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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3

녹취문: 의롭고 평화로운 인간관계의 비밀_태승철 (창 14:1~24)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4.06.13|조회수70 목록 댓글 0

 

www.everyday01.com -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의롭고 평화로운 인간관계의 비밀>의 줄거리 :

영광의 하나님을 마음이 놓치지 않고 봄이 진짜 이익이다. 그래서 마음에 들어올 만큼 가까운 사람은 다 버린다. 그런데 이런 진짜 이익 추구가 ‘의’ 즉 올바름이라고 하신다. 이렇게 버리면 하나님이 모든 방해를 뛰어넘어 그 관계를 붙잡아 유지하신다. 이것이 진정한 평화이다. 그리고 이 의로움과 평화로움이 오직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다.

 

의롭고 평화로운 인간관계의 비밀

 

(창세기 14:1~24)

 

14. 아브람이 그의 조카가 사로잡혔음을 듣고 집에서 길리고 훈련된 자 삼백십팔 명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

15. 그와 그의 가신들이 나뉘어 밤에 그들을 쳐부수고 다메섹 왼편 호바까지 쫓아가

16. 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의 조카 롯과 그의 재물과 또 부녀와 친척을 다 찾아왔더라

17.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을 쳐부수고 돌아올 때에 소돔 왕이 사웨 골짜기 곧 왕의 골짜기로 나와 그를 영접하였고

18.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19.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20.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21. 소돔 왕이 아브람에게 이르되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가지라

22. 아브람이 소돔 왕에게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23.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하게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실 한 오라기나 들메끈 한 가닥도 내가 가지지 아니하리라

24. 오직 젊은이들이 먹은 것과 나와 동행한 아넬과 에스골과 마므레의 분깃을 제할지니 그들이 그 분깃을 가질 것이니라

 

 

산다는 것은 결국 사람을 관계하는 것입니다. 가족으로부터 시작해서 친구나 직장 동료와 이웃들까지 다양한 관계를 맺게 됩니다. 본문에는 그 모든 인간관계에서 저와 여러분이 항상 올바르고 평화로울 수 있는 비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가정에서 배우자나 부모 자식과의 관계가 항상 올바르고 평화롭습니까? 형제자매 관계나 친구와의 관계 혹은 직장 동료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항상 올바르고 평화의 관계를 맺고 계십니까? 이렇게 모든 인간관계에서 항상 올바를 수 있고 평화 위에 세워 질 수 있는 비밀이 있습니다. 이 비밀을 알면 모든 인간관계에서 항상 올바를 수 있고 무조건 평화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게 됩니다.

 

본문을 살펴보기에 앞서 먼저 우리가 읽지 않은 부분의 내용을 정리해 봅니다. 본문 앞부분에는 성경에서 처음으로 연합군들의 전쟁에 관한 이야기가 언급됩니다. 가나안 경계를 벗어난 북부에 그돌라오멜 왕이 있었습니다. 이 왕은 가나안 남부의 소돔 지역을 중심으로 한 사해 주변의 5개 국가의 왕들로부터 12년 동안 조공을 받아왔습니다. 그런데 가나안 남부의 5개 국가가 조공을 거부하였고, 이에 그돌라오멜 왕은 북부 지역의 다른 세 나라와 4개국 연합군을 이루어서 남하합니다. 본문은 이들이 남부로 내려오면서 만나는 모든 족속들을 다 물리쳤다는 점을 언급하며 엄청나게 강력한 세력이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아브라함은 이들을 무찌릅니다.

