없을 정도로 영적인 지적장애를 앓고 있습니다. 그 상태를 장애로 보지 않고 정상이라고 전제하기에 십자가 생활화가 어렵고 하나님 사랑을 생활화하는 것이 안 된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밥숟가락도 입에 가져갈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영적인 지적장애 상태임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바뀔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이러한 영적인 지적장애 상태를 기준으로 삼고 정상으로 전제한 후에 십자가 생활화가 어렵다, 하나님 사랑이 어렵다, 말씀이 어렵다, 이 말씀을 내 말씀으로 옮기는 것이 어렵다고 합니다.

 

말씀드렸듯이 본문에는 ‘눈을 들어 바라본다.’라는 어절이 반복됩니다. 이로부터 우리는 내 몸에 달린 눈으로 본다는 기능을 제대로 사용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눈으로 보는 기능을 제대로 사용하는 아브라함과, 전혀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있는 롯이 모든 인류를 대표하여 비교되고 있습니다. 롯은 영적인 지적장애가 너무 심해서 내 몸에 달린 두 눈으로 볼 수 있는 기능 자체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10절을 보면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라고 하였습니다. 롯의 눈에는 에덴이나 애굽의 삼각주처럼 비옥한 요단 지역이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상황은 롯이라는 사람의 생애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 중에서 가장 무서운 일이 일어나는 순간입니다. 육체의 눈을 들어서 세상을 보는데 너무나 마음에 좋게 느껴지는 것들이 포착됩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망함이 시작됩니다. 마음에서 좋게 여겨지는 것들이 육체의 눈에 보이는 순간은 인생이 망가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고깃덩어리가 된 결과이고, 비둘기파의 삶 대신 까마귀파의 삶을 살게 된 결과이며, 저주를 받은 함 자손의 삶을 살고, 니므롯처럼 사냥꾼의 삶을 사는 출발점이고 근원입니다.

창세기 3장 7절을 보면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한 후에 제일 먼저 나타난 증상은 눈이 밝아지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은 타락 전이나 타락 후나 마음을 채워 만족하고자 합니다. 만족(滿足)이라는 말 자체가 충만하게 채워짐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채움을 위해서는 좋음을 추구해야만 합니다. 문제는 그 좋음의 대상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한 이후에는 마음의 채움을 위하여 좋음을 추구하는 방법이 육체의 눈과 직결되고 말았습니다. 눈이 밝아졌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가 이와 같습니다. 육체의 두 눈과 마음 채움을 위한 좋음을 추구함이 직결되어 고래 힘줄같이 끊으려야 끓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죄와 타락이 인간에게 들어온 후에 나타난 첫 번째 증상입니다. 여러분은 몸에 달린 두 눈의 보는 기능을 아브라함처럼 사용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롯처럼 사용하고 계십니까? 마음에서 좋음을 추구하는 상태가 육체의 두 눈으로 이 세상을 볼 수 있음에 직결되어 있고 의존하고 있다면 롯처럼 큰일이 난 상태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유일한 좋음이십니다. 이는 곧 눈으로 보는 것들 중에는 마음에서 좋다고 느낄 수 있는 대상이 아무것도 없음을 의미합니다. 눈으로 보는 것들 중에는 내 마음에 좋다고 여겨지는 것이 없어야 합니다. 우리는 바로 이러한 상태가 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이란 곧 이 세상에서 좋음을 찾으려는 눈의 죽음입니다.