아브라함은 군대도 없었고 나라도 이루지 못했습니다. 단지 자기 집에서 길리던 삼백십팔 명의 종들을 데리고 가서 북부의 강력한 4개국 연합군을 무찌릅니다. 말씀드렸듯이 이들 4개국 연합군은 남하하며 만나는 모든 족속을 물리칠 정도로 강했고, 결국 소돔을 중심으로 한 5개국 연합군도 멸절시켰습니다. 그 과정에서 소돔에 살던 아브라함의 조카 롯도 사로잡혀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한편 아브라함은 당시 주변의 아모리 사람들과 잘 지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에 아모리 사람들의 도움을 좀 받고 자기 집안의 종들 삼백십팔 명을 주축으로 해서 4개국 연합군을 가나안 북부까지 추격하여 다 멸절시키고 조카 롯을 데려옵니다.

이러한 본문은 이제까지 살펴보았던 아브라함의 모습을 떠올리자면 참 기가 막힙니다. 우리가 봐왔던 아브라함의 겉모습은 자기가 살겠다고 아내를 다른 남자에게 줘버리는 나약하고 비겁하며 한심한 자였습니다. 조카 롯과 헤어질 때도 자기 살 땅도 챙기지 못하는 무골호인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물론 우리는 아브라함이 왜 그러한 모습을 보였는지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마음에서 영광의 하나님을 보았고, 그 상태를 놓치지 않고자 씨름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말씀드린 대로 겉으로 드러나는 아브라함의 모습이란 참담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그러한 아브라함에게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북부의 4개국 연합군은 남하하며 도중에 포진하고 있었던 다양한 민족과 나라들을 무찔렀습니다. 그리고 끝내 남쪽의 5개국 연합군을 멸절시키고 소돔의 부녀자들을 잡아서 노예로 끌고 갑니다. 그중에는 아브라함의 조카 롯과 그의 가족들도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북부 지경까지 쫓아 올라가서 4개국 연합군을 다 무찌르고 조카 롯을 되찾았을 뿐만 아니라 끌려갔던 모든 사람과 빼앗겼던 모든 재산을 되찾았습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소돔 왕과 살렘 왕이자 하나님의 제사장인 멜기세덱을 만납니다.

이 전쟁 이야기의 중심에는 아브라함과 조카 롯의 관계가 서 있습니다. 다시 말해 아브라함과 조카 롯의 관계를 이야기하기 위해 이 전쟁을 소재로 사용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주권적으로 섭리하고 계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지만 마음에서 영광의 하나님을 놓치지 않으려고 씨름하고 있는 그 사람들을 중심축으로 역사를 이끌어가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영광의 하나님을 늘 보기 위해 몸부림치는 사람은 그 사람의 성격과 인간성을 종잡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 기근이 심했을 때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이러한 모습을 겉으로만 보면 신념이 없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아내 사라를 다른 남자에게 들어가라고 말하는 모습을 보면 꿀밤을 한 대 때려주고 싶을 만큼 비겁하고 아주 이기적인 좀생이입니다. 조카 롯과 헤어질 때도 자기의 밥그릇 하나 챙기지 못하는 무골호인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랬던 아브라함이 본문에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 용맹한 모습을 보입니다.

아브라함은 심지어 자기 가족과 재산을 잃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단지 조카가 잡혀갔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삼백십팔 명 종들과 주변에서 돕겠다는 몇몇 사람들과 함께 막강한 4개국 연합군을 야습하여 멸절시키고 끝까지 추격하여 조카 롯과 부녀자들과 모든 재산을 되찾아 옵니다. 이처럼 마음에서 영광의 하나님을 놓치지 않기 위하여 몸부림치며 사는 사람의 모습이란 종잡을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의 성격이나 인간성이 좀스럽고 비겁하고 나약하고 무골호인처럼 보일 때도 있으나 때로는 영웅호걸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 MBTI가 유행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항목에 대한 대답을 통해 그 사람의 성격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예전에는 혈액형으로 인간성을 이야기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다 쓸데없는 이야기입니다. 영광의 하나님을 놓치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는 사람은 그때그때 자기가 보는 영광의 하나님이 가르쳐주시는 대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인간성과 성격이 때마다 주어지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규정되는 것입니다. 어떨 때는 과격하고 영웅호걸 같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또 어땔 때는 비겁하고 무골호인 같을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이 사람이 어떤 성격인지 알 수 없습니다. 마음에서 환하게 보고 있는 영광의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지시와 뜻이 그 사람의 행동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아브라함이 그러한 사람이었고 우리도 그러한 사람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저 사람은 정말 종잡을 수가 없다.’라고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겉으로만 보기에는 순한 사람인지 과격한 사람인지 급한 사람인지 느려터진 사람인지 알 수 없는 이유는, 살아계신 하나님과 연결되어서 하나님의 뜻만을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만 온유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다 받아들여 삶에서 나타나는 사람의 인간성과 성격은 세상 사람들이 종잡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아브라함 같은 사람이 된다면 어떻게 인간관계를 해나갈 수 있을까요? 본문은 그 대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분명히 마음에서 조카 롯을 버렸습니다. 그런데 롯이 잡혀갔다는 소리를 듣더니 죽음을 불사하고 끝까지 쫓아가서 막강한 4개국 연합군을 무찌르고 롯을 찾아오는 종잡을 수 없는 모습을 보입니다. 한편 아브라함이 이기고 돌아오는 길에서도 종잡을 수 없는 모습은 계속 발견됩니다. 소돔 왕이 나와서 아브라함을 영접한 것에는 충분히 개연성이 있습니다. 자기가 진 전쟁에서 아브라함이 원수를 갚아줬으니 속이 다 시원했을 것입니다. 21절에서 “소돔 왕이 아브람에게 이르되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가지라”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전리품을 받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합당한 일을 했으니 보수를 받아도 좋을 텐데 아브라함의 태도는 완고합니다. 이 부분에서도 아브라함의 종잡을 수 없는 성향은 드러나고 있습니다.

앞서 아브라함이 애굽에 있을 때 사래를 되찾으며 많은 재물도 함께 얻었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재물을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완고하게 전리품 받는 것을 거부합니다. 세상의 관점에서는 아브라함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영광의 하나님을 보기 위해 몸부림치지 않는 한 아브라함을 끝내 정확하게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한편 소돔 왕의 등장 이후에 뜬금없는 인물이 또 한 명 등장합니다. 바로 살렘 왕이자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언급되는 멜기세덱입니다. 살렘 왕이란 평화의 왕이라는 뜻입니다. 멜기세덱을 풀어보면 멜기는 ‘왕’이라는 뜻이고 세덱은 ‘의롭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차다크(צךקה)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다시 말해 살렘 왕 멜기세덱이란 ‘평화의 왕이자 의의 왕’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멜기세덱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7장을 보면 멜기세덱에 대해 자세한 언급이 이루어집니다. 1~3절을 보면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왕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 아브라함이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누어 주니라 그 이름을 해석하면 먼저는 의의 왕이요 그다음은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닮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쉽게 말해 히브리서 기자는 창세기에 나온 멜기세덱은 예수님의 현현(顯現)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왜 아브라함 앞에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의 모습으로 등장하였던 것일까요?