실제로 눈에 보이는 세상 중에 우리 마음을 채울 수 있는 좋음은 없습니다. 죄와 타락의 특징은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 좋음을 찾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좋음, 마음의 채워짐, 마음의 평강을 눈에 보이는 것들에 절대적으로 의존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 인생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 중에 가장 무서운 일입니다. 이렇게 살게 된 결과 롯은 소돔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소돔은 동성애의 본산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동성애자를 의미하는 소도마이트(sodomite)라는 단어 자체가 소돔에서 나온 이유이기도 합니다. 롯이 소돔에 이끌려 갔던 것과 마찬가지로 눈으로 보는 것 중에서 좋음을 찾으려고 하는 삶을 산다면 하나님께서 유황불로 멸절시킬 수밖에 없는 더러움과 타락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우리 사회에는 외모지상주의가 만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 사회로부터 전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는 K-팝이나 K-드라마는 한편으로 염려가 됩니다. K-팝과 K-드라마가 세상 젊은이들에게 눈으로 보는 것에서 좋음을 찾는 경향을 자극하고 활성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경향을 더욱 북돋아 주는 것은 아닌지 염려와 두려움이 생깁니다. 유명하다는 아이돌 그룹의 뮤직비디오를 보면 그 화려함과 현란함이 온 세상 젊은이들의 마음을 다 빼앗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현상을 흥과 가무를 좋아하는 한민족의 특징이 발현된 것이라 봅니다. 그런데 이것이 현대의 IT와 합쳐지면서 젊은이들의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던, 눈으로 보는 것에서 좋음을 찾으려는 가장 기본적인 타락의 특징을 너무 강하게 자극하고, 너무 강하게 활성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염려가 되어서 기도하게 됩니다. 우리 민족이 그런 일에 앞장서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또한 한국처럼 성형이 왕성한 나라는 달리 없습니다. 그만큼 외모지상주의가 현저하다는 증거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십자가를 생활화하는 자들이 필요합니다. 저울의 반대쪽에서 무게중심을 유지하듯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만을 유일한 좋음으로 유지하며 사는 삶을 통하여 가치의 균형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럴 수 없다면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자면 아브라함은 참 특이한 사람입니다. 이제 자기가 살아야 될 땅을 선택하고 결정해야 할 때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자기가 살 땅을 결정해야 하는 순간에도 눈을 들어 땅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대체 어디를 바라보고 있었기에 하나님께서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라고 말씀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 굳이 동서남북을 좀 바라보라고 말씀하셔야만 했던 이유는 간단합니다. 아브라함이 땅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나 롯이나 마음의 공백을 채워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롯은 마음의 좋음을 찾기 위해 육체의 두 눈을 사용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육체의 두 눈으로 볼 수 없는 영광의 하나님을 보고 있었습니다. 땅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하나님만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굳이 아브라함에게 눈을 들어 땅을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땅을 찾아가야 하는 아브라함이 땅을 보지 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어떤 땅에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 하나님은 생각을 갖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눈으로 보고 계시고, 하나님이 결정하시고, 하나님이 인도하십니다.

이로부터 우리 눈의 올바른 사용법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에는 좋음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만을 좋아하는 자들은 십자가의 예수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죽습니다. 내 마음을 채우기 위한 좋음이 없는 세상에 대해서는 살아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죽음을 잊어버리는 이유는 영적인 뇌성마비에 걸렸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좋음이 있으리라 여겨서 육체의 두 눈으로 보는 기능에 마음을 의존합니다. 이것이 너무나 치명적인 타락의 결과입니다.

이것은 창세기 6장에서 2절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을 고깃덩어리로 보시고 홍수로 쓸어버리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아름다움을 보았다고 했지만, 본래 아름다움은 하나님만 아름답고 하나님만 좋음이십니다. 그렇기에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마음으로 볼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눈을 들어 네 앞을 지나가는 저 아가씨를 보아라. 네가 저 아가씨와 결혼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을 것이고 그 말씀을 따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타락한 인류는 자기 육체의 두 눈으로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육체의 두 눈으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만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는 곧 마음의 좋음과 만족과 행복의 문제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육체의 두 눈으로 보는 세상에서 마음의 만족을 찾을 필요가 없고 헤맬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네 눈을 들어 땅을 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취업을 하더라도 내가 원하는 회사를 찾아 들어가는 것과, 하나님께서 들어가라고 말씀하시는 회사로 들어가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육체의 눈을 사용함에 있어서 마음의 좋음은 전적으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뿐임을 확고하게 믿고 인정해야 합니다. 내 마음의 행복을 위해서는 더 이상 두 눈으로 세상을 보지 않습니다. 지금 몸이 아픈 사람이라면 건강해야 마음이 채워지고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두 눈을 잘못 사용한 것과 똑같습니다. 색 성 향미 촉의 오감을 잘못 사용하는 것입니다. 육체의 오감을 통해서 마음의 기쁨과 좋음과 채움을 추구해서는 안 됩니다. 음식을 먹는 것도 하나님만을 보고 하나님만으로 마음의 좋음을 완결지은 상태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눈을 들어 짜장면을 보라’라고 말씀하신다면 짜장면을 먹으면 되고, ‘눈을 들어 김치찌개를 보라’라고 말씀하신다면 김치찌개를 먹으면 됩니다. 이렇게 마음의 좋음과 만족의 문제를 하나님으로 매듭짓고, 해결하고, 끝장내야 합니다.