다시 3절을 보면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닮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아버지가 없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육체의 아버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표현을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멜기세덱이 등장한 이유는 아브라함이 롯과의 관계에서 보인 태도가 바로 의로움이고 평화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공개적으로 인치는 역할을 위하여 예수님의 현현으로써 제사장 멜기세덱이 등장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보실 때 아브라함이 보인 롯에 대한 관계성이 진짜 올바름이고 진짜 평화라는 것을 멜기세덱이 보증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1절을 보면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왕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라고 하였습니다. 평화의 왕이라는 멜기세덱이 복을 빌어 주는 아브라함은 여러 왕을 쳐서 죽이고 온 사람입니다. 여러 왕을 쳐서 죽인 것이 의로움이고 평화라니 세상의 관점에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처럼 본문의 상황은 무척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말씀드렸듯이 본문은 아브라함과 롯의 관계를 통해 마음에서 영광의 하나님을 보기 위하여 몸부림치는 사람이 어떻게 인간관계를 의롭고 평화롭게 이어갈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단순히 전쟁이 있었고 아브라함이 이겼다는 사실을 가르쳐주고자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전쟁도 결국 아브라함과 롯의 관계 안에 포함된 일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롯을 찾기 위해 이 전쟁에 뛰어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과 롯의 관계에서 무엇이 의로움이라는 것일까요? 사람은 누구나 마음에 들어올 수 있을 만큼 가까운 존재가 있습니다. 가족들, 직장 상사나 동료, 친구, 이웃 등 다양한 대상이 있습니다. 삶이란 결국 이들과의 관계로 이루어집니다. 이때 모든 인간관계에서 내가 무조건 올바르기 위해서는, 아브라함이 자기의 진짜 이익을 위하여 롯을 버렸듯이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나의 진짜 이익을 위하여 내 마음에 들어올 수 있는 가까운 사람을 버리는 것이야말로 인간관계에서 보일 수 있는 가장 큰 올바름입니다. 그리고 나의 진짜 이익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진짜 이익이 하나님인 줄 안다면 마음에서 하나님을 환하게 보는 상태를 망가뜨리거나 잃거나 상실하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기 위하여 마음에 들어올 수 있는 가까운 사람들을 다 버리는 이기적인 행동이 의로움이고 올바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네가 의인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진짜 이익을 챙기는 이기심이 곧 의로움입니다. 그 이기심으로 모든 사람을 마음에서 버립니다. 마음에 들어올 수 있을 만큼 가까운 사람을 다 버립니다. 어차피 마음에 들어오지 않을 사람들은 방해가 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버린 사람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몸을 이용해서 4개국 왕들을 쳐 죽이면서까지 롯을 되찾게 하십니다. 그리고 이것이 진정한 평화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신다면 모두를 죽이고서라도 한 사람을 지켜내십니다. 죽이는 것이 평화가 될 수 있다니 참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4개국 왕이 롯을 잡아다 죽였다면 아브라함과 롯의 물리적이고 환경적 차원의 관계는 완전히 끊어지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에서는 롯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의로움으로 보셨습니다. 이 의로움의 내막을 보면 진짜 이익인 하나님을 놓치지 않으려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 버렸는데 이것을 올바름으로 보신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에서 버린 사람을 4개국 왕이 개입해서 물리적이고 환경적 차원에서 완전히 끊어내려고 합니다. 아브라함으로서는 롯을 만날 수도 없는 상태가 되게 하려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감동시키셔서 이 관계를 끊어내려는 방해 요소인 4개국 왕들을 쫓아가게 하시고 쳐서 죽이게 하시면서까지 롯을 찾게 하십니다. 이것이 본문이 가르쳐주는 평화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방해 요소를 제거하시고 유지하시는 관계야말로 진정한 평화라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마음에 새겨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롯이 4개국 연합군의 왕들에게 잡혀갔을 때 만약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쫓아가라는 뜻을 주시지 않았다면 어땠을까요? 아브라함이 마음에서 끊어낸 롯은 물리적 환경적으로 아브라함과 영원히 끊어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의한 일이라면 평화입니다. 멜기세덱 대제사장이 등장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보여준 행동이 곧 의로움이고 평화임을 드러냅니다. 멜기세덱은 의의 왕이고 평화의 왕입니다. 이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축복했다는 것은 아브라함이 롯에 대해 보여준 모습이야말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관계의 전형적인 모습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진정한 평화는 인간들끼리의 야합이 아닙니다. 4개국 왕을 진멸시키면서까지 롯을 구해내는 것이 하나님이 보시는 평화였습니다. 설령 내가 마음에서 버린 사람을 하나님이 지키시지 않더라도 그것 역시 평화입니다. 그렇게 지키시지 않아서 갈라진 관계라면 내가 마음에서 버렸기 때문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마음에서 버린다고 해서 물리적 환경으로도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들어올 만큼 가까운 사람이 있는데, 영광의 하나님을 보기에 방해가 된다고 여겨 마음에서 버린다고 해도 물리적으로 환경적인 관계가 끊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4개국 왕이 개입할 정도로 강력한 방해가 있어도 하나님께서는 그 방해를 다 물리치시고 관계를 이어가십니다. 그런데 만약 하나님이 관계를 이어가시도록 나로 움직이지 않게 하신다면 내가 마음에서 버렸기 때문에 끊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관계를 맺지 않으시기 때문에 끊어지는 것입니다.

물리적이고 환경적인 차원에서 관계가 맺어지고 끊어지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 하나님의 일은 맺든지 끊든지 무조건 진정한 평화라는 것입니다. 그 평화 속에서는 4개국 왕에 해당하는 방해물들을 치열하게 제거하시는 역사가 포함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소돔 왕은 빼앗긴 재산을 되찾아 온 아브라함에게 사람은 내게 보내고 전리품은 가지라고 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제안을 거절하고 아무런 보상을 받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소돔 왕에게 전리품을 받았다면 본의 아니게 상을 받는 입장이 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롯을 구해왔습니다. 그런데 소돔 왕에게 상을 받는다면 아브라함은 롯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이 아닌 소돔 왕에게 상을 받고 세상의 이익을 챙기는 결과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간관계에서 마지막으로 생각할 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맺게 하신 인간관계에서는 절대로 이 세상의 이득을 챙기려는 마음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로움과 평화로움이 유지될 수 있는 인간관계의 기본적인 바탕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관계하게 하시는 사람을 통해서는 세상의 이득을 취하려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맺게 하시는 관계가 아닙니다. 내가 타인을 통해서 이득을 얻으려는 관계는 거래이고 타협이고 야합이고 사기입니다. 평화의 관계가 아닙니다.

이것을 구분하는 것이 참 어렵습니다. 부부관계를 예로 들어봅니다. 배우자는 내 마음으로 가장 가까이 들어올 수 있는 1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시기에 옳은 관계를 위해서는 마음에서 배우자를 버려야 합니다. 내 마음에서 버렸다면 배우자를 통해서 이득을 챙기려는 마음은 생길 수 없습니다. 진짜 이익인 하나님을 놓치지 않기 위해 남편과 아내가 서로를 버립니다. 이것이 세상에서 제일 올바른 부부관계의 모습입니다. 그렇게 버린 상태가 의로움이고 이로부터 진정한 평화가 생겨납니다. 4개국 왕이 롯을 잡아가듯이 남편과 아내의 사이에서 방해물이 등장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어떤 방해물이라도 능히 제거하시고 넘어가게 하시면서 관계를 맺어가게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평화의 관계가 됩니다.

그렇다면 마음에서 배우자를 완전히 버리지 못하는 경우는 어떨까요? 사람의 마음은 좋음을 추구하고자 하는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마음에서 배우자를 버리지 못했다는 것은 배우자에게 무언가 좋음을 기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무조건 틀린 일이고 부부관계를 포함한 다른 모든 관계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부모자식관계, 친구와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직장 동료와의 관계는 마음에서 버릴 수 있어야만 합니다. 마음에서 버리지 않은 채로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은 사랑처럼 보일지라도 의로움이 아니라 악입니다.