하나님을 찾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죽어야 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눈으로 보는 세상에 마음을 자꾸 빼앗기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세상에 대한 죽음을 나 자신에게 계속 가르칩니다. 그럴 수 없다면 영적 뇌성마비 상태로 살게 됩니다. 영적으로 밥숟가락을 입에 넣지도 못하는 상태를 정상이라고 생각하고 기준으로 삼은 채 판단하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면 그것은 절대로 올바른 모습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온전히 십자가를 붙잡지 못하는 순간에 판단하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들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모릅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먼저 십자가에서 눈에 보이는 대로 좋음을 추구하려는 영적인 지적장애, 영적 뇌성마비 상태를 죽여야만 합니다. 영적으로 멀쩡한 나를 죽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심각한 영적인 장애 상태의 나를 죽여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수 없다면 하나님께서 차려놓으신 은혜의 밥상에서 한 숟가락도 퍼먹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으로 마음의 채움과 만족의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다짐하고 또 하면서 십자가를 붙잡습니다. 그러는 중에 하나님께서는 내 몸으로 사는 삶에서 일어나야 될 하나님의 뜻과 계획들을 위해서 ‘눈을 들어 땅을 보라’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결혼해야 하는 사람이라면 ‘눈을 들어 저 사람을 봐라. 너는 저 사람과 결혼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실 것이고, 취업해야 하는 사람이라면 ‘눈을 들어 저 회사를 봐라. 저 회사로 들어가라.’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심지어 밥을 먹어야 하는 상황에서도 ‘눈을 들어 이 음식을 봐라. 이것을 먹어라.’라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이 유일한 좋음이신 하나님을 붙잡고 있는 상황에서 내 몸으로 만나는 것들에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이루어질 대상과 영역이 있습니다. 내 육체의 눈이란 그 대상과 영역을 포착하는 레이더와 같습니다. 눈은 보는 대로 좋음을 찾아서 내 마음을 채우는 데 쓰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삶은 니므롯 같은 사냥꾼의 삶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만이 좋음입니다. 마음의 좋음을 추구함이 육체의 눈과는 연결이 끊어진 상태가 유지되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눈을 들어 땅을 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곧 ‘내게는 너를 통해 이루려는 뜻과 계획이 있다. 이제 너는 눈을 들어서 그 대상을 포착하고 관계하라.’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적 뜻에 따라 가족을 이루고 삽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가족을 눈으로 봅니다. 다만 그냥 보는 것이 아닙니다. 날마다 눈으로 봐야 하는 가족들을 아브라함 같은 관점에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배우자를 보면서 배우자에게 좋음을 기대한다면 롯의 자손입니다. 아직 신앙의 선진인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눈으로 보는 대상은 마음의 좋음과 만족과는 상관이 없어야 합니다. 배우자도 자녀도 돈도 건강도 마음과 무관합니다. 내 마음의 좋음은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매듭을 지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어려운 것이 아니라, 나의 죄성이 너무 강해서 영적 뇌성마비와 지적장애의 상태에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십자가의 죽음도 실제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속마음으로 나를 정상이라고 생각한다면 십자가의 죽음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여전히 내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 잘못입니다. 내가 할 수 없는 일은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고 불만스럽습니다. 내가 잘돼야 합니다. 지금 이 상태에서 받아들일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지금의 상태를 정상으로 여기며 기준으로 삼는다면 달라질 수 없습니다. 내 속마음은 어떤가 가만히 들여다보시기 바랍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죄성이 있기에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이러한 상태를 유지한다면 달라질 수도 없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보겠습니다만 본문의 아브라함은 특이한 모습을 보입니다. 아브라함은 영광의 하나님을 본 뒤로는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소원을 하는 기능 자체가 영광의 하나님으로 끝나버렸습니다. 사람이 무엇인가를 소원하는 기능은 타락하기 전이나 후나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타락한 후에 소원의 기능이 육체의 오감과 연결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마음의 소망과 희망이라는 기능이 눈과 연결되고 입과 연결되어서 사방천지에서 좋은 것을 보기 원하고 좋은 것을 먹기 원합니다. 이것이 인간이 영을 가진 존재에서 고깃덩어리로 변해가는 치명적 단계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영광의 하나님을 본 이후로 세상에서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하나님만을 바라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마치 조급증에 걸리신 것처럼 아브라함에게 자꾸만 약속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많은 후손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영광의 하나님을 본 뒤로는 많은 후손이나 다른 것들을 원한 적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마음의 기쁨과 만족과 행복의 문제는 끝내고자 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25년 뒤에나 주실 아들을 약속해 주시고, 당장 주시지도 않을 땅에 대해서도 약속해 주십니다. 때가 되어서 이루실 일이라면 그때 가서 하시면 될 것을 왜 이렇게 조급증에 걸리신 것처럼 약속을 주시는 것일까요?

아브라함은 약속을 받아들이지도 않고, 약속하시는 하나님을 볼 뿐입니다. 영광의 하나님을 보는 중에 약속의 내용을 마음에 담았을 리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약속을 주신 이유는 하나님의 본성 때문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에게만 국한된 일이 아닌,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본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여생 동안 이루시고자 하는 계획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에게서처럼 말씀하시지 못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아브라함처럼 눈을 올바르게 사용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 몸에 달린 눈인데도 아직 사용법을 정확히 모릅니다.

나의 두 눈은 내 마음이 하나님과 씨름하면서 마음의 기쁨과 만족을 결정짓고, 매듭짓고, 끝내려는 삶을 지속해 나갈 때 의미를 갖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조급증에 걸리신 분처럼 ‘내가 이것을 이루겠다. 내가 저것을 이루겠다.’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나를 통해 이루시려는 뜻의 대상과 뜻의 영역들을 레이더로 포착하듯이 보는 것이 눈의 역할입니다. 내 마음의 좋음, 내 마음의 채움, 내 마음의 만족을 위해 눈을 돌리면 안 됩니다. 그렇게 사용한다면 아직도 눈의 사용법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지독한 영적인 지적장애에 빠져서 살아왔습니다. 이 상태는 무조건 십자가에서 죽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눈을 사용할 수 있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용법대로 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브라함은 눈 사용의 교본입니다. 아브라함은 기쁨과 만족을 위해서 마음을 눈과 연결하지 않았습니다. 마음의 기쁨과 만족을 위해서는 눈을 쓸 일이 없었기에 롯이 눈을 들어 땅을 보는 상황에서도 아브라함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만이 기쁨이고 만족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일어나야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통해 이루시려는 대상과 영역을 레이더로 포착하듯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내가 너를 통하여 너의 배우자와 자녀에게 말할 것이다. 너를 통해 행동하게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럴 때도 나의 마음이 볼 대상은 세상에 있지 않습니다. 기쁨과 채움을 원하는 마음에는 배우자도 소용없고, 자녀도 소용없고, 건강도 소용없고, 외모도 소용없고, 돈도 소용없습니다. 내 마음과 눈의 연결은 끊어져 있는 상태입니다. 바로 이러한 상태에서 눈은 본래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나의 눈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영역을 포착하는 레이더입니다.

롯은 눈을 오용했고 인류는 그 방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브라함의 눈을 사용하는 방식을 고스란히 배우는 진짜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하여 오늘도 끊임없이 영적 지적장애의 기질을 십자가에서 죽이시기를 바랍니다. 마음의 기쁨과 채움의 문제를 육체의 두 눈의 봄과 직결시키려는 죄적 체질을 막기 위해서 오직 주님의 십자가를 향해 돌진해야 합니다. 십자가를 붙잡고 아브라함이 보는 방식대로 육체의 두 눈을 사용하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것저것 삶에 대해 생각하기 전에 내 몸에 달린 두 눈 사용법부터 제대로 익힐 수 있는 은혜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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