영적으로 볼 때 하나님을 등진 채 마음으로 다른 대상들을 붙잡고 관계를 맺어가는 것은 악질적인 행위입니다. 무조건 틀린 행위입니다. 그런데 서로 그런 마음을 가지고도 잘 지내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진정한 평화가 아닌 야합입니다. 하나님이 그 관계를 깨시면 오히려 다행인데, 깨시지 않고 야합 상태를 놔두신다면 정말로 큰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경우는 관계에서 자꾸 이득을 챙기려 합니다. 아내는 남편을 통해서 이득을 얻고자 하고, 남편은 아내를 통해서 이득을 얻고자 합니다. 부모는 자녀를 통해서 이득을 얻고자 하고, 자녀는 부모를 통해 이득을 얻고자 합니다. 이렇게 이득을 챙기려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처럼 마음에서 영광의 하나님을 보는 자리를 유지한다면 이득을 얻고자 관계하려고 하는 상태에 대해 4개국 왕을 진멸시킨 것과 같은 행동이 반드시 나오게 됩니다. 또한 아브라함은 소돔 왕 앞에서 ‘어떻게 너 따위가 나를 부자가 되게 하겠느냐?’라는 마음으로 전리품을 받지 않았습니다. 4개국 왕을 진멸시키는 것과 같은 태도를 보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맺어주시는 관계에서는 절대로 세상의 이득을 위해서 서로 움직일 수 없습니다. 만약 그러한 움직임이 나타날 것 같다면 우선 관계를 정리해야 합니다. 마음으로만 버릴 것이 아니라 겉으로 드러나게 깨뜨리더라도 관계를 다시 세울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마음에서 영광의 하나님을 놓치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며 사는 사람이 인간관계에서 무조건 옳게 할 수 있고 무조건 평화의 관계로 가져갈 수 있는 비결입니다. 깨뜨림도 평화일 수 있습니다. 무조건 야합하고 타협하여 겉으로 보기에 싸움이 없을지라도 평화가 아닐 수 있습니다. 4개국 왕을 진멸시키는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평화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겉으로 드러난 인간 됨은 종잡을 수 없습니다. 무골호인처럼 보이고, 신념 없는 사람처럼 보이고, 비겁한 사람처럼 보이고, 영웅호걸인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평화도 무조건 싸움이나 갈등이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어떨 때 공격하고, 어떨 때 물러설지, 어떨 때 무골호인처럼 되어야 할지, 어떨 때 영웅호걸처럼 되어야 할지 어떻게 결정할까요? 예수님을 붙잡는 것 외에는 절대로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예수님 안으로 마음이 들어가야만 합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 안으로 마음이 들어가려면 마음에 들어온 사람을 버려야만 합니다. 그리고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영광 가운데 뵐 수 있는 상태가 유지되어야만 합니다. 그러고 나면 하나님의 뜻에 따라 때로는 무골호인처럼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신념 없는 비겁한 사람처럼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영웅호걸처럼 보이기도 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롯과의 관계에서 보인 자세와 태도는 의로움이며 진정한 인간관계의 평화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수시로 들락거리는 가까운 사람이 누구인지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진짜 이익을 위해 십자가에서 그 사람을 무조건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에서 버림이 분명해서 영광의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다면 설령 과격한 행동이 나오게 되더라도 그것은 평화의 기초이고 진정한 평화입니다.

우리는 평화라는 표현에서 서로 웃고 껴안는 모습, 서로 양보하는 모습을 떠올리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과의 평화를 위해서 방해 요소를 제거하실 때 아브라함을 통해 4개국 왕을 진멸시키셨듯이 하실 수도 있습니다. 또 그 평화를 위해서 이 세상 모든 것들에 대해서 먼저 갖도록 행동하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본문은 아브라함과 롯과의 관계를 통해 인간관계가 어떻게 무조건 의로울 수 있고, 어떻게 평화 위에 세워질 수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진짜 이익인 영광의 하나님을 마음에서 놓치지 않기 위해 가장 가까운 사람들부터 무조건 버림으로써 무조건 의롭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마음이 하나님을 보는 가운데 나타나는 행동이 어떤 과격함일지라도 그대로 드러나게 됨으로써, 그 과격함이 곧 평화의 기초가 될 수 있는 아브라함의 인간관계를 우리도 맺으며 살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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